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6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3 : 우스타샤의 폭주

1941년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세력판도에서 가장 빠르게 자리를 잡은 것은 역시 같은 파시스트들인 우스타샤들이다. 유고를  점령한 나찌독일은 당장은 우스타샤에게 크로아티아를 넘기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고 한다. 우스타샤Ustaša의 대중적 기반이 너무 취약한 것도 문제였지만, 너무 오랫동안 무솔리니의 보호를 받았던 것도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스타샤 심볼. '봉기'라는 뜻의 우스타샤 첫 글자 U에 십자가를 그려넣은 형상이다. 우스타샤는 무식한 만큼이나 신심이 강했다. 요새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길거리 그래피티 등으로 가끔 보인다. 도저한 역사의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나찌독일이 먼저 접근한 것은 크로아티아에서 대중기반이 탄탄한 농민당HSS이었다. 만약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면, 초대 당수 라디치Radić 이후 크로아티아에서는 거의 절대적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농민당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디치의 후계자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측과의 오랜 협상을 거쳐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권력분할 협정Sporazum을 체결한 사람이다. 때문에 2차대전이 났을 때만해도 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부수상이었다.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를 버리고, 점령군에 협력하는 것이 꺼림직했던 것 같다. 마첵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럼, 차례는 우스타샤에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우스타샤는 이의없다. 독일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 수령 파벨리치가 자그레브를 입성한 것이 4월 15일의 일이다. 입성해서 당장 한 일이 독립크로아티아Nezavisna Država Hrvatska(NDH)를 선포했다. 물론 자신은 그 수령Poglavnik이다. 평소 슬라브인들을 경멸하는 독일인들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는 크로아티아 민족은 어쩌다 슬라브 언어를 쓰게 된 동고트족이라는 해괴한 개드립을 쳤다.
 국호를 독립크로아티아라고 까지는 했지만, 우스타샤 정권은 내정 외치 등 어느 면에서도 홀로 '독립'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라를 반쪽으로 나눠 북쪽은 독일의 영향권, 남쪽은 이태리 영향권으로 분리하고, 독/이 양대 파시스트 군대의 주둔과 작전을 허용했다.

또 설명하기 복잡한 지도다. 크로아티아를 반분해서 독일과 이태리의 영향권으로 나뉜 모습이다. 짙은 회색으로 표시된 해변지역은 아예 이태리로 넘어갔고, 노란색 부분은 명목상 NDH에 주권이 있었지만, 이태리는 크로아티아군의 주둔을 막았다. 이태리는 원래 합병지역에만 군대를 주둔시킬 계획이었으나, 우스타샤 폭주가 시작되면서 이 노란색 부분에까지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우스타샤 X맨이 맞는거다.

같은 파시스트라고 하더라도 독일과 이태리의 전략적 접근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태리 쪽이 '땅'과 과거의 영화에 집착했다고 한다면, 독일의 접근은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발칸에서 나오는 자원 확보, 그리고 자그레브-베오그라드-테살로니키로 이어지는 철도보급선 확보가 이들의 주요 목적이였다. 따라서 독일군이 NDH 여기저기 포진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라예보에 1개사단 만을 남겨두고 우스타샤가 그리고 크로아티아내 독일계로 구성된 '로컬' 돌격대가 이들의 주력이었다.


