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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구유고의 음악 6 :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Klapa

오늘날 크로아티아 해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달마시아에는 클라파Klapa라는 남성중창 전통이 발달해 있다. 한참 관광시즌 때 자다르, 쉬베닉, 트로기르, 스플릿, 두브로브닉 등의 해변도시를 걷다보면 이들 남성 중창단을 심심치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라파 합창단. 위 밴드가 클라파 캄비Klapa Cambi 아래쪽이 클라파 인트라데Klapa Intrade다.

처음 들어보면 '일 디보'Il Divo가 부르는 칸쪼네?같은 느낌이 문득 드는데, 이것이 사실은 크로아티아 고유의 음악이다. 칸쪼네 냄새가 강하게 베인 것은 아무래도 베니스가 달마시아를 상당히 오랫동안 지배한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개의 서양음악이 그렇듯 시작은 교회음악이다. 아무래도 해변마을 가난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모인 미사에서 성대한 오케스트라를 초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대체적으로 암마추어들 중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모아서 성가를 부르면서 미사를 집전했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할 사람이 없다보니, 당연히 무반주 아카펠라다. 

클라파 중창단이 교회에서 아카펠라로 합창하는 모습. 

이 같은 교회음악의 전통은 슬라브족의 전통적인 민속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달마시아 산구석이나 인근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양가죽 백파이프, 지난 번에도 소개한 적인 구슬레 음악이 남아있다. 

카톨릭 교회, 예수회, 프란체스코회 등의 카톨릭 조직들은 이런 원시족 슬라브족에게 그레고리안식의 음계와 화성을 전했다. 그것이 민간에 스며들어 만들어진 것이 클라파인 것이다.  서양음계를 갖춘 다성합창이다 보니,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의 성부가 다 있지만, 오페라나 성악의 발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중심의 음악이다.

서양음계를 받아들이고 다성으로 소화했다고 해서, 클라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희한하게 단조 노래가 없다. 웅장함과 슬픔을 대변하는 조성이 없다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하지만\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를\ 보면 그럴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파란 하늘, 이 파란 바다, 이 아름다운 자연풍광에서 슬픔과 심각함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달마시아의 생활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달마시아를 오랜 기간 경영했던 베니스의 기본 방침은 '착취'에 가까웠다. 식민지 백성들이 '학자 보다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베니스는 의도적인 궁핍화 정책을 추구화했다. 그나마 달마시아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유고슬라비아 당시 해외여행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다음이니,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슬라브의 우수는 어디가고 어찌 찬가만 남은 셈인지 모르겠다.

달마시아 어느 해변 정경. 우리에게 떠오르는 노랫말은 '근심을 접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다.

가사는 주로 하늘, 바다, 태양, 포도주, 동네 일상사 등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소갯말에는 짝사랑, 슬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허나 조성이 영 딴판이니 믿기 어렵다.

유네스코는 나 같은 문외한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러 저러한 음악적 이유로 2012년 클라파 음악을 유네스코 무형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그 설명은 여기로) 보통 문화유산 쯤 되면 대다수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징표도 될 법한데, 클라파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아마추어 및 프로 클라파 중창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실력있는 밴드들은 어딜가나 매진이다. 달마시아의 오미쉬Omiš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클라파 페스티벌이 성대하게 개최되어, 실력있는 합창단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클라파 캄비의 '좋은날'Dan Ljubezni. 클라파 가사의 상당수는 달마시아 사투리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지금은 달마시아가 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이지만, 원래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 주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의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시아가 모여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가 된 것이다. 그만큼 달마시아와 자그레브 중심의 크로아티아 본토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크다.  


현재 크로아티아에서 클라파 음악은 전통적인 무반주에서 벗어나 전통악기 탐부리차, 기타, 베이스 등이 가미되어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 최근에는 남성 일색 클라파 합창에 여성중창단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단조 클라파 합창곡이 나오는게 다음 순서가 아닐까 한다. 

클라파 인트라데의 '크로아티아여, 맘으로부터 너를 사랑해'Croatio iz duše te ljubim. 달마시아가 아무리 크로아티아 본토와 문화적 차이가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분리주의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파 인트라데가 부른 이 애국적 크로아티아 찬가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2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붕괴

1928년 크로아티아의 거물정치인 라디치의 암살로 인해 촉발된 위기에서 알렉산다르 왕은 결국 6개월의 장고 끝에 1929년 1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다.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대세르비아를 추구할까라는 개인적 망설임을 묻어버리고 왕국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왕정 독재자로서 알렉산다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행정구역 개편이다. 왕국내 기존까지 통용됐던 역사적 경계를 다 지워버리고 주요 강이름을 기반으로 바노비나Banovina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요 구성민족 명칭을 썼던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e으로 바꿨다. 왕국의 애칭 또는 별칭 정도로 쓰이던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어가 공식적인 국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 주도하는 국민통합의 첫걸음이었다.

1929년 새로 개편된 행정구역체제. 슬로베니아가 이름을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의 전통적 경계가 없어졌다. 크로아티아의 반Ban 제도에서 비롯된 바노비나Banovina라는 없던 단어를 만들어서 광역지방의 단위로 썼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민통합 드라이브가 걸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참외에 줄을 그어넣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 세르비아 민주당과 같은 주요 야당 정당지도자들은 투옥 또는 가택연금되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이같은 통합 조치는 오히려 왕국내 세르비아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왕국내 다른 민족들의 반발도  심해졌지만, 왕의 전횡이 강해지면서 세르비아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반발과 원망이 누적된 끝에, 1934년 알렉산다르 왕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되고 만다. 암살을 직접 시행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무장테러단체인 IMRO. 그 배후에는 무솔리니 치하 이태리에 결집한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우스탸샤Ustaša가 있었다.

알렉산다르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페타르는 11살의 미성년자였다. 정부는 부랴부랴 영국에서 사촌 파블레Pavle 왕자를 섭정Regent으로 불러와서 왕세자가 성인이 될때까지 임시적으로 왕권을 맡겼다. 생각지도 않은 왕권을 물려받은 파블레공은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항구적인 솔루션을 원했다. 왜?

무엇보다 국제정세가 불안했다. 1차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신생 세르비아의 앞을 막아선 거대제국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더 크고 험악한 독일 제3제국이 나타났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괴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까지 다가오자 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거기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달마시아 지역을 노렸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에 접근해서 왕국의 균열을 도모했다. 파블레공으로서는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크로아티아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938년에는 이 같은 섭정의 뜻에 따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과 왕국의 내무부장관(후에 수상)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Dragiša Cvetković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속됐다. 그 결과 나온 것이 1939년 8월의 '대타협'Sporazum이다. 핵심 골자는 크로아티아에 자치권autonomy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외부와의 협상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던 크로아티아와 폭력으로 나라를 만들어왔던 세르비아 간의 타협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39년 대타협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크로아티아, 즉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e의 지도. 크로아티아는 연청색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오늘날 보스니아(날줄로 표시)를 먹고들어 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나? 아쉽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사단은 1941년 파블레가 히틀러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이의 추축국 동맹Tripartite Pact에 가입하면서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독일을 싫어한데다, 타협주의적인 섭정을 싫어했던 군부 민족주의자들이 (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노발대발, 41년 3월 곧바로 유고슬라비아로 짓쳐들어갔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왕국의 군대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왕국을 점령한 독일은 곧바로 왕국의 해체에 돌입한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우스타샤에게 넘겨 독립크로아티아NDH를 만들고, 세르비아에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대타협을 성사시킨 크로아티아 농민당 마첵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소년왕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왕가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민족간의 '대타협'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1941년 히틀러를 만난 파블레공.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친영 성향이 강했지만,  영국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왔다. 

이 '대타협'이 몇년 만 더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그 이전에 알렉산다르 왕이 크로아티아와 분리했었더라면, 아니면 더 이전에 왕국이 만들어질 때부터 중앙집권이 아닌 연방제를 염두에 뒀더라면....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후세 사가들 조차도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만큼 유고슬라비아에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대타협' 자체는 민족간 화합의 단초이자 재난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가장 극명한 단초로 '대타협'에는 보스니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당시의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인들은 무슬림들이 별도의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무슬림은 종교 범주고 민족 범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시의 생각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귀의한 크로아티아인 아니면 무슬림이 된 세르비아인'이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결국 무슬림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며, 따라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하나의 나라로서 역사적 뿌리가 부족하다는  인식으로 연계된다.

나중에 이런 인식은 1990년대 유고 내전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원인이 됐다. 후일 1990년 크로아티아의 투지만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어떻게 두 민족 간에 유고슬라비아를 갈라먹을 것인가를 논의했다고 한다. 워낙 동상이몽이었지만 이 두 정치지도자들의 머리 속에는 39년 '대타협'이 들어있었던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보스니아가 90년대 유고 내전의 중심전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당시에 대타협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이런 것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지도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내파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레퍼런스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유고슬라비아의 해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2013년 3월 15일 금요일

구유고 음악 2 : Prljavo Kazalište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이 같은 유연한 자세로 인해 그 치세 하인 60년대부터 많은 록 밴드들이 연방내 각 공화국에서 나타났다. Time, Parni Valjak, Azra(크로아티아), Korni Grupa, Idoli, Riblja Corba (세르비아), Indexi, Bijelo Dugme(보스니아), Buldožer (슬로베니아), Leb i Sol (마케도니아) 등의 음악적 성취는 영미권에 비해, 영향은 받았을지는 몰라도 질적으로 꿀릴 것도 없었다는 것이 평이다. 실제로 70년대 활약한 Time, Korni Grupa 등은 유럽풍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상당히 음악적으로도  진취적이다.

