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NOJ 3차 회의는 1945년 8월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됐다. 이 때가 되어 티토의 빨치산은이미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승자였다. 곧바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법이 만들어 지고, 공산당은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비공산주의 항독세력과 연합해서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왔다. 경쟁 정당? 선거가 아니라 전투로 쓸어버린 터였다. 1945년 11월 선거결과는 당연히 인민전선의 승리였다. 이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인민연방 공화국이 선포됐다. 당연히 영국에 있던 왕은 공식적으로 '새'가 됐다..
1945년 3월 베오그라드에 서 대중연설 중인 티토. 쫓겨다닐 때 보다 살집도 붙었다. 심광체반이라고 해야하나? 날카로운 서기는 없어졌지만 위엄은 늘어났다. 공화국으로 거듭난 유고슬라비아를 되살리기 위해 그가 만든 구호가 '단결과 우애'Jedinstvo i Bratstvo였다.
승전의 사후처리 역시 전쟁 당시 못지않게 잔혹했다.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수가 죽었다. 티토 조차 1945년 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형이 너무많다보니)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이런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는 의문은 있다.
디킨Deakin이 쓴 'Embattled Mountains'에는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티토의 빨치산들이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생사의 기로를 쫓겨다닐 때, 빨치산 중에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노병이 있었다. 1차대전까지 참전했던 이 역전의 노병이 빨치산에 들어갈 때는 자기 아들 네명을 몽땅 데리고 참전했다. 알토란 같은 아들을 전쟁 중에 하나 둘씩 까먹고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들이 전사했다. 그 마지막 아들을 묻으면서 노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너를 위해 울지 않겠다. 우는 건 파시스트 원수놈들의 부인들이나 할 일이야'... 아비가 죽거나 아들이 다친 사람들이 일어나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산악의 '정의'를 실현해야 했다.
디킨Deakin이 쓴 'Embattled Mountains'에는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티토의 빨치산들이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생사의 기로를 쫓겨다닐 때, 빨치산 중에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노병이 있었다. 1차대전까지 참전했던 이 역전의 노병이 빨치산에 들어갈 때는 자기 아들 네명을 몽땅 데리고 참전했다. 알토란 같은 아들을 전쟁 중에 하나 둘씩 까먹고 몬테네그로 산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들이 전사했다. 그 마지막 아들을 묻으면서 노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아, 너를 위해 울지 않겠다. 우는 건 파시스트 원수놈들의 부인들이나 할 일이야'... 아비가 죽거나 아들이 다친 사람들이 일어나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산악의 '정의'를 실현해야 했다.
체트닉의 영수, 미하일로비치. 어떻게든 상황을 돌이켜 보려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반공'정책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쟁에 지친 이들이 이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1945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로 가는 동안, 싸우다 죽고 병들어 죽고 지쳐죽어 대열은 홀쭉해졌다. 그러다 결국 미하일로비치가 잡힌 것은 1946년 3월. 재판이 열렸고 결국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같은 해 7월의 일이다.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 체트닉 주도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도 그렇고, 체트닉의 부역혐의도 고스란히 자신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세력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이 때, 미하일로비치는 티토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티토와 유고공산당 입장에서는 이 쯤해서 사라져 줘야만 했다.
미하일로비치의 복권이라고 해야할까? 세르비아에서는 2013년 중 미하일로비치의 2차대전 행적을 그린 미니시리즈 '라브나 고라'Ravna Gora가 방영됐다. 라브나 고라는 미하일로비치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복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을 맡은 사람은 네보이샤 글로고바츠Nebojsa Glogovac다.
