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사회문제의 하나는 집시들의 앵벌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집시들의 구걸이야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런 일들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앵벌이가 산업화되자 당연히 인신매매, 아동학대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집시들이 많이 모여사는 구유고 지역이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리가 없다
이 문제를 작심하고 들여다본 유고 영화가 '수호천사'Anđeo čuvar(1987)다.
스토리는 이렇다. 영화의 초두는 집시 마을 상공에서 천천히 마을, 특히 주인공 집시네 집으로 하강하는 부감샷으로 시작한다. 그야말로 수호천사의 하강을 보여주는 샷이다. 그럼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신문기자 드라간Dragan은 집시들의 인신매매 현황을 취재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집시아이들 중에서 샤인Šajn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사회사업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악(아코디온)에 재능이 있다는데, 다년간의 학대를 겪은 탓인지 맘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신문기자 드라간Dragan. 1936년생 마케도니아 출신의 류비샤 사마르지치Ljubiša Samardžić가 역할을 맡았다. 슬라브인 답게 2m에 가까운 장신이다. 덕분에 상대역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훨씬 작아보인다.
샤인Šajn 역할을 맡은 야쿱 암지치Jakup Amzić.이상한 일은 집시들은 주연을 맡아도 영화배우를 업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영화 속의 이 아이는 지금은 30대 후반 나이가 됐을 텐데, 후속작도 없고 뭐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샤인을 집으로 보내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한 드라간. 잘 사는지 집시 마을을 방문해 보기로 한다. 갔더니 왠 걸. 경제력 제로 아빠가 다시 샤인을 '조직'에 팔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도 얼마전에 죽고.. 기왕에 돋은 궁금증/측은지심으로 드라간은 베니스까지 샤인을 찾아 나선다.
이런 애 본 적있니? 당연히 애들은 모르쇠.
드라간은 천신만고 끝에 경찰에게 잡힌 샤인을 다시 찾아낸다. 밥(+술)도 사주고 놀이동산도 같이 가주는 드라간에게 샤인은 마음을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드라간의 자동차 뒷자석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샤인. 창녀로 일하는 같은 처지의 집시소녀다.
계속되는 '조직'의 학대를 참지 못한 샤인, 결국 드라간과 같이 세르비아로 도망친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사회시설에 샤인을 의탁할 생각을 하던 드라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샤인은 참지못하고 몰래 고향집으로 간다.
다시금 샤인을 찾으러 집시마을을 방문한 드라간. 그런데 샤인의 태도가 영 삐딱하다. 알아보니, 아빠는 감옥에 갔고 어린 동생들만 집에 남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샤인의 분노는 왜 드라간이 엄마의 죽음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냐는 데서 비롯된다. 집안을 챙기기 위해서는 다시 이태리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샤인의 퉁명스런 대답이다.
샤인의 쌀쌀한 태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드라간의 '영업 방해' 사실을 알아챈 '조직'이 나선 것이다. 결국 드라간은 마을에서 '조직'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영화는 결국 '수호천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람객에게 던진다. 드라간의 선의는 무시할 수 없지만, 그가 샤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아원에 의탁하는 것 뿐이다. '조직'의 작태는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샤인의 동생들은 연명할 건덕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란 선의로 샤인을 구하려다 목숨까지 잃은 드라간인가? 아니면 인륜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집시들에게 살 구석을 마련해주는 '조직'인가? 물론 영화는 질문만 할 뿐. 대답은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가 나오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는 앞서 소개한 '깃털수집상'이 나온 60년대와는 상당히 판이한 상태에 있었다. 티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민족주의가 사회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던 때다. 여느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서도 개방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시들의 앵벌이가 고질화되던 시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성조지의 날'Đurđevdan 축제일에 집시들이 냇가에서 몸을 씻는다. 아무리 무법해 보여도 집시들 나름의 사회적 질서와 제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집어 넣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샷에는 쓰레기 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드라간의 모습도 비춘다. 구유고 집시음악의 거두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이 영화에서 샤인의 아빠 역할을 맡고, 메인테마Sajbija까지 불렀다.
