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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30일 일요일

구유고의 집시 4 : 영화 속 집시 2 - Anđeo Čuvar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사회문제의 하나는 집시들의 앵벌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집시들의 구걸이야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런 일들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앵벌이가 산업화되자 당연히 인신매매, 아동학대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집시들이 많이 모여사는 구유고 지역이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리가 없다

이 문제를 작심하고 들여다본 유고 영화가 '수호천사'Anđeo čuvar(1987)다.

스토리는 이렇다. 영화의 초두는 집시 마을 상공에서 천천히 마을, 특히 주인공 집시네 집으로 하강하는 부감샷으로 시작한다. 그야말로 수호천사의 하강을 보여주는 샷이다. 그럼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신문기자 드라간Dragan은 집시들의 인신매매 현황을 취재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집시아이들 중에서 샤인Šajn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사회사업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악(아코디온)에 재능이 있다는데, 다년간의 학대를 겪은 탓인지 맘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신문기자 드라간Dragan. 1936년생 마케도니아 출신의 류비샤 사마르지치Ljubiša Samardžić가 역할을 맡았다. 슬라브인 답게 2m에 가까운 장신이다. 덕분에 상대역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훨씬 작아보인다.

샤인Šajn 역할을 맡은 야쿱 암지치Jakup Amzić. 이상한 일은 집시들은 주연을 맡아도 영화배우를 업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영화 속의 이 아이는 지금은 30대 후반 나이가 됐을 텐데, 후속작도 없고 뭐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샤인을 집으로 보내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한 드라간. 잘 사는지 집시 마을을 방문해 보기로 한다. 갔더니 왠 걸. 경제력 제로 아빠가 다시 샤인을 '조직'에 팔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도 얼마전에 죽고.. 기왕에 돋은 궁금증/측은지심으로 드라간은 베니스까지 샤인을 찾아 나선다.

이런 애 본 적있니? 당연히 애들은 모르쇠. 

드라간은 천신만고 끝에 경찰에게 잡힌 샤인을 다시 찾아낸다. 밥(+술)도 사주고 놀이동산도 같이 가주는 드라간에게 샤인은 마음을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드라간의 자동차 뒷자석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샤인. 창녀로 일하는 같은 처지의 집시소녀다.  

계속되는 '조직'의 학대를 참지 못한 샤인, 결국 드라간과 같이 세르비아로 도망친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사회시설에 샤인을 의탁할 생각을 하던 드라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샤인은 참지못하고 몰래 고향집으로 간다.

다시금 샤인을 찾으러 집시마을을 방문한 드라간. 그런데 샤인의 태도가 영 삐딱하다. 알아보니, 아빠는 감옥에 갔고 어린 동생들만 집에 남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샤인의 분노는 왜 드라간이 엄마의 죽음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냐는 데서 비롯된다.  집안을 챙기기 위해서는 다시 이태리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샤인의 퉁명스런 대답이다.

샤인의 쌀쌀한 태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드라간의 '영업 방해' 사실을 알아챈 '조직'이 나선 것이다. 결국 드라간은 마을에서 '조직'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영화는 결국 '수호천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람객에게 던진다. 드라간의 선의는 무시할 수 없지만, 그가 샤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아원에 의탁하는 것 뿐이다. '조직'의 작태는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샤인의 동생들은 연명할 건덕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란 선의로 샤인을 구하려다 목숨까지 잃은 드라간인가? 아니면 인륜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집시들에게 살 구석을 마련해주는 '조직'인가? 물론 영화는 질문만 할 뿐. 대답은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가 나오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는 앞서 소개한 '깃털수집상'이 나온 60년대와는 상당히 판이한 상태에 있었다. 티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민족주의가 사회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던 때다. 여느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서도 개방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시들의 앵벌이가 고질화되던 시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성조지의 날'Đurđevdan 축제일에 집시들이 냇가에서 몸을 씻는다. 아무리 무법해 보여도 집시들 나름의 사회적 질서와 제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집어 넣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샷에는 쓰레기 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드라간의 모습도 비춘다. 구유고 집시음악의 거두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이 영화에서 샤인의 아빠 역할을 맡고, 메인테마Sajbija까지 불렀다. 

이 같은 문제는 EU가 들어선 오늘날이라고 특별한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집시들이 많은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까지 EU로 가입한 만큼, 집시들의 휴먼 트래피킹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간 듯 하다. EU가 풀어야할 난제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구유고의 집시 3 : 영화 속 집시 1 - Skupljači Perja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다수 집시영화들이 나와서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다. 1967년작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은 깐느 그랑쁘리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역시 집시들을 소재로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1989)으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것 말고도 Anđeo Čuvar(1987), Crna Mačka Beli Mačor(1998), Ciganska Magija(1998) 등 (구)유고산 집시 영화는 허다하고 반향도 크다.

평론가들은 이들 영화가 집시를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외부자의 시각으로 외부자를 위해 만들어진 집시 영화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영화들에 대해서는 서구 중심부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라는 비난도 있다.

어떻게 보면 주변부의 비애다. 우리나라도 해외에서 각광을 받으려면, '만다라', '서편제'처럼 서구의 이국취향을 살려주거나 아니면 '섬', '올드보이'처럼 폭력적으로 충격적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어찌 됐건 집시들을 서커스 곰처럼 부린 것도 아닌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랴.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유고슬라비아처럼 내부사회 문제를 까밝힌 나라도 많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줘야 한다.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는 집시들이 직접 만들면 된다.

유고슬라비아 영화를 세계무대에 제대로 선보인 첫번째 영화가 바로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영어로 Feather Gatherers)이다. 영어 제목은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I Even Met Happy Gypsies)다. 왜 이런 차이가?  Feather Gatherers라는 직업 자체가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네'는 집시들의 송가 젤렘 젤렘Djelem Djelem에 나오는 가사의 한 구절이다. (젤렘 젤렘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영화 포스터.

영화 내용은 이렇다. 물론 스포일러 주의다.

무대는 보이보디나Vojvodina. 예전에 헝가리 땅이었다가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에 귀속된 지역이다. 세르비아 말고도 다양한 민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는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 세르비아어 말고도 헝가리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때문에 세르비아에서도 자막없이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주인공인 집시 보라Bora는 인근 농가로부터 거위 깃털을 수집해서 파는 장사꾼이다. 젊고 힘도 세다보니 술-도박-여색의 3박자에 거칠 것이 없다. 이미 자기보다 연상의 마누라가 있지만, 나쁜남자답게 대드는 마누라에게는 구타가 약이다.

보라. 짐승남이라고 이마에 쓰여있다. 

보라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시 처녀 티사Tisa를 좋아한다. 동업을 하는 미르타Mirta의 의붓딸이다.

보라가 좋아하는 티사. 실제 집시인 고르다나 요바노비치Gordana Jovanović가 맡았다. 영화를 찍을 때까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티사는 관습과 부모의 주선에 따라 동네 어린애에게 시집가지만, 신랑이 너무 어린 바람에 합방에 실패. 결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보라는 이 때다 싶어 미르타에게 티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하지만 미르타는 이를 거절한다. 왜냐. 그 스스로가 티사한테 흑심이 있었거든.

딸을 다오. 싫다 새꺄.

아니나 다를까. 티사를 겁탈하려던 미르타, 마누라가 말린 덕에 미수에 그친다. 티사는 도망과 곡절 끝에 보라와 만나 교회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빡친 미르타, 보라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그 사이 티사는 보라의 마누라가 준 돈으로 베오그라드로 도망갔다가 이도 저도 못하고 거리에서 겁탈만 당한채 결국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온다.

티사를 찾아다니던 보라, 티사가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복수에 나선다. 깃털 수북한 작업장에서 만난 두 사람. 격투 끝에 미르타는 죽고, 보라는 도망에 나선다. 마지막 장면은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이 집시 마을에서 보라를 탐문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집시들은 공권력의 사법정의 구현노력에 대해서는 시종 모르쇠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일곱살 쯤 되보이는 집시 뽀이가 담배를 피면서 탐문 중인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을 노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여기는 신경 끄는 게 좋아'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영화감독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Aleksandar Petrović는 당시 유고 영화계 블랙 웨이브의 기수였다. 티토 스스로가 영화광이다 보니 영화산업을 적극 후원했다. 덕분에, 유고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배달의 기수'류의 영화가 판을 쳤다. 페트로비치는 이 같은 조류에서 벗어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사람이다.

주연배우로 보라 역을 맡았던 사람이 유고산 국제스타 1호 베킴 페흐미유Bekim Fehmiu다.

추레한 모습을 벗어던진 베킴 페흐미유. 초기 헐리우드 진출작으로 캔디스 버겐Candice Bergen과 공연한 Adventurers(1970) 만 안 망했어도,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질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시가 아니라 코소보 알바니아계인 이 사람은 이 영화를 통해 국제적 스타덤에 올랐다.  그런데 이 양반, 잘 살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자 베오그라드에서 사는 것이 불편해졌다. 1987년 결국 민족주의 정책에 대한 항의표시로 연극 공연 도중에 무대를 박차고 나간 뒤, 다시는 배우로 복귀하지 않았다. 2001년 잠깐 인터뷰에서 드러난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에 대한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은둔생활을 지속하다가 2010년 76세의 나이에 베오그라드 자택에서 권총자살을 택한다. 아내에게 적어놓은 편지에서 그는 '암만 생각해도 인생이 의미가 없어서...'라고 적었다. 정치가 애꿎은 사람 하나 잡은 셈이다.

1951년생의 또다른 주연 고르다나 요바노비치는 그 이후 딱히 출연작이 많지 않다. IMDB에서는 '수호천사'에서도 출연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1967년 그러니까 이팔청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만 보여주고 주섬주섬 사라졌다. 1999년에 죽었으니 오십이 채 안된 나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에는 가정폭력, 구타, 도벽, 주벽, 제도에 대한 거부 등 집시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가운데 영화제목을 '행복한 집시들 만났네'라고 붙였으니, 참 역설적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60년대는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전성기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미국-소련한테도 꿀리지 않는 정치적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 거칠 것 없는 유고슬라비아에 어떤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집시들의 앤썸, 젤렘 젤렘은 환청과도 같이 지속된다.

영화 속의 젤렘 젤렘 노래부르는 장면. 집시 여가수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르는 올리베라 카타리나Olivera Katarina는 당시 유고 최고의 (섹시) 스타였다.  베킴 페흐미유의 자기파괴적 야성미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3 : 2차대전과 체트닉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짓쳐온 것은 독일 뿐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1차 대전 때 빼앗긴 보이보디나Vojvodina를 되찾고자 했고, 불가리아는 발칸전쟁 때 빼앗긴 마케도니아Macedonija를 탐했으며, 아드리아 건너편의 이태리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코소보를 노렸다. 독일군이 진주한 베오그라드에는 초록동색의 파시스트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크로아티아는 말 잘듣는 우스타샤가 점거한 것은 지난 번에도 말했고.

