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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7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8 : 사라진 민족의 노래

옛날의 유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무슬림, 집시들 뿐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유태인들도 수백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발칸반도에 유태인들이 흘러 들어온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다. 일찍부터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유태인 본거지가 만들어지고, 보스니아나 세르비아를 남슬라브족보다 먼저 왔던 침입자들 중에서도 유태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태인 집단이 발칸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의 일이다.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력에 축출되면서, 도매급으로 유태인들도 같이 쫓겨났다. 당시 관용이라고는 전혀없었던 기독교인들에게 몰려난 유태인들을 받아준 것은 오토만 터키였고 그들 중의 일부가 보스니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몰려온 유태인들은 세파르딤Sephardim 계열로 스페인어 버캐뷸러리의 영향을 받은 라디노Ladino를 썼다.

1918년 경, 보스니아에 살던 세파르딤 계열의 유태인 여성 (출처 : Journey East)

17세기에는 세파르딤과 양대계열을 이루던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태인들이 보스니아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잃어버린던 때이다. 아쉬케나짐들의 언어는 라디노와는 전혀 딴판인 이디쉬Yeedish다. 언어 탓이었는지 양대 세력이 같은 신을 같은 방식으로 믿었지만, 정작 보스니아에서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보스니아에서의 유태인들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단순한 숫자를 능가했다. 무엇보다 상업민족으로서 항상 부를 축적해왔다는 것도 있지만, 유럽 각지에 퍼진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로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의약, 외교 분야의 지식으로 보스니아의 총독이나 토호들의 자문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근동식 전제군주 체제 하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항상 자의적이기 쉬운 행정관이나 총독의 불알을 잡아놓지 않을 경우 뒷탈이 있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초 한때 변학도 같은 오토만 총독이 트라브닉에서 유태인 부자들을 붙잡아서 평양감사식으로 털어먹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무슬림들이 집단봉기를 일으켜서 즉각 석방을 요구하자, 총독이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슬림들이 굳이 유태인들을 선호해서라기 보다는, 이에는 외지인 총독과 보스니아 토종 무슬림들 간의 권력갈등이 중첩되어 있었지만, 어쨌던 다민족 사회로 살아가던 보스니아의 내부사정이 이런 식으로도 풀릴 수 있었다.

난리가 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유태인들은 언제나 이웃민족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차 대전을 맞아 히틀러가 폭주하면서 발칸에서 이런 감초같은 매개자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보스니아 3대 마초 민족 간의 관계도 팍팍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이런 보스니아에서 얼마전부터 Arkul이라는 2인조 밴드가 결성되어 오래된 세파르딤 유태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오늘날 보스니아에서 쓰는 사람이 500명 남짓하다는 라디노어로... 뭔가 스페인스러운 어투로 부르는 노래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노랫말에 나오는 Te kero는 스페인어로 Te Quiero와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같은 것을 알겠다.  라이너 노트에 나온 가사를 보면 이런 저런 일상적인 차제에 부른 노래인듯 싶다. 세브다흐와 같은 절절한 내러티브는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내가 이쪽 방면으로 과문한 탓에 뭐라고 말하긴 어렵다. 곡조는 중근동 색채가 스레인의 플라멩코 만큼은 완연하다. 세브다흐와의 상호영향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듣자니 세브다흐 대표곡 중의 하나인 '내가 벰바슈를 지날 때'Kad ja pođoh na Bebmašu가 세파르딤 민요곡조에 남슬라브어 가사를 붙인 것이라고 하니 이들의 조우를 허투로 볼 것은 아닌 듯 하다.

2집 타이틀곡, Il bastidor. 비디오 트레일러에 나오는 아트워크는 보컬 블라디미르와 그 동생 요십이 같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라이너 노트에도 삽입되어 있다. 가사의 뜻은 금요일날은 뭐하고, 안식일(토요일) 날에는 뭐하고 일요일 날은 뭐하고... 식이다. 주부가 부르는 노동요라고 봐야할 듯 하다.

그 멤버, 블라디미르 미츠코비치Vladimir Mićković(보컬)와 아틸라 악소이Atilla Aksoj(어쿠스틱 기타)는 모두 모스타르 출신이다. 그 덕이었는지 Mostar Sevdah Reunion 등 현지 뮤지션들과 가깝고, 최근에는 그들의 앨범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보컬의 목소리가 여리고 톤이 높은데, 라틴계열의 부드러운 언어에 워낙에 유태인들이 겪었던 간난과 신고가 겹친 탓인지, 노래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하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진다. 내가 듣기에 그냥 안쓰러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청승맞게 불러야 제맛인 노래들인가.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7 : Mother of Gypsy Soul

릴랴나 부틀레르 페트로비치Ljiljana Buttler Petrović. 보스니아산 구유고의 가수로 대스타라고 부르기는 조금 모자란다. 본령은 집시뮤직이지만, 세브다흐도 능통하다. 에트노 뮤지션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로컬 카페 가수다.

1944년 아코디온 주자 집시 아빠 가수 크로아티아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아빠가 도망가고, 보스니아 로컬 카페에서 가수로 일하는 엄마 슬하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아파서, 대신 나가서 노래를 부른 것이 그대로 데뷔로 연결됐다. 그러다 편모로서의 삶이 고됬던지 엄마도 도망가버리고, 여사는 십대 나이에 홀홀 단신으로 남게 된다. 카페 가수로 살면서 어쩌다 하게 된 임신 끝에 첫 애를 낳았을 때가 14살 때라고 하니까, 초장부터 곡절이 많은 인생이다.

83년 발표작 커버에 실린 릴랴나 여사. 부틀레르라는 성을 붙이기 전의 모습이다. 언뜻 동양인 같은 인상도 있는데 어찌보면 강부자 여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70년대 들어 가수로 인정받게 되고 음반을 내면서 집시 뮤지션으로 어느 정도 인기도 끌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80년대 들어와서 유고의 대중음악이 더욱 서구화되거나 민요의 대중가요화가 진행되면서, 집시음악은 구린 음악이 됐던 듯 하다. 고심 끝에 여사는 1989년 점점 개판이 되가는 유고슬라비아를 뒤로 애들을 끌고 독일로 떴다.

말해봐 왜 날 버렸는지kaži zašto me ostavi. 2005년 발표작 첫곡으로 수록된 노래다. 시골구석 카페에서 집시가수가 부르는 정경을 상상해 보면 되겠다. 스스로가 일찍부터 여러번의 버림을 받아서 그런지, 노래 속에 버려진 사람의 흉금이 절실하다. 

독일이라는 이름의 타향, 한물간 여가수를 알아줄 사람은 없다. 전혀 유고스럽지 않은 이름 부틀레르Buttler는 독일에서 얻은 성이다. 영주권을 얻고자 위장결혼한 결과라고 한다. 유고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으로, 호텔 청소부 등 허드렛일로 호구했다.

이러던 그녀를 다시금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의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다. 어느날 우연히 옛날 레코드를 듣다가 삘받았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은퇴 여가수. 한번 다시 해보자는 프로듀서. 여사는 망설였다고 한다.

2002년 보스니아로 돌아와서 낸 앨범이 Mother of Gypsy Soul. 반응이 좋았다. 2005년 다시금 판을 냈다. Legends of Life라는 이름으로. 첫판이 몸이 덜풀린 서먹한 기가 있다면, 2005년판은 가수로서의 워밍업이 끝난 그야말로 완숙한 '작품'이 됐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맘에 드는 앨범이다.

또다른 2차 복귀작 수록곡. 나는 작은 집시소녀Ciganka sam mala. 여사가 '밤새워 노래부르고 춤추는 나는 당신의 작은 집시소녀...'의 생활을 살았으니 이런 해석이 나온다. 원래는 업템포의 곡인데 여사는 미드템포로 불렀다. 노래의 이면에 남을 즐겁게 해야하는 집시 여가수의 신산한 삶이 읽힌다.

릴랴나 여사의 매력은 낮은 중저음, 인생의 곡절이 베어있는 속깊은 노래들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버림받고 카페가수로 살다보니, 여사에게는 예술가나 인기가수로서의 고아한 자의식이 없다. 그런만큼 내려 놓고 불러서 그런가. 여사의 노래는 가식없고 진솔하다. 달관이랄까 체념이랄까. 전반적으로 고달픈 인생에 맞춰진 노래들이다. 그래서 붙었을 것이다. 집시 쏘울의 대모라는 별명도.

이 양반,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인생 좀 피나 싶었는데, 아쉽게도 2009년 예순 다섯에 돌아가셨다. 아쉬울 뿐이다. 고생 많으셨다. 편히 쉬시라.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구유고의 음악 16 : 슐라게르 또는 샨손 - Adult Contemporary 장르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서구식 어덜트 컨템포러리 장르도 번성했다. 보통 슐라게르Šlager 또는 샨손Šanson이라고도 일컫기도 한다. 샨손은 프랑스의 샹송에서 온 건 알겠는데, 슐라게르는? 독일어의 Schlager다. 뭔가 찾아봤더니 Hit라는 뜻이란다. 히트송, 한마디로 유행가 되겠는데, 주로 서구형 발라드 또는 어덜트 컨템포러리물들이다. 이 장르에서 유고를 대표하는 인사라고 한다면 크로아티아의 아르센 데디치Arsen Dedić, 드라고 디클리치Drago Diklić에서 부터 세르비아의 조르제 발라셰비치Đorđe Balašević 등이 주옥같은 발라드를 많이 만들었다. 누구는 슐라게르, 누구는 샹송, 누구는 칸쪼네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노래를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짠한 노래는 드라간 스토이니치Dragan Stojnić가 부른 '내맘은 또다시 너만을 꿈꾼다'I opet mi duša sve o tebi sanja다. 보스니아 대시인의 알렉샤 산티치가 지은 시 3수를 교묘히 섞어서 하나의 노래로 만들었다. 알렉사 샨티치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 수작으로, 가사를 음미할 수 있다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왼편이 노래를 부른 스토이니치, 오른편이 본의아닌 작사가 알렉사 샨티치. 원래는 90년대 초에 방영된 TV시리즈 '내 형제 알렉사'Moj brat Aleksa 수록곡이다 . 스토이니치는 불어를 전공해서 주로 샹송 장르를 소화한 발라드 가수다. 샨티치와 같이 보스니아 출신이다.