곁가지지만 90년대를 풍미한 Nirvana의 베이스 주자 Chris Novoselic(대충 한국사람 사이에서는 노보셀릭이라고 불렸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노보셀리치가 맞다)도 재미 크로아티아인에게서 태어난 크로아티아인이다. (이 양반, 90년대 중 이름도 Chris에서 Krist로 크로아티아식으로 바꿨다. 크로아티아말도 잘 한다고 한다.) 80년대 10대 당시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친척집에서 머물면서 Azra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를랴보 카잘리슈테Prljavo Kazalište(더러운 극장이라는 뜻, 이하 PK)는 1977년 자그레브에서 결성된 록밴드다. 롤링 스톤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 PK는 당시에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뉴웨이브 등을 수용,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을 이끌었다. 초기 출세작 Crno Bijeli Svijet(흑백 세상)는 완연한 스카 펑크록이다.

PK의 대표곡인 흑백 세상. 초기 프론트맨 다보린 보고비치Davorin Bogović는 밴드 결성 당시 롤링스톤즈 풍의 노래를 빠르게 불렀더니 그걸 세상사람들이 '펑크'라고 부르더라라고 술회했다.

이 밴드는 크로아티아 독립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1988년 발표한 Mojoj Majci : Ruža Hrvatska (어머니에게 : 크로아티아의 루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크로아티아 청년층의 열기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루쟈는 밴드의 리더 야센코 호우라Jasenko Houra의 엄마 이름인데, 이것을 크로아티아와 빗대어 노래함으로써 중의적이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은 음악적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가사는 대충 이렇다.

<밤늦게 그녀의 방에 소리죽여 들어가네,....문 닫는 소리 크게 날까 두려워하면서, 방에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Ruža가 잠들어 있고...... 만약 그녀가 없다면 누가 아침에 나를 깨울까. 만약 그대가 없다면 나는 잘 알지. 그대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장미여 나의 장미여. 나는 그대 때문에 밤새워 우네..... (중략)>

건전가요도 아니고 반항의 대명사 록음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약간은 아이러니 한데, 당시는 그게 또 먹힐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특수성이다. 1989년 10월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에는 30만명이 모였다. 자그레브의 인구가 80만 남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크로아티아 문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이다. U2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연상시키는 이 공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아레나록이 아니라 체제전환 광장록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당시 기록영상은 크로아티아가 얼마나 새시대를 열망했는지, 또 미지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시대는 더 없이 추악한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그걸 아직 몰랐다.

1989년 공연에서 부른 Ruža Hrvatska : 광장의 열기를 확인하려면 이 비디오

이건 앵콜로 다시 부른 Ruža Hrvatska : 크로아티아 청년들의 표정을 보려면 이 비디오

어쨌거나, 결성 30년을 넘어선 이 밴드의 음악적 경향은 초기에 비해 팝스러운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 2000년대 나온 노래 중에서  초기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Smeđi Šečeru(흑설탕)는 듣기에 흥겹고 즐겁다.


어쨌거나 민족밴드?국민밴드로 거듭난 PK가 2012년 들어서는 26년만에 처음으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Ruža Hrvatska를 불러, 크로아티아-세르비아간의 대결의식이 무뎌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뉴스가 됐으니, 또 그 세월이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도 보여줬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3 : 엔터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크로아티아에서는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으니, 우스타샤Ustaša(봉기라는 뜻이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계 출신으로 세르비아가 헤게모니를 쥔 유고슬라비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골수민족주의자였다. 이들의 대외적 표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작 크로아티아에서 정치적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이태리에서 무쏠리니의 비호를 받는 과격테러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 암살 사건 이후에는 이들의 관여가 문제가 되면서 비호라기 보다는 감금 상태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쥐구멍 같은 이들의 처지에도 쨍하고 해뜰날이 있었으니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히틀러가 194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생긴 공백에 크로아티아에 이들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권을 앉혔다. 개선장군 처럼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부정하고 독립크로아티아Nezavisna Dražava Hrvatska, NDH 를 세웠다.

무쏠리니와 사열 중인 NDH 수령Poglavnik 안테 파벨리치 : 나찌 코스프레가 완연하다. 히틀러의 외부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그대로 계승했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로버트 카플란 등 일부 논자들은 나찌즘의 연원을 발칸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청출어람?

졸지에 생각도 않던 독립을 했으니, 1941년 초기만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권이 독립국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었다. 결국 나라를 둘로 나눠서 독일과 이태리의 영향권을 인정했으니, 우스타샤는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력이 아니고서는 유지가될 수 없는 정권이었다.

NDH의 판도 : 세르비아는 독일이, 몬테네그로는 이태리가 점령하고 남는 땅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합쳐서 NDH가 성립했다. 나라를 둘로 가르는 회색선 위쪽은 독일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 아래쪽은 이태리의 영향권이 됐으니, 독립국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해변가는 이태리에게 양도했으니 달마시아를 둘러싼 이태리의 야심은 그야말로 유구하다.

우스타샤는 독일의 열등민족 박살정책을 계승하여, 영내 유태인과 집시들을 박멸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구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형성된 발칸의 유태계 사회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다. 여기까지 나찌가 정해놓은 표준화된 이민족 혐오에 더해 우스타샤는 자기만의 색채를 더했는데, 그것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박해였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성호를 그려보라고 해서 카톨릭 성호가 아니면 즉결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톨릭으로 강제개종을 시키거나 혹은 개종을 시켜준다고 해놓고는  한자리에 모인 세르비아계 마을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잔학상은 학살의 원조인 나찌 독일군조차 아연해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우슈비츠 등을 본딴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를 세워놓고 공장형 학살을 자행했다. 이 악명높은 수용소에서는 많게는 70만, 적게는 2만 정도의 인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은 쪽으로 갈수록 세르비아, 낮은 쪽으로 갈수록 크로아티아 쪽의 주장이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약 3년 반 가량의 운영기간 중 야세노바츠에서는 약 77,000-90,000명 가량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는 곡물다발을 자르는 농기구였던 이 도구를 우스타샤들은 세르비안 커터srbosjek라고 명명하고, 사람잡는 도구로 썼다. 다소 작은 외양과는 달리 치명적 도살 도구였는데, 사람의 멱따는데 경동맥을 끊는데 효율적으로 만들어졌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는 이것으로 사람잡는 경진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때때로 인간의 잔인함은 그 많은 고어 무비나 잔혹극에서도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자료원 : Wikipedia, srbosjeck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숫자를 두고 로버트 카플란은 유고슬라비아 만큼 2차대전 역사가 청산이 안된 나라가 없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NDH는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더이상 추락하기 어려운 밑바닥인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나온 이야기로는 우스타샤은 영내 세르비아계의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내고, 1/3은 절멸시킨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을 깊은 의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생적 기반이 없던 우스타샤의 운명은 2차대전의 성패와 직결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의 전선이 크게 위축되면서, 우스타샤 역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이 임박하자, 파벨리치는 로마, 나폴리 등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암살자를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다가 1957년 스페인에서 병으로 죽었다. NDH군은 같은 달 오스트리아쪽으로 도주, 유고슬라비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기차에 태워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되돌려 보냈고, 빨치산은 이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3만 명 정도가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leiburg 학살)

2차대전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이렇게 처참하고 험악하게 끝났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는 이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회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억압은 됐을지언정,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우스타샤의 일부는 해외로 도망을 나가 미국, 캐나다, 남미 등지에서 웅크리고 살았다. 이 사람들의 후손들이 나중에 크로아티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크로아티아의 역사 12 : 세르비아와의 동침

1차 대전이 끝난 후 이러저러한 요행수와 우여곡절로 발칸의 맹주로 성장한 세르비아. 19세기에 갓 독립한 나라로서는 눈부신 팽창이 아닐 수 없었다.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을 대내외에 선포는 했지만, 세르비아의 통치 및 국가관리 능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토만 터키에게 500년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한 사회제도가 없이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가부장적 대가족Zadruga 중심으로 살았다. 문맹률은 높고 그나마 교육시켜놨던 대학생들은 몇번의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근대적으로 훈련된 관료들은 적었으며, 민주주의의 전통은 물론 귀족들간의 대의의 관습도 없었다.