그럼 열강들과 대충 판을 짰으니, 이제 슬슬 국내를 정리할 때가 됐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미워하니까, 따라서 미워하기는 하는데, 유태인보다 더 미운 족속은 세르비아인들이다. 어떻게든 쫓아내야 겠다. 그래서 나온 것이 '1/3론'이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죽이고,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 낸다는 소리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스타샤는 무슬림들에게 접근했다. 1차대전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긴 일부 무슬림들이 옳타꾸나 편승했다. 우스타샤들이 폭주하면서 세르비아 촌락을 쑥대밭을 만들기 시작하자, 진짜로 일부는 개종하고 일부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2 차대전도 끝난지 한참되는 2013년 월드컵 예선 경기. 크로아티아 대표팀 주장 요십 시무노비치Josip Simunović가 결선진출이 확정된 것이 기뻤던지, 홈스타디움을 메운 관중들에게 구호를 선창했다. '조국을 위해!'Za dom. 여기에 관중들이 화답했다. '준비끝!'Spremni! 기분좋자고 한 일인데 이 일로 FIFA는 시무노비치의 월드컵 본선 출전기회를 박탈했다. 이게 우스타샤 구호였거든...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된 나라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 때 NDH에 있는 세르비아계는 190만 정도니까 전체 인구의 1/3가량이다. 이 인구를 쫓아내면 누가 물산을 만들고 누가 세금을 내나? 게다가 여기저기 주요 세르비아계 거주지를 중심으로 당장 봉기가 터졌다. 오래된 지역 자위세력 체트닉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됐다.

자그레브 주재 독일 사령부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소련침공이 준비되는 마당에 NDH에 군사력을 박아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쯤에는 아예 본부에 전문을 쳤다; '우스타샤놈들, 완전 미쳤음.' 이태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배후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도륙나기 시작하자 그 영향이 주둔지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 보다 못한 이태리군이 우스타샤 세력을 무장해제까지 시키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지역을 안돈코자 앉힌 우스타샤가 뜻하지 않은 X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세르비아계 저항세력이 일부는 체트닉으로 일부는 공산당에 합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슬림계나 크로아티아계 역시 우스타샤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계에게는 그래도 체트닉들이라고 있었지, 무슬림계나 크로아티아계나 불길처럼 일어나는 내전 속에서 갈데가 없었다. 공산당 말고는....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구유고 음악 14 : 유고 록의 큰형님 Indexi

유고슬라비아 록과 관련해서 80년대 뉴웨이브를 특필하는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고록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고, 뉴웨이브는 그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화산폭발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록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마치 헤비메탈은 어느 밴드가 시작했을까라는 것 만큼이나 비슷한 바보같은 소리지만, 나름 잡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바로 보스니아의 록밴드 인덱시Indexi다. 1962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2001년 해체 때까지 40년 역사를 보유한 유고록의 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바깥 문물인 록을 수용했던 얼리어댑터는 역시나 학생 층이다. 인덱시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기록한 장부라는 뜻이란다. 밴드 인덱시 역시 스스로가 '학출'임을 시사하는 강력한 징표다. 처음에는 단순히 외국 밴드의 곡을 커버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인덱시가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의 67년 자작곡 '손을 잡아요'Pružam ruke가 유고 최초의 '오센틱' 록음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역사 속에 기십명의 멤버들이 들락거렸지만, 46년 개띠 동갑내기 트리오가 가장 오래 머물면서 인덱시 음악의 뼈대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다보린 포포비치Davorin Popović(보컬), 파딜 레지치Fadil Redžić(베이스), 슬로보단 코바체비치Slobodan Kovačević(기타).

처음 연주했던 음악은 비틀즈류의 멜로디록이었는데, 이게 중기에 들어 싸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록으로까지 변모해 나갔다. 때문에 인덱시는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비조로도 지목된다. 원래 이 밴드의 건반을 맡았던 코르니예 코바치Kornelije Kovač가 독립하면서 베오그라드에서 프로그레시브밴드 코르니 그루파Korni Grupa를 만들고, 또 여기에서 보컬하던 다도 포피치Dado Popić가 자그레브에서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그룹 타임Time을 만들었으니 인덱시는 한 집안 족보의 첫페이지에 위치한 셈이다.