I opet mi duša sve o tebi sanja
I kida mi srce i za tobom gine.

Što te nema , što te nema , što te nema

Bog zna gdje si sada i da l' živiš jošte!
Ali dragi spomen negdanje milošte
Kao mlado sunce svu mi dušu moju grije

I ja snova cujem zveket tvojih grivna,
Po licu me tice tvoja kosa divna,
Dok mjesec kroz vrbu cisto srebro lije.

Što te nema , što te nema , što te nema

내 맘은 또다시 너만을 꿈꾼다
단장은 끊어지고 너는 더욱 생각나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네가 어딨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언젠가 아름다웠던 너와의 기억이
마치 젊은 태양처럼 나의 마음을 달군다

꿈속에서 너의 팔찌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내 얼굴엔 당신의 풍성한 머리결이 닿고
달은 버드나무 새로 순결한 은빛을 쏟는다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가사만 본다면 닳고 닳은 유행가겠지만, 이 시가 나온 때는 100년 전 보스니아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내 얼굴에 니 머리결 닿듯이' 훨씬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지켜보면 이런 정조는 보스니아 시가Sevdah의 전통에 이미 잘 살아 있었다. 샨티치가 접하고 살았던 무슬림들의 러브송들의 가사에는 사랑에 대한 찬미, 못이뤄진 사랑에 대한 절망, 예상외의 외설까지 사랑과 관련된 풀 스펙트럼이 들어있다. 샨티치는 그것을 자신만의 '근대'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발라드 장르가 주로 이런 알캉달캉/씁쓸짭쪼롬한 사랑 이야기를 재생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조르제 발라셰비치의 88년 발표작 부른 레퀴엠Rekvijum은 재미있는 예다. 이 노래는 80년대 말 각 공화국내 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어지러워진 사회상황을 마치 티토에게 일러바치듯 불러낸 노래다. 이 노래는 유고슬라비아의 파국가 불안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아니면 당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로 꺼낸 것이 그였을 수도 있겠다.

조르제 발라셰비치의 시대만가Rekvijum. 발라셰비치는 90년대에도 반전, 정치비판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했지만,  권력이 장악한 방송계가 노래를 틀어주지 않는 바람에 한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의 노랫말에도 등장하지만, '씹X 90년대'jebite se devedesete가 아닐 수 없었다.
Kad god prođem ulicom sa tvojim imenom
Pomislim na onu pesmu...
Već je godinama ne pevam,
Stari refren nikom ne treba.

A ljudi pesme kratko pamte, Komandante...

Ostaće u knjigama i priča o nama:
Balkan krajem jednog veka.
Svako pleme crta granicu.
Svi bi hteli svoju stranicu...

Tope se snovi kao sante, ej Komandante...

Na barikadama su opet zastave,
Svet ide k'o na praznike.
I decu izvode s jutarnje nastave
Da vide gladne radnike...

A gde smo mi, naivni,
Što smo se dizali na "Hej Sloveni"?
Kao da smo uz tu priču izmišljeni...

Vremena su nezgodna za momka kao ja
Koji gleda svoja posla...
Nisam lutak da me naviju.
Imam samo Jugoslaviju...

Sve druge baklje bez mene plamte, e Komandante...

I svi su tu da dobiju na toj lutriji...
Na barikadama su uvek najbrži,
Al' nikad i najmudriji.

A gde smo mi, naivni,
Što smo se dizali na "Hej Sloveni"?
Kao da smo uz tu priču izmišljeni...

I prevareni...

Kad god prođem ulicom sa tvojim imenom
Pomislim na Panta rei...
Baciće se, tako, neki lik
Kamenom i na tvoj spomenik.

Jer sve se menja, i sve teče... čoveče.
Jer sve se menja, i sve teče... čoveče.

당신 이름이 걸린 거리를 걸을 때 마다
그 노래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부르지 않은지도 꽤 오래
오래된 후렴구는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령관 동지, 사람들은 노래를 짧게만 기억할 뿐입니다.

책과 이야기들에는 이렇게 남을 것입니다;
발칸, 세기말을 맞아
모든 족속들이 국경을 그리고
모두가 자신만의 페이지를 원하다
마치 빙산처럼 가라앉았다고 말이지요... 사령관 동지
바리케이드에는 다시 깃발이 올라서고
모두가 마치 휴일인 듯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오전수업 마치고
배고픈 근로자들을 보고 있을 뿐...

아, 우린 어디에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헤이 슬라브여'를 부르면서 우리가 쌓아올린 것은 무엇이었나요.
마치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라도 한것 처럼

이 시대는 제 앞가림이 급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불편합니다.
나는 누가 감아줘야 움직이는 태엽인형이 아닙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나말고 모두 휏불을 들고있습니다, 사령관 동지

사람들은 일확천금의 복권에 혹하고
바리케이드에는 가장 잽싼놈들만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지요.

아, 우린 어디에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헤이 슬라브여'를 부르면서 우리가 쌓아올린 것은 무엇이었나요.

마치 없던 거짓말이라도 만들어내기라도 한것 처럼

당신 이름이 붙은 거리를 걸을 때 마다
'모든것이 흐른다'(Panta rei)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어떤 놈들은 당신의 동상에도
돌을 던질겁니다.
2014년 어느 때인가 자그레브 리신스키 극장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웬 줄을 이렇게 섰나 싶더니, 그게 발라셰비치의 콘서트 표를 구하는 줄이었다. 이 양반은 한번 콘서트를 열면 4시간이 넘는 공연으로 유명한데 그게 노래 중간 중간에 만담까지 섞어가면서 청중을 즐겁게 하기로 유명하다. 53년생이니까 이제 환갑을 넘었는데, 아직 왕성하다. 발라셰비치는 원래부터 티토를 숭모해서 젊었을 때 부터, 그에게 헌정하는 찬가를 여러곡 만든 바 있다. 아부꾼 취급을 받을 법도 한데, 이와는 관계없이 전 구유고지역에서 아직 인기가 높다.




2014년 3월 9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15: 나는 록스타 Bijelo Dugme

60년대 선구적인 밴드들의 뒤를 이어, 70년대는 록밴드들이 쏟아져 나타나기 시작했다. 팬덤도 커진 것은 물론이다. 봉황이 한마리 나오려면 닭이 천마리 있어야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록스타가 나타났다.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다.

비옐로 두그메 초기시절 모습.  중앙에 폼잡고 있는 사람이 베벡, 고란 브레고비치는 맨 왼쪽에 있다. 이 사진에서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태도다. 불량끼+쇼맨십이 넘치는 이 밴드를 전유고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비옐로 두그메는 197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5인조 밴드다. 밴드의 중심축은 아무래도 젤코 베벡Željko Bebek(45년생, 보컬)과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50년생, 기타). 베벡이 69년에 고란을 꼬셔서 이태리 등지에서 밴드활동을 하다가  74년에 비옐로 두그메로 까지 연결이 된 것이다. 

초기에 사라예보의 레이블 디스코톤Diskoton이 뻣뻣하게 나와서 자그레브의 유고톤Jugoton과 계약을 했는데, 디스코톤 입장에서는 유고 팝음악 역사상 최대의 패착을 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1974년부터 1989년 해체 때까지 비옐로 두그메가 내는 앨범들마다 적어도 기십만장씩은 팔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차분했던 유고 록 씬에서 이들은 록스타로서의 아우라와 태도로 록스타처럼 행동했던 최초의 밴드라고 할 수 있겠다.

1978년(79년?) 인민해방군 스타디움 공연 모습. 미쳐날뛰는 청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히 유고식 아레나 록이라 할 만하다. '내 자동차 뒷좌석에서' Na zadnjem sjedištu moga auta.  눈치를 챈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가사 내용도 약간 19금적 암시가 있다.

비옐로 두그메의 음악을 두고 유고의 평론가들은 '양치기 록'Pastirski rok(목가록, 전원록...)이라고들 평한다. 포크송적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데뷔 앨범을 들어보면, 딥퍼플이나 레드제플린 등의 서구 록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사의 세팅은 '시골'이다. 예컨대는 노래 가사 중에는, '당신과 놀기 위해서라면, 집도 팔고, 영혼도 팔고, 말도 팔고..(말?)', '내가 하얀단추라면... 당신과 붙어있는 것을 동네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고...', '동네에선 날 주정뱅이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어쩌라고?'...

후기로 갈수록 포크송의 영향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세팅뿐만 아니라 테마자체가 음악에 활용되는 빈도가 점점 많아진다. 이 같이 유고록의 중심점에 올라선 비옐로 두그메는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자 극복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잠들지 말아요, 그대여,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엔..'Ne spavaj, mala moja, muzika dok svira. 데뷔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딱맞는 락커빌리 넘버로, 베벡의 금속성 목소리하고도 잘 맞는듯 하다.

도시적 감성을 지향하는 후배 밴드들은 두그메의 노래들에 대해서 '가사에 양들이 나오고, 백살까지 산다는 둥'의 가사가 뭔소린질 모르겠다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사실 당대는 물론 후대의 유고 록음악에서 비옐로 두그메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아마 인기라는 척도로 비교가능한 밴드로는 세르비아의 리블랴 쵸르바Riblja Čorba를 들 수 있겠지만, 시대를 열어간 것은 아무래도 두그메로 봐야할 것 같다. (쵸르바 역시 두그메와 더불어 양치기 록으로 레이블링되기도 한다)

여느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비옐로 두그메의 활동 역시 1991년 유고 내전을 끝으로 거의 해체가 확실해 졌다. 크로아티아계 출신인 베벡은 83년에 밴드를 떠나서 솔로커리어를 추구하다가 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 살고 있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베벡이 없는 가운데 밴드를 끝까지 이끌다가, 결국  밴드 해체 후 지금은  주로 세르비아에서 활동하면서 현재는 발칸을 대표하는 뮤지션이 됐다.  