2차대전 당시 쪼그라든 세르비아 지도.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마디로 암울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스타샤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는 독립크로아티아에 세르비아를 조직적으로 절멸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지만, 힘없는 세르비아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가 세르비아 전체를 물샐틈 없는 통제하에 둔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만 주둔해 있었고,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부가 집안 구석구석을 다스릴 힘이 없었다. 한마디로 대충 틀은 잡았지만, 내정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었다. 이런 공백 속에서 자급자족적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무장 자위조직이 생겨났다. 체트닉Četnik 반군들이다. 

체트닉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더 깊다. 체타Četa라는 이름은 터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은 소규모 부대를 의미한다. 오토만 터키가 물러나자, 발칸에서의 군소민족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마을과 지역 별로 때로는 알바니아계 게릴라, 때로는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의 테러, 1차대전 때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적들에 맞서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근대화된 심리와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한 무장조직이 할 수 있는 것은 게릴라전 + 보복테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어딘가. 누군가 쓰러진 왕국을 위해 싸워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 때 나타난 사람이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ža Mihajlović다.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에 항복할 당시 대령이었던 이 사람,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작정, 1941년 세르비아의 중부 라브나 고라Ravna Gora로 숨어들어, 체트닉 운동을 주도했다.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별명 드라쟈 아저씨. 말끔하게 면도를 하거나, 정돈된 수염을 갖춘 근대 서양인들과 달리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세르비아 농촌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 가부장의 모습이다. 미하일로비치의 심리적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당연히 왕국의 망명정부는 쌍수들어 환영했다. 당장 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히틀러를 물리칠 수 있다면 누구와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던 처칠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리고 용맹무쌍 세르비아군의 수령 미하일로비치가 내놓은 필승의 전략은 '대기전술'이었다. 

대기전술? 연합군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힘을 비축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최선? 체트닉 조직의 성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독일군은 1941년 독일군 1명 부상에 50명, 독일군 1명 사망에 100명에 해당하는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다. 그 해 세르비아 중부 크라구예바츠Kragujevac에서 독일군이 공격을 당해서 다수가 죽었다. 빡친 독일군이 예의 원칙에 의거, 양민을 거의 3,000명 가깝게 학살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밤에는 퇴근해야 하는(!) 체트닉 입장에서는 이 같은 복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기전술은 세르비아의 인명피해를 줄이자는 생각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전쟁 전반에 걸쳐 체트닉의 주적은 독일이나 이태리 같은 점령군이 아니라 세르비아 민족의 박해자 우스타샤 혹은 민족해방의 경쟁자인 빨치산들이 된다. 2차 대전으로 외부세력에 점령을 당한 유고슬라비아는 업친데 덥친 격으로 내전까지 일어났다. 무의미한 살륙과 복수가 연이어 일어났다. 미하일로비치 입장에서는 말리고 싶은 부분도 있었겠지만, 체트닉 조직은 내부통제도 제대로 안됐다.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카톨릭 또는 무슬림 마을에서 수두룩하게 일어났던 양민학살은 분에 못이긴 즉흥 복수극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체트닉 운동의 근본목표 자체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왕국의 원상복구보다는 대세르비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던 크로아티아인들과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체트닉 조직의 가장 큰 경쟁자는 뭐니뭐니 해도 티토Tito가 이끄는 빨치산이었다.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체트닉 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이도 컸지만, 해방전선에서 빨치산과 체트닉 간의 실질적인 차이점은 바로 조직이었다. 티토는 마을 또는 지역 단위 투쟁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기동군을 조직해서 독일, 이태리, 우스타샤 등에 대항했다. 체트닉이 결국 방어에 중심을 둔 조직이라면 빨치산 기동군은 공격과 타격에 촛점이 맞춰졌다. 설사 독일 점령군이 가혹한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데미지는 체트닉에 비해 작았다. 더구나 학살당한 가족 친지들의 복수를 원하는 자들의 선택도 체트닉보다는 빨치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때문에 티토의 인민해방전선은 나중으로 갈 수록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처칠이 필요한 것은 이런 싸움꾼이었다. 양 측을 저울질을 하던 처칠은 1943년, '때'를 기다리는 체트닉이 아니라 언제든 싸울 의지가 넘쳤던 빨치산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빨치산과의 경쟁에 몰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과 연합하는 실수까지 범했다. 

복벽을 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결국 2차대전 말로 들어서면서 빨치산에 밀리게 되고, 2차대전 후 공산당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것으로 체트닉 조직이 역사에 이별을 고하게 됐을까? 당연히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형성된 체트닉의 전통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에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첨병으로서의 과거를 세르비아인들이 기억해 낸 것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얼마전에 미하일로비치를 복권까지 시켰다.

체트닉 깃발과 모자를 둘러쓴 세르비아인들. 당연히 최근 사진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체트닉 깃발에는 '신에 대한 믿음'S VEROM U BOGA '자유가 아니면 죽음'SLOBODA ILI SMRT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중앙의 해골 문양이 이색적이면서도 섹시하다.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 역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의 시기가 됐다. 티토가 나타나서 대충 상황을 갈무리했지만,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했다. 어느 식자는 세르비아인들의 전형적 심리상태를 '피해망상'으로 묘사했다. 코소보에서부터 시작된 피억압의 역사, 근세를 거쳐, 더구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참혹한 피해를 입은데다, 유태인들과 같이 조직적 살륙까지 당했다. 이러니 자라보고 놀란 마음, 솟뚜껑만 봐도 돌아버리지 않겠냐고. 이런 내상은 사회주의 시절 내내 잠복상태에 있다가 1980년대 말 크로아티아인들이 전통의 홍백 체크무늬 깃발Šahovnica을 들고 나왔을 때 다시 터졌다.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2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붕괴

1928년 크로아티아의 거물정치인 라디치의 암살로 인해 촉발된 위기에서 알렉산다르 왕은 결국 6개월의 장고 끝에 1929년 1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다.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대세르비아를 추구할까라는 개인적 망설임을 묻어버리고 왕국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왕정 독재자로서 알렉산다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행정구역 개편이다. 왕국내 기존까지 통용됐던 역사적 경계를 다 지워버리고 주요 강이름을 기반으로 바노비나Banovina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요 구성민족 명칭을 썼던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e으로 바꿨다. 왕국의 애칭 또는 별칭 정도로 쓰이던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어가 공식적인 국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 주도하는 국민통합의 첫걸음이었다.

1929년 새로 개편된 행정구역체제. 슬로베니아가 이름을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의 전통적 경계가 없어졌다. 크로아티아의 반Ban 제도에서 비롯된 바노비나Banovina라는 없던 단어를 만들어서 광역지방의 단위로 썼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민통합 드라이브가 걸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참외에 줄을 그어넣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 세르비아 민주당과 같은 주요 야당 정당지도자들은 투옥 또는 가택연금되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이같은 통합 조치는 오히려 왕국내 세르비아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왕국내 다른 민족들의 반발도  심해졌지만, 왕의 전횡이 강해지면서 세르비아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반발과 원망이 누적된 끝에, 1934년 알렉산다르 왕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되고 만다. 암살을 직접 시행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무장테러단체인 IMRO. 그 배후에는 무솔리니 치하 이태리에 결집한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우스탸샤Ustaša가 있었다.

알렉산다르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페타르는 11살의 미성년자였다. 정부는 부랴부랴 영국에서 사촌 파블레Pavle 왕자를 섭정Regent으로 불러와서 왕세자가 성인이 될때까지 임시적으로 왕권을 맡겼다. 생각지도 않은 왕권을 물려받은 파블레공은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항구적인 솔루션을 원했다. 왜?

무엇보다 국제정세가 불안했다. 1차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신생 세르비아의 앞을 막아선 거대제국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더 크고 험악한 독일 제3제국이 나타났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괴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까지 다가오자 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거기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달마시아 지역을 노렸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에 접근해서 왕국의 균열을 도모했다. 파블레공으로서는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크로아티아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938년에는 이 같은 섭정의 뜻에 따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과 왕국의 내무부장관(후에 수상)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Dragiša Cvetković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속됐다. 그 결과 나온 것이 1939년 8월의 '대타협'Sporazum이다. 핵심 골자는 크로아티아에 자치권autonomy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외부와의 협상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던 크로아티아와 폭력으로 나라를 만들어왔던 세르비아 간의 타협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39년 대타협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크로아티아, 즉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e의 지도. 크로아티아는 연청색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오늘날 보스니아(날줄로 표시)를 먹고들어 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나? 아쉽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사단은 1941년 파블레가 히틀러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이의 추축국 동맹Tripartite Pact에 가입하면서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독일을 싫어한데다, 타협주의적인 섭정을 싫어했던 군부 민족주의자들이 (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노발대발, 41년 3월 곧바로 유고슬라비아로 짓쳐들어갔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왕국의 군대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왕국을 점령한 독일은 곧바로 왕국의 해체에 돌입한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우스타샤에게 넘겨 독립크로아티아NDH를 만들고, 세르비아에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대타협을 성사시킨 크로아티아 농민당 마첵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소년왕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왕가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민족간의 '대타협'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1941년 히틀러를 만난 파블레공.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친영 성향이 강했지만,  영국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왔다. 

이 '대타협'이 몇년 만 더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그 이전에 알렉산다르 왕이 크로아티아와 분리했었더라면, 아니면 더 이전에 왕국이 만들어질 때부터 중앙집권이 아닌 연방제를 염두에 뒀더라면....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후세 사가들 조차도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만큼 유고슬라비아에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대타협' 자체는 민족간 화합의 단초이자 재난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가장 극명한 단초로 '대타협'에는 보스니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당시의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인들은 무슬림들이 별도의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무슬림은 종교 범주고 민족 범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시의 생각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귀의한 크로아티아인 아니면 무슬림이 된 세르비아인'이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결국 무슬림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며, 따라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하나의 나라로서 역사적 뿌리가 부족하다는  인식으로 연계된다.

