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영토를 대폭 늘린 라슬루 1세는 나중에는 카톨릭의 성인으로까지 추대됐는데, 이 양반이 오늘 날의 자그레브를 주교령으로 지정하면서 자그레브가 크로아티아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놨다.
라슬루의 사후 그 후계자인 칼만Kalman이 12세기 초에 달마시아 지역 크로아티아 세력을 패퇴시키고 1102년 크로아티아의 족속들과 협약Pacta Conventa을 맺었다. 크로아티아의 귀족들 또는 영향력 있는 족속들은 헝가리의 왕을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협약이다. (흔히 말하는 2중 왕국dual monarchy 체제) 이로 인해 '법적으로' 크로아티아가 이 때부터 약 800년에 걸쳐 헝가리 지배를 받게 된다. 이같은 도식에 따라 13세기 초 유럽지도를 보면 얼추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서기 1100년 유럽의 판도 :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흡수된 모습이 보인다. 헝가리가 한때는 이렇게 잘 나가던 나라였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헝가리인들도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크로아티아를 자신과는 별개의 슬라보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라고 불렀으니, 어쨌거나 크로아티아를 슬라브족의 땅으로 본 것이다. 왕의 직위는 헝가리 왕들이 맡았지만, 실질적 자치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크로아티아를 보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다스려보려는 헝가리인들의 야욕이 커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또 이 같은 이중왕국 Dual Monarchy 정치 체제를 통해서 발전한 것이 있으니, 거버너 또는 총독의 의미를 지닌 Ban과 대의결사체인 의회 사보르Sabor다. 왕이 따로 있으니 Ban은 세습보다는 선출에 의해서 추대됐다. 또한 Ban은 사보르를 통해서 귀족들의 중지를 모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행정부 입법부와 기묘하게 병치되는 부분이 있다.
Pacta Conventa가 체결됐을 때만 하더라도 헝가리 사람들도 그렇게 크로아티아를 본격적으로 구워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헝가리에서 원격으로 크로아티아를 지배하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Pacta Conventa를 통해서 보스니아까지 자동적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스니아에 사는 슬라브족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게다가 달마시아를 비롯한 아드리아 해변지방은 지속적으로 해상대국인 베니스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실효적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입장에서는 이들에 맞서 싸워주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이 그저 고마웠고, 베니스가 실질적으로 지배를 하던 지역들에 대해서는 몇번 수복을 시도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마자르 족이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다고는 했지만, 헝가리 역시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이 13세기에 몽골족이 유럽까지 처들어오면서 헝가리왕이 크로아티아의 해변까지 피난을 다니는 일이 발생했다. 중간에 징기스칸의 후예인 오고타이가 죽지만 않았어도 발칸지역에 몽골에서 뻗어난 분국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몽골침략 이후에도 헝가리 나름의 내전과 내분이 지속됐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는 즈린스키Zrinski나 프랑코판Frankopan 등의 호족세력의 실효적 지배가 이어졌으며, 왕권을 강화해보려는 헝가리의 시도는 간헐적으로나 성공을 거뒀을 뿐이었다.
15세기 경에는 아예 헝가리가 왕위 승계 문제로 골치가 아팠을 때, 왕위계승자 하나가 아예 자다르Zadar와 주변지역을 10만 듀카트에 베니스에 양도했다. 양도라고 표현은 했지만, 기실 아드리아 해변을 중심으로 한 베니스가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헝가리가 약간의 깽값을 뜯으면서 인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보른다. 15세기 이후부터 18세기 말까지 이탈리아 세력이 크로아티아 해변을 법적, 실효적으로 지배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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