2014년 11월 9일 일요일

유고슬라비아란 나라 1 : 연방제

티토가 천우신조 끝에 1944 베오그라드에 입성한 까지는 좋았는데, 어쩌다 물려받은 유고슬라비아를 건사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보낸 4 많은 인명이 죽고 기반시설들은 파괴됐다. 자빠진 사회를 일으켜야 하는데 왕정을 중심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거부하기로 했으니 뭐를 해도 새로 시작하는 셈이다.

처음부터 민족자결을 앞세우기로 만큼, 사회주의의 정체는 애초부터 얼추 정해져 있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 이것은 이미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43년에 2 AVNOJ 거쳐서 결정된 일이다누가 맹주가 되서 지역의 헤게모니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구성민족들의 반발도 크게 잦아드는 효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누구를 구성민족으로 것인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는 이전 국체부터 인정을 했다. 마케도니아는 어차피 말도 다른 만큼 별도의 민족으로 보아야할 것이다그렇다면,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는 아리까리하다. 과연 여기를 하나의 별도의 민족공동체로 봐야할  것인가? 티토의 결정은 별도의 공동체로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보스니아 무슬림들도 내가 세르비아인인지 아니면 크로아티아인인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세개의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된다는 무슬림 지도자들은 보스니아를 하나의 독립된 지역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 사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유고슬라비아에서 이슬람 만큼 탈색된 종교도 없었지만, 이런 무슬림들이 오늘날까지 티토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각 민족의 숙원이 민족자결이라는 사실을 적절히 안배해서 만들어진 유고슬라비아. 지도만 봐도 소련과 같은 일괴암 사회주의를 강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느낌적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인의 일부로 봐야할지 아니면 별도의 민족으로 봐야할지 고민하다가 이것도 결국 별도의 민족으로 보기로 했다. 세르비아와 달리 몬테네그로는 한번도 오토만 터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타고난 호전성에 산악에서 닦은 달음박질 실력이 있어서였는지 빨치산 중에는 유난히 몬테네그로 출신의 대장들이 많았다. 50만도 안되는 인구였지만, 대충 세르비아계로 퉁치기에는 무시못할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구성민족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과 보이보디나 헝가리인들 게다가 집시들도 있다. 별개 민족으로서의 자기주장이 없는 집시들은 그냥 넘어가고,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는 그냥 자치주autonomous region 봐주기로 했다. 집시들도 있었지만, 치지도외. 이렇게 해서 다섯개의 공화국과 두개의 자치주. 사회주의유고슬라비아연방은 이렇게 구성됐다.

유고슬라비아의 깃발, 공산당 아니랄까봐 붉은 별도 넣었다. 원래는 범슬라브주의를 상징한 깃발이었는데 어떻게 이게 사회주의유고연방의 깃발까지 됐다.

앞으로 싸우지 말고 같이 살자는 의미에서 구호도 정했다. ‘우애와 단결’Bratstvo i Jedinstvo. 이것이 유고슬라비아를 규정하는 키워드다.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재기 민족들의 모임. 세르비아인들이 최대다수이긴 했지만, 전체를 합치고 보면 과반수가 안됐다. 어느 누가 형님행세 하는 순간 유고슬라비아는 흔들릴 밖에 없다는 것을 줄타기의 명인 티토는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헌법을 만들 때는 호기롭게 한마디도 집어넣을 수 있다: '각 공화국은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탈퇴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유고 삼국지 12 : 전쟁의 끝

AVNOJ 3 회의는 1945 8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됐다. 이 때가 되어 티토의 빨치산은이미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승자였다.  곧바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법이 만들어 지고공산당은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비공산주의 항독세력과 연합해서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왔다경쟁 정당선거가 아니라 전투로 쓸어버린 터였다. 1945 11 선거결과는 당연히 인민전선의 승리였다이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인민연방 공화국이 선포됐다당연히 영국에 있던 왕은 공식적으로 '새'가 됐다..

1945년 3월 베오그라드에 서 대중연설 중인 티토. 쫓겨다닐 때 보다 살집도 붙었다. 심광체반이라고 해야하나? 날카로운 서기는 없어졌지만 위엄은 늘어났다. 공화국으로 거듭난 유고슬라비아를 되살리기 위해 그가 만든 구호가 '단결과 우애'Jedinstvo i Bratstvo였다. 