나중에 이런 인식은 1990년대 유고 내전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원인이 됐다. 후일 1990년 크로아티아의 투지만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어떻게 두 민족 간에 유고슬라비아를 갈라먹을 것인가를 논의했다고 한다. 워낙 동상이몽이었지만 이 두 정치지도자들의 머리 속에는 39년 '대타협'이 들어있었던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보스니아가 90년대 유고 내전의 중심전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당시에 대타협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이런 것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지도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내파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레퍼런스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유고슬라비아의 해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5 : King of Gypsy Music

먼저 음악부터..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부른 '풍뎅이'Bubamara. 화면은 이 노래가 OST로 활용된 에밀 쿠스투리차의 1998년작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Crna Mačka Beli Mačor의 장면을 모아서 만든 동영상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또 집시 음악이다. 발칸 집시 음악은 브라스 밴드로 유명하지만, 실력있는 보컬 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가수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에스마 레제포바Esma Redzepova와 세르비아의 샤반 바이라모비치Šaban Bajramović를 들 수 있다. 오늘은 샤반 바이라모비치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단발머리 청년 당시, 그러니까 젊었을 때 모습이다. 찰슨 브론슨의 향취가 느껴진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1936년 세르비아 남부 니쉬Niš에서 태어나서 2008년 죽었다. 대부분의 집시들이 그렇지만, 학교 공부는 설렁설렁 초등학교 중퇴, 길거리에서 음악을 배웠다. 19살 되던 해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연애에 빠져 병역을 회피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 앞에서 어설픈 소리하다가 3년이면 끝날 형량이 5년반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끌려간 곳이 '벗은섬'Goli Otok(영어로 옮기면 Naked Island. 정치범/흉악범 수용소로 유명)이다.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굴러먹던 집시생활, 수용소에서도 잘 버텼다. 재소자 축구시합에서는 '흑표범'으로 이름을 날리고, 밴드에도 들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쓰고 읽는 법도 익혔다고 하니, 교도소가 그에게는 학교가 됐다. 출소 이후 여기 저기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가 1964년 첫 음반을 내고, 그 길로 엉겁결에 스타가 됐고, 그렇게 50여년 가수 인생에서 20여장의 앨범과 50장의 싱글을 발매했고, 집시음악의 왕kralj romske muzike라는 칭호를 얻었다. 곁가지로 수호천사Anđeo Čuvar(1988), Ciganska Magija(1998) 등의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과거 유랑악단이나 다름없는 생활이다. 음반, 공연도 있지만, 결혼식, 피로연 등이 집시밴드의 주수입원이다. 로컬 카페가 우리나라와 같은 '업소' 역할을 했다.

예술가 답게 생활도 방탕했다. 노름.술.담배.여색 등. 성격도 괴퍅해서 정해진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아무때나 마음대로 훌쩍 사라졌다. 공연을 펑크내서 수소문해서 찾아보면 누구집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동안은 내내 불평불만이었다. '같이 작업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위키에 따르면 그는 700여곡을 작곡했다(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자기 노래라고 주장한 노래가 원래부터 집시들 사이에서 불리워졌던 것도 있고, 같은 노래에 제목이 달리 달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축재의 방도를 딱히 아는 것도 아니고, 유고슬라비아 시절 내내 저작권이 잘 보호되지 않아서 말년에는 지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가 죽은 다음에 후배 뮤지션들이 위로 삼아 '고인은 저작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라고 세속에 초연한 영웅인 듯 그를 기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 같은 동료음악인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같은 영화인을, 특정 음반제작업자를 틈만 나면 욕했다. 허락 또는 보상 없이 자기 노래를 쓴다는 이유로. 하지만 정작 그는 쟁송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을까. 집시가 남에게 소송을 건다는 게 허망하게 느껴졌을지, 아니면 남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이 많아 변호사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또 다른 노래 '깡총깡총'Opa Cupa. 헤르체고비나의 세브다흐 장르 밴드인 '모스타르 세브다흐 리유니언'Mostar Sevdah Reunion과의 공연 장면이다. 샤반은 이들과 2002년과 2006년 콜라보 앨범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냥 뭉뚱그려서 '집시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와 같이 토만 터키의 영향 때문인지 오리엔탈 풍은 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 그의 노래는 발칸 세브다흐Sevdah 장르에서부터 재즈, 삼바, 탱고 등으로의 다양한 확장성을 가진다. 90년대 까지 그의 음반은 난삽해 보이는 아코디온 반주에 싸구려 씬서사이저까지 곁들어져 음악적 이디엄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들린다. 게다가 프로덕션 밸류도 낮아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뽕짝 메들리 판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낮은 질의 레코드를 커버하고 있는 '쏘울'이 있었다. 창법으로나 태도에 있어서나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는 '봄비'를 히트시킨 박인수씨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세르비아어보다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그 스스로가 언어상의 장벽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노래는 '쏘울'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가사를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한번은 티토 앞에서도 노래를 불렀는데, 티토가 집시의 언어를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음반 Romano Raj에 수록된 '백장미'Bele Ruže. 프로모션 화면이지만 집시의 음악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는 이 오랜 히트곡을 장고라인하르트 풍의 집시 재즈로 풀어냈다.

그에게 다행한 점이 있다면 성격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콜라보하고 싶어하는 실력있는 후배 뮤지션들이 따라 붙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2000년대 이후 나온 음반들은 음악적 전성기를 지난 상황에서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수작들이다. 특히 2006년 세르비아 재즈 밴드 '자발적대장간협회'Dobrovoljno Kovačko Društvo와 공동으로 만든 마지막 앨범 '집시의 천국'Romano Raj(PGP RTS 발매)에서는 재즈, 삼바, 레게, 탱고 등의 주법에 맞춰 자신의 히트작들을 다시 불렀는데, 장르가 바뀌었음에도 마치 자기옷 입은 마냥 편안하게 느껴진다. 죽음을 2년 앞둔 70세 고령에 녹음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확장성, 놀라운 적응력, 놀라운 유연성이다. 가히 '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백조의 노래. '집시의 천국'Romano Raj. 재즈, 삼바, 레게 등으로 풀어낸 자신의 히트곡 모음집이다.  이 음반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세계 구석구석에서 비루하게 시작된 음악들이다. 원래 예술을 비루한 현실을 더욱 숭고한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인간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천상 예술가다.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1 : 유고슬라비아라는 몸

1918년 12월 합병을 통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탄생은 세르비아 카라조르제 왕가의 입장에서는 과거 두샨의 제국에 버금가는 역사적 영광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창업과 경영은 상당히 다른 종류의 기법을 요구하는 별도의 과정이다. 이제 스스로 나라로 자립한지 얼마 안되는 민족이 다른 민족까지 포함한 연합왕국을 다스리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차대전 이후 확대된 왕국에는 국명에 거명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외에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 왕국의 인구는 1,200만을 헤아리게 됐는데, (몬테네그로까지 포함한) 세르비아 민족은 39%를 차지, 최대다수였지만 과반수까지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보스니아 무슬림들이라는 별개의 정치세력까지 생각하면, 카라조르제 왕가의 밥상에 놓인 밥은 크게 차고 넘치는 양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지만 민주적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던 세르비아 정부로서는 이들 민족의 요구가 보통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고, 주로 강압적 수단으로 대응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저항에는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고, 마케도니아에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썼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고 규정한 몬테네그로에서도 합병 반대세력에 호된 철퇴를 내렸다.

왕국령 마케도니아에서 조직된 내부마케도니아혁명기구(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zation, IMRO) 게릴라의 모습. 20세기 초 결성된 IMRO는 오토만 터키에 대항하는 불가리아계 민족 독립무장단체였지만, 발칸전쟁, 1차대전을 거치면서 반세르비아 무장봉기조직으로 변했다. 프랑스에서 암살당하는 알렉산다르왕을 죽였던 것도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결탁한 이들이다.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를 중심으로 1918년부터 반세르비아 무장저항운동인 카착Kacak운동이 일어났다. 사진속의 인물은 운동의 지도자 아젬 갈리차Azem Galica와 그의 부인이자 여걸 쇼타Šota.

1920년 제헌의회에서는 전체 419석에서 세르비아계 2개 주요정당 183석, 공산당이 58석,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50석을 차지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속에 만들어진 새 헌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불법이었으니 퉁치고, 여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세력은 라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결국 이들이 의회를 보이콧한 상황에서 헌법은 의회를 통과, 6월 28일 聖비드의 날(Vidovdan, Saint Vitus Day)에 선포됐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가 몸을 가진 현실 정치체로 전환된 순간이기도 했다.

헌법이 효력을 발휘한 다음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왕국에서 두번째로 큰 비중(24%)을 차지하는 '크로아티아 문제'Croatian Question였다. 국가연맹 하에서 공화국 체제를 지향하던 크로아티아 농민당수 라디치가 완고하게 협력을 거부했다. 왕가는 라디치를 투옥하고 이리 겁박 저리 회유를 반복했다.

왕국의 정부에 몽니 옹고집을 거듭하던 라디치가 생각을 바꾼 것은 1925년. 헌법을 받아들이고 정부참여를 선언했다. 정부가 이것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 회심한 라디치에게는 교육부 장관 감투까지도 씌워줬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정치상황이 이 때를 기점으로 미묘하게 변화한다.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 중심으로 구성된 세르비아 민주당이 이전까지의 기조를 180도 전환, 중앙집권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의회에 입성한 라디치의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연합을 통해 왕국 제1야당 연합이 됐다. 뭔가 좀 될 수 있으려나 싶던 바로 1928년 6월,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동료의원이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의회에서 라디치와 그 일행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디치는 즉사는 면했지만, 결국 두달 후 병상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정국이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28년 자그레브에서 라디치의 장례운구 행렬. 라디치는 20세기 초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으로써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국장에 가까운 장례행사가 치뤄졌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대변했지만, 후에 등장하는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의 우스타샤 운동과는 구별되는 온건노선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28년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국왕 알렉산다르는 '아예 이참에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자기네는 그냥 하던 대로 大세르비아나 계속 추구할까'라는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실행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국왕이 나서서 헌법을 위배(반역)할 수는 없다는 것, 둘째, 그리고 갈라서면 어디를 경계로 갈라서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아이디어는 너무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 세르비아인들로만 구성된 단일 국가.... 이 아이디어는 2차대전을 거쳐 199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가 된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0 :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

유고슬라비아. 유고는 남쪽을, 슬라비아는 슬라브를 뜻한다. 합치면 결국 남슬라브인들의 단결 또는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유고슬라비아는 국가체제 이전에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비록 종교도 다르고 역사적 경험도 다르지만, 하나로 단결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등의 강대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과 자립을 지키자는 아이디어. 때문에 그 자체는 정복적 전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EU에 비견할 만한 야심찬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린 사람들은 19세기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류데빗 가이Ljudevit Gaj(1809 – 1872)가 일리리안 운동으로 남슬라브 족의 연합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했고, 요십 스트로마이에르Josip Strossmayer 주교(1815 – 1905)가 이 아이디어를 이어 받아 정치세력화했다. 문제는 고장난명. 세르비아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세르비아의 기본적인 관심은 순수 세르비아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형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르비아인 지사들 상당수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카톨릭을 믿는 세르비아인이라고 보고 있었다.