또 이들의 음악적 거점 사라예보는 선후배/동료가 서로 당기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70년대 어느 때 건반에 공백이 생기자 인덱시는 이웃 밴드인 프로 아르테Pro Arte와 키보디스트를 공유(?)하는 희한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사라예보에 만연한 라야(동아리) 문화가 음악계에도 침투한 것이다. 그 덕에, 유고 팝 음악계에는 '사라예보 스쿨'이 형성되고, 보스니아의 3대 수출품 중의 하나가 음반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런 타이트한 음악적 유대 속에서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 같은 유고 최초의 수퍼밴드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덱시는 한마디로 유고 록의 큰형님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장르의 시도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인덱시의 음악에는 항상 기억할 수 있는 멜로디가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인덱시는 철저한 대중음악 밴드였다. 보컬 다보린 포포비치의 미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70년대 전성기때의 음악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멜로디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1969 년 발표 대표작 '아침이면 모든게 변해있을거예요'Jutro će promijeniti sve. 연주모습을 찍은 것은 80년대 언제 쯤이 아닌가 싶다. 다 좋은 데, Flying V하고 나비 넥타이는 암만 봐도 눈에 걸린다. 이들의 삶이 서구의 Rock'n Roll Life Style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나긴 밴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식으로 발표한 앨범은 딱 두 장이다. 나름대로는 유고 록음악 시장과도 관련이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록 팬덤이 굳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의 주요 공연무대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나 가요제였다. 거기에 곡을 발표해서 입상하는 게 이들의 주요 목표였던 것이다. 음반 역시 싱글이나 EP판이 주된 매체였다. 유고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그만그만한 팝송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환경이야 어쨌건, 인덱시가 78년에 맘잡고 제작한 음반 '푸른 강물'Modra Rijeka은 이들의 음악적 열정과 욕심이 농축된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걸작이다.

80년대에는 멤버들도 나이가 들고, 지금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지키자는 수성의 멘탈리티가 강했는지 활동도 뜸해진다. 그러다 90년대 유고 내전이 터지면서 밴드가 산산이 흩어지게 됐다. 그래도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나. 사라예보가 근대 전쟁사상 최장기간의 포위를 겪게 되는 와중에도 보컬 다보린 형님은 끝내 사라예보를 떠나지 않았다. 


72 년에 발표된 '나는 꿈꾼다'Sanjam. 인덱시표 대표 발라드다. 클래식 기타 반주로 시작한 단조곡이 후렴에 들어가서 70년대 대중가요 풍 장조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원테마로 돌아올 때의 건반 트랜지션이 너무 맘에 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멤버들이 모여서 1999년 두번째 앨범 '돌꽃'Kameni Cvijet를 발표했다. 물론 전성기를 지나 만든 앨범이라 그런지, 곡들의 퀄리티는 전작에 못미친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겪은 밴드가 풍기는 인간적 아우라는 여전하다. 여담이지만, '돌꽃'은 2차대전때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수용소 야세노바츠Jasenovac 터에 조성해 놓은 기념조형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골육상쟁, 형제살륙의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음반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가 궁금하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살아 남았음을 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깐. 보컬 다보린 형님이 2001년 50대 아쉬운 나이로 죽으면서 밴드도 결국 막을 내린다. 굳이 다른 보컬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2004년에는 밴드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곡했던 코바체비치 형님까지 죽었다. 주축 3인방 중에 레지치 형님은 전쟁에 학을 뗐는지 현재 미국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난리통 후 다시 공연에 나선 다보린 형님. 이 때는 록스타라기보다는 마을회관 노래자랑 이장님 아우라다. 주위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여러 애칭과 별칭이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가수'Pjevač로 불렸다. 이 별명에는 영어 정관사 The가 함께 붙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어쨌거나 밴드는 없어졌지만, 사라예보 시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자기들과 함께했던 왕년의 스타를 여전히 잊지 않았다. 보스니아 대중음악계는 최고권위의 대중음악상 이름을 다보린상으로 개칭, 그를 기리고 있다