언어가 동일했지만,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기질과 역사. 레베카 웨스트의 Black Lamb and Grey Falon을 보면, '크로아티아는 변호사를 길러냈지만, 세르비아는 군인을 키웠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Pacta Conventa부터 시작해서 크로아티아는 주로 외부 민족들과의 '계약' 또는 '협정'을 통해서 국체를 지켜왔다. 면면한 Sabor의 전통도 있어왔고... 그러나 세르비아는 오토만에 폭력으로 망했고, 폭력으로 오토만을 도왔으며, 폭력(1804년과 1817년 봉기)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같은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동방정교와 카톨릭간의 관계는 기독교/무슬림의 관계 못지 않게 나빴다. 역사적으로도 차라리 무슬림들보다 서로 비슷한 이 두 종교간의 증오가 더욱 뿌리깊었다는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이렇게 안맞아도 한참 안맞는 나라에 크로아티아가 편입됐다. 크로아티아인들이 느끼게 될 이질감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합병이 처음부터 마땅치 않았던 라디치는 공화정과 독립을 요구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왕정이 이런 주장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1921년 수립한 왕국의 헌법에는 크로아티아가 그 오랜 세월을 지켜왔던 Ban과 Sabor 제도가 폐지됐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라디치는 결국 왕국의 의회에 참여하기로 한다. 역량이 모자란 세르비아 통치체제를 배경으로 최대야당으로 올라서게 되고, 세르비아 민주당과 연합하면서 세르비아 골수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긁어놓는다. 그런데 옐라치치 이래 거의 처음으로 크로아티아 민족의 총의를 대변한 이사람이 1928년 회기 도중 몬테네그로 출신의 동료 의원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의회 암살 :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스톄판 라디치 말고도 두명이 더 죽었다. 라디치의 장례식은 크로아티아에서 '국장'인 것 마냥 진행됐다. 이 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라디치를 '우리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으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불신과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의회정치로는 답이 안보인다고 생각한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I은 결국 1929년 1월 헌법을 정지, 의회를 해산시키고, 왕정독재를 선포한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라 이름도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바꿨다 (유고슬라비아는 남(Jug) 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라디치를 각별히 아끼고, 총격사건 이후 그 병실까지 지켰다는 이 왕으로서는 바닥에서 돌아가는 일에 솔직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왕마저 몇 년 후인 1934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다....

알렉산다르1세 암살사건 : 불가리아계가 많은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들이 일으켰지만, 이에는 후에 등장할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 우스타샤Ustaša가 관여되어 있었다. 곁가지로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는 이 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를 보고 유고슬라비아를 찾았고, 20세기 기행문학의 걸작 Black Lamb & Grey Falcon을 남겼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지속적인 소요와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짧은 왕국의 역사에서 천수를 누린 왕 자체는 두 사람 밖에 없고, 쿠데타로 쫓겨나던가, 암살 당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겪었으니 권력기반 자체가 심히 불안불안했다.

안그래도 내정도 불안한데, 외정 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파시즘이 급속도로 퍼졌고, 신생 독립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앞에는 먹구름 뿐이었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1 : 1차대전과 남슬라브족의 나라

제국의 교묘하고도 노회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이웃의 발칸 민족들과 더불어 점점 더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 되어 갔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터키의 청년터키혁명Young Turk Revolution에 자극을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탄하자, 그 동안 헝가리 측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왔던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대거 반정부로 돌아서는 효과가 났다. 정치재판, 회유 어떤 수를 써도 크로아티아 의회에서는 헝가리가 나오는 대로의 선거결과가 나오질 않았고, 결국 1912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라디치 등의 요인들을 잡아들였다.

거기에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등이 1차 발칸전쟁Balkan War을 일으키고, 또다시 오토만 터키군을 패퇴시키자 발칸의 전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1913년 전후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2차 발칸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패하자 세르비아는 영토를 거의 두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발칸을 노리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복장터질 일이었다. 어떻게든 세르비아를 손을 봐줘야 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는 가운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1914년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Arch Duke Ferdinand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Gavrilo Pricip에게 암살을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주권국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의 통첩을 때리고 전쟁에 돌입했고, 복잡하게 맞물린 국제정세에서 이는 연쇄반응을 거쳐 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장면 복원도 : 비스마르크의 예언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발칸에서 난리가 날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 난리가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물론 황태자의 암살이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사건은 우연에 우연, 오판에 오판, 실수에 실수, 주로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결과는 대비극.
자료원: http://www.znanje.org/i/i23/03iv05/03iv0502/html/sarajevski_atentat.htm

이런 국제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의 처지는 장기판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191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앙땅뜨 국가Entente Powers들은 런던에서 모여,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북달마시아 양도를 조건으로 이태리를 꼬드겼다. 이태리는 이 미끼를 물고 곧바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혼란기에 제국에 염증을 느낀데다, 앙땅뜨 국가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염려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지사들이 1915년 파리에서 유고슬라브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결성, 앙땅뜨 국가들에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로비하기 시작한다. 

유고슬라브위원회는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도 이들의 노선을 두고 크로아티아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과연 민의를 대표하지 않는 일개 사설조직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 크로아티아로서는 선택지 자체가 많지 않았다. 중립을 지키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편을 선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어차피 견마의 노력은 1848년에 이미 했고, 그 결과 돌아온 것은 배신 밖에 없었다. 

1918년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센트럴 국가들이 패전하면서 결국 제국은 붕괴됐다. 100년묵은 여우보다 더 오래 유럽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합스부르크 황가도 망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1918년 10월 800년을 이끌어온 헝가리와의 관계를 종식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을 선언한들 나라를 지킬 힘은 없었다. 1818년 11월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왕가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도합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를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도 : 1차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로 인해 가장 커다란 이득을 얻은 것도 세르비아였다. 불가리아, 헝가리가 당초 센트럴 국가들과 붙어먹는 바람에 이들로부터도 국토를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세르비아의 땅이 엄청 넓어졌다. 사회주의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지도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으니,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와 해변의 몇몇 도시가 1차대전의 또다른 승전국 이태리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생긴 차이다.
* http://news.bbc.co.uk/2/hi/europe/7251376.stm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하나의 방향으로 갈피를 잡기 어렵다.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독립을 원했으나, 속아서 왕국에 편입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서 독립을 추진할 수단과 토대가 전혀 없었다. 유고슬라브위원회처럼 남슬라브족의 연합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일부 오스트리아 충성파 장교들 처럼 제국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희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주어진 왕국에서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을 최대한 얻어내려는 세력이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정치거물이자 민족지도자 격인 라디치는 바로 이 세번째 세력이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줄다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0 : 세기말의 발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1848년은 정치적으로 크로아티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을 표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결과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헝가리의 입김과 압력은 더 세졌다.

이때 크로아티아를 이끌었던 민족지도자가 바로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농민당Hrvatska Pučka Seljačka Stranka을 결성했다. 농민당... 제대로된 산업화의 과정도 없었고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던 크로아티아의 처지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레베카 웨스트는 라디치의 비전과 정책이 크로아티아의 미래를 대변하기에는 불완전하고 부정합적이라고 봤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처럼 문명의 변방에서 허덕이던 사회에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라디치. 크로아티아 쿠나화에도 올라온 위인이다. 200쿠나는 우리 돈으로 약 40,000원 정도

라디치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각축이 가열차게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세계 다수의 민족들이 기왕의 독립조차 빼앗기던 시기에 라디치의 외로운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될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대로 발동걸린 제국주의가 발칸반도 소수민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기도 했다. 가장 커다란 계기는 오토만 터키의 패퇴였다. 19세기 초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이 러시아 제국 등의 암암리의 지원을 받아 봉기, 오토만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한다.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데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슬라브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유럽의 열강들이 모여서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특히 러시아가 몬테네그로 등을 통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들에게는 악몽같은 일이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나온 해결 방안이란 발칸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키는 것. 이 참에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정식 독립을 쟁취하고, 불가리아가 오토만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토만 터키의 주권을 인정한 가운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경영하게 되니, 정치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

1900년의 유럽: 군웅할거의 독일이 통일되면서, 지도가 지극 간단해졌다. 하지만 발칸에서는 없던 나라들이 생겨났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발칸이 민족분쟁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였다. 제국과 제국들의 욕심과 지배욕이 중첩되고, 거기에 신생국들의 민족적 열망이  겹치면서 휘발성이 높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를 주도했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만약 유럽에서 또다른 전쟁이 있을 것이라면, 발칸의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될 것'If there is ever another war in Europe, it will come out of some damned silly thing in the Balkans.(자료원 : wikiQuote) 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 예지력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 스스로가 이런 구도를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9 : 민족? 어느 민족?

18세기부터 징조가 보이더니 유럽에서는 19세기 들어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지난 회차에서 다뤘던 옐라치치, 코슈트, 서로 다투기는 했지만 모두 거대 제국 하에 눌려있던 변방 민족들의 바램을 담아낸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같은 민족주의라고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에서의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언어와 혈통의 고립점으로 남아있던 헝가리와는 자못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19세기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직접적 타겟은 헝가리였다. 이같은 경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이 있고 난 다음에 더 심해졌다. 그렇다면 헝가리와 맞서는 우리 민족은 무엇인가? 즉, 누구를 아(我)로 놓고 누구를 비아(非我)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크로아티아의 경우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와 비아를 가르는 투쟁이 계속됐고,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됐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오스트리아, 터키, 헝가리 등으로부터의 차이점에 주목한 19세기 초 일리리안 운동Illyrian Movement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 족이 당초 원주민인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정착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아이러니 한 이름이지만, 이 운동의 창시자(류데빗 가이Ljudevit Gaj)는 운동을 통해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의 단합을 생각했다. 언어공동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남슬라브족은 동일민족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19세기초 오토만 터키에 대한 봉기를 통해 자치(또는 실질적 독립)를 획득했다.