승전의 사후처리 역시 전쟁 당시 못지않게 잔혹했다. ‘인민의 이라는 이름으로 다수가 죽었다티토 조차 1945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형이 너무많다보니) 사람들이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이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는 의문은 있다. 

디킨Deakin이 쓴 'Embattled Mountains'에는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티토의 빨치산들이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생사의 기로를 쫓겨다닐 때, 빨치산 중에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노병이 있었다. 1차대전까지 참전했던 이 역전의 노병이 빨치산에 들어갈 때는 자기 아들 네명을 몽땅 데리고 참전했다. 알토란 같은 아들을 전쟁 중에 하나 둘씩 까먹고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들이 전사했다. 그 마지막 아들을 묻으면서 노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너를 위해 울지 않겠다. 우는 건 파시스트 원수놈들의 부인들이나 할 일이야'... 아비가 죽거나 아들이 다친 사람들이 일어나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산악의 '정의'를 실현해야 했다.

체트닉의 영수, 미하일로비치어떻게든 상황을 돌이켜 보려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반공'정책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쟁에 지친 이들이 이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1945 추종자들을 이끌고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로 가는 동안싸우다 죽고 병들어 죽고 지쳐죽어 대열은 홀쭉해졌다그러다 결국 미하일로비치가 잡힌 것은 1946 3재판이 열렸고 결국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같은  7월의 일이다.
재판 중 고뇌에 빠진 미하일로비치. 사면에서 정든 고향 초나라의 노래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나올 것 같다. 최후진술에서 미하일로비치는 '나는 많은 걸 원했고, 많은 걸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의 바람이 나의 작업과 나를 쓸어버렸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심경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 체트닉 주도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도 그렇고, 체트닉의 부역혐의도 고스란히 자신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세력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이 때, 미하일로비치는 티토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티토와 유고공산당 입장에서는 이 쯤해서 사라져 줘야만 했다.

미하일로비치의 복권이라고 해야할까? 세르비아에서는 2013년 중 미하일로비치의 2차대전 행적을 그린 미니시리즈 '라브나 고라'Ravna Gora가 방영됐다. 라브나 고라는 미하일로비치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복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을 맡은 사람은 네보이샤 글로고바츠Nebojsa Glogovac다. 

이렇게 해서 유고의 3국지는 티토의 승리로 끝난다. 티토의 승리와 더불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정치연합체 유고슬라비아도 살아남았다. 살아는 남았지만, 속으로 남은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무슬림 간의 갈등과 상호적대는 티토의 '단결과 우애'라는 구호 속에 뭍혀 사라진 줄로 보였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세르비아. 유고의 장형으로써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그 싸이키 깊숙한 곳에 손도 대기 어려운 '피해망상'이 남았다. 80년대 세르비아 인텔리들 사이에서 회자된 '세르비아 민족의 절멸'Genocide이란 말은 현실과는 전혀 달랐음에도 꾸준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민족의 말살로 나아갔다. 파시즘의 가장 큰 피해자가 파시스트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하게 됐다는 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크로아티아. 열등의식이 클 수록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독일 아리안계의 우등민족 사이에 끼고 싶었던 크로아티아는 나찌를 추수하면서 나찌보다 더 나찌스러운 짓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우월성이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처럼. 공산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를 과감히 청산하는 듯 보였지만, 시골과 촌락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파벨리치를 숭상하고, 우스타샤 크로아티아를 찬양하는 세력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는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테러전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슬림. 2차대전 때 세르비아에 대한 구원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손을 잡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진작에 깨달았다. 스스로의 자위조직을 만들고 나찌 치하에서 정치적 권위를 찾다보니 SS친위대까지 만드는 데 까지 갔다. 하지만 공산당 입장에서는 카톨릭, 정교에 비해서 무슬림들은 더욱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었기에, 더욱 커다란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는 적어도 보스니아에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무슬림끼리 싸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교리적 핍박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무슬림들은 열열한 공산주의, 더 나아가서는 티토 지지세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