요십 스트로스마이에르 : 교황무오류설에 반기를 드는 등 카톨릭 주교로서는 매우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해서 남슬라브족의 정치적 단결을 촉구했고 이를 위해 동방정교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 크로아티아인이 어디 가서도 꿀리지 말라고 자그레브 대학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과 식견으로 당대의 교양인이자 지금도 크로아티아의 사표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이디어로만 머무르던 유고슬라비아 개념은 1차대전 때를 들어 실현가능성이 급속하게 높아진 정치적 화두로 부각된다. 강고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게 된 탓이다.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영토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모여서 유고슬라비아 실현을 위한 활동에 돌입한다.

일단 합스부르크 영토내 3개 민족 명망가들이 1915년 영국 런던에서 유고슬라브 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합스부르크내 남슬라브 땅을 세르비아와 합병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이 굳이 세르비아와의 합병을 주창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연합국이 달마시아 등 크로아티아 땅을 미끼로 이태리의 참전을 부채질했던 탓이 크다. 이대로라면 합스부르크 영토내 남슬라브족의 영토가 또 강대국들에게 전리품으로 배분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연합국 편인 세르비아와의 합종을 내세워, 자신도 연합국의 편임을 증명하고, 영토의 통합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이 같은 시도는 해외에서 활동중인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 만은 아니었다. 슬로베니아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영토 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들의 연합을 지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슬로베니아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일부 카톨릭 주교들이 이런 운동을 주도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 사는 민족이 남슬라브 족에 해당된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일부 이 같은 움직임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이 있었던가 하면,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Ante Starčević((1823 – 1896)와 그 정치적 후계자들은 세르비아인들과의 합종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의 목소리는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묻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망하면서 1918년 10월 자그레브에서는 남슬라브 3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권력을 인수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국'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 (DSHS, State of Slovenes, Croats and Serbs, '왕국'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을 선포한 일이다. 그러나 시대는 DSHS 편이 아니었다. 이태리는 원래 정해진 선을 넘어서 리예카까지 쳐들어왔다. 국민회의 안에서도 어서 세르비아와 합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약간 난삽해 보이지만, DSHS 지도.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일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포괄하는 땅이 바로 DSHS의 영토이다. 이 영토를 어떻게든 건사해야겠는데, 아쉽게도 DSHS 국민회의는 그럴 수 있는 실행력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인 농민당(당수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이 반대했다.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에 합병된다는 것, 연방제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로 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스스로가 이런 방향으로 활동을 한 탓도 있지만, 그의 말은 후에 대부분 들어맞았다.

결국 국민회의는 농민당을 빼고 베오그라드로 가서 페타르 왕을 접견하고,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을 대내외에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로 가는 지난한 길이 시작된 것이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4 : Balkan Gypsy Brass Band

발칸반도에 집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4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는 서유럽이나 러시아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퍼져나갔지만, 다수는 아직도 발칸에서 살면서 사회생태계의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살을 맛대보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 집시 하면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이들의 음악은 찌고이네르바이젠, 헝가리 무곡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줬으며, 후대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집시 뮤지션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발칸지역 집시 음악 역시 같은 궤적에 있다고 봐야 겠지만, 가장 눈에 띠는 점은 집시 브라스 밴드의 존재다. 이들 음악은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이들 밴드는 중요한 축제 혹은 애도의 계기 때마다 등장해서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듣는 것이 축제 때가 많다보니 다수의 노래에 축제와 흥분의 톤이 내장되어 있다. 

구유고에서 활동 중인 집시 브라스 밴드 중에서 가장 많은 각광을 받는 보반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Markovic Orkestar의 모습. 리더 보반의 아들 마르코Marko도 14살때 학교를 때려치고 가세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브라스 밴드인가? 동유럽 집시하면 바이올린 아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오토만 터키는 서구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앞서 전문군악대Mehter를 운영했다. 14세기부터 오토만의 서진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악기(주로 나팔과 북)가 이런 저런 경로로 집시들 수중에 들어갔다. 19세기 세르비아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악기는 서양식 나팔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적으로 조직된 세르비아 군대에서도 군악의 취주를 담당한 계층은 집시들이었다. 더 나아가 척박한 데서 거친 일을 하다보니, 손이 거칠어져서 현악기보다는 관악기 쪽이 이들에 맞았다는 설명도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브라스 밴드가 많다 보니, 세르비아에서는 오늘 날도 구챠Guča에서 매년 8월 마다 트럼펫 축제가 열리는데, 이게 왠만한 서유럽이나 미국 록 페스티발 저리 가랄 정도로 규모가 꽤 크다. 

이들 음악은 이것 저것을 섞은 잡탕처럼 보이지만, 족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19세기 발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첵Čoček 장르의 주요담지자들이다. 터키식 오리엔탈 멜로디, 강력한 비트(4/4, 7/8, 그리고 집시 9이라고 불리는 9/8박) 등이 주요 특징이다. 댄스비트의 경우 벨리댄스와도 결부되기도 한다.

구유고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집시 브라스 밴드를 꼽으라면, 단연 세르비아의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 Marko Marković Orkestar다. 다음 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10년 구챠 트럼펫 페스티발에서 이들의 라이브 장면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집시 브라스 음악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 연주곡은 쿠스투리차 영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칼라시니코프Kalašnjikov다. 브라스 밴드 역시 여느 록밴드 못지 않게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이것이 집시 브라스 밴드의 전통적 기능이었을 것이다.


약간 발칸의 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최근에 뜨는 집시 밴드로는 팡파레 초카를리아Fanfare Ciocărlia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루마니아 집시들인 이들은 독일 음반제작가들에게 최근에 '발견'되기 전까지 동네 섬유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루마니아 깡촌에서 조차도 지켜낸 이들 음악의 매우 높은 완성도다. 이들은 2011년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와 공동음반 발칸 브라스 배틀Balkan Brass Battle(Asphalt Tango 발매)을 내놨다. 두 밴드의 경쟁심으로 시종 긴장감이 팽팽한 명반이다.  공산주의 시절 전혀 만날 수 없었던 두 밴드가 얼마나 동일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다.

2011년 부다페스트에서 이 두 밴드가 만나서 같이 공연했다. 영화 007 테마를 주제로 만든 곡인데, 대중에 어필하는 곡인데도 어쨌건 집시식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이게 꽤나 흥겹다. 청중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9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2 - 1차대전의 결과

동맹들과의 협력과 알력을 통해 일으킨 발칸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꿈에 그리던 고토 코소보를 회복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동포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차대전 직전 보스니아의 경우 인구의 43%가 세르비아인들이었으며, 크로아티아에서도  군사특별구Krajna Vojna를 중심으로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세르비아의 꿈은 이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는 것이었다.

오스만 터키와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 형태로 보스니아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병합annexation하여 지역의 긴장도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때문에 1912-13년 발칸전쟁이 끝난 다음을 기점으로 세르비아의 민족적 원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토만 터키에 비해 헛점이 없었다. 국력 면에서도 실력 차이가 너무 확실했다(인구 : 오-헝 5천만, 세르비아 발칸전쟁 이후 440만).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에서는 청년적 이상주의와 군부의 팽창주의가 만난다.

1911년 이상주의적 청년장교들이 '통일 아니면 죽음'Ujedinjenje ili Smrt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 축출과 쿠데타 주동자들이 만든 단체다. 그것이 나중에는 훨씬 간지나는 '검은손회'Crna Ruka로 이름이 굳어버렸다. 시작은 단촐했지만, 군내유력인사가 시대정신을 담아 만든 것이다 보니 1914년 경에는 2,50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대세르비아의 실현. 이를 위해서 보스니아 등지에서 활동할 다양한 사보퇴르, 게릴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했다. 어느날 이들에게 보스니아 촌뜨기 청년들이 찾아와서 거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 중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cip이었다. 1914년 6월 . 이 보스니아 청년이 얼떨결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암살하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1차대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검은손회 주동자 중의 한사람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역사적으로는 아피스Apis라는 암호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당시 대령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 햇병아리 암살자들에게 총과 폭탄을 건내주라고 한 사람이 바로 이 양반이다.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세르비아 정부에서 1차 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살로니카(오늘날 테살로니키)에서 반란혐의로 체포, 총살했다.  

1차대전을 만나 자기보다 훨씬 강한 적을 만나게 세르비아는 전쟁 초기 예상외로 잘 싸웠다. 이미 발칸 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병사들의 훈련상태나 전투준비도가 훨씬 높았던 것도 있었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다민족군을 이끌다 보니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가 많았다. 1차대전 협상강대국Entente Powers 측의 최초 승리 역시 세르비아군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해를 넘긴 1915년부터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동맹국Central Powers이 불가리아를 꼬드겼다. 발칸전쟁으로 피해의식이 컸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잃은 땅을 되찾아주겠다는 말에 홀딱 넘어갔다. 오스트리아-불가리아의 양면협공이 시작되자, 세르비아도 바로 만세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포위를 피해 선택한 퇴로는 알바니아 해변.

알바니아 해안까지 후퇴하는 길은 너무나도 고단했다. 험악한 지형, 악천후, 추위, 전염병, 패잔병을 노린 알바니아 산악부족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민간인과 군인 약 20만명이 이 퇴각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1916년 3월 동사, 아사, 피로사 등에서 살아남은 병력 12만명이 아드리아해에 있던 연합국 해군군의 도움으로 그리스의 코르푸Corfu로 이동했다. 왕과 수상을 비롯한 중요 정부요인들만 이곳에 남고, 병사들은 다시 그리스-마케도니아 쪽의 살로니카전선으로 투입됐다.

알바니아로의 후퇴 장면. 한겨울에 산길이다. 당시는 죽을 맛이었겠지만, 1차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때, 세르비아 민족에게는 유구한 국난극복의 역사에서 또 다른 기념비적 순간이 됐다. 

이 같은 고난을 버틴 세르비아는 편을 잘 선택한 탓에 결국 1차대전 승전국이 됐다. 대세르비아를 노려왔던 세르비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전의 결과 세르비아 왕가에게는 정작 기대하던 대세르비아보다 커다란 선물이 배달됐다. 유고슬라비아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사들이 세르비아와의 병합을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에 요청해 온 것이다.

1918년 왕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 통칭 SHS라고도 부른다. 보스니아라는 이름이 빠져있는 게 눈에 띈다)의 결성을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세르비아는 이 참에 기존 왕가를 내치고 몬테네그로까지 합병했다.

