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2 : 산 속의 생활

15-6세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오토만의 물결을 피해서 산으로 달아난 몬테네그로인들. 산으로 들어가고 보니 사방이 막막했다. 디나릭 알프스 자락의 산악 지형은 카르스트 암반 위주의 지형이다. 몬테네그로에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은 돌덩어리들을 이쪽지역에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당연히 거칠고 황폐하다.

코토르 만을 둘러친 몬테네그로의 산들. 물가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산위는 보기는 좋지만 살기는 영 아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19세기말까지 산에서 내려오질 못했고 이들 해변 도시를 제대로 접수한 것 역시 20세기 전후의 일이다.

이런 산속에서 최후까지 반 오토만 전선의 선봉이었던 이반 츠르노예비치도 몇 년 살아보다가, 15세기 말 베니스로 투항했다. 츠르노예비치의 후예로 이반의 세째 아들 스타니샤Staniša는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토만 술탄의 대리자로서 지역을 군림했다. 그러나, 지역에 뿌리박은 호족으로서가 아니라  행정관료로서였다.

산속에서 지배계급이 없어진 만큼 몬테네그로 인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다. 억센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도 그만큼 억세어지지 않으면 안됐다. 그렇다고 개개인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던 만큼 대가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들이 나타났다.

목축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지만, 이것 역시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산아래로 내려와서 약탈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주된 약탈의 대상은 주로 어느정도 윤택했던 무슬림 대갓댁이었지만, 부족들 끼리도 목축지를 둘러싸고 험한 싸움이 지속됐다.

위의 그림은 산 아래를 내다보는 몬테네그로 전사의 모습. 마초들이 다스리는 남성우위사회다.  고산지대를 배경으로 강팍한 스파르타 생활을 영위했으니까 가히 하이랜더라 할만 하다.

누군가 나의 원한과 원망을 풀어주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줄 중앙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는 부족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룰이 금과옥조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룰은 부족간의 쟁패를 불식하기는 커녕 더 확산시킬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산 아래는 오토만이라는 강적이 있지 않은가?

해서 부족간의 분규 해결이나 쟁송 협의를 위해서 부족회의Opšti Crnogorski zbor가 구성됐다. 오늘 날 의회와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되려나? 또 누군가 불편부당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블라디카Vladika, 부족간 회의를 통해서 선출된 지역 정교교회의 수장이다. 영어로는 Prince-Bishop으로 번역되는 데, 만약 번역 그대로라면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제정일치 또는 신정합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금 제도가 없다 보니 중앙집권적 정부가 나올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오토만에 먹히던 내분으로 망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방책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이런 권력을 몰아주기는 어려우니 어느정도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종교인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카가 받은 권력이라는 것 역시 실제적 물리력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블라디카의 궁극적 역할은 군사지도자이자 중재자였다. 군사지도자라 함은 오토만에 대한 군사지도자, 중재자라 함은 부족간의 알력을 막는 타협의 매개체 역할인데, 말 안듣는 족장에게는 '파문' 으름짱을 놓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몬테네그로 산중의 생활. 터키식 칼 야타간과 총을 찬 남자들의 무대였다. 이들에게 '무장해제'란 '거세'와 비슷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19세기까지 몬테네그로의 정치체제는 정교일치였다고 하지만, 오늘 날의 이란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의 블라디카의 권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봉건 영주가 없는 무계급 사회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산에서 사는 만큼 삶은 강팍해졌지만, 개인을 찍어누르는 계급은 없어진 셈이다. 무정부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 이것이 몬테네그로 산중생활의 실체였다. 이 같은 생활양식이 18-19세기 서유럽의 낭만주의적 영감을 자극했다.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10 : 록에서 집시 뮤직까지 Goran Bregović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는 보스니아 출신의 락/에트노 뮤지션이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2차대전 후 사회적 긴장이 완화된 틈을 타서 민족 간의 혼인이 성했다. 고란 브레고비치도 이런 예로, 아빠는 세르비아, 엄마는 크로아티아계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근 모습. 90년대 유고 내전이후 고향이 보스니아를 떠나 세르비아에 눌러 앉기는 했지만 이기 팝Iggy Pop 등 서구 락스타에게 곡을 주고 크로아티아의 팝스타 세베리나Severina 등과 교류하는 등 국제적 지명도도 높다.  