이러한 방향의 움직임은 당시 고개를 들던 범슬라브주의 유행과도 궤를 같이 했지만, 운동 추진체의 실행력이나 현장의 사정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분한 민족주의 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황가에 대항적인 면모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이 운동의 특이한 단면이다. 한마디로 농촌이나 현장과는 격리된 인텔리들의 공상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오토만이 퇴조하자 슬슬 불손해지기 시작한 헝가리를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변방의 슬라브 민족주의를 용인하지 않았을까. 서로 의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제국이든 이이제이는 살아있는 준칙이었다. 실제로 제국에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민족주의를 억누르는 데 앞잡이 역할을 했다. 헝가리가 패퇴하자 그 용도도 없어지고, 슬라브 민족주의 운동도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금지는 됐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크로아티아 더 넓게 남슬라브족의 역사에 커다란 저류이자 영향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심의 움직임에 대한 구심의 반작용도 있었다. 주변 남슬라브족과는 별개인 크로아티아 민족의 정체성을 주창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조를 이끌었던 인물(안테 스타르체비치 Ante Starčević)들은 세르비아와의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 역시 또다른 저류로 크로아티아 역사에 도저히 흐르게 된다.

왜 이런 흐름이 생겼던 것인가? 가장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19세기 초 세르비아가 오토만 제국에 대한 두차례의 거국적인 봉기를 통해서 실질적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남 슬라브 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세르비아의 궐기는 앞으로 크로아티아에게 새로운 경계의식을 일으키게 된다.

이 두가지 흐름, 전혀 반대방향의 사조는 크로아티아 역사(더 나아가 이웃의 남슬라브 국가들의 역사)에서 음과 양 같은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사족같은 말이지만 일리리아 운동을 주창했던 류데빗 가이는 부계는 슬로바키아, 모계는 독일계이고, 순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대표주자 스타르체비치는 아빠가 크로아티아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세르비아 사람이다. 결국 혈통과 삶보다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 셈이니, 이것도 결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이 내포한 미망의 시작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2013년 3월 6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8 : 빛나는 예외, 두브로브닉

초기에 잠시 반짝하던 때를 제외하고 적어도 19세기까지 크로아티아의 역사에서 해뜰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한 민족의 쟁투를 놓고 봤을 때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생존자로서 역사의 투쟁에서 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모든 구석이 고투 속에서 역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으니, 그 예가 바로 라구사Ragusa 공화국이다. 오늘날 두브로브닉Dubrovnik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도시 국가는 크로아티아가 악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베니스, 제노아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두브로브닉 올드타운의 전경, 우리나라에서 고현정씨가 커피믹스 광고를 찍어면서 유명해졌다.

이태리 쪽에 비해서 훨씬 더 투명하고 맑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변에 위치한 이 중세도시는 오토만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에도 지중해 무역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베니스, 헝가리, 오토만 등 주변 열강들의 움직임에 따라 속국을 자처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외세의 실질적 지배를 허용했던 적이 없었다. 몽매한 군주가 나오면 한큐에 역사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던 문명의 경계선에서, 라구사 공화국이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공화정 정치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경이롭다할 수 있을 것이다.(사가들은 도시 자체는 한 7세기 정도부터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외교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외적들의 위협을 돈으로 무마할 수 있을 만큼 재력도 튼튼한데다 사진에서 보듯이 성곽도 튼튼해서 쉽게 공략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베니스가 오토만과의 쟁패로 점점 내리막을 걷고 있을 때도, 이들은 오토만, 헝가리, 베니스 등과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이 잘 나가던 공화국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으니, 17세기 중엽 지진으로 인해 통령관저 등 대다수의 주요건물들이 무너지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오늘 날 올드 타운의 모습은 그 이후 복구된 모습인데, 안타깝게도 왕년의 영화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둘째, 주요 교역대상인 중국, 오토만 문명이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신대륙, 신항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 상황에서 지중해 무역은 과거 프레스티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근대적인 무기체계의 발명으로 인해 높은 성곽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남은 건 외교술인데 주둥이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면, 세상에 망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 

두브로브닉 성당이다. 카톨릭 역시 라구사와 크로아티아를 엮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에 성문을 열면서 라구사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다음부터 달마시아의 일부로서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들 라구사 사람들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구는 슬라브 계통이 다수였지만, 지배계급은 라틴어나 라틴계 지역방언을 사용했으며, 원로원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배계층의 이런 생각에도 불구, 라구사 공화국 전성기인 16세기, 지배층의 일원인 이반 군둘리치Ivan Gundulić가 크로아티아어로 장편서사시를 만들었으니, 크로아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1990년대 유고가 붕괴되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몬테네그로 출신의 민병대가 두브로브닉에 포격을 가하면서 국제사회가 공분한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유적에 대포를 쏜다는 것이 너무 야만적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폭격으로 갈아업다시피한 크로아티아의 또다른 도시 부코바르Vukovar와 달리, 두브로브닉에 대한 공격은 조기에 중단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이건 도시건 이쁘고 봐야할 일이다. 

2013년 3월 5일 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7 : 귀신들린 해 1848년

18-19세기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유럽 구석구석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자각, 산업국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계급적 자각 등이 버무려진 혼돈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유럽지도는 점점 간단해졌지만, 속사정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드디어 1800년대 유럽지도 : 이전에 나온 지도들에 비해 (통일되지 않은 독일만 빼놓고) 엄청 간단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드리아해를 주름잡던 베니스까지 잡아 먹은 모습이다.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오토만 터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이 철저한 반동정치로 회귀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압박과 압력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열망이 응축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산주의의 귀신이 유럽을 활보하고 있다고 전했지만, 분명 유럽을 괴롭힌 귀신은 공산주의 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구석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각종 사상과 주의 주장들이 나타나면서 1848년은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든 것 처럼 전 유럽이 무병을 알았다. 

반동정치에 앞장섰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집약됐는데, 보헤미아, 헝가리, 이태리 등 각 속령에서 반란이 속출하는 가운데 비엔나에서 마저 봉기가 일어나,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합스부르크 황가 역시 또다른 위기를 맞았다. 가장 커다란 도전은 제국에서 최대다수의 피지배민족인 헝가리의 봉기였다. 러요쉬 코슈트Lajos Kosuth를 위시한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황가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포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도 민족주의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거셌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자신의 민족적 입장을 대변할 만한 인물로 오토만 터키 국경에서 오스트리아 장교로 활약하던 요십 옐라치치 Josip Jelačić(1801-1859) 대령을 반Ban으로 선출한다.

요십 옐라치치 :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특별구를 주활동 무대로 했던 이 사람은 부하들의 절대적 신망을 받았다. 반이 될 때까지만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입장은 헝가리에 비해 훨씬 요구사항이 온건했는데, 요체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동등하게 3중왕국Triune Kingdom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합스부르크가 약해질대로 약해졌을 때 헝가리와의 연합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헝가리는 아예 크로아티아를 자신의 속령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헝가리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과거의 전례로 보아, 크로아티아를 자신과 동등한 민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알량한 자존심이 헝가리 사람들에게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십 옐라치치가 한 일은 합스부르크의 편을 들어 코슈트의 난을 진입하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독립....은 아니라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것... 황제의 명을 받지도 않고 덜컥 헝가리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았다. 헝가리에 들어가서 견마의 수고를 했어도,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장기판의 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가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약탈과 강간 등 오토만 터키와의 오랜 마찰을 통해 체득한 여러 못된 습관으로 인해 크로아티아군의 내부군기까지도 말썽이어서 오히려 헝가리 국민의 결속을 굳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황가의 문제를 풀어준 것은 혁명의 열기가 자국에 까지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러시아 황제. 1849년 러시아 군이 개입하면서 헝가리 독립군이 지리멸렬, 러요쉬 코슈트가 터키로 망명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게 1848년의 혁명은 지금도 항복날에는 아예 맥주를 마시지 않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가 됐다. 개와 말의 노고를 다했던 크로아티아는? 역시 개뿔 얻은게 없었다. 혁명의 열기를 타고 모처럼 제목소리를 냈던 의회Sabor는 다시금 권위와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기기 시작했다. 옐라치치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뇌와 고민을 거듭하다 조로의 길을 걷고, 혁명이 진압된 10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헝가리 문제는 당분간 잠잠해졌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1867년 들어 다시금 입장이 궁해진 합스부르크 황가가 결국 헝가리와의 대타협Ausgleich을 통해, 제국을 비엔나를 수도로 한 오스트리아와 부다페스트를 수도로한 헝가리 2개로 분할한다. 황제만 합스부르크가에서 맞되 두개의 분국은 각자의 의회와 각자의 수도를 가진 2중 제국이 된 것이다. 또 이 때를 기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크로아티아는? 당연히 과거의 관례에 따라 헝가리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니, 한마디로 크로아티아가 쏟아부은 견마의 노고는 없었던 일이 됐다. 헝가리가 벌로 받은 것을 크로아티아는 상으로 받았다는 말도 나왔다. 이 이후부터 크로아티아는 교육 등 여러 면에서 강력한 마자르화Magyarization의 압력을 받게 된다.