이 같은 문제는 EU가 들어선 오늘날이라고 특별한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집시들이 많은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까지 EU로 가입한 만큼, 집시들의 휴먼 트래피킹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간 듯 하다. EU가 풀어야할 난제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다수 집시영화들이 나와서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다. 1967년작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은 깐느 그랑쁘리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역시 집시들을 소재로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1989)으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것 말고도 Anđeo Čuvar(1987), Crna Mačka Beli Mačor(1998), Ciganska Magija(1998) 등 (구)유고산 집시 영화는 허다하고 반향도 크다.
평론가들은 이들 영화가 집시를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외부자의 시각으로 외부자를 위해 만들어진 집시 영화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영화들에 대해서는 서구 중심부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라는 비난도 있다.
어떻게 보면 주변부의 비애다. 우리나라도 해외에서 각광을 받으려면, '만다라', '서편제'처럼 서구의 이국취향을 살려주거나 아니면 '섬', '올드보이'처럼 폭력적으로 충격적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어찌 됐건 집시들을 서커스 곰처럼 부린 것도 아닌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랴.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유고슬라비아처럼 내부사회 문제를 까밝힌 나라도 많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줘야 한다.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는 집시들이 직접 만들면 된다.
유고슬라비아 영화를 세계무대에 제대로 선보인 첫번째 영화가 바로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영어로 Feather Gatherers)이다. 영어 제목은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I Even Met Happy Gypsies)다. 왜 이런 차이가? Feather Gatherers라는 직업 자체가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네'는 집시들의 송가 젤렘 젤렘Djelem Djelem에 나오는 가사의 한 구절이다. (젤렘 젤렘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영화 포스터.
영화 내용은 이렇다. 물론 스포일러 주의다.
무대는 보이보디나Vojvodina. 예전에 헝가리 땅이었다가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에 귀속된 지역이다. 세르비아 말고도 다양한 민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는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 세르비아어 말고도 헝가리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때문에 세르비아에서도 자막없이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주인공인 집시 보라Bora는 인근 농가로부터 거위 깃털을 수집해서 파는 장사꾼이다. 젊고 힘도 세다보니 술-도박-여색의 3박자에 거칠 것이 없다. 이미 자기보다 연상의 마누라가 있지만, 나쁜남자답게 대드는 마누라에게는 구타가 약이다.
보라. 짐승남이라고 이마에 쓰여있다.
보라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시 처녀 티사Tisa를 좋아한다. 동업을 하는 미르타Mirta의 의붓딸이다.
보라가 좋아하는 티사. 실제 집시인 고르다나 요바노비치Gordana Jovanović가 맡았다. 영화를 찍을 때까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티사는 관습과 부모의 주선에 따라 동네 어린애에게 시집가지만, 신랑이 너무 어린 바람에 합방에 실패. 결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보라는 이 때다 싶어 미르타에게 티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하지만 미르타는 이를 거절한다. 왜냐. 그 스스로가 티사한테 흑심이 있었거든.
딸을 다오. 싫다 새꺄.
아니나 다를까. 티사를 겁탈하려던 미르타, 마누라가 말린 덕에 미수에 그친다. 티사는 도망과 곡절 끝에 보라와 만나 교회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빡친 미르타, 보라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그 사이 티사는 보라의 마누라가 준 돈으로 베오그라드로 도망갔다가 이도 저도 못하고 거리에서 겁탈만 당한채 결국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온다.
티사를 찾아다니던 보라, 티사가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복수에 나선다. 깃털 수북한 작업장에서 만난 두 사람. 격투 끝에 미르타는 죽고, 보라는 도망에 나선다. 마지막 장면은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이 집시 마을에서 보라를 탐문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집시들은 공권력의 사법정의 구현노력에 대해서는 시종 모르쇠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일곱살 쯤 되보이는 집시 뽀이가 담배를 피면서 탐문 중인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을 노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여기는 신경 끄는 게 좋아'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영화감독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Aleksandar Petrović는 당시 유고 영화계 블랙 웨이브의 기수였다. 티토 스스로가 영화광이다 보니 영화산업을 적극 후원했다. 덕분에, 유고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배달의 기수'류의 영화가 판을 쳤다. 페트로비치는 이 같은 조류에서 벗어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사람이다.