2014년 2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2 : 내전의 시작

유고에 진주한 나찌독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유고의 분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면 치를 떨었던 히틀러는 그 조약의 결과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거니와, 무솔리니 역시 달마시아 등 아드리아 해변지역에 복벽주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디바이드 앤 룰. 지배의 황금율이다. 유고라는 틀 아래서 세르비아와의 동거가 영 불편했던 크로아티아 민심을 이용한다. 이같은 지배자의 필요에 부응해서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사람이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941년 안테 파벨리치
1889년 오-헝 제국 치하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이 사람. 부모를 따라 보스니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초등학교 한 때는 무슬림 학교 Maktab를 다니기도 해서 무슬림 문화와 경전에 익숙했고, 그것이 나중에 우스타샤의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파벨리치가 안착한 귀의처는 순혈적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였다.


 자그레브에서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정의당Hrvatska Stranka Prava 열혈당원이 됐다. 하지만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 헤게모니의 유고슬라비아가 등장하면서 순수 크로아티아의 꿈은 더욱 강해졌다. 왕국의 당국에 의해 활동이 금지된 것이 1929년. 이 때 파벨리치는 폭력노선을 걷는 우스타샤-크로아티아혁명운동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을 조직하고, 초록동색 무솔리니가 있는 이태리로 넘어가 웅거했다. 2차대전으로 파시즘 세력들이 유럽을 접수하면서 파벨리치에게도 햇볓이 들기시작한다.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과 더불어 그는 급거 귀국, 총통Poglavnik의 자리에 올랐다.

1937년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구 유고왕국군인들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고군이 녹아나면서, 일부 장교들이 조직적인 저항활동에 돌입했다. 그 대표가 드라고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goljub Draža Mihailović다. 1893년 세르비아 남부에서 태어났으니까 파벨리치보다는 4살 어리다. 조실부모하고 군인이었던 삼춘 슬하에서 자라다가, 그길로 직업군인이 됐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보스니아 북부에 주둔한 2군단 참모장이었다. 허망한 항복 이후 그는 몇몇의 장교들과 더불어 부대를 이탈해서 세르비아의 산악지대인 라브나 고라Ravna Gora 지역에 숨어들었다. 따르던 사람들이 80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시작은 미약했다. 이들을 데리고 평소 지론이었던 체트닉Četnik게릴라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체트닉이란 용어가 보통명사이고, 나찌에 협력했던 체트닉들도 있다보니, 미하일로비치는 스스로의 정치/군사 활동을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명했다. 

라브나 고라 운동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눈에 들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왕가는 미하일로비치를 장군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왕가보다 더 기뻐한 것은 영국정부였다. BBC는 1941년 11월 그를 유고슬라브군 사령관으로 지칭했다. 별다른 도움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미하일로비치 휘하 체트닉군의 도덕적, 법적 기반은 크게 높아졌다. 미하일로비치의 목표는 당연히 왕가의 복귀였다.

1928년 티토
이 같은 세력구도 하에서 또다른 풍파를 일으킨 제3세력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KPJ)이다. 유고 공산당 당수 요십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는 1892년 크로아티아 북서부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시삭Sisak에 있는 금속공 밑에서 도제 노릇을 하다가 1913년 군대에 징집됐다. 1차대전 오-헝제국군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된 그는 수용소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접하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전쟁이 끝난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조활동을 조직하다가 당국에 잡혀서 5년 감옥생활을 한 이후, 지하에서 암약하면서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의 밀정 노릇을 했다. 티토Tito는 그를 지칭하는 암호명 중의 하나였다.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나 사관학교를 졸업한 미하일로비치에 비해 가방끈은 짧다.레닌이나 마오쩌뚱과 같이 이론가를 자처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희한한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다. 그는 부모 탓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슬로베니아어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노동자 시절 독일, 포로 시절 러시아에서 습득한 어학으로 코민테른 등 국제무대에서도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1937년 티토가 공산당수의 자리에 오를 때만해도 유고 공산당은 계급문제에 민족문제까지 겹쳐 당내 노선투쟁으로 오합지졸의 수준이었다. 가장 커다란 약점은 공산당 수뇌부가 비엔나에서 유(?)하면서 현장과의 유대감이 엷어졌다는 것. 스탈린이 소련공산당은 물론 코민테른까지 숙청하면서, 유고공산당 수뇌들까지 도륙을 내는 바람에, 항상 현장에만 있던 그에게 순서가 돌아왔다. 최악의 순간에 당을 맡았으니, 한마디로 유고공산당은 바닥부터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거나 2차대전을 기해 삼국지 같은 삼파전이 벌어졌다. 유고에서는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더해 자체적인 내전이 발발하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2014년 2월 14일 금요일