1918년 새왕국의 지도. 얼추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비슷한 모습이다. 1차대전 승리로 세르비아는 원래 영토(옅은 황색)에 헝가리의 보이보디나Vojvodina(연홍색),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를 추가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반도는 이태리가 가져갔다. 제국의 한축을 담당했던 헝가리는 루마니아한테도 땅을 빼았기고 1차대전 이후 크게 위축됐다.  헝가리가 2차대전 당시 독일 편에 붙은 이유는 히틀러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고토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어쨌거나 봉기 이후 100년이 지나고, 독립을 인정받은지 40년 만에 세르비아는 이루고 싶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뤘다. '싸우면 이긴다'는 세르비아의 호전적 상승의식은 1차대전을 기점으로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에 또다른 그늘이 있었다. 무엇보다 1차대전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구 1/4, 15-55세 남성인구의 2/3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1차대전 참전국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특히 대학 졸업자들이 대거 전사하면서 넓어진 왕국을 다스릴 엘리트층이 괴멸됐다. 나라는 몇 배 커졌지만, 왕가와 세르비아에게는 좀 벅찬 짐이 됐다.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8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1 - 1912-13 발칸전쟁

19-20세기 격동기에서 세르비아를 규정하는 중심적 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은 大세르비아 이데올로기Greater Serbia Ideology다. 민족으로서 이런 꿈을 가지지 않은 족속이 없었지만, 발칸에서 Greater라는 말은 유독 세르비아와 결부되어 사용되는 감이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을 제치고, 이를 정말로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탓이 크다.

세르비아어 개혁자인 북 카라지치Vuk Karadžic(1787-1864)는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 슈토Što를 쓰는 민족은 모두 세르비아인이라고 봤다. 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의 상당부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는 물론 몬테네그로에 사는 남슬라브계는 모두 세르비아 민족이 된다. 다만 일부는 카톨릭을 믿고, 일부는 이슬람을 믿는 차이 뿐이다. 언어공동체를 중심으로 민족을 규정하는 초기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류데빗 가이가 주창한 일리리아 운동Ilyrian Movement가 비슷한 궤를 그리고 있었다. 다만, 남슬라브족을 세르비아로 통칭하는 데 대해서는 분명 이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서 이 원초적 아이디어를 보다 고도화되고 구체적인 국가비전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일리야 가라샤닌Ilija Garašanin (1812-74)이다.

가라샤닌(1812-74)의 초상. 근대적 관료제 도입 등 세르비아의 국체를 세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역사상 세르비아 및 발칸 정치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1844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나체르타니예Načertanije (Outline 또는 Draft라는 뜻)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대세르비아Greater Serbia의 목표, 전략 및 방법을 기술한 이 문건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현 국경선 바깥에 있는 세르비아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어우를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비전대로라면 결국 오늘날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에 이르는 상당한 영토를 세르비아가 흡수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1850년 경 유럽의 지도. 가라샤닌이 문건을 작성할 때 만 해도 세르비아의 처지는 오토만내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는 자기를 둘러싼 제국들에 대한 대항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물론, 14세기 두샨의 제국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당시 세르비아는 오토만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둘러쌓여 있었고 제대로 독립을 인정받은 나라도 아니고 오토만 터키의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세르비아에는 아직도 오토만 터키 군대가 주둔) Načertanije는 결국 이들 강대국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작성하고 나서도 상당기간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문건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비밀주의, 음모론의 냄새가 강하게 베어들게 된다. 하지만 정책입안가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으로 회람됐고, 그 내용은 왕정하 세르비아 정부에 지속적인 방향성을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19세기 세르비아 역사는 이 비전을 실현시키는 과정이 됐다.

물론 만만치는 않았다. 1876년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후원을 업고 오토만을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마 사정이 뜻대로 흐르지 않아서,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1877년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도와 오토만과의 전쟁에 뛰어들고 오토만이 여지없이 밀리면서 발칸의 세력균형이 크게 바뀌게 될 처지에 이르렀다.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서구 열강들이 1878년 베를린 회의(Congress of Vienna)를 소집한다.

이 회의를 통해서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또 영토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가 경영하기로 하고, 불가리아가 자치를 획득하면서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입장이 됐다. 강대한 오스트리아, 형님형제격 러시아보다는 만만한 오토만을 상대하길 원했던 세르비아로서는 동서 방향 팽창의 길이 막힌 셈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에는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던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885년에는 갓독립한 불가리아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어이없는 완패. 때문에 세르비아의 국왕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국민의 멸시를 받게 된다.

1878년의 유럽지도. 독립을 인정받은 세르비아 색깔이 드러난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독립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르비아의 남부인 니쉬Niš까지 영토를 넓혔다. 자력은 아니지만 세르비아가 더 커진 것Greater은 사실이다.

답답한 가운데 새로운 계기는 1903년 왕조가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으로 교체되면서 나타났다. 1910년 대는 발칸에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과거 오토만 지배하의 독립국들이 자리를 잡은 때다. 러시아가 살살 슬라브 형제국들을 부추키고, 그리스가 이에 합세하면서 이들 간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형성된다. 이들 간의 군사력을 모아놨더니 대충 70만, 지역내 터키 군사력을 두배나 상회했다. 1912년 발칸 전쟁은 이런 구도 하에 일어났다. 결과는 터키가 참패. 오토만 터키가 유럽에서 발을 떼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그러나 이들 신흥국가들의 야망은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1912년 런던조약(Treaty of London)에서 서구 열강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가 지중해에 발을 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알바니아가 얼떨결에 독립을 당하게 됐다(?). 코소보를 넘어 알바니아를 집어먹을 생각을 하던 세르비아의 기도가 틀어지면서, 발칸 동맹국 간의 마찰이 일어났다.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공모해서 마케도니아의 상당부분을 발라먹은데 대한 앙심으로 1913년 불가리아가 전쟁을 선포, 2차 발칸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불가리아의 패배. 덕분에 세르비아는 원하던 바다를 얻지는 못했지만, 코소보를 넘어, 마케도니아 쪽 영토를 공고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4년의 유럽지도. 세르비아가 올챙이 자라듯 커졌다. 이번에는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일부까지 먹고 들어간 모습이다. 특히 코소보는 고토회복의 의미가 크지만, 이 때 쯤 이미 알바니아계가 인구의 과반을 넘고 있었다.  

세르비아가 대세르비아의 꿈을 실현해 나가면서 국운이 뻗어가는 듯 보이지만, 이 같은 팽창은 지역 내에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 냈다.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신흥민족의 팽창과 더불어 대대적 인종청소가 일어났다. 누구나 지역내 정착한 무슬림들을 축출했다. 터키에는 19세기 말부터 발칸지역의 정정불안을 피해서 거의 100만 명의 인구가 터키로 이주했다. 발칸전쟁 덕으로는 거의 20만 가량의 무슬림등이 다시 터키로 도망갔다. 남아있는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폈다. 언어 상으로 불가리아 쪽에 가까웠던 마케도니아에서 이런 정책이 제대로 펴질 리가 없었다.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의 활동이 더욱 거세졌고, 그 결과는 1934년 알렉산다르의 암살로 연결됐다.

이는 20세기 초 발칸이 왜 화약고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밖으로는 한치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국간의 긴장, 안으로는 갓태어난 신생민족들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의 그늘이었다. 발칸전쟁을 통해 코소보를 복수한다는 꿈은 실현됐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불안했다.




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7 : 왕조의 드라마

세르비아에 왕조 또는 왕조라 할만한 가문이 다시 들어선 것은 400년만의 일이다. 세르비아 민족의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인데, 문제는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점이었으니, 오브레노비치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그것이다. 터키와의 외교를 통해 독립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국내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함으로써,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했지만, 가문 마저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밀로쉬는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카라조르제 미망인과 자녀들을 세르비아로 불러들이고 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왕조가 만들어졌던, 지역을 둘러싼 열강들의 견제와 줄다리기, 거기에 별다른 통치술을 익히지 못한 신생왕국의 내부적 불균형. 이 두가지가 모여서 웬간한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왕조의 역사가 만들어 졌다.

세르비아 1차 봉기를 이끌었던 카라조르제는 반란지도자들에 의해 수령Vožd으로 추대됐다. 2차봉기 지도자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오토만과의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는 수준에서 출발해서 차근 차근 제도를 유럽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초기만 해도 오토만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공Knez(Prince)로 세르비아에 군림했다. 오토만의 속령이었지만, 지위는 전제군주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스스로가 오토만 전제군주의 틀을 크게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 밑에서 다단한 봉기가 일어났고, 1939년 결국 장남 밀란Milan에게 양위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역사를 시시콜콜하게 기록하는 것은 필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같은 이름이 계속 재활용되는 바람에 엄청 헷갈리기도 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839 : 밀로쉬의 장남 밀란 즉위. 병약해서 몇주 안에 병사하고, 16살 미성년자인 동생 미하일로Mihailo가 승계했다. 그러나 경험 미숙으로 3년만에 오스트리아로 망명, 아버지인 밀로쉬와 합류한다.

1842 : 반란세력이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장손 알렉산다르Aleksandar를 군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양반, 아버지 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 1858년 결국 의회가 퇴위를 요구했고, 이를 군말없이 수락했다.

1858 : 창업자인 밀로쉬가 78의 나이로 군주로 복귀했다. 망명 당시 '나는 세르비아의 왕으로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데 정말 그 말대로 됐다. 20개월 만에 병사한다.

1860 : 창업자의 아들 미하일로가 다시 군주의 자리를 계승했는데, 이번에는 좀 잘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무엇보다 세르비아에 주둔해있던 오토만군을 조용한 외교술로 철수시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또다른 초석을 다졌다. 나름대로 비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1868년 묘연한 이유로 암살 당했다. 지금도 범인과 배후가 누군지 모른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본정통에 서 있는 군주 미하일로Knez Mihailo의 동상.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골목이자 만남의 장소다.

1868 : 미하일로가 후사가 없었던 탓에 5촌조카 격인 밀란Milan이 군주 자리를 계승했다.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이 양반을 재난 급으로 묘사한다. 전쟁에서 약했고, 외교에서 밀렸으며, 가정사가 어지러웠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멸시당한 군주라고나 할까. 이 양반의 치세에 세르비아가 독립을 인정받고, 또 나라의 격을 공국에서 왕국으로 높였지만, 민심이 이반했다. 결국 1889년 미성년자인 왕자를 놔두고 자진 퇴위했다.

1893 : 그 아들 알렉산다르Aleksandar가 16살 성년이라고 우기면서, 왕으로 등극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성격적으로 불안했다. 자진퇴위한 아버지 밀란을 다시 불러와서 총사령관에 앉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모습도 연출했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서 자라난 철모른 아들들이 다 그렇듯, 순정이 충만해서, 모후의 시녀이자 이미 한번 결혼경험이 있는 드라가 마신Draga Mašin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부모는 물론 전 세르비아가 패닉 상태로 돌입. 더 나아가 외척인 두 오빠들이 나설 기세를 보이자 세르비아 군이 나서서, 1903년 왕과 왕비를 왕궁에서 잔인하게 살해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세르비아군은 후계자를 오브레노비치 왕가에서 찾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또다른 가문인 카라조르제비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퇴진한 알렉산다르의 아들, 스위스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페타르Petar를 찾아내서 왕좌에 앉혔다. 그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다.