포크송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들어간 넘버로 대중적인 호응도 많이 끌어낸 비옐로 두그메 곡으로는, 역시 '성조지의 날'Đurđevdan(또는 에데를레지)을 들 수 있다. 1988년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향후 고란의 음악적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참 이때의 보컬은 알렌 이슬라모비치Alen Islamović인데, 2005년 밴드 재결성 공연인 듯 하다.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구유고 음악 14 : 유고 록의 큰형님 Indexi

유고슬라비아 록과 관련해서 80년대 뉴웨이브를 특필하는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고록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고, 뉴웨이브는 그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화산폭발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록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마치 헤비메탈은 어느 밴드가 시작했을까라는 것 만큼이나 비슷한 바보같은 소리지만, 나름 잡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바로 보스니아의 록밴드 인덱시Indexi다. 1962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2001년 해체 때까지 40년 역사를 보유한 유고록의 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바깥 문물인 록을 수용했던 얼리어댑터는 역시나 학생 층이다. 인덱시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기록한 장부라는 뜻이란다. 밴드 인덱시 역시 스스로가 '학출'임을 시사하는 강력한 징표다. 처음에는 단순히 외국 밴드의 곡을 커버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인덱시가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의 67년 자작곡 '손을 잡아요'Pružam ruke가 유고 최초의 '오센틱' 록음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역사 속에 기십명의 멤버들이 들락거렸지만, 46년 개띠 동갑내기 트리오가 가장 오래 머물면서 인덱시 음악의 뼈대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다보린 포포비치Davorin Popović(보컬), 파딜 레지치Fadil Redžić(베이스), 슬로보단 코바체비치Slobodan Kovačević(기타).

처음 연주했던 음악은 비틀즈류의 멜로디록이었는데, 이게 중기에 들어 싸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록으로까지 변모해 나갔다. 때문에 인덱시는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비조로도 지목된다. 원래 이 밴드의 건반을 맡았던 코르니예 코바치Kornelije Kovač가 독립하면서 베오그라드에서 프로그레시브밴드 코르니 그루파Korni Grupa를 만들고, 또 여기에서 보컬하던 다도 포피치Dado Popić가 자그레브에서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그룹 타임Time을 만들었으니 인덱시는 한 집안 족보의 첫페이지에 위치한 셈이다.

또 이들의 음악적 거점 사라예보는 선후배/동료가 서로 당기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70년대 어느 때 건반에 공백이 생기자 인덱시는 이웃 밴드인 프로 아르테Pro Arte와 키보디스트를 공유(?)하는 희한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사라예보에 만연한 라야(동아리) 문화가 음악계에도 침투한 것이다. 그 덕에, 유고 팝 음악계에는 '사라예보 스쿨'이 형성되고, 보스니아의 3대 수출품 중의 하나가 음반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런 타이트한 음악적 유대 속에서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 같은 유고 최초의 수퍼밴드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덱시는 한마디로 유고 록의 큰형님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장르의 시도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인덱시의 음악에는 항상 기억할 수 있는 멜로디가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인덱시는 철저한 대중음악 밴드였다. 보컬 다보린 포포비치의 미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70년대 전성기때의 음악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멜로디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1969 년 발표 대표작 '아침이면 모든게 변해있을거예요'Jutro će promijeniti sve. 연주모습을 찍은 것은 80년대 언제 쯤이 아닌가 싶다. 다 좋은 데, Flying V하고 나비 넥타이는 암만 봐도 눈에 걸린다. 이들의 삶이 서구의 Rock'n Roll Life Style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나긴 밴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식으로 발표한 앨범은 딱 두 장이다. 나름대로는 유고 록음악 시장과도 관련이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록 팬덤이 굳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의 주요 공연무대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나 가요제였다. 거기에 곡을 발표해서 입상하는 게 이들의 주요 목표였던 것이다. 음반 역시 싱글이나 EP판이 주된 매체였다. 유고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그만그만한 팝송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환경이야 어쨌건, 인덱시가 78년에 맘잡고 제작한 음반 '푸른 강물'Modra Rijeka은 이들의 음악적 열정과 욕심이 농축된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걸작이다.

80년대에는 멤버들도 나이가 들고, 지금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지키자는 수성의 멘탈리티가 강했는지 활동도 뜸해진다. 그러다 90년대 유고 내전이 터지면서 밴드가 산산이 흩어지게 됐다. 그래도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나. 사라예보가 근대 전쟁사상 최장기간의 포위를 겪게 되는 와중에도 보컬 다보린 형님은 끝내 사라예보를 떠나지 않았다. 


72 년에 발표된 '나는 꿈꾼다'Sanjam. 인덱시표 대표 발라드다. 클래식 기타 반주로 시작한 단조곡이 후렴에 들어가서 70년대 대중가요 풍 장조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원테마로 돌아올 때의 건반 트랜지션이 너무 맘에 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멤버들이 모여서 1999년 두번째 앨범 '돌꽃'Kameni Cvijet를 발표했다. 물론 전성기를 지나 만든 앨범이라 그런지, 곡들의 퀄리티는 전작에 못미친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겪은 밴드가 풍기는 인간적 아우라는 여전하다. 여담이지만, '돌꽃'은 2차대전때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수용소 야세노바츠Jasenovac 터에 조성해 놓은 기념조형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골육상쟁, 형제살륙의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음반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가 궁금하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살아 남았음을 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깐. 보컬 다보린 형님이 2001년 50대 아쉬운 나이로 죽으면서 밴드도 결국 막을 내린다. 굳이 다른 보컬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2004년에는 밴드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곡했던 코바체비치 형님까지 죽었다. 주축 3인방 중에 레지치 형님은 전쟁에 학을 뗐는지 현재 미국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난리통 후 다시 공연에 나선 다보린 형님. 이 때는 록스타라기보다는 마을회관 노래자랑 이장님 아우라다. 주위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여러 애칭과 별칭이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가수'Pjevač로 불렸다. 이 별명에는 영어 정관사 The가 함께 붙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어쨌거나 밴드는 없어졌지만, 사라예보 시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자기들과 함께했던 왕년의 스타를 여전히 잊지 않았다. 보스니아 대중음악계는 최고권위의 대중음악상 이름을 다보린상으로 개칭, 그를 기리고 있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3 : 유고슬라브 뉴 웨이브 2 - Azra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은 그야말로 재기있고 창의력있는 밴드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밴드는 자그레브씬을 대표하는 밴드 아즈라Azra다. 리더인 브라니미르 '조니' 슈툴리치Branimir Džoni Štulić는 원래 자그레브 대학 철학도 출신이지만, 공부는 설렁설렁하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기타나 뚱땅거리던 보헤미안 생활을 지속했던 듯 하다.

3인조 밴드 아즈라의 진용. 가운데 선그라스에 야전상의(?) 같은 궁상을 걸친 사람이 리더 '쬬니' 슈툴리치다. 3인조였지만 원맨밴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처음 조직한 것이 발칸 세브다흐 밴드Balkan Sevdah Band라는 이름의 밴드였다.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보스니아의 세브다흐 장르의 곡들을 불렀을 것 같은데, 진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하고 막연한 비틀즈나 포크 쪽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이러던 그가 본격 뉴웨이브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은 동시대 청년들로 슬로베니아 밴드 판크르티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부터라고 한다.

첫 싱글 발표곡으로 대박을 쳤던 발칸Balkan. 1987년 공연 장면이다. 소규모 콘서트지만 발광하는 청년들에게서 아즈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발칸의 보헤미안 정서를 노래했던 이 노래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우리 노래들에서도 익히 겪었던 G-Am-C-Em 코드 진행인 탓이 클 것이다.   

통기타에서 전기기타를 바뀌쥔 슈툴리치는 1977년 본격적으로 아즈라Azra(터키어로 '소녀'라는 뜻)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싱글 몇장을 발매하고 첫 앨범을 발표한 것이 1980년의 일인데 80년대 초반은 슈툴리치에게는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다. 80년 첫앨범 이후 81년 두번째 앨범(더블), 82년 라이브 앨범(트리플)과 더블어 세번째 앨범(더블) 연달아 발표를 한 게 족족 열화와 같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2000년대 세르비아에서 발간한 책 '유고슬라비아 100대 록/팝 앨범'YU 100: najbolji albumi jugoslovenske rok i pop muzike에서는 위의 초기 앨범 3장을 모두 10위권에 집어넣었다. 가히 신들린 창작력이다. 이 당시 슈툴리치는 뇌리의 노래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여느 위대한 록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슈툴리치 그 스스로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기타를 잘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즈라의 노래들은 처음 들으면 밋밋한 느낌이다. 왜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리프가 없다. 아즈라 노래들의 동력은 리프가 아니라 코드진행이다. 기억에 남는 리프가 없다는 것은 요새와 같은 자극의 시대에는 커다란 단점이다. 그러나 잘 들으면 멜로디가 느껴지고, 멜로디가 느껴지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 따라부르기가 가능한 록... 이게 다른 뉴웨이브 밴드들과도 구별되는 아즈라 록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즈라의 노래들은 통기타 세팅에서도 성공적으로 재연될 수 있다. 실제로 슈툴리치가 보헤미안 시절 때 녹음한 데모테입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밥 딜런 못지않는 고밀도 노래들이 들어있다.

평론가들은 구유고 밴드들 중에서 아즈라 만큼 도시의 감수성을 잘 표현한 밴드가 없다고들 평한다. 이 역시 주로 슈툴리치의 작품들인데 꾸준한 서사구조를 갖지 않는 파편화된 일상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드물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도 있다. 두번째 앨범(Sunčana strana ulice)에는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자유노조운동과 강한 연대를 표명한 노래 '내마음의 폴란드'Poljska u mom srcu가 있다. 세번째 앨범(Filigranski pločnici) 첫트랙 '누가 거기서 노래를 불러'Tko to tamo pjeva는 물경 티토(!)에게 바친 헌정곡이다. 내용은 신랄한 비판이다. 그러나 슈툴리치는 체제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유고슬라비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87년 공연 때 부른 Tko to tamo pjeva. '모래찜질 중인 임금님, 뭘하나 봤더니 방귀를 끼시네' 가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80년대의 폭발적 성공을 뒤로하고 활동도 뜸해지더니 현재의 슈툴리치는 '은퇴'가 아니라 '은둔'에 들어갔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예술가 아니랄까봐 성격이 모난것도 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산산해체되는 데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93년 언론 인터뷰에서 슈툴리치는 '이번 전쟁은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졌다고 믿는 듯 하다. 네덜란드에서 그는 이런저런 고전들을 번역하거고, 유튜브에서 자기 노래들을 관리하고 있다. 가끔 여기를 통해 새로운 녹음이나 노래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녹음의 질도 그렇고 전성기 때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런 눈에 띄는 '부재'는 이런 저런 소문과 전설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70/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를 다룬 다큐멘타리 '행복한 아이'Sretno Dijete의 제작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결국은 거절당하는 장면 만을 성공적으로(!) 영화에 집어 넣었다. 누가 어떻게 해도 그를 만날 수 없자, 또다른 작가는 그가 썼던 가사에 나왔던 인물들만 만나서 다큐멘터리 영화(kad miki kaze da se boji)를 만들기도 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어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얻어낸 토막말들이 아직도 뉴스가 된다.