주연배우로 보라 역을 맡았던 사람이 유고산 국제스타 1호 베킴 페흐미유Bekim Fehmiu다.
추레한 모습을 벗어던진 베킴 페흐미유. 초기 헐리우드 진출작으로 캔디스 버겐Candice Bergen과 공연한 Adventurers(1970) 만 안 망했어도,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질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시가 아니라 코소보 알바니아계인 이 사람은 이 영화를 통해 국제적 스타덤에 올랐다. 그런데 이 양반, 잘 살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자 베오그라드에서 사는 것이 불편해졌다. 1987년 결국 민족주의 정책에 대한 항의표시로 연극 공연 도중에 무대를 박차고 나간 뒤, 다시는 배우로 복귀하지 않았다. 2001년 잠깐 인터뷰에서 드러난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에 대한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은둔생활을 지속하다가 2010년 76세의 나이에 베오그라드 자택에서 권총자살을 택한다. 아내에게 적어놓은 편지에서 그는 '암만 생각해도 인생이 의미가 없어서...'라고 적었다. 정치가 애꿎은 사람 하나 잡은 셈이다.
1951년생의 또다른 주연 고르다나 요바노비치는 그 이후 딱히 출연작이 많지 않다. IMDB에서는 '수호천사'에서도 출연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1967년 그러니까 이팔청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만 보여주고 주섬주섬 사라졌다. 1999년에 죽었으니 오십이 채 안된 나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에는 가정폭력, 구타, 도벽, 주벽, 제도에 대한 거부 등 집시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가운데 영화제목을 '행복한 집시들 만났네'라고 붙였으니, 참 역설적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60년대는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전성기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미국-소련한테도 꿀리지 않는 정치적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 거칠 것 없는 유고슬라비아에 어떤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집시들의 앤썸, 젤렘 젤렘은 환청과도 같이 지속된다.
영화 속의 젤렘 젤렘 노래부르는 장면. 집시 여가수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르는 올리베라 카타리나Olivera Katarina는 당시 유고 최고의 (섹시) 스타였다. 베킴 페흐미유의 자기파괴적 야성미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2차대전을 맞아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발칸지역 역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독일 나찌 점령군은 집시와 세르비아인들을 개잡듯 잡았다. 2차 대전 중 유태인들은 6백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집시들에게는 그 수를 헤아려 줄 사람도 없다.
이 같은 참상은 결국 스스로가 정치세력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집시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을까.
세르비아의 집시 쟈르코 요바노비치Žarko Jovanović는 2차대전을 맞아 일족의 대부분을 수용소에 잃었다. 티토의 빨치산에 합류하여 목숨을 보전한 쟈르코는 1964년 파리로 이주한다. 그는 1971년 세계최초로 런던에서 전세계집시회의Romani Congress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78년 2차 제네바 회의 당시에는 '문화부 장관'에 추대됐다. 스스로는 일국의 장관이 아니라 전세계 (집시들의) 장관이니 훨씬 격이 높다고 주장했다.
1971년 회의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집시깃발이 공인되고, 더 나아가 쟈르코 요바노비치가 만든 집시들의 앤썸, 젤렘 젤렘Đelem Đelem(이것도 지역마다 고유한 표기 방식에 따라 Djelem Djelem, Gelem Gelem, Jelem Jelem, Dzelem Dzelem 등 허다한 방식으로 표기)이 채택됐다는 것이다. 이제 국기國旗에 국가國歌가 생겼으니, 모든 게 거의 이뤄졌다. 국가國家만 만들면 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집시들의 깃발. 깃발 정중앙에 인도에서 모티브를 따 온 바퀴문양이 그려져 있다. 원래 만들어진 것은 2차 대전 전의 일인데, 1971년에서야 전세계 집시들에게 공인됐다고 한다.