1903 : 페타르는 프랑스에서 사관학교와 외인부대 장교를 거치고, 보스니아 봉기에 참여하는 등 군인으로써 자질을 보여준 바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등 계몽군주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두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의회를 활성화하는 등 민주주의도 확장해서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14년 건강 상의 문제로 왕태자에게 실권을 넘겼지만 곧이어 터진 1차대전을 맞아 노구를 이끌고 군과 함께 했다. 1차대전의 승리를 맞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왕이 되어, 봉기 이후 세르비아의 황금기를 열고 1921년 죽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시대를 본격 개장한 페타르 1세. 낭인 청년기를 보내고, 1차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쟁 등으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왕조 중에서 가장 행복한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1921 : 그 다음 왕이 된 알렉산다르는 부왕 페타르 1세의 차남이다. 장남 조르제Đorđe가 있었지만, 증조 할아버지를 닮아서였는지 성격이 너무 과격했다. 1909년 하인을  발로 차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세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알렉산다르는 일찍 권력을 이양받아 섭정왕자로서 1차대전 내내 군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테살로니키 전선을 돌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자질이나 행동거지 면에서 왕으로서의 자질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세르비아가 너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내외의 정치적 위기에 휩쓸렸다는 것. 지금까지 역사를 같이 해본 적이 없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같이 다스린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29년 크로아티아의 정치인 라디치가 세르비아 국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헌법을 정지시키고 독재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1934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테러조직에 암살당했다.

1934 : 왕위는 알렉산다르의 아들 페타르Petar II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알렉산다르의 사촌인 파블레Pavle가 섭정이 되어 페타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를 다스리게 된다. 이 때는 유럽이 파시즘 등으로 흉흉해지던 때. 옥스포드 출신의 파블레는 심정적으로는 영국에 가까웠지만, 영국과의 인연을 계속하기에는 히틀러 독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리 빼고 저리 빼다가 1941년 독-이-일 간의 3국 군사동맹에 유고슬라비아가 조인했던게 화근이 됐다. 독일을 전통적인 원수로 간주하던 세르비아 군부가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키고 파블레를 축출하고 17살의 페타르를 왕에 앉혔다.

1941 : 페타르가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독일이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 베오그라드 공습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돌입했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 든 알바니아 산길을 타고 그리스까지 후퇴할 여유도 있었지만, 전격전을 내세운 독일한테는 이런 전술도 쓸 틈이 없었다. 결국 군은 백기투항하고, 페타르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다. 빨치산이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면서 이들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카라조르제, 오브레노비치 두 왕가는 밀로쉬 1명, 미하일로 1명, 밀란 2명, 알렉산다르 3명, 페타르 2명의 왕(또는 공)을 배출했다. 자꾸 썼던 이름을 재활용하다보니, 표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은 가계도라고 하겠다.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면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는 왕위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건재하다. 페타르 2세가 1970년에 죽고, 그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세자로 아직도 남아있다. 왕가는 주로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밀로셰비치 정권이 무너진 2000년에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왕가의 목표는 입헌군주제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1/3가량은 입헌군주제 찬성, 1/3 가량은 아직도 반대다. 왕세자 알렉산다르가 세르비아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세르비아 국민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오늘날 모습. 왼쪽부터 후계자 피터, 왕세자 알렉산더 2세, 왕세자비 캐서린, 차남 쌍동이 필립과 알렉산더 3세다. 로얄 패밀리 홈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다보니, 이름들이 다 영어식이다. 

어쨌거나 세르비아의 왕조는 대하드라마로 전혀 손색이 없는 부침을 겪었다. 누군가 실력있는 제작자가 만든다면,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뿌리Roots나 다이나스티Dynasty 못지 않은 재밌는 대하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3 : 구슬레와 구전서사시

오토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정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커다란 자랑이지만, 정작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문건은 그리 많지 않다. 19세기 봉기 지도자들 조차도 문맹들이었으니, 역사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 내고,  그것을 정체성의 일부로 체화해 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 해답은 동방정교 교회와 세르비아의 구전서사시가epske pesme다. 교회가 고답적인 문어체 기도문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면, 구전서사시들은 바로 민간에 즉각적으로 유통됐다는 점에서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적으로 시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낭송하기 위해 있는 것. 세르비아의 음유시인들은 여기에 반주 격으로 구슬레gusle라는 악기를 연주한다.

구슬레.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악기로 봐야할지 아니면 연장으로 봐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단 한가닥의 현, 제한된 음계, 딱히 정해진 음정이나 피치도 없다. 낼 수 있는 피치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할 경우 많아야 다섯개. 연주하는 사람의 목소리 높낮이에 따라 튜닝도 바뀌는 인간친화적인(?) 악기다. 세르비아에서만 쓰는게 아니라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발칸 전체에 연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악기의 종주는 세르비아 민족이 많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다.

구슬레, 이렇게 생겼다. 양다리 사이에 끼우고 활을 써서 연주하는 찰현악기다. 우리나라 해금과도 비슷한 구조이지만, 손아귀가 아니라 손가락 만으로 음정을 만들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음계가 그리 많지 않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서는 이 한줄짜리 악기를 복수plural 취급한다는 것.......

음유시인의 낭송을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음악 이전의 그 무엇인가? 정작 들어보면 형언할 수 없는 원초성이 마음을 파고들어 온다. 청중에게는 악기의 단순성이 오히려 메시지의 명징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주로 세르비아의 역사와 신화, 영웅담들이다. 당연히 가장 인기있는 곡들도 1389년의 코소보 전투 전후의 사정들을 기록한 시가들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던 코소보 신화 역시 음유시인들의 낭송을 통해 전해졌다. (특히 코소보 서사시들은 유고 내전 등의 계기를 통해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영어번역으로 보려면 링크1 혹은 링크2 참조)


그렇다면 박제된 과거의 일만 전해지는가? 구슬레 서사시가들은 세르비아인들에 영향을 끼친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을 노래하는 창구가 된다. 19세기 초 사라예보 암살사건, 티토의 빨치산 활동, 가장 최근에는 유고 내전에 이르기까지, 구슬레 음유시인들이 아니 다루는 주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오늘날 세르비아 구슬레 씬의 주된 에토스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유고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 혐의로 전범으로 지목된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등을 칭송하는 구슬레 서사시도 심심치 않게 곧 잘 들을 수 있다.

구슬레 음유시인 Guslar 사샤 라케티치Saša Laketić. 세르비아에서 활동 중인 많은 구슬레 가수들이 있지만, 무대 장악력이 좋아서, 그런지 박수도 잘 이끌어 내고, 청중과의 교감이 좋다.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 음유시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14년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암살사건sarajevski atentat을 노래하고 있다. 

세르비아가 2012년 EU 후보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회원국이 되는 절차를 밟아가는 오늘 날 구슬레 서사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 나갈까? 이 원초적 목소리가 EU 문명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궁금해 지는 지점이다.

2012년 I Got Talent 몬테네그로 프랜차이즈에서는 14살짜리 소녀 Bojana Peković가 출연해서, 능숙한 구슬레 연주와 노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로 남성일색의 구슬레 씬에 나타난 귀여운 소녀의 고고성은 세르비아 민족 서사시에 새로운 방향과 기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려서 그런지 다른 악기와 합주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음역을 내보는 등 신선한 실험도 하고 있다.

2013년 2월 보야나와 니콜라 페코비치 남매의 구슬레-아코디언 협연 장면. 희귀한 일이다. 구슬레는 다른 악기 사이에서는 거의 음향효과 정도를 낸 적은 있지만, 제한된 음역으로 인해 협연을 불가능했다. 보야나가 과거에는 거의 고정적이었던 손 포지션을 바꿔가면서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구슬레의 미래?

그러나 이 같은 실험이 구슬레의 미래를 담보할 것인가? 모르는 일이다. 보야나가 알아서 잘 하겠지.

개인적으로는 베오그라드에서 구슬레를 구입하기 위해 물어 물어 장인匠人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담배가 쩐 아파트 응접실에서 몬테네그로 출신의 장인은 구슬레의 요모조모를 가르쳐 주더니 날보고 이제 여기에 맞춰서 노래를 하라고 권했다. 세르비아말을 못해서 안된다고 하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한국말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구슬레의 미래에 대해서 그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나한테는 구슬레 시가의 본질에 대한 작은 깨달음의 계기도 됐다. 구슬레가 없어진다면 세르비아의 매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듯 하다.





2013년 5월 6일 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6 : 독립 아니면 부활

오토만 터키가 서구문명권에 이리 저리 밀리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에도 독립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조리돌림 고전하는 사이에 오토만 터키의 술탄 셀림Selim III세가 어떻게든 살아볼 요령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변방에는 상당한 자유를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몸은 김정구 마음은 김완선이랬던가, 내부적 부패가 극에 달한 오토만 체제 자체가 통제가 안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 세력. 오토만 확장의 일등공신 예니체리들이 공고한 기득권을 형성하면서 술탄에게 반기를 들어 1802년에는 술탄의 총독을 살해하고 세르비아를 점거하고, 폭압을 일삼았다. 1804년 이들은 세르비아 내부적으로 싹트는 반란의 조짐을 선제적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세르비아계 주요 지도자들 150명을 한곳에서 살해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곳곳에서 반란의 물길을 트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세르비아 1차 봉기다.

이 때 세르비아인들이 봉기의 지도자로 지명한 사람이 조르제 페트로비치Đorđe Petrović, a.k.a 카라조르제Karađorđe, 영어로 표현하면 Black George다. 일자무식에 양돈업자였던 이 사람이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가. 세르비아는 이미 귀족들이 사라져버린 평등사회였다.  전국민이 거의 무학인 상황에서, 무식은 지도자로서의 결격사유가 아니었다. 카라조르제는 이미 터키와 맞서 싸우다 대가족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고, 오스트리아 군 통제하에서 군인생활 경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잔인, 과단, 용맹한 행동은 세르비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키가 큰 세르비아인들 중에서도 카라조르제는 더 컸다고 한다.

카라조르제는 자신을 찾아온 세르비아 가부장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는 너무 잔인하다. 당신들이 아마 못견딜 껄?'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그는 못이기는 척 수락하고, 이처럼 비싸게 군 덕에 3만 세르비아 반란군의 총수로서 절대적인 리더쉽을 확립할 수 있었다. 오토만 내부에서도 손발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일련의 전투를 거쳐 반란 예니체리들을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다.



성사바 교회 앞의 카라조르제 동상. 사뭇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설을 통해서 전해지는 카라조르제의 아우라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양반, 자기가 했던 말 처럼 정말로 사나왔다. 청년시절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거부하는 양아버지를 직접 죽이고, 동생이 양가집 규수를 강간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처형, 시체를 며칠 동안 그 자리에 걸어놨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는 민족해방의 첫 물꼬를 튼 지도자로서 추앙받는다. 야만인으로서의 야성과 지도자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던 듯.....