나라를 막론하고 구유고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그리워 한다.





2014년 1월 4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2 : 유고슬라브 뉴 웨이브 1 - Šarlo Akrobata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권 치고 드물게 록음악이 성했다. 프로그레시브, 펑크, 하드록 등 다양한 장르의 록음악이 나왔고 음악적 성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주는 마냥 입안의 혀처럼 남모를 유고 청년의 고민을 대변하고 표현한 록의 하위장르가 있다면 단연 80년대 초 대유행한 뉴웨이브가 아닐까 한다.

왜 하필이면 뉴웨이브였을까?

우선 시운이다. 유고슬로비아 뉴웨이브(이 나라 말로는 Novi Val 또는 Novi Talas)가 본격화된 것이 80년대 초의 일이다. 80년은 유고 원맨쇼의 주인공 티토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개막했던 거물이 죽고 난 다음, 유고 사회는 놀랄만큼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도 한참 어려울 때다. 여기저기 실업율도 높아지고, 당연히 사회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이들 앞에 마침 뉴웨이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 나온 음악인 만큼 사회주의 체제비판적이거나 불만적인 가사가 많았다.

거기에 뉴웨이브 음악의 기본적인 특성도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유고슬라비아에는 블루스/컨트리 등의 록의 기본 자양 자체가 없었다. 뉴웨이브 같이 특별하게 천착해야할 역사도 없고 너무 과격하지 않으면서 만들기도 쉽고 듣기도 쉬운(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는..) 음악이 유고 도시 청년들의 감성에는 더 잘맞았던 것같다.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의 신호탄이 된 Paket Aranžman(패키지 딜이라는 뜻). 1981년 Jugoton 발매. 주로 펑크 음악에서 한 발 더 나간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장르 음악들을 담았는데, 베오그라드의 3두마차 밴드 Idoli (Idols), Šarlo Akrobata(Charles of Acrobat), Električni Orgazam (Electric Orgasm)의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쉽게도 절판이다. 당장은 유튜브에서 듣는 수 밖에는 길이 없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서구에 대한 선망의식과 뽕짝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록을 시작했던 것은 유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유고의 뉴웨이브 밴드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Bijelo Dugme나 Riblja Čorba 등의 선배들을 '시골'록 이라고 폄하했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치고 나간다고 앞세대를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록의 고유한 변증법이 발현된 결과였다.

같은 뉴웨이브라고 하더라도 지역적인 특성이 없지는 않았다. 자그레브의 뉴웨이브가 Azra, Haustor, Prljavo Kazalište 등을 중심으로 좀더 대중적이고 멜로딕했다고 한다면 Idoli, Šarlo Akrobata, Električni Orgazam 등이 대표하는 베오그라드씬은 훨씬 더 전위적이고 리듬 중심적이었다.

유고의 뉴웨이브 밴드 중에서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존재는 샤를로 아크로바타Šarlo Akrobata다. 샤를로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유고사람들이 부르는 찰리 채플린의 애칭이란다. 그렇다면 밴드 이름의 뜻은 아크로바트하는 찰리 채플린 정도라고나 할까나?

밴드멤버. 왼쪽부터 기타 밀란 믈라데노비치Milan Mladenović, 가운데가 베이스 두샨 코야 코이치Dušan Koja Kojić, 오른쪽이 드럼 이반 브드 브도비치Ivan VD Vdović. 

기타, 드럼, 베이스 가장 단촐한 구성의 트리오지만, 가장 과격하고 실험적이었다. 특히 베이스 라인이 육중한데, 이건 아무래도 베이스를 담당했던 두샨 코이치(애칭 코야Koja)의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렇다고 밀란이나 이반이나 쉬운 성격은 아니었다.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Bistriji ili tuplji čovek biva kad'은 개성의 충돌이라고 할 만큼, 화려한 불협화음들이 가득 차있다. 그러나 같은 불협화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전위적/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청춘의 에너지 같은 느낌이다. 앨범 두번째 트랙 '애들 잘보시라'Pazi na decu I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괴성이 꼭 이런 느낌이다. 예컨대는 이런 거다. 밤 늦게 동네 굴다리나 한강 고수부지 같은 데를 지나가다보면, 고삘이 중삘이들이 모여 놀다가 씰데 없고 의미도 없는 괴성을 지를 때가 있다. 세상은 불가해하고,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고, 달리 풀어갈 방법도 없지만, 에너지만 남아돌아가는 청춘들의 자화상. 90년대 미국의 얼터너티브 붐이 청춘의 이유없는 열폭, 열패감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유고의 80년대 뉴웨이브도 그러한 느낌이 강하다.

위의 컴필 앨범에 수록되어있는 트랙 중의 하나, 내 머리 주위로oko moje glave. 트리오 멤버가 담당한 세 악기가 오직 리듬에만 복무하는 느낌이다.  화려한 애드립, 이런 거 없다. 그렇지만 악기 다루는 실력이 상당하다는 감은 강하게 온다.


개성이 강한 멤버들이 있다보니 밴드 활동 중 다툼이 심했다. 그 탓에 1981년 베오그라드의 다른 밴드들과 더불어 만든 컴필 앨범 Paket Aranžman에 이어, 독집 앨범를 발매하고는 해산했다.


코야의 회고에 따르면 독집앨범을 발표할 무렵에는 멤버들 간에 너무싸워서 이미 정이 다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앨범이 너무 늦게 나온 셈이라고나 할까. 발표한 앨범 자체가 별로 없다보니까 다른 밴드들이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베스트 앨범 격인 얼티밋 컬렉션 더블판을 발표해도 이 밴드는 그런게 없다. 애초에 더블 판을 채울 만큼의 노래도 없었거든.


유일한 방법이라면 리마스터 판을 내는 것인데, 발매사인 Croatia Records(유고슬라비아 록의 산실 Jugoton의 후신이다)가 2007년 반짝 박스세트로 재발매한 다음 다시 절판 상태다. 아쉬울 뿐이다.



81 년 나온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집 앨범 Bistriji ili tuplji čovek biva kad (사람은 이럴 때 똑똑해지거나 멍청해진다). 곡도 좋지만 뭣보다 놀라운 것은 에너지 레벨이다. 젊었을 때만 나오는 그런 레벨이다. 개인적으로는 수록곡 중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반 중의 명반이다. 이런 건 통째로 다 들어줘야 한다.  


헤어지고 난 후 멤버들 중 밀란과 이반은 에카테리나 대제Ekatarina Velika(EKV)를 구성해서 활동을 계속하다 90년대 각각 마흔도 못채우고 췌장암과 AIDS로 죽었다. 유일한 생존멤버인 코야는 Disciplina Kičme라는 리듬섹션으로만 만들어진 전위밴드를 만들어 요새도 음반을 내고 있다. (유고가 한참 어지러웠던 한 때 영국에서 활동한 덕에 밴드 이름을 Disciplin A Kitschme라고 고쳤다)

코야가 리드하는 Disciplina Kičme의 최신작 Uf!에 수록된 Ako ti je glasno(이게 너에게 시끄럽다면). 밴드 구성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강력/펑키하면서도 희한하다.  아무래도 샤를로의 아방가르드는 코야 담당이었던 듯.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1 : 몬테네그로 전사의 노래

몬테네그로에는 지난 번에도 소개했던 구슬레 서사시를 부르는 악사Guslar가 유난히 많다. 소박한 악기 자체가 공교롭기 어려운 산악의 단순한 삶에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몬테네그로가 배출한 최고 시인 네고쉬도 '구슬레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이라고 읊었을 정도였으니, 구슬레가 몬테네그로에서 가지는 의미가 알쪼다.

몬테네그로인들이 구슬레를 연주하면서 읊었던 서사시 중에는 영웅을 찬탄하는 류의 서사가 많은데, 이번에 소개할 '밀로 요보비치 사제의 죽음'Pobigija (또는 Smrt) Popa Mila Jovovića가 가장 대표이라 할 수 있겠다.

원초적 단순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구슬레 연주 버전의 '죽음'. 여기 소개하는 것은 1부고 2부까지 합치면 장장 20분이 조금 모자라는 서사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르면서 끝까지 듣기가 어렵다. 

내용인 즉 이렇다.

"닉시치Niksić(오늘날 몬테네그로 도시들의 대다수는 19세기까지 오토만 터키 지배하에 있었다. 닉시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은 몬테네그로 대표브랜드 맥주를 만드는 동네다) 공략을 모의하던 몬테네그로 진영에서 누군가 밀로 요보비치 사제를 중상하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런 참언을 들었기 때문인가? 부족의 족장이 여러 전사들 앞에서 밀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대는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로다.' 요보비치 사제는 이 말을 듣고 분기탱천, 분노에 몸을 떤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홀연 총칼을 차고 닉시치로 향한다.

닉시치 성문 앞에 선 요보비치. 터키 경비병들에게 말한다. '무쇼비치 대장kapetan 나오라 그래'. 이 말을 듣고 나온 무쇼비치 수비대장. '웬 일이야? 항복하러 왔으면 환영이야'. 요보비치가 답한다. '쓸 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당장 나와. 나랑 결투다!' 하지만 요보비치의 명성을 알고 있는 대장은 부하들을 시켜 성문 앞 요보비치를 저격한다.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요보비치의 목을 따라 터키의 병사들이 몰려나오고, 그의 목은 닉시치 탑 위에 걸린다. 그 날 밤 병사들 사이에선 잔치가 벌어지고, 터키식 하렘의 여인들은 창문 넘어 유명했던 영웅의 머리를 호기심 어린 듯 바라본다. 요보비치가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이 땅을 치며 울음을 터뜨린다."