때문에 옐라치치에 대해서는 후세 사회주의 정권 등으로부터 '나이브하다'느니, '정치적 둔재'라느니 가혹한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모처럼 민족의 총의를 한몸에 모아낸 이 사나이에 대한 크로아티아인들의 애정은 매우 깊다. 특히 그 이후 계속된 마자르화의 압력 속에서 헝가리와 맞서 싸운 이 사람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유고에서 독립하고 난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의 중심광장을 이 영웅에게 헌정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 동상도 역시 반 옐라치치. 원래 칼을 뻗은 방향이 헝가리 쪽(북쪽)이었는데,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헝가리 정부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남쪽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옐라치치와 동일하게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러요쉬는 나중에 가서 헝가리내 소수 민족을  달래지 못한 것을 가장 커다란 실패로 꼽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아집이 결국은 사단을 만들었지만, 오스트리아 내의 어느 소수 민족도 전략적 사고를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봉헌된 러요쉬 코슈트. 웃긴 이야기지만 부계조상은 슬로바키아계, 모계 조상은 독일계다. 자신은 스스로를 100% 헝가리인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 3월 3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6 : 합스부르크의 팽창

17허망하게 토종 귀족들을 잃어버리게 된 크로아티아의 주변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나타났다. 크로아티아 두가문의 난이 진압된지 10여년이 지난 1683년 오토만의 Grand Vizier인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가 뜬금없이 비엔나를 처들어간 것이다. 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서 비엔나를 겁박하니 합스부르크의 Leopold 황제도 일단 도망가기 바빴다.

1683년 비엔나 포위전 : 이 때보다는 훨씬 뒷 시대에 태어났지만, 모짜르트의 초시대적 히트곡 중에 터키 행진곡이 있다. 모짜르트 시대 오스트리아는 오토만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군악대를 조직해서 전쟁터로 끌고 다녔던 것은 오토만 터키가 처음이라고 한다.
* 자료원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Vienna_Battle_1683.jpg

하지만 거기까지. 

1만명 남짓으로 지키는 비엔나에서 발이 묶이고, 여기에 폴란드, 바바리아 등 독일의 각 왕국에서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역전됐다. 오토만군의 일방적인 패주가 시작되고, 평지에 풍파를 일으켰던 카라 무스타파는 결국 베오그라드에서 참수당했다. 이 때의 패전을 계기로 오토만군 뿐만 아니라 오토만 제국 자체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았고, 이 이후로 유럽의 병신 병자Sick Man of Europe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이후 30년 간에 걸쳐 헝가리를 비롯하여 크로아티아 땅 대부분이 회복되고, 1697년에는 사보이의 오이겐공 Prince of Savoy Eugen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의 젠타Zenta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이제는 오토만이 평화를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1699년 체결된 스렘스키 칼로브치Sremski Karlovci 협정을 통해 오토만 제국은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를 포기하게 되는 바, 오이겐 공은 부다페스트 부다왕궁에 동상을 모실 정도로 초국적 영웅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오이겐공의 초상, 원래는 프랑스 왕궁에서 총신의 자제로 자라났으니 프랑스 사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형제 중에 가장 병약했지만 군문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 자기를 받아준 오스트리아 황제를 위해 진력했다. 비엔나에는 이 사람의 여름별장이던 Belvedere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활약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국토의 상당부분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로 남게된데다가, 크로아티아인들을 이끌만한 대표적 가문도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내세울 만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중앙집권적 행태는 더욱 강해졌고, 거기에 더해서 과거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던 헝가리 귀족들까지 나서서 크로아티아를 헝가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중 왕국 체제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자치를 인정하던 과거 헝가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18세기초 유럽의 세력판도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전세기에 비해 부쩍 커졌다.

베니스의 직할로 다스려진 해변지역 역시 역시 상황은 안좋았는데, 베니스 공화국은 광대한 해상 영토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내재적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 보다는 공산품(베니스)-원자재(식민지) 분업구조를 유지하면서 지역경기를 빈곤으로 내몰았다. 베니스는 정책적으로 식민지에서 학자보다는 군인을 원했고, 군인을 만들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가난의 대중화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크로아티아에서 생산한 소금에 중과세를 부과하면서, 생선의 보관을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던 달마시아 어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과거에는 숲이 울창했던 크로아티아 해안지방이 지금은 팍팍한 돌산 밖에 남지 않은 것이 베니스가 배를 만들 나무를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조달하면서 남벌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뭐 하나 시원한 소식이 없는 가운데도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슴이 끌어오르는 분위기는 자꾸 조성됐는데, 유럽에서도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5 : 나머지의 나머지

오토만 제국이 16세기 초에 들어 모하치 전투 등을 통해 헝가리를 발라버리면서  중부유럽-발칸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이 공고화되는 결과가 나왔고 크로아티아는 바로 문명권의 경계선이자 최전방이 됐다.

기독교 문명의 보루 Antemurale Christianitatis. 1519년에 카톨릭 교황 레오10세가 크로아티아에게 내린 이름이다. 영광스런 이름이지만, 헝가리가 오토만의 매타작으로 지리소멸하고, 국권이 오스트리아 왕가로 넘어가면서 크로아티아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 영광스런 이름 빼고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크로아티아 땅의 1/3가량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인 군사특별구.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어울리는 말은 나머지의 나머지Reliquiae Reliquiarum라는 말이다. 오토만과의 알력, 쉽지만은 않은 베니스와의 교류 등으로 남은 것은 과거의 크로아티아 왕국의 극히 일부 만 남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교황이 했다는 이 말은 자기 땅을 오토만에게 잃어버린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한탄으로 남아 계속 구전됐다.

1600년대 유럽 지도 : 16세기초까지 잘나가던 헝가리가 없어졌다. 헝가리 영토의 반의 반도 안되던 산골짜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흡수한 모습이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고토회복이라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열망보다는 오토만과의 협상을 통한 지역안정을 택했다. 걸핏하면 전쟁이 터지는 이웃나라들과의 알력 속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인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의 귀족들로서는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166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 Leopold I가 오토만과 평화협정Peace of Vasvar을 체결하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합스부르크와의 결별을 꿈꾸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크로아티아에서 그나마 영지를 보존한 즈린스키Zrinski가문과 프랑코판Frankopan가문. 크로아티아에서 반Ban*을 역임하던 니콜라Nikola Zrinski가 이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다 사고로 죽자, 그 동생인 페타르Petar가 그 유지를 이어받았다. 사돈인 프랑코판Frankopan 등과 더불어 프랑스, 베니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밀담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아예 오토만과도 내통할 생각도 했다. 사단이 된게 바로 이 오토만과의 불장난이었으니...세력 확장보다는 만사 귀차니즘에 물들기 시작하던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IV가 이 계획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에게 일러바친다.

안그래도 이들의 거동들이 의심스러웠던 레오폴드 황제는 유럽 최장수 왕가의 일원답게 시간을 놓고 지켜보다가, 1670년부터 헝가리에서 관련자 대량 색출/체포/구금 등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황한 두 가문은 전국적 봉기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읍소 작전. 안그래도 비엔나의 궁정에서도 모든 것을 불고 참회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시그널이 왔다. 1671년 페타르Petar Zrinski와 프란Fran Frankopan이 사태를 수습해보려 비엔나를 들어갔지만 상대는 범유럽 인증 정치9단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변방 촌티나는 귀족들의 말빨이 설리가 없었다. 그 날로 체포되고, 신속한 재판 끝에 참수당했다.

이 두 잘나가던 가문이 멸망은 여러가지 면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에 반향을 남겼다. 크로아티아 출신 귀족들이 망하고, 몰수된 영지는 대부분 독일-오스트리아계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모하치 전투가 끝난 후(1527년) 부터 이 음모가 발각된 때(1670년)까지 크로아티아에는 13명의 반Ban*이 모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가 발각되고 난 직후 부터 60년 간 이 직위를 역임한 크로아티아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더 길게 잡아 1848년까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반은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크로아티아는 이 때를 기해 정치적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어차피 공화정, 입헌군주정이 도입되면서 없어질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크로아티아 중심 귀족들의 내파와 붕괴는 향후 크로아티아가 역사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상치 않은 결핍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즈린스키 가문은 16세기 초 오토만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Nikola Šubić Zrinski와 같은 영웅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대표집안 3인 Nikola Šubić, Nikola, Petar에게 자그레브 시내에 명당자리에 즈리녜바츠 공원 Zrinjevac을 헌정하여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한겨울 크리스마스 때를 맞춰 한껏 전등으로 치장한 즈리녜바츠 공원, 주말마다 밴드 공연, 점잖게 춤추는 자그레브 시민들을 볼 수 있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4 : 오토만의 내습

요즘 크로아티아 텔레비전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는 다름아닌 터키산 대하 드라마 술레이만 대제Suleiman Veličanstvo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야기하기를, 이 드라마를 보면서 크로아티아가 터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수 있다고들 한다. 터키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터키말에서 간간히 나오는 간투사들 Baš, Zar, Barem 등은 크로아티아어내에도 굳건히 자리 잡은 단어들이다. 정작 크로아티아는 오토만 터키의 완전한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역설적으로 무력으로도 크로아티아를 들어올 수 없었던 터키는 21세기가 되어 드라마로 크로아티아 안방까지 들어온 것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터반 위용 : 사물을 그리는 것을 기피했던 이슬람 전통을 벗어나 베네치아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다. 이 때는 서구의 제국들이 오토만에게 알랑거렸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러가지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의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은 역시 오토만 제국의 서진이었다.

헝가리는 종교적으로 카톨릭을 신봉했으므로 일상적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살아오는 방식을 바꿀 만한 근원적인 차이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을 신봉한 오토만 터키는 크로아티아에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 게다가 카톨릭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들 사이에는 오랜 적대의식이 쌓여있던 상황 아니었던가.