유고 삼국지 1 : 2차 대전과 독일의 침공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대전은 1차대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다가왔다. 일단 겁을 먹은 섭정이 '중립'을 선언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 좋은 것'을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책이 궁했다. 1940년에는 1차대전 때 세르비아에 군수품을 지원했던 우방 프랑스까지 떨어졌다.

1941년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독일군에 깨진 유고 전차. 위력적...이라기보다는 앙증맞다는 생각이 든다.


1941년이 되자 독일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절륜구라빨을 자랑하는 히틀러가 섭정 파블레를 불러서 무려 다섯시간을 혼자 떠들었다. 중립을 풀고 3국동맹에 가입하라는 취지. 히틀러는 일단 이렇게 엮어서 후방을 정리하고, 소련으로 처들어가자는 복안이었다.

망설임 끝에 협정에 조인하기로 했지만, 전통적으로 독일에 반감이 컸던 세르비아인들이 이를 좋아할리가 없었다. 1941년 3월 협정 조인식에서 히틀러는 유고 대표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슬라브놈들, 장례식이라도 온 것 같구만'. 일단 이걸로 대충 유고문제는 정리됐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여러가지로 불만이 많던 왕국의 군부가 3월 27일 쿠데타를 일으켜 섭정 파블레를 쫓아내고 아직 미성년자인 페타르 2세를 옹립한 것이다.

사고는 쳤지만 군부라고 뾰족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독일에는 '이번 거사는 순수 국내사정으로 인해 벌어졌고, 기왕에 맺은 협약은 존중할테니 걱정마시라'고 전보를 쳤다.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었지만, 길길이 날뛰는 히틀러는 어쩔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고향인 히틀러는 원래부터 슬라브를 '하등민족'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쿠데타가 난지 열흘이 안된 4월 6일 군사를 일으켜 유고를 친다. 이름하야 '징벌작전'Operation Punishment. 통상적으로 뜬금없기 마련인 작전명에서도 우월의식과 편견의 결이 잡힌다.


유고의 군주 페타르 2세. 그냥 소년왕이 아니라 미소년왕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왕위에 올랐을 때가 17살이었다. 독일군 쓰나미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 임시정부를 차렸지만, 위기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경험이 없었다.


19세기 이후 들어가는 싸움마다 손해보는 장사가 없었던 유고왕국이었지만, 전격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전쟁개념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조리돌림 당하듯 밀리다 미성년왕이 14일날 해외로 튀고, 남아있는 각료들이 17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열흘 남짓 버틴 셈이다. 폴란드 함락이 35일, 프랑스 함락이 43일. 아무리 속도가 특징인 전격전이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 유고는 졌다기 보다는 녹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해서 유고를 접수한 독일, 많은 병력을 유고 산골짝에 묶어둘 뜻이 없었다. 마음은 이미 러시아 벌판을 달리고 있었거든. 어떻게 하면 뒷설거지를 피할것인가. 첫째, 하는 짓 마다 믿음은 안가지만 일단 이태리가 있었다. 선심 쓰듯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그리고 달마시아 관리를 맡겼다. 둘째, 크로아티아를 분리독립시켜서 순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인 우스타샤에게 넘겼다. 보스니아는 덤이다. 세째, 세르비아에는 헛껍데비 괴뢰정부를 만들어 놓고 전권특임대사를 심어놨다. 네째, 슬로베니아는 어차피 숫자도 적고 하니 이태리랑 반으로 나눠 어영부영 동화시키자는 심산이었다.