시가의 형태로 음미하지 않고 줄거리만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몇가지 몬테네그로의 단면을 포착할 수 있다. 성직자가 전사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성직자 중에는 일자무식꾼도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적 용맹과 명예는 몬테네그로 부족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한 분노의 표출은 남자라면 응당해야할 사회적 행동이었다. 남성중심적 문화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면 빙고! 군사적으로는 득도 있지만 실도 크다.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은 산악 게릴라전에는 능했을지 몰라도 공성전과 같이 고도로 조직화된 군사적 행동에는 약했다.

이 오래된 노래는 80년대 등장한 몬테네그로 출신 랩퍼/로커 람보 아마데우스Rambo Amadeus가 모던한 랩으로 리바이벌한 적이 있다. 장장 20분 짜리 서사시가 5분 짜리 랩으로 축약되는 순간이다.

80년대 유고슬라비아 락씬에 데뷔한 람보 아마데우스는 B급 정서에 기반한 풍자적 노래도 곧잘하고 전통적 요소와 최신 유행을 결합시킨 곡을 다수 발표했다. 90년대 세르비아를 풍미한 '투르보 포크'turbo folk라는 말도 그가 만들어낸 말로, 짧은 말로 사회의 단면을 잡아낼 줄도 알았다. 지금도 활동 중이다. 2013년 몬테네그로를 대표해서 경제위기에 빠진 EU를 풍자하는 Euro Neuro로 유로비전 송 컨테스트에 나가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10 : 록에서 집시 뮤직까지 Goran Bregović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는 보스니아 출신의 락/에트노 뮤지션이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2차대전 후 사회적 긴장이 완화된 틈을 타서 민족 간의 혼인이 성했다. 고란 브레고비치도 이런 예로, 아빠는 세르비아, 엄마는 크로아티아계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근 모습. 90년대 유고 내전이후 고향이 보스니아를 떠나 세르비아에 눌러 앉기는 했지만 이기 팝Iggy Pop 등 서구 락스타에게 곡을 주고 크로아티아의 팝스타 세베리나Severina 등과 교류하는 등 국제적 지명도도 높다.  

20대 초반이던 70년대 말, 고란은 보스니아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모색끝에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라는 뜻)라는 락 밴드를 결성했다. 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 뿐만 아니라 유고 락 음악 역사에서 다수의 기념비적 명반을 배출한 대표 밴드다. 초기작들은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락 계열이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류에 편승해서 뉴웨이브로 전환했다. 고란의 변신의 싹수는 여기서 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옐로 두그메 전성기 때의 모습.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만나다 보니 경제적으로 피지는 못해도 유고슬라비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비옐로 두그메 역시 가장 시골스런 곳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을 추구한 밴드 되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밴드음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고란 브레고비치는 결국 세르비아에 정착하고 본령인 락음악에서 집시음악을 중심으로 한 에트노/월드 뮤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하필이면 집시음악인가? 모를 일이지만, 비옐로 두그메 후기 앨범에서는 집시노래 번안곡이 들어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음악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형성된 듯 하다.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와의 공동작업(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 에밀 쿠스트리차 대표작의 음악은 모두 고란의 작품)을 통해 집시 뮤직에 기반을 둔 영화음악을 발표해서 그 성가는 일국을 넘어서 범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 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만가다. 헤쳤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남슬라브족의 처지가 정처없이 유랑하는 집시들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유고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가 부질없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적어도 90년대에 들어 사방에서 고립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고란표 집시음악이 상당히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왔던 것 같다. 고란은 음악적 방향을 바꾼 90년대 이후 다른 나라 민족음악인(속칭 월드뮤직)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혔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집시 음악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

고란 브레고비치작 집시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완급 조절이다. 하드 드라이브 일색의 집시음악에 고란은 긴장과 이완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 주류적 대중감성, 모던 프로덕션 기술로 사운드를 윤색하니까 정말로 성속聖俗, 귀천貴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잘된 음악이 나왔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섹스Sex. 원래 음반에서는 집시 음악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음성이 수록됐다. 샤반의 다른 음반과 비교해 보면 프로듀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 한데, 은밀하게 밀고 당기는 듯한 섹스의 정조가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나 허다한 작품 가운데에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대 히트곡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1989)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에데를레지'Ederlezi다. 90년대 세르비아에서는 시대의 송가처럼 불리워 졌다. 

전통적 집시 브라스밴드의 반주를 바탕으로 한 에데를레지. 2005년 이태리 아시시Asisi 성프란시스코 바실리카에서 개최된 크리스마스 라이브 현장이다.  

에데를레지는 발칸의 종교축일 '聖조지의 날'Đurđevdan(Saint George's Day)를 기리는 집시들의 노래다. 이 날을 전후로 사람들은 강가에서 몸을 씻고 새끼양 통구이를 먹는다. 종교축일의 틀을 빌렸지만, 실제 주민들에게는 다가오는 봄을 기리는 축제날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발칸의 주민들은 카톨릭, 정교, 무슬림 할 것 없이 이 날을 기념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이교도의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보 안드리치와 더불어 보스니아 대표문호 메샤 셀리모비치Meša Selimović의 대표작 더비쉬와 죽음Derviš i smrt은 바로 이 성조지의 날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슬람 성직자Derviš인 주인공이 밤중에 길을 걸어가면서 성조지의 날을 맞는 주민들을 보면서 제도화된 종교적 순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남과 여의 원초적 마그네티즘으로 형성되는 생명이란 순수와 고결을 숭배하는 화석화된 기성종교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에데를레지는 종잡을 수 없는 봄 또는 생명의 시작을 찬미하는 찬송이지만 그 가사는 애잔하기 그지없다.
Ederlezi 
All my friends are dancing the oro Dancing the oro, celebrating the day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But me, poor, I am sitting apart
A Romany day, our day
Our day, Ederlezi
They give, Dad, a lamb for us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9: 세브다흐의 젊은 얼굴

젊은 층들이 보기에는 더 없이 '구릴 수 있는' 장르인 세브다흐가 환골탈퇴하는 데는 1990년대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구유고 내전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때를 기점으로 젊은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세브다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주방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모험적인 길을 택한 신진 세브다흐 장인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Amira Medunjanin이 가장 대표적이다.

아미라 메두냐닌. 보스니아의 빌리 홀리데이 또는 보스니아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라고도 칭송된다. 두 가수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정조를 극대화하는 노래실력 때문이다. 

아미라 메두냐닌은 사라예보 출신 여성 세브다흐 가수다. 90년대 유고 내전에 사라예보가 근대사상 최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생존이 급한 시대에 음악 교육을 따로 받을 여유가 없었지만, 그 어려운 때에도 지하에서 열리는 게릴라성 콘서트는 꾸준히 찾아갔다고 한다. 가수가 된 것은 좀 뜬금없는데, 전시 사라예보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조직하던 오늘날 남편을 만나서, 우연찮게 노래를 따라부르던 것이 가수가 되는 길이 됐다. 그녀의 테이프를 들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MSR)이 객원 가수로 초빙해서, 2003년 Secret Gate 제작에 참여한 것이 직업가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아미라가 부르는 세브다흐는 슬픔의 정조에 더욱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하여 카라 세브다흐Kara Sevdah (Black Sevdah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콘서트에서는 항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온다. 극도의 슬픔을 다한 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 그것이 그녀 음악의 지향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세브다흐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어쩔 때는 서양재즈에 어쩔 때는 바로크 류트와 같은 고악기를 반주로 나오는 그녀의 세브다흐는 기존의 음악을 상당부분 해체/재구성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것이 모던 세브다흐인가? 아티스틱한 면모가 더 분명해 지는 것은 분명하고, 또 이 같은 시도로 인해서 그 지평이 넓어지는 것 역시 분명한 듯 하다. 더 나아가 아미라의 시도를 두고 세브다흐의 본질을 훼손했느니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가까운 역사에서 쓴 맛을 봐서 그런지 그녀가 우울한 노래들에 대한 이 지역 대중들의 반응도 좋다.

류트 연주자 에딘 카라마조프Edin Karamazov와 같이 한 2010년 이스탄불 공연모습. 서구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오리엔트의 노래가 예상외로 잘 맞는다. 부르는 노래는 '아 사랑을 숨겨야 하다니'Ah što ćemo ljubav kriti. 에딘 카라마조프는 스팅과 더불어 존 다울랜드의 노래를 앨범으로 낸 사람이다. 아미라 메두냐닌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 출신. 

지금까지 네장의 독집 앨범을 냈는데, 앨범 마다 새로운 컨셉트를 채용했다. 세브다흐 장르의 혁신자로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항상 대담한 실험을 동반하면서 MSR 등과 같은 선배 뮤지션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됐다. MSR의 최근 앨범, Tales From A Forgotten City는 전례없는 실험을 하다가 망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 따라하다 망한게 아닌가 싶다.

아미라가 내놓은 앨범 모두 하나 같이 들을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2009년 앨범 Zumra에 수록된 '엄마가 메흐메드를 깨웠다'Mehmeda Majka Budila다. 단순한 노래인데, 가사가 심상치 않다.

내용인 즉 엄마가 아들 메흐메드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메흐메드가 이야기한다. 여동생이 자기의 팔을 묶고, 아버지가 눈을 가리고, 엄마가 심장을 도려내는 꿈을 꿨다고. 노래는 잠을 깨우는 노래라고 하지만, 곡조는 어째 자장가인가? 평안한 집안에 왜 메흐메드는 이런 악몽을 꿨는가? 한두가지가 수상치 않은 이 곡을 아미라가 메리마 클류초의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듣는 사람 기분이 서늘해 진다. 노약자와 임산부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앨범에 수록된 Mehmeda Majka Budila. 자장가풍의 단순한 노래에 섬뜩한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를 태워서 가사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전복적 성격을 극대화했다. 

아미라 메두냐닌의 가수로서의 활동은 앨범보다는 콘서트에 방점이 더 맞춰져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에딘 카라마조프 등과의 협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유럽의 주요도시가 그녀의 콘서트 무대다. 기본적으로 깔고들어가는 기조 때문인지 무대의상은 유난히 검다. 노래는 주로 슬프지만, 공연 중간에 실없는 웃긴 소리도 많이 한다. 2013년 최근에는 같은 보스니아 출신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 보쉬코 요비치Boško Jović와 같이 순회하고 있다. 이 역시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콘서트를 참여할 수 있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콘서트를 참여할 수 만 있다면...