13세기 아나톨리아에서 발흥한 오토만 터키는 야금 야금 비잔틴의 영지를 침식해 가면서 세력을 확장하더니 14세기에 세르비아 왕국을 밀어버리고, 15세기에는 소리소문 없이šaptom pade bosna 보스니아를 병탄했다.

이제 갈길을 막는 것은 헝가리(크로아티아 포함)였는데, 1493년 첫번째 조우에서부터 여지없이 오토만 세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자그레브 부근에까지 오토만 군사들이 들락거렸으며, 헝가리의 영웅 마쨔쉬왕Mathias Corvinus와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가 잠시 오토만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지만, 그것도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의 일이었다.

1519년 로마의 교황 레오 10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 문명의 보루'Antemurale Christianitatis라고까지 칭했다. 하지만 욱일승천의 오토만 터키를 막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으니, 1520년에 즉위한 술레이만 대제는 헝가리는 물론 서구문명 자체가 상대하기 어려운 '걸물'이었다. 1526년 술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터키군과 헝가리 군이 모하치Mahacs에서 대치했고, 그 결과로 헝가리의 왕이 전사하는 최악의 참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왕국은 붕괴되고, 헝가리 민족에게는 이 때가 (안좋은 방향으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모하치는 헝가리 속담에도 들어가, 최악의 상황에 비견되는 상투어가 됐다.(아무리 상태가 안좋아도 모하치 때보다는 낫다는...)

이러한 차제에 크로아티아와 헝가리가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은 결국 옆나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1533년에는 크로아티아 의회Sabor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Ferdinand를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어떻게든 오토만의 진군을 막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16세기 내내 영토를 잠식당했으며, 크로아티아인들의 집단이주가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슬라보니아 평야와 달마시아의 상당부분이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된다.

1500년경 유럽의 판도 : 발칸이 어느덧 오토만 터키의 영토가 됐으며 이를 막아선 것이 헝가리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오스트리아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도입한 것은 터키와의 접경지대에 군사특별구Vojna Krajna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대량 피난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리적 공백에 누구나 와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되, 관할권을 크로아티의 귀족들이 아닌 황제 직속 군사령관에게 줬다. 워낙에 언제 침략당할지 모르는 열악한 땅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면세혜택을 내리는 대신, 언제든지 오스트리아가 주민을 군인으로 차출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헝가리인이던 독일인이던 크로아티아인이던 누구나 다 정착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땅에는 오토만 통치를 피해 도망나온 세르비아인들이 눌러살게 됐다. 군사특별구는 나중에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 주민간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단초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크로아티아인들 입장에서는 원래는 자기 땅인데 다른 민족이 와서 살면서 귀족들의 관할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또 면세혜택으로 나름대로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세르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의 서진을 막아주고 있다는 자의식에 새로운 뿌리 의식이 결합되면서 자신을 어떻게든 지배하려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입장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오토만은 앞으로 500년에 걸쳐 남동유럽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흔히 다뉴브 이남 남동 유럽 지역을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라고 부르는 데, 발칸이라는 말도 터키말로 숲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칸 하면 발칸포Vulcan 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데, 그런 무식한 이야기는 여기와서 안했음 좋겠다.) 오토만의 직접적 지배를 받지 않았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발칸이란 말에 대해서 거부감이 강하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3 : 베니스의 입김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가 이태리 베니스 공화국 사람으로서 동방견문록을 저술했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남단의 섬 코르출라Korcula라는 것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믿음이다. 물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지만, 오늘날 코르출라섬에 가면 마르코 폴로가 태어났다는 집이 있다.

코르출라섬의 마르코폴로 생가라고 주장되는 곳
* 자료원 : http://www.korculainfo.com/marcopolohouse/

베니스의 시민인 마르코 폴로가 크로아티아 남단의 섬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베니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도저했나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 쿠빌라이 칸을 만나게 되는데, 어차피 서력 1242년 몽골 군단은 크로아티아 시골구석까지 말을 몰고 쳐들어왔으며,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이들을 피해서 달마시아 구석을 전전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베니스 사람들에게 몽골은 직접적 위협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익히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1200년경 유럽 판도 : 베니스의 영향력이 아드리아해를 중심으로 완연함을 보여준다. 나라의 국경이 항상 세력에 따라 유동적이던 시기에 베니스는 해상장악력을 바탕으로 한참 커나가기 시작한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헝가리의 기세가 크로아티아를 덮던 12세기에도 베니스의 달마시아 공략이 지속됐으며 13세기초 4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베니스 공화국이 십자군을 고용해서 자다르Zadar를 함락시키는 일도 일어났다. 이러 저러한 역사적 곡절을 거쳐 달마시아를 둘러싼 헝가리-베니스 간의 줄다리기는 15세기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줄다리기에서 벗어나 해변지역이 베니스의 지배하에 안정적으로 복속된 것은 헝가리가 자중지란에 빠졌던 15세기 초부터의 일이다. 달마시아를 비롯한 크로아티아 해변지역은 그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나서기 전까지는 이태리 땅이었다.

15세기 경 베니스의 세력도 : 영토적 욕심보다 무역을 기반으로 살아나가던 나라라는 게 잘 드러난다
* 자료원: http://en.wikipedia.org/wiki/Republic_of_Venice

2013년 1월 30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2: 마자르와의 조우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토미슬라브 사후 내분과 크로아티아를 둘러싼 열강의 획책 등으로 인해 지리멸렬한 양태를 답습하게 된다. 1089년 그나마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인사가 죽자 헝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왕 라슬루Laszlo 1세가 크로아티아 북부를 침입해서 달마시아 지역을 제외한 크로아티아를 접수했다.

헝가리 영토를 대폭 늘린 라슬루 1세는 나중에는 카톨릭의 성인으로까지 추대됐는데, 이 양반이 오늘 날의 자그레브를 주교령으로 지정하면서 자그레브가 크로아티아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놨다.

라슬루의 사후 그 후계자인 칼만Kalman이 12세기 초에 달마시아 지역 크로아티아 세력을 패퇴시키고 1102년 크로아티아의 족속들과 협약Pacta Conventa을 맺었다. 크로아티아의 귀족들 또는 영향력 있는 족속들은 헝가리의 왕을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협약이다. (흔히 말하는 2중 왕국dual monarchy 체제) 이로 인해 '법적으로' 크로아티아가 이 때부터 약 800년에 걸쳐 헝가리 지배를 받게 된다. 이같은 도식에 따라 13세기 초 유럽지도를 보면 얼추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서기 1100년 유럽의 판도 :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흡수된 모습이 보인다. 헝가리가 한때는 이렇게 잘 나가던 나라였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헝가리인들도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크로아티아를 자신과는 별개의 슬라보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라고 불렀으니, 어쨌거나 크로아티아를 슬라브족의 땅으로 본 것이다. 왕의 직위는 헝가리 왕들이 맡았지만, 실질적 자치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크로아티아를 보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다스려보려는 헝가리인들의 야욕이 커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또 이 같은 이중왕국 Dual Monarchy 정치 체제를 통해서 발전한 것이 있으니, 거버너 또는 총독의 의미를 지닌 Ban과 대의결사체인 의회 사보르Sabor다. 왕이 따로 있으니 Ban은 세습보다는 선출에 의해서 추대됐다. 또한 Ban은 사보르를 통해서 귀족들의 중지를 모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행정부 입법부와 기묘하게 병치되는 부분이 있다. 

Pacta Conventa가 체결됐을 때만 하더라도 헝가리 사람들도 그렇게 크로아티아를 본격적으로 구워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헝가리에서 원격으로 크로아티아를 지배하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Pacta Conventa를 통해서 보스니아까지 자동적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스니아에 사는 슬라브족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게다가 달마시아를 비롯한 아드리아 해변지방은 지속적으로 해상대국인 베니스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실효적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입장에서는 이들에 맞서 싸워주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이 그저 고마웠고, 베니스가 실질적으로 지배를 하던 지역들에 대해서는 몇번 수복을 시도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마자르 족이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다고는 했지만, 헝가리 역시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이 13세기에 몽골족이 유럽까지 처들어오면서 헝가리왕이 크로아티아의 해변까지 피난을 다니는 일이 발생했다. 중간에 징기스칸의 후예인 오고타이가 죽지만 않았어도 발칸지역에 몽골에서 뻗어난 분국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그레브를 병풍처럼 안고 있는 슬례메산에 있는 메드베드그라드Medvedgrad. 몽고의 침입 때문에 만든 성이다.>

몽골침략 이후에도 헝가리 나름의 내전과 내분이 지속됐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는 즈린스키Zrinski나 프랑코판Frankopan 등의 호족세력의 실효적 지배가 이어졌으며, 왕권을 강화해보려는 헝가리의 시도는 간헐적으로나 성공을 거뒀을 뿐이었다. 