이렇게 해서 유고의 3국지는 티토의 승리로 끝난다. 티토의 승리와 더불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정치연합체 유고슬라비아도 살아남았다. 살아는 남았지만, 속으로 남은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무슬림 간의 갈등과 상호적대는 티토의 '단결과 우애'라는 구호 속에 뭍혀 사라진 줄로 보였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세르비아. 유고의 장형으로써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그 싸이키 깊숙한 곳에 손도 대기 어려운 '피해망상'이 남았다. 80년대 세르비아 인텔리들 사이에서 회자된 '세르비아 민족의 절멸'Genocide이란 말은 현실과는 전혀 달랐음에도 꾸준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민족의 말살로 나아갔다. 파시즘의 가장 큰 피해자가 파시스트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하게 됐다는 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크로아티아. 열등의식이 클 수록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독일 아리안계의 우등민족 사이에 끼고 싶었던 크로아티아는 나찌를 추수하면서 나찌보다 더 나찌스러운 짓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우월성이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처럼. 공산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를 과감히 청산하는 듯 보였지만, 시골과 촌락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파벨리치를 숭상하고, 우스타샤 크로아티아를 찬양하는 세력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는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테러전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슬림. 2차대전 때 세르비아에 대한 구원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손을 잡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진작에 깨달았다. 스스로의 자위조직을 만들고 나찌 치하에서 정치적 권위를 찾다보니 SS친위대까지 만드는 데 까지 갔다. 하지만 공산당 입장에서는 카톨릭, 정교에 비해서 무슬림들은 더욱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었기에, 더욱 커다란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는 적어도 보스니아에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무슬림끼리 싸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교리적 핍박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무슬림들은 열열한 공산주의, 더 나아가서는 티토 지지세력이 됐다.
재판 중 고뇌에 빠진 미하일로비치. 사면에서 정든 고향 초나라의 노래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나올 것 같다. 최후진술에서 미하일로비치는 '나는 많은 걸 원했고, 많은 걸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의 바람이 나의 작업과 나를 쓸어버렸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심경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 체트닉 주도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것도 그렇고, 체트닉의 부역혐의도 고스란히 자신에게 떨어졌다. 하지만,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세력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이 때, 미하일로비치는 티토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티토와 유고공산당 입장에서는 이 쯤해서 사라져 줘야만 했다.
미하일로비치의 복권이라고 해야할까? 세르비아에서는 2013년 중 미하일로비치의 2차대전 행적을 그린 미니시리즈 '라브나 고라'Ravna Gora가 방영됐다. 라브나 고라는 미하일로비치의 정치적 근거지이자, 복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미하일로비치 역을 맡은 사람은 네보이샤 글로고바츠Nebojsa Glogovac다.
이렇게 해서 유고의 3국지는 티토의 승리로 끝난다. 티토의 승리와 더불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정치연합체 유고슬라비아도 살아남았다. 살아는 남았지만, 속으로 남은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무슬림 간의 갈등과 상호적대는 티토의 '단결과 우애'라는 구호 속에 뭍혀 사라진 줄로 보였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세르비아. 유고의 장형으로써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그 싸이키 깊숙한 곳에 손도 대기 어려운 '피해망상'이 남았다. 80년대 세르비아 인텔리들 사이에서 회자된 '세르비아 민족의 절멸'Genocide이란 말은 현실과는 전혀 달랐음에도 꾸준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민족의 말살로 나아갔다. 파시즘의 가장 큰 피해자가 파시스트들이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하게 됐다는 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크로아티아. 열등의식이 클 수록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독일 아리안계의 우등민족 사이에 끼고 싶었던 크로아티아는 나찌를 추수하면서 나찌보다 더 나찌스러운 짓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우월성이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처럼. 공산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를 과감히 청산하는 듯 보였지만, 시골과 촌락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파벨리치를 숭상하고, 우스타샤 크로아티아를 찬양하는 세력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 자리를 잡았다. 일부는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테러전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슬림. 2차대전 때 세르비아에 대한 구원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손을 잡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진작에 깨달았다. 스스로의 자위조직을 만들고 나찌 치하에서 정치적 권위를 찾다보니 SS친위대까지 만드는 데 까지 갔다. 하지만 공산당 입장에서는 카톨릭, 정교에 비해서 무슬림들은 더욱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었기에, 더욱 커다란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공산치하에서는 적어도 보스니아에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무슬림끼리 싸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교리적 핍박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무슬림들은 열열한 공산주의, 더 나아가서는 티토 지지세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