젤렘 젤렘. '간다 간다' 또는 '유랑한다'라는 뜻의 로마니어 단어라고 한다. 원래 있던 멜로디에 요바노비치가 가사를 붙였다. 집시 가수 또는 밴드들 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민족가, 국가 또는 앤썸이라고 한다면 집단의 뜻을 담은 힘찬 노래여야겠지만, 이 노래에는 오히려 슬픔과 우수가 서려 있다. 국가로써는 부적격이다.
쟈르코 요바노비치가 직접 부른 젤렘 젤렘. 요바노비치는 파리에서 발랄라이카(러시아 3현악기) 연주자로 활약했다. 원래는 '일어서라 집시여'Opre Roma라는 보다 선동적인 제목을 붙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먼 길을 가다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네. 어디서 오는가 집시여. 텐트를 짊어지고 행복하게 길을 가네.... 내 원래 가족이 있었으나, 검은 군단이 잡아 죽였다네. 가자, 전세계 집시들이여. 집시들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네. 일어나라 집시여. 지금 행동한다면 더 높게 일어서리.."
검은 군단Black Legion이 가족을 죽였다는 내용은 요바노비치의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나온 것이다. 나찌 친위대,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모두 검은 색 옷을 유니폼으로 입었거든. 2차대전 당시를 생각하면 집시들에게는 상당히 보편적 호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집시들이 반드시 이 가사에 천착하고 있지는 않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젤렘 젤렘 만큼은 집시들의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세르비아의 집시뮤직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쏘울풀하게 부른 젤렘 젤렘. 가사는 첫소절을 제외하고는 요바노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목소리에 곁들여 나오는 화면은 1987년 유고 영화 '수호천사'Anđeo Čuvar의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동유럽 집시의 본산 루마니아에서 집시들이 정당도 결성하고 케이블 채널도 보유하고 있다고들 한다. 합목적적 정치 활동을 집시들이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 붕괴 이후 최근의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와는 달라지지 않겠는가를 조심스럽게 점쳐보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큰것도 사실이다.
세르비아나 마케도니아에서 집시 뮤지션들이 크게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나머지 나라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기 앞가림이 급하다 보니, 집시들에게까지 돌아갈 에너지와 신경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서구 선진국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도찐개찐 아닐까 추론해본다.
보스니아 투즐라에서 본 노래하는 집시. 어린나이지만 보스니아의 오랜 장르음악인 세브다흐를 곧잘 소화했다. 집시들에게 동냥과 거리공연 사이의 경계는 상당히 불투명하다. 무반주인데다 자세로 보아 아무래도 동냥이라고 봐야할 듯....
집시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또는 집시들을 어떻게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편입시킬 것인가. 구유고 연방 출신 나라들에서는 쉽지 않은 문제인듯 하다.
발칸이 순수한 민족공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남슬라브계가 주류를 이루는 구유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도 블라흐Vlach, 몰락Morlach 등의 연원을 알기 어려운 종족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소수민족이 있다면 집시들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시를 '낭만적으로' 그린 서구의 문학, 음악, 미술 작품들이 많이 소개됐고, '집시여인' 등과 같은 노래가 히트를 하기도 해서 집시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실제로 이들을 맞부닥치고 보면 '꾀죄죄'라는 단어가 머리속 단어창에 뜬다. 신호 대기중인 자동차 앞에서 구걸하거나,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앞유리창을 닦는 집시들을 보면 남루 그자체다.
발칸에서 집시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터키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롬Rom, 로마Roma로 부른다. 집시 말로는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구유고 지역에서는 이들을 찌가니Cigani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독일의 찌고이네르Zigeuner와도 어원이 똑같다. 불가촉Untouchable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1906년 경 세르비아의 집시 가족. Augustus Sherman이 찍은 사진이다.