세르비아는 이렇게 하나의 해방구가 되면서 독립의 발길을 디디기 시작한다. 귀족-농노 구분이 없는 세르비아와 같은 상황에서 카라조르제는 처음으로 대의체제를 만들었다. 그 스스로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학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세르비아인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이런 체제가 181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카라조르제의 해방구도 위기를 맞았다. 1812년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처들어간 해이다. 러시아가 궁해진 입장에서 오토만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오토만이 군사력을 돌려막기가 훨씬 수월해 졌다. 처음에는 카라조르제가 골치거리 예니체리 잔당들을 처리해줘서 고마왔지만, 자신의 권위에 복속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된 오토만이 1813년 대군을 이끌고 발칸으로 들어섰다. 까마득한 대군을 맞아 카라조르제를 비롯한 반란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망명도생의 길로 들어서고, 1차 봉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1차 봉기는 결국 실패했지만, 세르비아의 궐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차봉기가 진압된지 2년 후인 1815년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이번에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Miloš Obrenović. 출생과정이나 사회적 배경이 카라조르제와는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양반의 봉기는 카라조르제 때와 달리 궁극적으로 성공했는데, 그 실마리는 아이러니스럽게도 다시 한번 나폴레옹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지면서 오토만 터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향배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브레노비치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오토만과의 협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오토만이 세르비아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되,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확보하는 구도가 만들어 졌다. 그 상황에서 그는 세르비아 대공Prince가 됐다.

2차봉기를 주도하는 오브레노비치. 터키식 복색이 눈에 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금 한다하는 집안들은 다들 이러고 살았다. 카라조르제가 비타협적인 군인의 이미지라면 오브레노비치는 외교가 또는 비즈니스맨의 면모가 강하다. 터키와의 타협을 추구하는 동시에 열강들과도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욱일승천하는 오브레노비치에 가장 강력한 정적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로 망명가 있던 카라조르제였다. 결국 오브레노비치는 1817년 뜬금없이 세르비아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하고, 그 수급을 터키로 보냈다.

오브레노비치가 그 이후 터키로부터 종주권suzerainty을 획득하고, 헌법을 제정한 데 이어, 터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독립을 쟁취해 나갔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약삭빠른 밀로쉬보다 단심의 카라조르제 쪽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어쨌거나 카라조르제는 불운한 암살을 당했지만, 후손들은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 가문이 되어 세르비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언제든 오브레노비치 가문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서 자리잡았다.

카라조르제가 시작해서 오브레노비치가 완성한 세르비아의 독립은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회의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가 너무 막나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모인 열강들의 짜고치는 고스톱 도박장이다. 이를 통해 세르비아는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가 끼어들어 보스니아를 가져간 데 대해서만큼은 적대적이었다.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 동포들 때문이었다. '단결 만이 세르비아를 구한다'는 구호가 머리 속에 선명해 졌다.



2013년 5월 5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5 : 반란과 봉기

세르비아인들의 자랑 중의 하나는 불굴의 민족혼, 외세 오토만에 대해 허다한 봉기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집단이주는 이와 같은 봉기 시기에 맞춰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봉기는 어디에나 일어나기 마련. 과연 세르비아인들의 봉기라고 할 만한 것을 찾는 데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

역사에 기록된 봉기 중에서 가장 최초이자 그 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봉기가 1596년 오늘날 보이보디나 지방인 바나트Banat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 반란에는 약간은 종교전쟁의 성격도 채색되어 있었는데, 정교 주교가 주동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반란군은 성 사바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들고 다녔다. 이 때 오토만군을 이끌던 시난 파샤Sinan Pasha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정교가 배출한 최고의 성인 성 사바Saint Sava의 유해를 베오그라드에서 화형? 소각? 화장해 버렸다. 물론 한참 오토만의 세력이 전성기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은 얼마 안가 진압됐다.

<베오그라드에 있는 성사바교회는 발칸 최대, 세계에서 두번째(또는 세번째?)로 큰 정교교회라고 한다. 터 자체는 바로 시난 파샤가 성사바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이 아름답고 야심찬 교회를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사바에게 봉헌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일이다. 1935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교회는 2차대전, 사회주의, 유고 내전 등 다사다난한 세르비아 역사 탓에 아직도 완성이 안됐다. 공사진도가 민족주의의 발흥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

세르비아 민족이 오토만에 대한 반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결국 17세기 오토만 세력의 쇠퇴와 일치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연합군의 도움으로 1683년 오토만의 비엔나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기 시작하면서 오토만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1683년부터 1699년까지는 서양사에서는 신성동맹Holy League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니스)과 오토만 간의 대전쟁Great War에 돌입하면서 오토만 지배 하의 기독교를 신봉하는 민족들의 봉기를 부추키고 다녔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정교의 수장인 아르세니예 3세 Arsenije III Čarnojević와 접촉, 거국적 봉기를 요청했으며, 아르세니예 3세가 이에 협조한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을 간다고 아직 오토만의 힘이 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발칸으로 들어서면서 보급선도 아슬아슬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을 빼기 시작한다. 덕분에 입장이 난처해진 아르세니예 3세는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과 더불어 다뉴브강을 건너 슬라보니아 평야로 다수 세르비아인들을 이끌고 이주했다. 이때 이주민들이 오스트리아가 만들어 놓은 군사특별구의 새로운 인력공급원이 됐다. 누구든 와서 군사특별구에 인구를 채워주길 기다렸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들을 대환영하고 각종 특권을 베풀었다.

1690년 아르세니예 3세가 주도하는 세르비아 민족의 대이동을 재현한 역사화. 파야 요바노비치Paja Jovanović가 1896년에 완성한 그림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이를 민족의 대이동The Great Migration이라고 부른다. 아르세니예 3세가 주석하던 곳은 다름 아닌 오늘날 코소보의 역사도시 페치Peć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때 세르비아인들의 대이주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인구가 줄어들게 된 결정적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그 공백을 알바니아계가 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동의 규모와 영향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많다.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의 존재가 이전에는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코소보에 대한 집착은 이 같은 역사적 경향을 수정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코소보 패전, 그리고 오토만 지배 하에서 강요된 대이동 등이 결국 세르비아계에 대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꼭 이 같은 이동이 세르비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150년 가량 살던 무슬림들이 개종을 하거나 다시금 발칸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땅을 잃고 쫓겨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리가 없다. 이 때를 맞춰 오토만의 영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복의 잔인성과 강도도 더욱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 같은 지역의 불안은 문명권의 조류와 더불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오스트리아, 베니스, 러시아 등 서구열강들의 오토만 터키에 대한 견제, 더 나아가 범 게르만, 범 슬라브 등의 민족주의의 발흥은 세르비아 인들의 맘을 설레게 한다. 특히 세르비아인들을 흥분시킨 것은 정교 형제국 러시아의 굴기였다.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꼬드겨서 그 장단에 춤을 몇번 추기는 했지만, 문제는 카톨릭 교회와의 긴장. 카톨릭 교회가 세르비아 이주민들에게 자꾸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정교 사제들의 맘에 상처를 줬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흑해를 주변으로 오토만과 쟁패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에도 '우리도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2013년 5월 2일 목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4 : 끝나지 않은 이주의 역사

15세기 오토만의 접수로 독자 정치체제 없어지자 세르비아인들은 여러나라에 드넓게 퍼져 나가게 된다. 16세기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가 오토만에 크게 발리면서, 오스트리아가 구원투수로 긴급투입된 상황. 크로아티아 역사를 이야기할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오토만이 촉발한 인구 공백을 채우기 위해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지역에 군사특별구 Vojna Krajna(Military Frontier, 또는 Military District로 표현)를 세운다. 이 군사특별구를 채워준 인구의 상당수가 주로 세르비아계였다.

17-18세기 군사특별구의 모습이다. 군사특별구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는 헝가리도 포함)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가 세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Republika Srpska Krajina의 판도와 어느 정도 겹친다. 아울러 왜 나라 이름에 '크라이나'라는 말이 들어갔는가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을 대표할 만한 정치체제가 없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사특별구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곳의 정주민들은 기존 귀족에 복속된 농노가 아니라 자유민이었다. 그만큼 세금에서도 자유로왔다. 오스트리아가 특별구민들에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특별구민들은 황제가 원할 때 언제든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르비아 귀족들이 오토만과의 동맹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 세력과의 대결에 참여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스스로 오토만의 서진을 막았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때 오스트리아가 동원한 군사력의 상당부분이 세르비아계였기 때문이다.

18세기 군사특별구 지역민의 모습. 군인의 모습이다. 특별구 안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대충 이러고 살았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부류들을 국경사람Graničar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오토만 치하에 있는 세르비아계는? 일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토만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에게 무기소지, 승마 등을 금지했다.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면 칼을 들어야 하는 시기에 상당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군문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세르비아 사람이 아니라 터키인Turci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오토만은 너무 광활한 지역에 팽창하다 보니 한 때는 인구의 80%가 기독교계였다. 문제는 군사력. 기독교인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이 미심쩍었던 오토만은 항상 밀리터리 엘리트가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토만은 한동안 데브쉬르메Devşirme 시스템이라는 엽기적 인력공급 방식을 유지했다. 공출과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독교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을 징발한다.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어려서부터 군사교육을 시킨다. 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술탄의 충성스런 정예 직할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예니체리Yeni Çeri (영어로는 Janissary로 표기)다. 예니체리의 주요공급처는 당연히 발칸의 피지배민족들,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인들이었다.

이태리의 벨리니가 그렸다는 예니체리. 신분상으로는 노예였다. 하지만, 고정적 급여를 받았다. 잘 하면 행정관으로 나가는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한 터키 전사 중에서 많은 수가 세르비아인이었을 것이다. 

술탄이 원정 때마다 대동하고 다녔던 이들 정예병들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 또는 백척간두의 타이밍에 투입되어 전투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 쏟아지는 화살과 투석 속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깨뜨린 사람들도 이들이었다. 오토만이 한참 잘 나가던 시기에는 능력위주의 인사가 이뤄지다보니, 여기에서 전공을 세운 자들은 황제의 대리인 Grand6 Vizier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하기도 했다. 이 부류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sha Sokolovic다. 나중에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상 수상작 '드리나강의 다리'가 바로 이 사람이 만든 다리의 이야기다.

곁가지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출세길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일부 마을에서는 아예 데비쉬르메로 뽑혀갈 아이들을 미리 뽑아놓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조금 잘나간다 싶을 때가 항상 문제, 예니체리 시스템은 나중에 세습으로 변질됐다. 아이들을 강제로 납치해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능력위주의 인사시스템이 기득권 체제로 변질되면서 오토만은 부패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토만 제국의 생성부터 절정기까지의 모습을 한꺼번에 표시한 지도. 한참 때는 유럽에서는 비엔나가 코 앞이다. 