1941년 직후 지도. 복잡하지만 이렇다. 독일이 이태리와 더불어 슬로베니아를 합병. 이태리는 달마시아, 코소보 등을 병합하고 몬테네그로를 보호령화.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 슬라보니아를 어우르면서 독립 크로아티아NDH 건국. 세르비아는 괴뢰정권 하 독일 점령. 나머지는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맹국들에 나눠줬다.


잘 되야할 텐데.. 다음은 소련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앞으로 펼쳐질 드라마의 밑그림을 그렸다.



2014년 2월 5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3 : 무너진 왕조

두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에서 몬테네그로는 기대한 것 만큼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민족 주도권이다. 이것 만큼은 전쟁을 통해 부쩍 커버린 세르비아에 빼앗긴 꼴이다. 니콜라 입장에서는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몬테네그로인들이 많아지면서 더 입장이 불편하게 됐다.

1914년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면서 역사의 보폭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니콜라는 이런 때 차라리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중립을 지키면 뭐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주변에는 범 세르비아 통일론자들이 들어선 상황.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의 편에 섰다. 각료들이 참모총장을 세르비아에서 모셔왔다. 당연히 주요 보직들 역시 세르비아 장교들의 차지. 몬테네그로인들에게는 거의 정신적 지주인 러시아가 이 조치를 지지하고 나서 니콜라는 대놓고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1차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발행됐다는 엽서. 동맹국의 국가수반들을 나열했다. 중간에 깃털달린 모자를 쓴 양반이 세르비아의 왕 페타르, 바로 그 우측이 장인,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다.  장인과 사위 사이의 나이차이는 딱 세살이었다. 이 중 1차 대전 후 승전국이면서도 나라가 없어진 것은 몬테네그로 밖에 없다.  

처음에는 세르비아가 곧 잘 싸워서 어찌어찌 버텼지만, 1915년 10월 불가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서면서 전황이 크게 바뀌었다. 3면 공격에 직면한 세르비아는 포위섬멸을 피하기 위해서 코소보를 거쳐 알바니아로 들어가는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것을 니콜라는 못했다. 어차피 몬테네그로군이 스쿠타리도 점령하고 있던 차,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콜라는 세르비아의 수상 파시치Pasić가 영 걸렸다. 범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파시치는 나이, 경력, 성격 어느 면에서나 니콜라에 꿀리는 게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 달마시아/보스니아 방면에서 몬테네그로를 옥죄어 오자 니콜라는 일단 국외로 떠났다. 왕이 사라지자 몬테네그로군을 이끌었던 세르비아 장군들은 간단하게 몬테네그로를 포기하고 국왕이 있는 코르푸로 갔다. 무주공산이 된 몬테네그로. 프랑스에 망명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팔십 노인 니콜라의 체력이나 사고력이 예전같지 않았다. 아들들이라도 좀 잘났다면 모를까. 셋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미덥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런 공백상태에서 1차대전이 끝났다는 것. 연합군의 틈 사이에 세르비아군이 잽싸게 몬테네그로로 진주해서 의회를 구성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세르비아 주도의 게리맨더링을 파쇄할 구심점이 없었다. 1918년 실시된 포드고리차에서 구성된 의회의 안건은 몬-세 통일, 자동적으로 페트로비치 왕조 퇴치의 건이었다. 결국 이긴 쪽은 통일파.

1918년 포드고리차 의회. 국왕이 아직 본국을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세르비아가 무리해가면서 구성했다. 법적이나 절차상 문제가 많았다. 통일파와 반대파 간의 갑론을박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사진을 찍을 여유는 있었다.