2013년 9월 5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8 : 모스타르에서의 재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세브다흐처럼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장르가 없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신파조의 멜랑콜리 추구'라는 세브다흐의 기본적인 덕목이 1990년대 유고 내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으면서 새로운 음악적 변화를 거듭해 가고 있다.

당금 보스니아에서 세브다흐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음악인(집단)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이하 MSR).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가 고향 모스타르Mostar 출신 음악인들과 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 밴드다.

2002년 경의 MSR. 앞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밴드의 보컬 일리야 델리치Ilija Delić옹. 약간의 주책기가 있지만, 담배에 찌든 텁텁한 목소리가 매력포인트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남부 헤르체고비나의 중심도시다. 이 동네가 재미있는 것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네레트바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주로 무슬림들이 서쪽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살면서 다문화 다종교 사회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500년 넘게 형성된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1990년대 유고내전으로 산산히 박살나면서, 모스타르는 졸지에 비극의 도시가 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찬탄해 마지 않던 오래된 다리가 1993년 내전 한가운데 무너지는 영상이다. 술레이만대제 때 만들어진 이 다리는 모스타르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이 다리 폭파 지시를 내렸던 사람들은 2013년 현재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고 있고, 그 폭파 사실이 공소이유의 하나가 됐다.

MSR은 이러한 비극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셰스티치가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 모스타르 어느 골방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작은 콘서트를 열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전쟁이 끝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브다흐를 알게 될꺼야'. 밴드 멤버 중의 누군가가 그 와중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은 실현됐다.

1999년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당신에게 숨어든다'Kradem ti se. 사랑하는 연인의 집에 월장해 들어간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들어있다. 세브다흐의 본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한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델리치 옹의 목소리다. 이 때 벌써 60대 중반의 노장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옛날 친구들을 찾아서 무슬림계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멤버들의 재회Reunion를 이뤄낸 리더 셰스티치는 1999년 들어 첫앨범을 내고 세브다흐 장르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다. 이들 음악의 특징은 세브다흐 고유의 본래적 전통에 서구음악의 영향을 결합시켜 구유고지역 젊은 세대는 물론 세계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멤버들이 모두 고향을 등지거나 뿔뿔이 헤어지는 비극을 거쳤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세브다흐 고유의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의외로 흥겹게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이 많다. 마치 흥을 통해서 슬픔을 극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2003년 Secret Gate에 수록된 '모스타르의 희한한 슬픔'Čudna jada od Mostara grada. 연인이 마음이 변할까 안절부절하는 여성의 심정을 희극적으로 풀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MSR 최대명곡이 아닌가 싶다. MSR은 이 노래를 보다 '훵키'하게 풀어내기 위해 비트를 2/4에서 4/4박자로 바꿨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듣는 모스타르 청중들의 반응이 물만난 고기같다. 

그러나 2013년 현재 MSR은 Reunion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갈라선 상태이다. 보컬인 델리치 옹과 더불어 코바체비치(바이올린), 샨티치(아코디온, 클라리넷) 등이 2007년 경 밴드에서 탈퇴해서 자신들만의 MSR을 결성했다. 때문에 2013년 현재는 원 멤버들도 서로 서먹해지고 연락도 안하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MSR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밴드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그 소상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드라기 셰스티치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멤버들의 반란이 아닌가 싶다. 셰스티치는 MSR를 통해 세브다흐 뿐만 아니라 묻혀있던 왕년의 (집시)씽어 샤반 바이라모비치, 릴랴나 버틀러Ljiljana Buttler 등을 재발굴했다. 이들이 다시 부른 노래는 하나같이 왕년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재해석이 됐다. 허나, 이들 스타에 가려진 보컬 델리치 옹이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똑같은 이름의 두 밴드는 각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만 델리치 옹의 노쇠현상이 심해지고, 드라기 셰스티치의 프로듀싱이 과도하게 실험적으로 흐르는 듯하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초 당시의 밴드가 최전성기였다고 본다. 헤어진 것은 안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민족감정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셰스티치 솔하의 MSR은 2013년 신작 앨범 'Tales from the Forgotten City'를 냈다. 밴드는 더 젊어지고 노래는 더 모던해졌다. 이 최신작에 수록된 '왜 당신은 여기 없는가'Što Te Nema는 그리운 이의 부재를 그리는 걸작이다.

모스타르에서 촬영된 Što Te Nema 뮤직 비디오. 모스타르 출신 세르비아계 민족시인 알렉사 샨티치Aleksa Šantić의 시에 노래를 붙인 장르 최대인기곡이다. 조국, 연인 또는 한용운식 님의 부재와 결핍을 노래한 이 노래는 크게는 오늘날의 보스니아, 작게는 MSR을 너무 절실하게 그려내는 듯 하다.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7 : 오토만의 유산 세브다흐Sevdah

구유고 지역의 대부분이 거의 500년 동안 오토만의 지배를 받다보니, 그 문화적 유산도 만만치 않게 남아있다. 음악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브다흐Sevdah라는 장르다. 세브다흐. 무슨 뜻인가. 위키를 찾아봤더니, 그 어원은 아랍어로 뜻이 '검은 담즙'black bile(또는 흑담즙)이란다. 검은 담즙이 음악과 무슨 상관? 

'검은 담즙'은 원래 의학용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등이 '4대 성정性情론'Four Temperaments을 주창한 바 있다. 중세 아랍의 학자들이 이 고대 그리스 의학 파라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고, 그것이 서양까지 전해져서 18세기까지 의학적 사고의 근간이 됐다.

'4대성정론'이 이야기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의 4대 성정, 즉 냉정(또는 침착), 분노, 낙천, 우울은 4대 체액의 분비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 바 '검은 담즙'은 우울(멜랑콜리)을 유발하는 체액이다. 

4대 성정 : 이 파라다임을 표현한 설명 중에서 위의 이모티콘보다 더 잘된 예를 본 적이 없다. 왼쪽부터, 분노, 우울, 냉정, 낙천을 뜻한다.

4대성정론이 서구문화에 영향은 예상외로 넓고도 깊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멜랑콜리 과다증후군을 앓은 대표적인 인사다. 생전에 되는 일이 별로 없었던 보들레르는 '빠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영국의 르네상스 작곡가 존 다울랜드John Dowland는 당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멜랑콜리 열풍에 충실히 부응하여 변진섭, 신승훈 못지 않게 슬픈 노래를 많이 남겼다. 

이름이 암시하듯, 세브다흐(더 친근하게는 세브달링카Sevdalinka)는 원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슬픈 보스니아 민속노래들이다. 사람이 왜 슬픈가? 가장 큰 이유는 실연이다. 때문에 세브다흐는 보스니아의 사랑 노래Bosnian Love Song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꼭 이런 연애 이야기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일단 기조는 슬픔이지만, 그 가사에는 해학, 익살, 로맨스, 음란, 외설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노래들은 원래 마을 잔치, 회합이 주무대였다. 누군가 카수가 나서면 너도 나도 같이 따라부르는 방식이다. 가사가 너무 슬프다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울었다고 한다.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주된 기능이었던 셈이다.

싸즈Saz라는 보스니아 전통악기를 반주로 부르는 세브다흐.  이웃들과 옹기종기 모인 사랑방이 주된 연주 장소였다. 

아무래도 오토만 터키에서 유입된 장르다 보니, 음계나 분위기가 오리엔탈하다. 이 같은 문화적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변화와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구 유고지역의 음악 중에서 세브다흐 만큼 커다란 변화와 트랜스포메이션을 거친 장르가 없다. 지금도 거침없이 변화 중이다.

세브다흐 장르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아무래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다. 오스트리아인들이 가지고 온 아코디온, 바이올린, 베이스 등이 보스니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세브다흐 장인들이 음량 등 여러가지 면에서 한계가 많았던 싸즈를 버리고 근대식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주 장소도 대가집 사랑방, 마을회관이 아니라 카페로 바뀌었다. 합창보다는 공연 중심으로 음악적 소비의 성격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1945년 종전 이후 , 보스니아에서는 힘조 폴로비나Himzo Polovina, 자임 이마모비치Zaim Imamović 등의 가수들이 나와서 여러 앨범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우리나라의 김정구, 배호 등과 같은 전설적 위치를 누리는 가수들이다. 오케스트라, 아코디온 반주를 극대화한 이들에게는 서양의 크루너crooner적인 면모가 보인다.

힘조 폴로비나가 부른 에미나Emina. 대체적으로 세브다흐/세브달링카는 녹음시간이 4분을 넘지 않았는데, 폴로비나는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이 곡을 7분이 넘는 대곡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탄조의 탄식이 가득한 이곡은 같은 동네 이맘댁 처녀 에미나에게 연심을 품은 젊은 화자의 심정을 절절히 담고 있다. 너무 절절하다 보니 꼭 신파조로 느껴지는 폐단이 있다. 그래도 이 노래는 아마 세브다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곡이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구유고의 음악 6 :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Klapa

오늘날 크로아티아 해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달마시아에는 클라파Klapa라는 남성중창 전통이 발달해 있다. 한참 관광시즌 때 자다르, 쉬베닉, 트로기르, 스플릿, 두브로브닉 등의 해변도시를 걷다보면 이들 남성 중창단을 심심치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라파 합창단. 위 밴드가 클라파 캄비Klapa Cambi 아래쪽이 클라파 인트라데Klapa Intrade다.

처음 들어보면 '일 디보'Il Divo가 부르는 칸쪼네?같은 느낌이 문득 드는데, 이것이 사실은 크로아티아 고유의 음악이다. 칸쪼네 냄새가 강하게 베인 것은 아무래도 베니스가 달마시아를 상당히 오랫동안 지배한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개의 서양음악이 그렇듯 시작은 교회음악이다. 아무래도 해변마을 가난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모인 미사에서 성대한 오케스트라를 초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대체적으로 암마추어들 중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모아서 성가를 부르면서 미사를 집전했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할 사람이 없다보니, 당연히 무반주 아카펠라다. 

클라파 중창단이 교회에서 아카펠라로 합창하는 모습. 

이 같은 교회음악의 전통은 슬라브족의 전통적인 민속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달마시아 산구석이나 인근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양가죽 백파이프, 지난 번에도 소개한 적인 구슬레 음악이 남아있다. 