어쨌거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오토만을 피해 정처없이 방랑과 이주를 반복했던 세르비아 남자들은 성직자가 아니면 군인의 길을 걸었다. (아예 성직자 겸 군인도 상당수 존재.) 오토만 시대는 세르비아에 상무 문화를 착근시킨 것이다.

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3 : 오토만 지배 500년

1389년의 코소보가 세르비아 민족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것으로 믿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그 때부터 오토만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귀족들이 오토만에 충성을 서약하면서, 15세기 유럽-오토만 간의 전선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다시 그려졌다.

또 유럽으로 들어오는 오토만 역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커다란 위기가 15세기 초에 티무르 칸과의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나타났다. 술탄 바예지트가 티무르에게 생포되고 그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벌여서 내분이 정리되는 데만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때를 기해서 세르비아의 대표호족, 즉 라자르의 후계자 스테판Stefan은 헝가리와 연합한다. 때마침 헝가리는 국력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었다. 스테판이 죽자 그 사촌 주라지 브랑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그 뒤를 이었다. 주라지는 변방국가 만이 할 수 있는 줄타기 외교의 달인이었다. 두명의 딸 중 한 명 마라Mara는 오토만 술탄에게, 또다른 한 명은 헝가리 왕의 사촌동생에게 출가시키면서 중간역할을 했다. 오토만-헝가리 평화조약인 세게드 평화조약Peace of Szeged(1444)를 중재하면서 세르비아의 국권을 일으키는 희귀한 일도 바로 이 사람의 치세 때 일이다.

세르비아의 거의 마지막 왕Despot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1430년에 거처 스메데레보Smederevo(베오그라드 남동쪽 다뉴브강변)에 지은 성이다. 오토만 쓰나미는 이 성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구-이슬람 문명의 평화체계가 지속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카톨릭 교회가 '이교도와의 약속은 안지켜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헝가리가 중심이 된 십자군이 오늘날 불가리아 지방으로 침입하면서 모처럼의 평화조약이 깨져버렸고, 주라지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 게다가 주라지는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야노쉬 훈냐디에게 뇌물까지 주지 않았나. 십자군과 오토만 간의 대결은 1444년 바르나 전투로 연결됐다. 결과는 십자군 패배.

헝가리의 야노쉬 훈냐디가 1448년 다시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코소보 들판에서는 두번째 서구와 오토만 간의 전투가 있었다. 또다시 헝가리의 패배. 이 전투에서 주라지는 중립을 지켰지만, 헝가리 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낱낱이 오토만 쪽에 알리고 전략적 자문을 제공했다고 한다. 세게드 평화조약을 망친 것은 훈냐디 때문이라는 개인적 악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오토만간의 일진일퇴 공방이 지속되고 이 자리에서 불안하게 나마 세르비아는 정치적인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는 1456년말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79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또다시 지긋지긋한 후계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를 틈타 오토만은 조용하게 세르비아를 병탄했다. 브랑코비치 왕가가 망하면서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정치체제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다뉴브강 북쪽으로 도망친 세르비아인들과 일부 귀족들이 잠깐 잠깐 왕국을 만들기는 했지만, 오래 끌지 못했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 하에서, 모하치 전투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하에서 오토만 항전의 최전선을 맡았다. 나라가 없어진 세르비아인들의 일부는 다뉴브를 넘어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슬라보니아 평야를 거쳐, 아니면 보스니아를 거쳐 달마시아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이동을 했다. Tim Judah가 말한 바 이 같은 세르비아의 이주 패턴은 결국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종청소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체제를 피한 정처없는 방랑 아니면 기존의 이주민들을 뿌리부터 드러내는 모습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됐다.

국가적 혹은 정치적 체제로서의 세르비아가 사라지게 된 때는 오토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정복왕 메흐메드Mehmed II the Conqueror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술레이만 대제의 치세였으니까, 오토만으로서는 최대 전성기를 찍고 있을 때다.

2012년 터키에서 개봉된 영화 Fetih 1453은 주라지의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서방세계를 괴롭히던 메흐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비잔틴제국) 정복을 다루고 있다. 최근 경제사정이 나아지니까, 터키에서는 과거의 영화를 영화로 재현하려는 움직임들이 커지는 듯 하다.

과연 오토만 터키가 과연 압제와 폭압 만을 앞세운 야만민족이었을까? 세르비아 사람들은 코소보 전투 이후부터 세르비아 민족의 암흑기로 들어서면서 내내 오토만의 압제가 지속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미지는 대부분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상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압제 만으로는 500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토만 제국은 세르비아를 병합하면서 무슬림 엘리트들과 샤리아 율법 체제를 발칸으로 도입했지만, 현지의 실정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아서 세르비아에서 통용되던 세속법quanuns을 대폭적으로 수용했다. 전제주의 오토만의 군사적 파상공세로 발칸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는데, 15, 16세기 오토만의 사회 시스템과 체제는 서구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앞서있었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란 말로 대표되듯 무자비하고 강제적인 개종작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것도 다 서구가 만든 편견이다. 물론 일부는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강제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오늘 날의 기준에서 보면 에누리가 있지만 오히려 오토만 치세는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하는 관용Tolerance의 시대였다. 동방정교던 카톨릭이던 기독교를 믿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과거 서구 문명권이 틈만 나면 박해하고 쫓아낸 유태인들을 받아 준 것도 오토만이었다.

사회 및 정치 체제가 이슬람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것은 세르비아 정교 교회였다. 정교 교회가 코소보에서 오토만과 싸우다가 전사한 라자르 Lazar를 비롯한 주요 민족의 영웅들을 성인으로 추존하고 숭앙하면서, 다시금 부활하게될 세르비아 민족의 신화를 전승해왔지만, 이 역시 건드리지 않았다.

오토만 제국은 정교, 카톨릭, 이슬람, 유대교 종교 신봉자들이 별도의 구역에서 살도록 하는 구획 시스템Mahala을 유지해왔다. 귀족들이 사라지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주로 농촌 대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결속한다. 하나의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세금을 제 때 내는 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토만의 원칙이었으므로 이들 대가족 커뮤니티Zadruga는 세르비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 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어떻게 보면 우리 기준에서 보면 전혀 다른 민족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이들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된데는 이 같은 시스템을 통해서 형성된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민족을 언어공동체 중심으로 규정하던 서구 사람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근원이었다.

문제는 지배세력의 타자성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관용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서구사회가 표방하는 것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토만이 유럽의 병자로 이 강대국 저 강대국에게 돌아가면서 따귀를 맞게 되면서, 애꿎은 화풀이를 지역내 기독교인들에게 했던 것이 두고두고 오토만의 압제로 기억되게 된다. 18-19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맞아 세르비아의 자기 주장은 결국 어떻게 하면 오토만 유산을 극복하고 몰아낼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었다.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2 : 코소보 1389

어느 민족이나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결정적 전기가 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그것이 1389년 코소보라고 생각한다.

* 코소보의 소녀, 우로쉬 프레디치Uroš Predić가 1919년에 완성한 그림으로 아직도 가장 인기 있다. 전투 다음 날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하는 코소보 소녀의 모습에서 세르비아의 자기투사가 보여진다. 

1389년이면 네마냐 왕조의 두샨이 제국의 위업을 세운지도 얼마 안되는 때다. 하지만 아들이자 후계자 스테판 우로쉬Stefan Uroš도 왕업을 이을 실력이 없었다. 친족과 호족들이 너도 나도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얼마 안가 우로쉬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어 네마냐 왕조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14세기 세르비아는 호족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했고, 이렇게 지역사정이 어지러운 가운데 1389년 오토만의 술탄 무라드Murad I가 대군을 이끌고 유럽원정길에 나섰다. 결국 라자르 흐레블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호족 연합군이 이들을 검은새벌, 코소보 들판Kosovo Polje에서 맞선다.

세르비아에서 민족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보는 이 전투의 구체적인 모습과 결과에 대해서는 예상 외로 자료가 많지 않다. 이 전투의 결과를 놓고 세르비아는 장렬한 패배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후세에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것이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동의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투 직후, 상황에 대한 평가는 서구에서 떠돈 서신과 편지들을 보면 오히려 세르비아 측의 승리라고 표현한 경우가 종종 나왔다.

적어도 거의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점은 전투자체는 매우 격렬했을 것이라는 점, 그 결과로 양측의 총수 즉 라자르와 무라드가 모두 전사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래서 후세 사가들은 세르비아의 일방적 패배보다는 무승부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투의 직접적 결과가 어찌 되었건, 오토만은 다시 끌고올 군사력과 재정이 충분했지만, 세르비아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Stefan은 터키에 충성을 서약하고 오토만의 봉신Vassal이 됐다.  특히 스테판은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 주도 십자군을 1396년 니코폴리스Nicopolis (오늘날 불가리아의 Nikopol)에서 격퇴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민족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자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신화로 격상된다.

라자르가 코소보에서 결전을 벌이기 전 날, 그는 선지자 엘리야Elias의 계시를 받는다. 엘리야는 라자르에게 묻는다.  천상의 왕국 Heavenly Kingdom을 원하는지 아니면 땅위의 왕국 Earthly Kingdom을 원하는지. 땅위의 왕국을 원한다면, 내일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지만, 언젠가는 망할 것이고, 천상의 왕국을 원한다면 내일 전투에서 지고 전사하더라도, 천국에서 하늘의 왕국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에 라자르는 천상의 왕국을 선택하고 나아가 장렬히 전사를 했다는 이야기. 이 찬란한 정신승리의 전설로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천상의 민족 heavenly people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최근에도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민족에게 백두산을 통째로 외국에 넘기라는 것과 비슷한 감정적 무게라고나 할까.

후세 학자들은 이 신화의 구조가 금도끼 은도끼 예수의 고난과도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세르비아 민족의 부활이다. 19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맞아 이 신화는 더욱 확대재생산되면서 대大대세르비아의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 베오그라드 연고 축구팀 츠르베나 즈베즈다Crvena Zvezda 축구경기에 등장한 1389 코소보 머플러

전투가 있었던 6월 28일은 세르비아 정교 축일인 Vidovdan(Saint Vitus Day)이다. 이 날에는 이 극적인 민족에게 유난히도 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1389년 코소보 전투를 필두로, 1914년 1차대전의 발화점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저격사건도 이날 일어 났다. 뿐인가 티토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는 1948년 6월 28일 스탈린 주도 코민포름에서 축출됐다. 가장 최근 1989년 이 날에는 밀로세비치가 코소보 들판에서 전투 600주년 기념연설을 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촉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