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은 그야말로 재기있고 창의력있는 밴드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밴드는 자그레브씬을 대표하는 밴드 아즈라Azra다. 리더인 브라니미르 '조니' 슈툴리치Branimir Džoni Štulić는 원래 자그레브 대학 철학도 출신이지만, 공부는 설렁설렁하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기타나 뚱땅거리던 보헤미안 생활을 지속했던 듯 하다.
3인조 밴드 아즈라의 진용. 가운데 선그라스에 야전상의(?) 같은 궁상을 걸친 사람이 리더 '쬬니' 슈툴리치다. 3인조였지만 원맨밴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처음 조직한 것이 발칸 세브다흐 밴드Balkan Sevdah Band라는 이름의 밴드였다.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보스니아의 세브다흐 장르의 곡들을 불렀을 것 같은데, 진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하고 막연한 비틀즈나 포크 쪽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이러던 그가 본격 뉴웨이브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은 동시대 청년들로 슬로베니아 밴드 판크르티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부터라고 한다.
첫 싱글 발표곡으로 대박을 쳤던 발칸Balkan. 1987년 공연 장면이다. 소규모 콘서트지만 발광하는 청년들에게서 아즈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발칸의 보헤미안 정서를 노래했던 이 노래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우리 노래들에서도 익히 겪었던 G-Am-C-Em 코드 진행인 탓이 클 것이다.
3인조 밴드 아즈라의 진용. 가운데 선그라스에 야전상의(?) 같은 궁상을 걸친 사람이 리더 '쬬니' 슈툴리치다. 3인조였지만 원맨밴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처음 조직한 것이 발칸 세브다흐 밴드Balkan Sevdah Band라는 이름의 밴드였다.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보스니아의 세브다흐 장르의 곡들을 불렀을 것 같은데, 진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하고 막연한 비틀즈나 포크 쪽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이러던 그가 본격 뉴웨이브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은 동시대 청년들로 슬로베니아 밴드 판크르티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부터라고 한다.
통기타에서 전기기타를 바뀌쥔 슈툴리치는 1977년 본격적으로 아즈라Azra(터키어로 '소녀'라는 뜻)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싱글 몇장을 발매하고 첫 앨범을 발표한 것이 1980년의 일인데 80년대 초반은 슈툴리치에게는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다. 80년 첫앨범 이후 81년 두번째 앨범(더블), 82년 라이브 앨범(트리플)과 더블어 세번째 앨범(더블) 연달아 발표를 한 게 족족 열화와 같은 팬덤을 만들어냈다. 2000년대 세르비아에서 발간한 책 '유고슬라비아 100대 록/팝 앨범'YU 100: najbolji albumi jugoslovenske rok i pop muzike에서는 위의 초기 앨범 3장을 모두 10위권에 집어넣었다. 가히 신들린 창작력이다. 이 당시 슈툴리치는 뇌리의 노래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여느 위대한 록밴드들과 마찬가지로 슈툴리치 그 스스로는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기타를 잘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즈라의 노래들은 처음 들으면 밋밋한 느낌이다. 왜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리프가 없다. 아즈라 노래들의 동력은 리프가 아니라 코드진행이다. 기억에 남는 리프가 없다는 것은 요새와 같은 자극의 시대에는 커다란 단점이다. 그러나 잘 들으면 멜로디가 느껴지고, 멜로디가 느껴지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다. 따라부르기가 가능한 록... 이게 다른 뉴웨이브 밴드들과도 구별되는 아즈라 록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즈라의 노래들은 통기타 세팅에서도 성공적으로 재연될 수 있다. 실제로 슈툴리치가 보헤미안 시절 때 녹음한 데모테입을 들어보면 나름대로 밥 딜런 못지않는 고밀도 노래들이 들어있다.
평론가들은 구유고 밴드들 중에서 아즈라 만큼 도시의 감수성을 잘 표현한 밴드가 없다고들 평한다. 이 역시 주로 슈툴리치의 작품들인데 꾸준한 서사구조를 갖지 않는 파편화된 일상들이 주로 표현되어 있다. 드물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도 있다. 두번째 앨범(Sunčana strana ulice)에는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자유노조운동과 강한 연대를 표명한 노래 '내마음의 폴란드'Poljska u mom srcu가 있다. 세번째 앨범(Filigranski pločnici) 첫트랙 '누가 거기서 노래를 불러'Tko to tamo pjeva는 물경 티토(!)에게 바친 헌정곡이다. 내용은 신랄한 비판이다. 그러나 슈툴리치는 체제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유고슬라비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87년 공연 때 부른 Tko to tamo pjeva. '모래찜질 중인 임금님, 뭘하나 봤더니 방귀를 끼시네' 가사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80년대의 폭발적 성공을 뒤로하고 활동도 뜸해지더니 현재의 슈툴리치는 '은퇴'가 아니라 '은둔'에 들어갔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예술가 아니랄까봐 성격이 모난것도 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산산해체되는 데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93년 언론 인터뷰에서 슈툴리치는 '이번 전쟁은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패배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졌다고 믿는 듯 하다. 네덜란드에서 그는 이런저런 고전들을 번역하거고, 유튜브에서 자기 노래들을 관리하고 있다. 가끔 여기를 통해 새로운 녹음이나 노래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녹음의 질도 그렇고 전성기 때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런 눈에 띄는 '부재'는 이런 저런 소문과 전설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70/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를 다룬 다큐멘타리 '행복한 아이'Sretno Dijete의 제작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 집앞까지 찾아갔지만, 결국은 거절당하는 장면 만을 성공적으로(!) 영화에 집어 넣었다. 누가 어떻게 해도 그를 만날 수 없자, 또다른 작가는 그가 썼던 가사에 나왔던 인물들만 만나서 다큐멘터리 영화(kad miki kaze da se boji)를 만들기도 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어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얻어낸 토막말들이 아직도 뉴스가 된다.
나라를 막론하고 구유고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그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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