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이 같은 유연한 자세로 인해 그 치세 하인 60년대부터 많은 록 밴드들이 연방내 각 공화국에서 나타났다. Time, Parni Valjak, Azra(크로아티아), Korni Grupa, Idoli, Riblja Corba (세르비아), Indexi, Bijelo Dugme(보스니아), Buldožer (슬로베니아), Leb i Sol (마케도니아) 등의 음악적 성취는 영미권에 비해, 영향은 받았을지는 몰라도 질적으로 꿀릴 것도 없었다는 것이 평이다. 실제로 70년대 활약한 Time, Korni Grupa 등은 유럽풍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상당히 음악적으로도 진취적이다.
곁가지지만 90년대를 풍미한 Nirvana의 베이스 주자 Chris Novoselic(대충 한국사람 사이에서는 노보셀릭이라고 불렸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노보셀리치가 맞다)도 재미 크로아티아인에게서 태어난 크로아티아인이다. (이 양반, 90년대 중 이름도 Chris에서 Krist로 크로아티아식으로 바꿨다. 크로아티아말도 잘 한다고 한다.) 80년대 10대 당시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친척집에서 머물면서 Azra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를랴보 카잘리슈테Prljavo Kazalište(더러운 극장이라는 뜻, 이하 PK)는 1977년 자그레브에서 결성된 록밴드다. 롤링 스톤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 PK는 당시에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뉴웨이브 등을 수용,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을 이끌었다. 초기 출세작 Crno Bijeli Svijet(흑백 세상)는 완연한 스카 펑크록이다.
PK의 대표곡인 흑백 세상. 초기 프론트맨 다보린 보고비치Davorin Bogović는 밴드 결성 당시 롤링스톤즈 풍의 노래를 빠르게 불렀더니 그걸 세상사람들이 '펑크'라고 부르더라라고 술회했다.
이 밴드는 크로아티아 독립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1988년 발표한 Mojoj Majci : Ruža Hrvatska (어머니에게 : 크로아티아의 루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크로아티아 청년층의 열기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루쟈는 밴드의 리더 야센코 호우라Jasenko Houra의 엄마 이름인데, 이것을 크로아티아와 빗대어 노래함으로써 중의적이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은 음악적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가사는 대충 이렇다.
<밤늦게 그녀의 방에 소리죽여 들어가네,....문 닫는 소리 크게 날까 두려워하면서, 방에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Ruža가 잠들어 있고...... 만약 그녀가 없다면 누가 아침에 나를 깨울까. 만약 그대가 없다면 나는 잘 알지. 그대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장미여 나의 장미여. 나는 그대 때문에 밤새워 우네..... (중략)>
건전가요도 아니고 반항의 대명사 록음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약간은 아이러니 한데, 당시는 그게 또 먹힐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특수성이다. 1989년 10월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에는 30만명이 모였다. 자그레브의 인구가 80만 남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크로아티아 문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이다. U2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연상시키는 이 공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아레나록이 아니라 체제전환 광장록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당시 기록영상은 크로아티아가 얼마나 새시대를 열망했는지, 또 미지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시대는 더 없이 추악한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그걸 아직 몰랐다.
어쨌거나, 결성 30년을 넘어선 이 밴드의 음악적 경향은 초기에 비해 팝스러운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 2000년대 나온 노래 중에서 초기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Smeđi Šečeru(흑설탕)는 듣기에 흥겹고 즐겁다.
어쨌거나 민족밴드?국민밴드로 거듭난 PK가 2012년 들어서는 26년만에 처음으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Ruža Hrvatska를 불러, 크로아티아-세르비아간의 대결의식이 무뎌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뉴스가 됐으니, 또 그 세월이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도 보여줬다.
곁가지지만 90년대를 풍미한 Nirvana의 베이스 주자 Chris Novoselic(대충 한국사람 사이에서는 노보셀릭이라고 불렸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노보셀리치가 맞다)도 재미 크로아티아인에게서 태어난 크로아티아인이다. (이 양반, 90년대 중 이름도 Chris에서 Krist로 크로아티아식으로 바꿨다. 크로아티아말도 잘 한다고 한다.) 80년대 10대 당시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친척집에서 머물면서 Azra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를랴보 카잘리슈테Prljavo Kazalište(더러운 극장이라는 뜻, 이하 PK)는 1977년 자그레브에서 결성된 록밴드다. 롤링 스톤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 PK는 당시에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뉴웨이브 등을 수용,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을 이끌었다. 초기 출세작 Crno Bijeli Svijet(흑백 세상)는 완연한 스카 펑크록이다.
이 밴드는 크로아티아 독립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1988년 발표한 Mojoj Majci : Ruža Hrvatska (어머니에게 : 크로아티아의 루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크로아티아 청년층의 열기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루쟈는 밴드의 리더 야센코 호우라Jasenko Houra의 엄마 이름인데, 이것을 크로아티아와 빗대어 노래함으로써 중의적이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은 음악적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가사는 대충 이렇다.
<밤늦게 그녀의 방에 소리죽여 들어가네,....문 닫는 소리 크게 날까 두려워하면서, 방에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Ruža가 잠들어 있고...... 만약 그녀가 없다면 누가 아침에 나를 깨울까. 만약 그대가 없다면 나는 잘 알지. 그대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장미여 나의 장미여. 나는 그대 때문에 밤새워 우네..... (중략)>
건전가요도 아니고 반항의 대명사 록음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약간은 아이러니 한데, 당시는 그게 또 먹힐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특수성이다. 1989년 10월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에는 30만명이 모였다. 자그레브의 인구가 80만 남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크로아티아 문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이다. U2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연상시키는 이 공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아레나록이 아니라 체제전환 광장록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당시 기록영상은 크로아티아가 얼마나 새시대를 열망했는지, 또 미지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시대는 더 없이 추악한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그걸 아직 몰랐다.
1989년 공연에서 부른 Ruža Hrvatska : 광장의 열기를 확인하려면 이 비디오
이건 앵콜로 다시 부른 Ruža Hrvatska : 크로아티아 청년들의 표정을 보려면 이 비디오
어쨌거나, 결성 30년을 넘어선 이 밴드의 음악적 경향은 초기에 비해 팝스러운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 2000년대 나온 노래 중에서 초기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Smeđi Šečeru(흑설탕)는 듣기에 흥겹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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