카톨릭 교회, 예수회, 프란체스코회 등의 카톨릭 조직들은 이런 원시족 슬라브족에게 그레고리안식의 음계와 화성을 전했다. 그것이 민간에 스며들어 만들어진 것이 클라파인 것이다.  서양음계를 갖춘 다성합창이다 보니,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의 성부가 다 있지만, 오페라나 성악의 발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중심의 음악이다.

서양음계를 받아들이고 다성으로 소화했다고 해서, 클라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희한하게 단조 노래가 없다. 웅장함과 슬픔을 대변하는 조성이 없다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하지만\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를\ 보면 그럴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파란 하늘, 이 파란 바다, 이 아름다운 자연풍광에서 슬픔과 심각함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달마시아의 생활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달마시아를 오랜 기간 경영했던 베니스의 기본 방침은 '착취'에 가까웠다. 식민지 백성들이 '학자 보다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베니스는 의도적인 궁핍화 정책을 추구화했다. 그나마 달마시아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유고슬라비아 당시 해외여행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다음이니,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슬라브의 우수는 어디가고 어찌 찬가만 남은 셈인지 모르겠다.

달마시아 어느 해변 정경. 우리에게 떠오르는 노랫말은 '근심을 접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다.

가사는 주로 하늘, 바다, 태양, 포도주, 동네 일상사 등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소갯말에는 짝사랑, 슬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허나 조성이 영 딴판이니 믿기 어렵다.

유네스코는 나 같은 문외한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러 저러한 음악적 이유로 2012년 클라파 음악을 유네스코 무형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그 설명은 여기로) 보통 문화유산 쯤 되면 대다수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징표도 될 법한데, 클라파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아마추어 및 프로 클라파 중창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실력있는 밴드들은 어딜가나 매진이다. 달마시아의 오미쉬Omiš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클라파 페스티벌이 성대하게 개최되어, 실력있는 합창단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클라파 캄비의 '좋은날'Dan Ljubezni. 클라파 가사의 상당수는 달마시아 사투리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지금은 달마시아가 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이지만, 원래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 주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의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시아가 모여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가 된 것이다. 그만큼 달마시아와 자그레브 중심의 크로아티아 본토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크다.  


현재 크로아티아에서 클라파 음악은 전통적인 무반주에서 벗어나 전통악기 탐부리차, 기타, 베이스 등이 가미되어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 최근에는 남성 일색 클라파 합창에 여성중창단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단조 클라파 합창곡이 나오는게 다음 순서가 아닐까 한다. 

클라파 인트라데의 '크로아티아여, 맘으로부터 너를 사랑해'Croatio iz duše te ljubim. 달마시아가 아무리 크로아티아 본토와 문화적 차이가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분리주의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파 인트라데가 부른 이 애국적 크로아티아 찬가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5 : King of Gypsy Music

먼저 음악부터..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부른 '풍뎅이'Bubamara. 화면은 이 노래가 OST로 활용된 에밀 쿠스투리차의 1998년작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Crna Mačka Beli Mačor의 장면을 모아서 만든 동영상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또 집시 음악이다. 발칸 집시 음악은 브라스 밴드로 유명하지만, 실력있는 보컬 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가수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에스마 레제포바Esma Redzepova와 세르비아의 샤반 바이라모비치Šaban Bajramović를 들 수 있다. 오늘은 샤반 바이라모비치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단발머리 청년 당시, 그러니까 젊었을 때 모습이다. 찰슨 브론슨의 향취가 느껴진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1936년 세르비아 남부 니쉬Niš에서 태어나서 2008년 죽었다. 대부분의 집시들이 그렇지만, 학교 공부는 설렁설렁 초등학교 중퇴, 길거리에서 음악을 배웠다. 19살 되던 해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연애에 빠져 병역을 회피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 앞에서 어설픈 소리하다가 3년이면 끝날 형량이 5년반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끌려간 곳이 '벗은섬'Goli Otok(영어로 옮기면 Naked Island. 정치범/흉악범 수용소로 유명)이다.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굴러먹던 집시생활, 수용소에서도 잘 버텼다. 재소자 축구시합에서는 '흑표범'으로 이름을 날리고, 밴드에도 들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쓰고 읽는 법도 익혔다고 하니, 교도소가 그에게는 학교가 됐다. 출소 이후 여기 저기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가 1964년 첫 음반을 내고, 그 길로 엉겁결에 스타가 됐고, 그렇게 50여년 가수 인생에서 20여장의 앨범과 50장의 싱글을 발매했고, 집시음악의 왕kralj romske muzike라는 칭호를 얻었다. 곁가지로 수호천사Anđeo Čuvar(1988), Ciganska Magija(1998) 등의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과거 유랑악단이나 다름없는 생활이다. 음반, 공연도 있지만, 결혼식, 피로연 등이 집시밴드의 주수입원이다. 로컬 카페가 우리나라와 같은 '업소' 역할을 했다.

예술가 답게 생활도 방탕했다. 노름.술.담배.여색 등. 성격도 괴퍅해서 정해진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아무때나 마음대로 훌쩍 사라졌다. 공연을 펑크내서 수소문해서 찾아보면 누구집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동안은 내내 불평불만이었다. '같이 작업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위키에 따르면 그는 700여곡을 작곡했다(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자기 노래라고 주장한 노래가 원래부터 집시들 사이에서 불리워졌던 것도 있고, 같은 노래에 제목이 달리 달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축재의 방도를 딱히 아는 것도 아니고, 유고슬라비아 시절 내내 저작권이 잘 보호되지 않아서 말년에는 지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가 죽은 다음에 후배 뮤지션들이 위로 삼아 '고인은 저작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라고 세속에 초연한 영웅인 듯 그를 기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 같은 동료음악인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같은 영화인을, 특정 음반제작업자를 틈만 나면 욕했다. 허락 또는 보상 없이 자기 노래를 쓴다는 이유로. 하지만 정작 그는 쟁송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을까. 집시가 남에게 소송을 건다는 게 허망하게 느껴졌을지, 아니면 남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이 많아 변호사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또 다른 노래 '깡총깡총'Opa Cupa. 헤르체고비나의 세브다흐 장르 밴드인 '모스타르 세브다흐 리유니언'Mostar Sevdah Reunion과의 공연 장면이다. 샤반은 이들과 2002년과 2006년 콜라보 앨범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냥 뭉뚱그려서 '집시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와 같이 토만 터키의 영향 때문인지 오리엔탈 풍은 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 그의 노래는 발칸 세브다흐Sevdah 장르에서부터 재즈, 삼바, 탱고 등으로의 다양한 확장성을 가진다. 90년대 까지 그의 음반은 난삽해 보이는 아코디온 반주에 싸구려 씬서사이저까지 곁들어져 음악적 이디엄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들린다. 게다가 프로덕션 밸류도 낮아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뽕짝 메들리 판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낮은 질의 레코드를 커버하고 있는 '쏘울'이 있었다. 창법으로나 태도에 있어서나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는 '봄비'를 히트시킨 박인수씨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세르비아어보다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그 스스로가 언어상의 장벽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노래는 '쏘울'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가사를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한번은 티토 앞에서도 노래를 불렀는데, 티토가 집시의 언어를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음반 Romano Raj에 수록된 '백장미'Bele Ruže. 프로모션 화면이지만 집시의 음악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는 이 오랜 히트곡을 장고라인하르트 풍의 집시 재즈로 풀어냈다.

그에게 다행한 점이 있다면 성격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콜라보하고 싶어하는 실력있는 후배 뮤지션들이 따라 붙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2000년대 이후 나온 음반들은 음악적 전성기를 지난 상황에서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수작들이다. 특히 2006년 세르비아 재즈 밴드 '자발적대장간협회'Dobrovoljno Kovačko Društvo와 공동으로 만든 마지막 앨범 '집시의 천국'Romano Raj(PGP RTS 발매)에서는 재즈, 삼바, 레게, 탱고 등의 주법에 맞춰 자신의 히트작들을 다시 불렀는데, 장르가 바뀌었음에도 마치 자기옷 입은 마냥 편안하게 느껴진다. 죽음을 2년 앞둔 70세 고령에 녹음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확장성, 놀라운 적응력, 놀라운 유연성이다. 가히 '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백조의 노래. '집시의 천국'Romano Raj. 재즈, 삼바, 레게 등으로 풀어낸 자신의 히트곡 모음집이다.  이 음반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세계 구석구석에서 비루하게 시작된 음악들이다. 원래 예술을 비루한 현실을 더욱 숭고한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인간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천상 예술가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4 : Balkan Gypsy Brass Band

발칸반도에 집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4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는 서유럽이나 러시아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퍼져나갔지만, 다수는 아직도 발칸에서 살면서 사회생태계의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살을 맛대보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 집시 하면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이들의 음악은 찌고이네르바이젠, 헝가리 무곡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줬으며, 후대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집시 뮤지션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발칸지역 집시 음악 역시 같은 궤적에 있다고 봐야 겠지만, 가장 눈에 띠는 점은 집시 브라스 밴드의 존재다. 이들 음악은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이들 밴드는 중요한 축제 혹은 애도의 계기 때마다 등장해서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듣는 것이 축제 때가 많다보니 다수의 노래에 축제와 흥분의 톤이 내장되어 있다. 

구유고에서 활동 중인 집시 브라스 밴드 중에서 가장 많은 각광을 받는 보반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Markovic Orkestar의 모습. 리더 보반의 아들 마르코Marko도 14살때 학교를 때려치고 가세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브라스 밴드인가? 동유럽 집시하면 바이올린 아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오토만 터키는 서구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앞서 전문군악대Mehter를 운영했다. 14세기부터 오토만의 서진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악기(주로 나팔과 북)가 이런 저런 경로로 집시들 수중에 들어갔다. 19세기 세르비아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악기는 서양식 나팔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적으로 조직된 세르비아 군대에서도 군악의 취주를 담당한 계층은 집시들이었다. 더 나아가 척박한 데서 거친 일을 하다보니, 손이 거칠어져서 현악기보다는 관악기 쪽이 이들에 맞았다는 설명도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브라스 밴드가 많다 보니, 세르비아에서는 오늘 날도 구챠Guča에서 매년 8월 마다 트럼펫 축제가 열리는데, 이게 왠만한 서유럽이나 미국 록 페스티발 저리 가랄 정도로 규모가 꽤 크다. 