15세기 경에는 아예 헝가리가 왕위 승계 문제로 골치가 아팠을 때, 왕위계승자 하나가 아예 자다르Zadar와 주변지역을 10만 듀카트에 베니스에 양도했다. 양도라고 표현은 했지만, 기실 아드리아 해변을 중심으로 한 베니스가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헝가리가 약간의 깽값을 뜯으면서 인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보른다. 15세기 이후부터 18세기 말까지 이탈리아 세력이 크로아티아 해변을 법적, 실효적으로 지배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 기원

우리나라에서 크로아티아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떠올릴 이름은 아마 크로캅이 아닐까 싶다. 크로캅은 2000년대 초반 K1, 프라이드 등 이종격투기 무대를 풍미하면서 크로아티아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한국인(주로 남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더 나아가 축구팬들은 1998년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갔던 일, 농구 팬들은 90년대를 풍미한 시카고 불스의 식스맨 토니 쿠코치 정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최근에는 광고에도 몇번 등장해서 그런지, 관광대국으로서의 크로아티아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현대의 크로아티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6개 공화국 중의 하나에서 출발한다.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식 정식 국명 표현은 Republika Hrvatske, 즉 흐르밧인들의 공화국이다. 흐르밧Hrvat은 부족민족 이름이다. 크로아티아라는 말은 흐르밧이라는 이름의 라틴식 오독이다. 슬라브말에서는 목구멍 깊숙이 나는 'ㅎh' 발음이 외부 사람들에게는 'ㅋc/k'라는 말로 들렸던 것이 그 연원이다.

오늘날 흐르밧족에게는 오늘날의 이란 부근, 폴란드 남부에서 왔다는 등의 다양한 기원설이 존재한다. 적어도 남슬라브 민족의 일원이었던 이 족속은 기원 후 4-5세기 정도에 오늘 날의 크로아티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들 스스로가 다른 지방으로부터 온 도래인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로마시대 이태리의 바로 이웃에 있는 만큼, 로마제국의 땅이었고, 그 만큼 유적들도 많이 남아있다. 지금도 크로아티아에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 유적 등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다..

크로아티아 풀라Pula의 원형경기장, 기원전후로 만들어졌다. 로마 경기장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한 경기장이다.

스플릿Split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발칸(오늘날의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의 황제다. 다스리기 점점 어려워지는 로마제국을 4분할한 황제로 유명하다. 기독교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정작 딸이 기독교 신자로 살다가 박해를 받아 살해당하는 등, 사연이 많은 황제다. 이 궁전은 은퇴 후 살던 곳이다.

로마의 지배 당시, 원래 이땅에는 일리리아Illyria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로마제국의 힘이 시들해지면서 고트Goth족, 아바르Avar족 등 외부 야만인들이 물을 흐려놓기 시작한다. 이들 등쌀에 일리리아 족이 이리 밀리고 저리 쫒겨날 때, 바로 이 때 슬라브 민족들도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데, 흐르밧은 그 민족들 중의 일 족속이었던 것이다.

슬라브 족들이 약탈이 주업이었던 다른 야만 족들과 달랐던 것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주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연히 로마의 지배와 기독교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로마의 황제들은 그래도 이 사람들이 좀 말이 통한다 싶었던지, 아바르 족이나 여타 야만족들을 물리치는 데 이 사람들을 활용하고 이에 따라 정식으로 정주도 허가하는 사례가 나온다.

이 사람들이 역사에 제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AD 800년 경으로 부족사회의 틀을 깨고 나와서 봉건영주의 틀을 갖춘 리더들이 역사서에 간간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크로아티아 해안가 도시인 닌Nin을 중심으로 이들이 초기국가 형태로 나라를 세웠고, 10세기 초 토미슬라브Tomislav가 달마시아 지방(오늘 날의 크로아티아 남쪽 해변가 지역이다)과 파노니아(헝가리까지 들어가는 내륙의 평야지대)를 통일하면서 교황의 허락 하에 '왕'Kralj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때가 크로아티아로서는 처음으로 국가 체제가 형성된 때라고 볼 수 있을 듯 할 것 같다.


서기 900년경 유럽의 판도: 프랑크 제국, 동로마 등이 보이지만, 이 때만 해도 불가리아가 발칸의 패왕이었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이 때 당시 크로아티아를 근대적 의미에서 독립국으로 봐야할 것인지는 잘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면 시대 자체가 특정 영주의 발흥에 따라 세력판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중세시대이기 때문이다. 봉건영주나 부족들이 그 때 그 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신종하는 리더들이 달라졌던 때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비잔틴계 동로마 제국이 주권을 주장했던 적도 있고,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프랑크 왕국이 주권을 주장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이들의 주장은 실효지배를 의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그레브 중앙역 앞 광장에 세워진 토미슬라브왕의 동상 : 크로아티아의 통일왕국을 이룬 위인이지만 정작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거나 크로아티아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 프란뇨 투지만Franjo Tudjman 박사 스스로가 크로아티아를 1,000년의 꿈을 담은 나라 thousand year dream of statehood 라는 말로 형용한 만큼,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적어도 이때 당시가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때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또 우연찮게도 토미슬라브 이후에는 몇몇 직계 후손을 제외하고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는 '왕'의 칭호를 쓰는 실력자가 없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크로아티아가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는 오늘날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 족이 발흥하기 시작하고, 가장 전성기를 구가한 토미슬라브왕이 죽고 난 다음에는 힘의 균형이 마자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Latinica, Glagolica, Cirilica

지난 번에는 크로아티아어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문자를 좀 짚어볼까 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라틴 알파벳을 약간 변형한 라티문자Latinica(라티니차라고 발음)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서구에서 쓰는 라틴 알파벳이라고 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어를 표현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슬라브어의 특성 상, 치찰음(예컨데는 츠, 치, 쯔, 스, 쉬 등) 등이 많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를 슬라브 족에게 전파하던 수도사들에게는 이게 하나의 딜레마였던 모양이다.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출신이라고 하던데, 키릴과 메토디우스Saint Cyril and Methodius라는 슬라브 출신 형제가 9세기 무렵에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냈으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글라골문자Glagolica라고 하는 문자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새로운 문자체계를 이들 형제에게 위임한 사람은 당시 한참 잘 나가던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다. 슬라브 문자를 잘 표현하는 문자 체계를 만든다는 것도 있었지만, 보리스 1세 입장에서는 슬라브 교회를 그리스 문자체계가 지배하던 비잔틴 하 동방정교로부터 독립시키고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독립성까지 획득하려던 획책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키릴 형제가 당시에 만든 문자는 오늘날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에서 활용되는 키릴문자 체제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생겼는데, 현재 활용되는 키릴 문자는 형제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갈고 닦아서 정립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키릴 형제의 초기 작품 글라골문자Glagoljica는 달마시아 지방으로 전달되면서 크로아티아에 정착하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쓰였다는 것이다.

     <글라골 문자, Glagoljica 또는 Glagolica>

* 자료원: http://fly.cc.fer.hr/~zox/glagoljica.html

설교, 전교, 기도문 작성 등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문자였던 만큼, 글라골문자는 교회에서 주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으로 라틴어를 교회 공식언어로 활용하던 카톨릭에는 조금은 맞지 않는 것이어서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일정한 알력이 있었다.

라틴어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다보니, 당연히 기층민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고, 이런 데 대해서 슬라브 출신 주교들이 글라골 문자를 공공연히 활용한다. 10세기 쯤 바티칸에서 이것을 고쳐 보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닌Nin 지역의 주교이던 그르구르Grgur (그레고리의 슬라브식 표현)등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13세기 당시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아예 달마시아 남부지역에 글라골 문자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까지 한다.


<닌의 그루그르>
* 출처 : wikipedia

글라골 문자는 적어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는 카톨릭 교세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슬라브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다르니까 다른 문자를 쓰겠다는..... 물론 이 문자체제는 역사를 걸쳐서 라틴 알파벳으로 대체되지만, 만약 크로아티아가 헝가리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지 않고, 터키 같은 강력한 외세에 적대할 일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 문자를 활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약소 민족의 역사가 정체성을 지키려는, 잊혀지지 않으려는 일련의 투쟁과정이라면, 적어도 크로아티아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했던 것 처럼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것을 더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까?

크로아티아는 지금 라틴문자 체제로  획일화되어 있지만, 세르비아의 경우에는 키릴 문자가 전해졌으니 현지에서는 치릴리차Cirilica라고 부른다. 키릴 문자는 세르비아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이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크로아티아어 또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어디에서 쓰나

크로아티아인들이 쓰는 언어는 스스로 부르기에 보통 크로아티아어(Croatian)라고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말은 세르보 크로아티아어(Serbo-Croatian)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 네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과(http://yugo.hufs.ac.kr/)에서 가르치고 있다.