현재 서유럽에 비해서는 동유럽이 집시인구 비중이 높고, 동유럽에서 집시들이 가장 많은 나라는 루마니아다. 그럼 구유고 지역은? 센서스 상으로 합쳐놓으면 30만 정도 사는 것 같은데, 이들이 워낙 제도를 등지고 살고 있다보니, 실제 인구는 이것보다 몇배는 크지 않을까 생각들 하고 있다. 구유고 연방 중에서는 세르비아가 가장 많은 집시인구(센서스 인구로 10만 이상)를 보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Romani people by country 참조]
구유고를 포함해서 발칸에서 집시들이 많다는 사실은 발칸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 만큼 사회가 빈틈이 많다는 것, 집시를 포함한 사회생태계가 있다는 것, 비록 천대는 하지만 나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 집시 종족은 주로 오토만 터키 지배 하에서 가장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맡아주는 해결사로 살아왔다. 특히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 끝이 뾰족한 장대를 인간의 항문에 집어 넣어 척추나 내장을 흟고 들어가는 이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주로 집시들의 몫이었다.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는 이 장면이 소상히 소개된다.
이 외에도 대장장이, 신발장이 등 소소한 공예 등을 생업의 기반으로 삼았고, 말 사육, 거위 치기 등이 주요한 수입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런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선 지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쓰레기 처리 등이 주요 직종으로 변한 듯 하다. 자그레브에서는 집집 마다 폐가구 등 크고 무거운 고형폐기물을 한꺼번에 집밖에 내 놓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 없이 집시들이 나타나서 어디론가 물건들을 실어간다. 아예 쓰레기 하치장이 주거지역으로 변한 경우도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집시들이 인근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집시 브라스 밴드인 팡파레 쵸카를리야Fanfare Ciocarlia의 경우, 독일 음반 제작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인근 섬유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실제로 세르비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따르면, 집시들이 사회적인 고정관념(도둑질, 나태 등)과 달리 일을 곧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도시에서 구걸에 나선 집시들도 많다. 아동들을 이용한 앵벌이가 거의 (수출)산업수준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한 인신매매 등이 집시들이 많은 나라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바 있다. 집시들을 어떻게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할 것인가는 구유고 및 발칸 지역의 주요한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집시하면 음악이다. 집시가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직종이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음악계에는 재즈 전설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t를 비롯해서 집시출신 기라성들이 배출됐고, 이들 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덕션 하우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길거리 밴드로 특화한다.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지에서는 집시들을 천대하면서도 집시의 음악에 대해서는 이를 자신의 음악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날 구유고 지역에서 집시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세르비아의 사진기자 Ivan Aleksic 참조.]
1940년대 찍은 발칸 집시 밴드의 모습. 관악기가 오토만 군악대가 쓰다버린 쓰던 터키식 나팔 Zurna이다. 이게 나중에는 서양 목.금관악기로 바뀐다.
어쨌거나 신기한 것은 이리 깨지고 저리 쫓겨다녀도, 집시들은 아직도 자기 언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풀들이 이 바람에 휩쓸리고 저 물에 쓸려나가면서도 지천에 깔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만약 어느 민족이든 생존이 지상과제라고 한다면, 이 특이한 민족 역시 역사의 승자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기 나라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그들 스스로는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없고, 뭘 빼았겼다는 억하심정으로 다른 민족을 곤란케하는 법도 없다. 기록하는 버릇이 없는 이들 입장에서는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낭만화하기 딱 좋지만, 이 역시 이들의 비참함을 생각하면 속없는 생각이다.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정확한 지리적 경계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드리아해, 에게해 등을 포함한 지중해, 흑해를 3면으로 해서 소챠Soča, Vipava비파바, 크르카Krka, 사바Sava, 다뉴브Danube 강을 경계로한 광대한 지역을 발칸이라고 칭하거나 사바, 다뉴브를 제외한 다른 강들이 들어서서 발칸을 구획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더불어 발칸국가Balkans라는 말도 있다. 발칸반도에 들어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또 다시 위키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불가리아, 그리스를 기본으로 해서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를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한다.