이들 음악은 이것 저것을 섞은 잡탕처럼 보이지만, 족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19세기 발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첵Čoček 장르의 주요담지자들이다. 터키식 오리엔탈 멜로디, 강력한 비트(4/4, 7/8, 그리고 집시 9이라고 불리는 9/8박) 등이 주요 특징이다. 댄스비트의 경우 벨리댄스와도 결부되기도 한다.

구유고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집시 브라스 밴드를 꼽으라면, 단연 세르비아의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 Marko Marković Orkestar다. 다음 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10년 구챠 트럼펫 페스티발에서 이들의 라이브 장면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집시 브라스 음악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 연주곡은 쿠스투리차 영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칼라시니코프Kalašnjikov다. 브라스 밴드 역시 여느 록밴드 못지 않게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이것이 집시 브라스 밴드의 전통적 기능이었을 것이다.


약간 발칸의 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최근에 뜨는 집시 밴드로는 팡파레 초카를리아Fanfare Ciocărlia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루마니아 집시들인 이들은 독일 음반제작가들에게 최근에 '발견'되기 전까지 동네 섬유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루마니아 깡촌에서 조차도 지켜낸 이들 음악의 매우 높은 완성도다. 이들은 2011년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와 공동음반 발칸 브라스 배틀Balkan Brass Battle(Asphalt Tango 발매)을 내놨다. 두 밴드의 경쟁심으로 시종 긴장감이 팽팽한 명반이다.  공산주의 시절 전혀 만날 수 없었던 두 밴드가 얼마나 동일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다.

2011년 부다페스트에서 이 두 밴드가 만나서 같이 공연했다. 영화 007 테마를 주제로 만든 곡인데, 대중에 어필하는 곡인데도 어쨌건 집시식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이게 꽤나 흥겹다. 청중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3 : 구슬레와 구전서사시

오토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정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커다란 자랑이지만, 정작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문건은 그리 많지 않다. 19세기 봉기 지도자들 조차도 문맹들이었으니, 역사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 내고,  그것을 정체성의 일부로 체화해 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 해답은 동방정교 교회와 세르비아의 구전서사시가epske pesme다. 교회가 고답적인 문어체 기도문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면, 구전서사시들은 바로 민간에 즉각적으로 유통됐다는 점에서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적으로 시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낭송하기 위해 있는 것. 세르비아의 음유시인들은 여기에 반주 격으로 구슬레gusle라는 악기를 연주한다.

구슬레.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악기로 봐야할지 아니면 연장으로 봐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단 한가닥의 현, 제한된 음계, 딱히 정해진 음정이나 피치도 없다. 낼 수 있는 피치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할 경우 많아야 다섯개. 연주하는 사람의 목소리 높낮이에 따라 튜닝도 바뀌는 인간친화적인(?) 악기다. 세르비아에서만 쓰는게 아니라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발칸 전체에 연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악기의 종주는 세르비아 민족이 많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다.

구슬레, 이렇게 생겼다. 양다리 사이에 끼우고 활을 써서 연주하는 찰현악기다. 우리나라 해금과도 비슷한 구조이지만, 손아귀가 아니라 손가락 만으로 음정을 만들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음계가 그리 많지 않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서는 이 한줄짜리 악기를 복수plural 취급한다는 것.......

음유시인의 낭송을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음악 이전의 그 무엇인가? 정작 들어보면 형언할 수 없는 원초성이 마음을 파고들어 온다. 청중에게는 악기의 단순성이 오히려 메시지의 명징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주로 세르비아의 역사와 신화, 영웅담들이다. 당연히 가장 인기있는 곡들도 1389년의 코소보 전투 전후의 사정들을 기록한 시가들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던 코소보 신화 역시 음유시인들의 낭송을 통해 전해졌다. (특히 코소보 서사시들은 유고 내전 등의 계기를 통해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영어번역으로 보려면 링크1 혹은 링크2 참조)


그렇다면 박제된 과거의 일만 전해지는가? 구슬레 서사시가들은 세르비아인들에 영향을 끼친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을 노래하는 창구가 된다. 19세기 초 사라예보 암살사건, 티토의 빨치산 활동, 가장 최근에는 유고 내전에 이르기까지, 구슬레 음유시인들이 아니 다루는 주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오늘날 세르비아 구슬레 씬의 주된 에토스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유고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 혐의로 전범으로 지목된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등을 칭송하는 구슬레 서사시도 심심치 않게 곧 잘 들을 수 있다.

구슬레 음유시인 Guslar 사샤 라케티치Saša Laketić. 세르비아에서 활동 중인 많은 구슬레 가수들이 있지만, 무대 장악력이 좋아서, 그런지 박수도 잘 이끌어 내고, 청중과의 교감이 좋다.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 음유시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14년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암살사건sarajevski atentat을 노래하고 있다. 

세르비아가 2012년 EU 후보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회원국이 되는 절차를 밟아가는 오늘 날 구슬레 서사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 나갈까? 이 원초적 목소리가 EU 문명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궁금해 지는 지점이다.

2012년 I Got Talent 몬테네그로 프랜차이즈에서는 14살짜리 소녀 Bojana Peković가 출연해서, 능숙한 구슬레 연주와 노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로 남성일색의 구슬레 씬에 나타난 귀여운 소녀의 고고성은 세르비아 민족 서사시에 새로운 방향과 기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려서 그런지 다른 악기와 합주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음역을 내보는 등 신선한 실험도 하고 있다.

2013년 2월 보야나와 니콜라 페코비치 남매의 구슬레-아코디언 협연 장면. 희귀한 일이다. 구슬레는 다른 악기 사이에서는 거의 음향효과 정도를 낸 적은 있지만, 제한된 음역으로 인해 협연을 불가능했다. 보야나가 과거에는 거의 고정적이었던 손 포지션을 바꿔가면서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구슬레의 미래?

그러나 이 같은 실험이 구슬레의 미래를 담보할 것인가? 모르는 일이다. 보야나가 알아서 잘 하겠지.

개인적으로는 베오그라드에서 구슬레를 구입하기 위해 물어 물어 장인匠人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담배가 쩐 아파트 응접실에서 몬테네그로 출신의 장인은 구슬레의 요모조모를 가르쳐 주더니 날보고 이제 여기에 맞춰서 노래를 하라고 권했다. 세르비아말을 못해서 안된다고 하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한국말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구슬레의 미래에 대해서 그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나한테는 구슬레 시가의 본질에 대한 작은 깨달음의 계기도 됐다. 구슬레가 없어진다면 세르비아의 매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듯 하다.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구유고 음악 2 : Prljavo Kazalište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이 같은 유연한 자세로 인해 그 치세 하인 60년대부터 많은 록 밴드들이 연방내 각 공화국에서 나타났다. Time, Parni Valjak, Azra(크로아티아), Korni Grupa, Idoli, Riblja Corba (세르비아), Indexi, Bijelo Dugme(보스니아), Buldožer (슬로베니아), Leb i Sol (마케도니아) 등의 음악적 성취는 영미권에 비해, 영향은 받았을지는 몰라도 질적으로 꿀릴 것도 없었다는 것이 평이다. 실제로 70년대 활약한 Time, Korni Grupa 등은 유럽풍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상당히 음악적으로도  진취적이다.

곁가지지만 90년대를 풍미한 Nirvana의 베이스 주자 Chris Novoselic(대충 한국사람 사이에서는 노보셀릭이라고 불렸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노보셀리치가 맞다)도 재미 크로아티아인에게서 태어난 크로아티아인이다. (이 양반, 90년대 중 이름도 Chris에서 Krist로 크로아티아식으로 바꿨다. 크로아티아말도 잘 한다고 한다.) 80년대 10대 당시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친척집에서 머물면서 Azra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를랴보 카잘리슈테Prljavo Kazalište(더러운 극장이라는 뜻, 이하 PK)는 1977년 자그레브에서 결성된 록밴드다. 롤링 스톤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 PK는 당시에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뉴웨이브 등을 수용,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을 이끌었다. 초기 출세작 Crno Bijeli Svijet(흑백 세상)는 완연한 스카 펑크록이다.

PK의 대표곡인 흑백 세상. 초기 프론트맨 다보린 보고비치Davorin Bogović는 밴드 결성 당시 롤링스톤즈 풍의 노래를 빠르게 불렀더니 그걸 세상사람들이 '펑크'라고 부르더라라고 술회했다.

이 밴드는 크로아티아 독립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1988년 발표한 Mojoj Majci : Ruža Hrvatska (어머니에게 : 크로아티아의 루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크로아티아 청년층의 열기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루쟈는 밴드의 리더 야센코 호우라Jasenko Houra의 엄마 이름인데, 이것을 크로아티아와 빗대어 노래함으로써 중의적이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은 음악적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가사는 대충 이렇다.

<밤늦게 그녀의 방에 소리죽여 들어가네,....문 닫는 소리 크게 날까 두려워하면서, 방에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Ruža가 잠들어 있고...... 만약 그녀가 없다면 누가 아침에 나를 깨울까. 만약 그대가 없다면 나는 잘 알지. 그대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장미여 나의 장미여. 나는 그대 때문에 밤새워 우네..... (중략)>

건전가요도 아니고 반항의 대명사 록음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약간은 아이러니 한데, 당시는 그게 또 먹힐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특수성이다. 1989년 10월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에는 30만명이 모였다. 자그레브의 인구가 80만 남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크로아티아 문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이다. U2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연상시키는 이 공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아레나록이 아니라 체제전환 광장록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당시 기록영상은 크로아티아가 얼마나 새시대를 열망했는지, 또 미지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시대는 더 없이 추악한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그걸 아직 몰랐다.

1989년 공연에서 부른 Ruža Hrvatska : 광장의 열기를 확인하려면 이 비디오

이건 앵콜로 다시 부른 Ruža Hrvatska : 크로아티아 청년들의 표정을 보려면 이 비디오

어쨌거나, 결성 30년을 넘어선 이 밴드의 음악적 경향은 초기에 비해 팝스러운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 2000년대 나온 노래 중에서  초기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Smeđi Šečeru(흑설탕)는 듣기에 흥겹고 즐겁다.


어쨌거나 민족밴드?국민밴드로 거듭난 PK가 2012년 들어서는 26년만에 처음으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Ruža Hrvatska를 불러, 크로아티아-세르비아간의 대결의식이 무뎌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뉴스가 됐으니, 또 그 세월이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