물론 아무리 스스로를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 통일안을 몬테네그로 전체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찬성파Bijelaši(백색당)에 반대해서, 반대파Zelenaši(녹색당)이 1919년 크리스마스 때 봉기를 일으키고, 몬테네그로는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만약 100년 전이었다면, 오토만 터키에 맞서 싸우는 몬테네그로를 기특해하는 열강이 많았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전후 처리 회담이 열린 베르사이유에서도 니콜라의 목소리는 파시치의 노회한 외교술에 묻혀 들리지를 안았다. 몬테네그로의 편을 들어주는 강대국은 사위가 왕으로 있는 이태리 정도? 이것도 세르비아가 달마시아 일부를 할양하자, 몬테네그로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되는 일이 없는 가운데 노왕은 결국 1921년 프랑스에서 눈을 감는다. 79살 때 일이다.

몬테네그로가 2006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부터  독립하고 난 뒤 얼마 안되, 포드고리차에는 니콜라의 동상이 들어섰다. 에디스 더햄은 니콜라를 두고 '발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체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몬테네그로의 영욕을 한꺼번에 경험한 인물이다.

결국 세르비아에 흡수통일된 몬테네그로. 겉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불만은 있었던 것 같다. 1920년 확대된 왕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몬테네그로에서는 뜬금없이 공산당이 38% 득표율을 올렸다(물론 얼마 안가서 불법화). 공업시설이고 뭐고 개발도 안된 데서...안팔리는 떡, 헐값에 파느니 우리집 개나 준다는 심정이었을까? '나는 세르비아인이기 이전에 몬테네그로인이기 때문에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은 최선의 세르비아인(Best of all Serbs)'  몬테네그로인들 사이에 회자된 말들이다. 그저 그런 세르비아인임을 인정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싶은 몬테네그로인들의 심정이 보이는 것 같다. 몬테네그로 특유의 전투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지하 심층을 떠돌다 2000년 경에 간헐천처럼 치솟아 올랐다.

어쨌거나 15세기부터 투쟁과 쟁투로 국가를 만들어나갔던 몬테네그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적 틀 안에 들어가서 상대적으로 오랜 평화기를 맞았다.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무능했다. 몬테네그로 마초들의 관심은 전투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적 놀이로 이어졌으니, 그게 바로 운전이다. 자동차 운전. 2차대전 직전에 몬테네그로를 방문했던 레베카 웨스트는 몬테네그로 남성들이 통행이 어려운 산악지대를 자동차로 돌아다니다가 전복, 추락 등 교통사고로 얻은 상처를 전투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마냥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한다. 그게 적어도 2차대전 전까지의 이야기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3 : 유고슬라브 뉴 웨이브 2 - Azra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은 그야말로 재기있고 창의력있는 밴드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밴드는 자그레브씬을 대표하는 밴드 아즈라Azra다. 리더인 브라니미르 '조니' 슈툴리치Branimir Džoni Štulić는 원래 자그레브 대학 철학도 출신이지만, 공부는 설렁설렁하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기타나 뚱땅거리던 보헤미안 생활을 지속했던 듯 하다.

3인조 밴드 아즈라의 진용. 가운데 선그라스에 야전상의(?) 같은 궁상을 걸친 사람이 리더 '쬬니' 슈툴리치다. 3인조였지만 원맨밴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처음 조직한 것이 발칸 세브다흐 밴드Balkan Sevdah Band라는 이름의 밴드였다.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보스니아의 세브다흐 장르의 곡들을 불렀을 것 같은데, 진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하고 막연한 비틀즈나 포크 쪽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이러던 그가 본격 뉴웨이브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은 동시대 청년들로 슬로베니아 밴드 판크르티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부터라고 한다.

첫 싱글 발표곡으로 대박을 쳤던 발칸Balkan. 1987년 공연 장면이다. 소규모 콘서트지만 발광하는 청년들에게서 아즈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발칸의 보헤미안 정서를 노래했던 이 노래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우리 노래들에서도 익히 겪었던 G-Am-C-Em 코드 진행인 탓이 클 것이다.   