발칸이라는 명칭 자체가 터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9세기 근대 유럽에 있어서 발칸은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도 문명권 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를 의미했다. 19세기 유럽의 문명(!)국들은 발칸을 쇠락하는 터키 제국의 무능, 부패와 결부시키면서 그 인식 자체를 유럽 문명의 안티테제로 부각시켰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속에서도 보스니아로 발령난 오스트리아 영사의 부인이 왜 자신이 '아시아'로 가야하냐면서 속상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디트 더햄Edith Durham이라고 20세기 초 발칸반도를 여행한 작가는 유럽인들의 인식을 이렇게 정리했다. 발칸에서 무슬림이 무슬림을 죽이면 잘된 일이고,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죽이면 폭정이자 탄압이고,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죽이면 숭고한 독립투쟁이었다고... 이 같은 편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같은 인식이 팽배하다보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발칸국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이다. 이 두 나라는 스스로의 소속처를 숭고한 중앙유럽Central Europe(!)으로 본다. 중앙유럽이 어디인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다. 세르비아는 스스로를 발칸반도 국가로 인정을 하지만, 자신은 이슬람을 극복하고 이겨낸 기독교 문명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인기있는 철학자(?)인 슬라보이 지젝은 이런 현상을 '모든 나라가 발칸을 필요로 한다Every Country Needs Balkans'고 정리한다. 이태리나 오스트리아 같은 서구 선진국들 눈에는 발칸은 슬로베니아부터 시작해서 터키까지 이르는 부분이고, 슬로베니아는 크로아티아에서부터 발칸이 시작한다고 본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같은 무슬림들이 문제라고 본다는 것. (이슬람 = 테러리즘)
결국 발칸이란 말은 되고 싶지 않은 타자, 박멸해야할 외적, 반문명, 비문명과 결부되어 사용되는 예가 많았고, 그 탓에 유럽에서는 공식적 외교문서에서 발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이보다 훨씬 가치 중립적인 남동유럽 Southeastern Europe이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그런지 구유고 국가들 저마다 동쪽의 이웃 나라를 '발칸'으로 얕잡아 보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알게된 크로아티아에 시집온지 10년이 되가는 마케도니아 색씨는 완벽한 크로아티아어를 구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엘리트지만, 크로아티아 정부나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마케도니아인은 그럴 자격이 부족하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슬로베니아 최대 유통체인인 메르카토르Mercator가 도산지경에 이르렀던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 최대기업으로 유통체인이자 식품가공업체인 아그로콜Agrokor가 인수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번번히 최종단계에서 무산됐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토종 국내최대기업이 크로아티아 기업에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2012년 만난 슬로베니아 유통업체 인사에게 이와 관련해서 의견을 물어봤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고 했지만, 태도나 언사로 봤을 때 딱 받은 인상은 '머슴이 어디 안방을 들어와?'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사실 발칸에서만 일어나고 있나? 사람사는 데가 어딘들 다르겠나. 어쩌다 알게된 세계은행 컨트리 매니저와 부부동반 식사(부부가 한국인)를 하는데, 아프리카 출신 월드뱅크 직원들이 한국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월드뱅크 명함달고 다녀도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 1997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인도 출신 IMF 직원과 같이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인도 사람이 제나라나 잘 건사할 것이지 뭣하러 한국에 왔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란다. 그 뿐인가 안산 같은 데서 사는 외국인근로자들에게는 온갖 멸시가 쏟아지고, 웹에서는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데마고그도 한참이다. 최근에는 한동안 호남사람들에 대한 멸시 버릇이 점차 다른 나라나 조선족으로 비화하는 느낌이다.
비단 우리 뿐이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수태 죽어나간 이야기도 결국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근거없는 소문 때문이었고, 기독교 문명권이 유태인을 대대로 이지메하고 핍박했던 것도 유태인들이 애를 잡아먹는다는 둥,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둥의 편집증 때문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