슬라브어 계통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금방 배우기는 꽤 어려운 언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거나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보다 쉽게 접근이 되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자 바로 옆나라 슬로베니아에서 쓰는 슬로베니아어와는 상당히 많은 부분 비슷하지만, 전화로 통화하면 서로 잘 못알아 듣는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슬로베니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한 80% 비슷하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인 마케도니아의 경우에는 불가리아어가 더 가깝다. 세르비아 사람들 평으로는 서로 천천히 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불가리아에서는 마케도니아에서 쓰는 말을 불가리아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가장 최근 독립한 코소보의 경우에는 알바니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용어가 알바니아어다. 이는 또 슬라브계통의 언어와는 천양지차의 언어인데, 코소보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알바니아어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거의 중국어와 영어만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어도 어차피 인도유럽 계통의 언어로 알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코소보 사람이 자기네는 세르비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쓴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쓰나

어쨌거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문자를 라틴계통 알파벳에서 받아왔기 때문에, 보통 자신들의 문자를 라티니차(Latinica)라고 한다. 세르비아에서는 키릴문자(또는 치릴리차, Cirilica)를 쓰기 때문에, 문자 자체가 민족을 가르는 중요한 분계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 알파벳>

크로아티아 문자 영어발음 발음례
A /a/ a as in car
B /b/ b as in bat
C /ts/ c as in cats
Č /tʃ/ č as in chalk
Ć /tɕ/ ć as in church
D /d/ d as in dig
Dž /dʒ/ dž as in gin
Đ /dʑ/ đ as in jack
E /e/ e as in let
F /f/ f as in fit
G /ɡ/ g as in game
H /x/ h as in heaven
I /i/ i as in east
J /j/ j as in year
K /k/ k as in cut
L /l/ l as in love
Lj /ʎ/ lj as in million
M /m/ m as in mice
N /n/ n as in nice
Nj /ɲ/ nj as in onion
O /o/ o as in autmn
P /p/ p as in pick
R /r/ r as in Fritz
S /s/ s as in sound
Š /ʃ/ š as in shut
T /t/ t as in time
U /u/ u as in shoot
V /ʋ/ v as in verb
Z /z/ z as in zest
Ž /ʒ/ ž as in pleasure


* 출처 : http://mylanguages.org/croatian_alphabet.php

위의 글자체계를 보시면 알겠지만, 총 30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보통 우리가 두개의 낱글자로 오인하기 쉬운 Lj, Dž, Nj 같은 글자는 크로아티아어의 입장에서는 한개의 낱글자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발음자체를 소리나는 대로 글자로 옮겼기 때문에 읽는 것 자체는 매우 쉽다. 글자가 눈에 안들어오는 것이 문제지..


몇가지 용례 및 특징들

보통 영어 알파벳에서 곧잘 쓰는 y, w 등이 없다. y는 j가 대신하고, w는 v가 대표한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 말로 슬라브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미묘한 걸림돌은 역시 치찰음 계통이 아닐까 한다.

c는 대충 우리 발음으로 쯔 정도로 표기할 수 있다. 그러나 č, ć 는 모두 ㅊ 발음이며 사실 듣는 입장에서 구분이 쉽지 않다. 약간의 구분이 있다면,  č는 권설음이다. 즉 혀를 안으로 말고 발음하는 ㅊ가 되겠다. 크로아티아에서도 다양한 사투리 덕에 일부 지역에서는 이 두가지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뉴스 앵커들도 이를 구분하지 않고 발음하는 일이 있다는데, 나 스스로가 이를 구분할 능력이 없기에 할말이 없다.

s는 ㅅ 발음이며, š는 ㅅ의 권설음이다. 쉬 발음이 가장 가깝다 하겠다.  z는 ㅈ 발음이 나며,  ž는 역시 ㅈ의 권설음, 쥐 발음이 난다. dž, đ는 모두 약간 강한 ㅈ 발음인데, đ는 ć와 비슷하게 해당 발음의 연음이다.


어쨌거나 서구 언어 중에서는 영어, 불어, 독어를 주로 배워온 우리 입장에서는 이 c 계통의 발음들을 일률적으로 ㅋ 발음으로 표현하는 수가 많다.

예컨대 Zenica: 이곳에서는 '제니짜'라고 읽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제니카'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발음과 관련해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류는 사람 이름을 발음할 때 일어난다. Jurić :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백발백중 '주릭'이라고 읽지만, 제대로 된 크로아티아 발음은 '유리치'다. 이곳 사람들 성씨의 대부분은 ć로 끝나기 때문에 남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써주는 것이 좋다.

또하나 특징적인 면모는 r에서 찾을 수 있다. 크로아티아어에서는 r이 모음 역할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  덕분에 이곳 단어 중에서는 우리 입장에서는 순전히 자음만으로 이뤄진 단어가 있는데;

Trst (트르스트) : 이태리의 도시 Trieste(트리에스테)
Vrt(브르트) : 정원
Skrb(스크릅) : 복지
Srb (스릅) : 세르비아


얼마나 어려운가

크로아티아어는 우리나라 같이 별개의 독립언어족(우랄알타이어족) 입장에서는 매우 생경하고 생소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처음 자그레브 도착한 다음에 길 이름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단어도 생소하지만, 슬라브어 답게 우리한테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한 2음절 넘어가면 뒷부분은 어물쩍 넘어가야하는 상황이 한동안 지속된다. 만약 상대가 못알아 먹으면 참으로 난감한 시추에이션 되겠다.

일단 명사의 성별이 3성(남.여.중)인데다, 단복수가 엄연히 구분되고, 이것이 여섯가지 격변화(여기에서 호격 vocative를 합치면 모두 7격)를 거친다는 것. 이것만 해도 명사에서는 3x2x6=36가지의 버라이어티한 변화가 나오게 되고, 명사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도 명사가 들어가 있는 장단에 맞춰 복잡한 춤을 춘다. 이러한 변화를 한 눈에 외우는 것은 일반인으로써는 상당히 어려운 일로, 때문에 크로아티아어 독학은 거의 불가능하다.

문법 룰도 허다한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룰에 두 세가지 예외가 존재한다는 거.....

자그레브에서는 표준어가 광범위하게 통용되지만, 조금만 바깥으로 나가도 바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 또다른 써커펀치다. 이는 크로아티아 표준어가 자그레브 지역보다는 보다 동쪽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크로아티아어 순수론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개탄할 만한 일이지만, 이것도 어떻게든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 되겠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크로아티아 사람들 조차도  문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자평이다. 문법에서도 남녀유별이 존재해서 과거형을 개입한 문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하는 말이 유별하다.

러시아어와 비교를 하면 비슷한 단어는 많지만, 기나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분화되어서, 서로 잘 못알아 듣는다. 다만, 이들 같은 경우에는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배울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어를 배우기 쉽다는 것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억양이 있긴 하지만, 러시아어만큼 쎄지는 않다. 발음도 좀 부드러워서, 우리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러시아나 프랑스 발음을 따라하는 데 들어가는 유별난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는 듯 하다.

몰라도 알아 보는 방법은

구글 번역기를 활용할 경우 크로아티아어를 여러 언어로 전환해 볼 수는 있지만, 아직도 상당히 많은 번역상의 오류가 나오기 때문에 믿고 사용하기는 어렵다. 번역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때 크로아티아 문법 상식이 있으면,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아는데 상당히 도움 된다.

다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편이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런대로 먹힌다. 특히 청장년층의 영어 구사 능력은 꽤 높은 편이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정서

크로아티아에 온지도 어언 1년 반이다. 뭔가 기록이라도 해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왤까?

1930년대 발칸지역을 방문한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방문과 기행의 동기가 묘연하다. '그냥'이라고 말하려면 좀 심할까 싶지만, 그의 저작 'Black Lamb and Grey Falcon'(1941)에서는 세르비아의 왕(Aleksandar Karadjordjevic)이 프랑스에서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냥, 뜬금없이 기행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발칸 지역을 돌아다녔을까? 책이 너무 두꺼워서 다시 읽을 맘이 없지만, 웨스트는 이에 대해 끝까지 모호했다.

후대 사람인 로버트 카플란(Robert Kaplan) 역시 1980년대 발칸 지역을 방문하고, 'Balkan Ghosts'(1993)라는 .기행문을 남긴다. 그는 레베카 웨스트에 비해서는 보다 명확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서문에서 글로벌화로 인해 세계가 비슷비슷해지고 있는 가운데, 과거의 기억이 빠르게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는 발칸 지역은 바깥으로 목을 메어 소리쳤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쓰고 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역사와 예술 그리고 정치를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발칸을 방문했다는게 그의 변이다.

티토가 살아있던 시절,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이 지역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질 못했다. 20세기 말에 유고가 붕괴하고, 드럽고 지저분한 내전이 지속된 이유도 결국 누구도 발칸의 정서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대로 대응할 시기도 놓쳤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서, 발칸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들었고(혹은 강제됐고?), 이곳 사람들도 그럭저럭 '과거는 잊고 잘 지내자'고 하지만, 크로아티아를 포함해서 인근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깔린 도저한 흐름은 나같은 외지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2012년 말 크로아티아의 독립 전쟁영웅 안테 고토비나(Ante Gotovina) 장군이 헤이그 전범재판에서 사면을 받았을 때, 자그레브 여기저기에서 경적소리가 터지고, 도시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들어섰던 적이 있다. 헤이그 전범재판이란 과정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하여 이곳 사람들에게는 외계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닫히고 불투명한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사실은 누구도 깨끗하기 어려웠던 전쟁이기에, 그 결말은 예측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재판소가 무죄라고 평결을 내렸으니,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90% 이상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환영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크로아티아인 동료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이런 마음, 바깥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그 때서야 깨달았다. 이쪽 지역 사람들 마음에 다가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친절함, 상냥함, 순수함... 이런 외양적 모습들 저 너머에는 외부 사람들 누구도 알기 어려운 곡절이 있음을...내가 1년 좀 넘는 생활을 하면서 익혔던 이쪽 사람들 민심은 사실은 겉껍데기였음을...

어쨌거나 발칸의 정서를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연원과 심연을 드려다보려는 시도 자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발칸의 내력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아주 헛된 수고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부터 남기는 기록들은 크로아티아는 물론 주변 민족들의 정서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단서는 역사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 정리해 놓은 역사가 과연 그 결과로 오늘의 현실을 낳았는지, 아니면 오늘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역사속에서 이해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인지는 아닌지. 결국 발칸의 역사는 이곳 사람들 나름의 몫이다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끝을 맺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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