통기타에서 전기기타를 바뀌쥔 슈툴리치는 1977년 본격적으로 아즈라Azra(터키어로 '소녀'라는 뜻)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싱글 몇장을 발매하고 첫 앨범을 발표한 것이 1980년의 일인데 80년대 초반은 슈툴리치에게는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다. 80년 첫앨범 이후 81년 두번째 앨범(더블), 82년 라이브 앨범(트리플)과 더블어 세번째 앨범(더블) 연달아 발표를 한 게 족족 열화와 같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2000년대 세르비아에서 발간한 책 '유고슬라비아 100대 록/팝 앨범'YU 100: najbolji albumi jugoslovenske rok i pop muzike에서는 위의 초기 앨범 3장을 모두 10위권에 집어넣었다. 가히 신들린 창작력이다. 이 당시 슈툴리치는 뇌리의 노래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여느 위대한 록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슈툴리치 그 스스로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기타를 잘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즈라의 노래들은 처음 들으면 밋밋한 느낌이다. 왜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리프가 없다. 아즈라 노래들의 동력은 리프가 아니라 코드진행이다. 기억에 남는 리프가 없다는 것은 요새와 같은 자극의 시대에는 커다란 단점이다. 그러나 잘 들으면 멜로디가 느껴지고, 멜로디가 느껴지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 따라부르기가 가능한 록... 이게 다른 뉴웨이브 밴드들과도 구별되는 아즈라 록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즈라의 노래들은 통기타 세팅에서도 성공적으로 재연될 수 있다. 실제로 슈툴리치가 보헤미안 시절 때 녹음한 데모테입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밥 딜런 못지않는 고밀도 노래들이 들어있다.

평론가들은 구유고 밴드들 중에서 아즈라 만큼 도시의 감수성을 잘 표현한 밴드가 없다고들 평한다. 이 역시 주로 슈툴리치의 작품들인데 꾸준한 서사구조를 갖지 않는 파편화된 일상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드물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도 있다. 두번째 앨범(Sunčana strana ulice)에는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자유노조운동과 강한 연대를 표명한 노래 '내마음의 폴란드'Poljska u mom srcu가 있다. 세번째 앨범(Filigranski pločnici) 첫트랙 '누가 거기서 노래를 불러'Tko to tamo pjeva는 물경 티토(!)에게 바친 헌정곡이다. 내용은 신랄한 비판이다. 그러나 슈툴리치는 체제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유고슬라비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87년 공연 때 부른 Tko to tamo pjeva. '모래찜질 중인 임금님, 뭘하나 봤더니 방귀를 끼시네' 가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80년대의 폭발적 성공을 뒤로하고 활동도 뜸해지더니 현재의 슈툴리치는 '은퇴'가 아니라 '은둔'에 들어갔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예술가 아니랄까봐 성격이 모난것도 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산산해체되는 데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93년 언론 인터뷰에서 슈툴리치는 '이번 전쟁은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졌다고 믿는 듯 하다. 네덜란드에서 그는 이런저런 고전들을 번역하거고, 유튜브에서 자기 노래들을 관리하고 있다. 가끔 여기를 통해 새로운 녹음이나 노래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녹음의 질도 그렇고 전성기 때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런 눈에 띄는 '부재'는 이런 저런 소문과 전설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70/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를 다룬 다큐멘타리 '행복한 아이'Sretno Dijete의 제작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결국은 거절당하는 장면 만을 성공적으로(!) 영화에 집어 넣었다. 누가 어떻게 해도 그를 만날 수 없자, 또다른 작가는 그가 썼던 가사에 나왔던 인물들만 만나서 다큐멘터리 영화(kad miki kaze da se boji)를 만들기도 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어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얻어낸 토막말들이 아직도 뉴스가 된다.

나라를 막론하고 구유고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그리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