20대 초반이던 70년대 말, 고란은 보스니아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모색끝에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라는 뜻)라는 락 밴드를 결성했다. 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 뿐만 아니라 유고 락 음악 역사에서 다수의 기념비적 명반을 배출한 대표 밴드다. 초기작들은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락 계열이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류에 편승해서 뉴웨이브로 전환했다. 고란의 변신의 싹수는 여기서 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옐로 두그메 전성기 때의 모습.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만나다 보니 경제적으로 피지는 못해도 유고슬라비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비옐로 두그메 역시 가장 시골스런 곳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을 추구한 밴드 되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밴드음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고란 브레고비치는 결국 세르비아에 정착하고 본령인 락음악에서 집시음악을 중심으로 한 에트노/월드 뮤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하필이면 집시음악인가? 모를 일이지만, 비옐로 두그메 후기 앨범에서는 집시노래 번안곡이 들어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음악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형성된 듯 하다.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와의 공동작업(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 에밀 쿠스트리차 대표작의 음악은 모두 고란의 작품)을 통해 집시 뮤직에 기반을 둔 영화음악을 발표해서 그 성가는 일국을 넘어서 범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 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만가다. 헤쳤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남슬라브족의 처지가 정처없이 유랑하는 집시들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유고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가 부질없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적어도 90년대에 들어 사방에서 고립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고란표 집시음악이 상당히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왔던 것 같다. 고란은 음악적 방향을 바꾼 90년대 이후 다른 나라 민족음악인(속칭 월드뮤직)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혔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집시 음악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

고란 브레고비치작 집시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완급 조절이다. 하드 드라이브 일색의 집시음악에 고란은 긴장과 이완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 주류적 대중감성, 모던 프로덕션 기술로 사운드를 윤색하니까 정말로 성속聖俗, 귀천貴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잘된 음악이 나왔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섹스Sex. 원래 음반에서는 집시 음악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음성이 수록됐다. 샤반의 다른 음반과 비교해 보면 프로듀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 한데, 은밀하게 밀고 당기는 듯한 섹스의 정조가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나 허다한 작품 가운데에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대 히트곡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1989)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에데를레지'Ederlezi다. 90년대 세르비아에서는 시대의 송가처럼 불리워 졌다. 

전통적 집시 브라스밴드의 반주를 바탕으로 한 에데를레지. 2005년 이태리 아시시Asisi 성프란시스코 바실리카에서 개최된 크리스마스 라이브 현장이다.  

에데를레지는 발칸의 종교축일 '聖조지의 날'Đurđevdan(Saint George's Day)를 기리는 집시들의 노래다. 이 날을 전후로 사람들은 강가에서 몸을 씻고 새끼양 통구이를 먹는다. 종교축일의 틀을 빌렸지만, 실제 주민들에게는 다가오는 봄을 기리는 축제날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발칸의 주민들은 카톨릭, 정교, 무슬림 할 것 없이 이 날을 기념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이교도의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보 안드리치와 더불어 보스니아 대표문호 메샤 셀리모비치Meša Selimović의 대표작 더비쉬와 죽음Derviš i smrt은 바로 이 성조지의 날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슬람 성직자Derviš인 주인공이 밤중에 길을 걸어가면서 성조지의 날을 맞는 주민들을 보면서 제도화된 종교적 순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남과 여의 원초적 마그네티즘으로 형성되는 생명이란 순수와 고결을 숭배하는 화석화된 기성종교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에데를레지는 종잡을 수 없는 봄 또는 생명의 시작을 찬미하는 찬송이지만 그 가사는 애잔하기 그지없다.
Ederlezi 
All my friends are dancing the oro Dancing the oro, celebrating the day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But me, poor, I am sitting apart
A Romany day, our day
Our day, Ederlezi
They give, Dad, a lamb for us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 : 옛 로마의 도클레아

몬테네그로Montenegro.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현지어로된 정식명칭은 검은 산의 직역인 츠르나 고라Crna Gora. 라틴어를 애호했던 옛 식자들 덕분에 외지인들에게는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대한민국이 코리아가 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할까나.

발칸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슬라브족이 살았던 땅이 아니었다. 로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그리스 혹은 로마 시민들이 바닷가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내륙 일리리아의 부족들과 교류했다. 그 때 이 땅 이름이 도클레아Doclea(또는 디오클레아Dioclea, 원래 이땅에 살고 있던 일리리아 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였다. 나름대로 번성했던지 서력 3세기 경에는 이 땅에서 로마 황제를 배출했는데, 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릿Split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발칸이 배출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비대해진 로마를 다스리는 방책으로 4두정치체제를 구상한 사람이다. 이 궁전은 황제직에서 은퇴한 뒤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 만든 사저다. 

도클레아라는 이름은 슬라브족이 도래한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슬라브족은 이 땅을 두클랴Duklja라고 불렀다. 어쨌건 기존 토착민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한 슬라브족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패자가 명멸하는 봉건제가 지속됐다. 그 때를 기해 이 지역은 제타Ze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9세기 경의 지역 세력관계도. 도클레아가 바로 오늘날 몬테네그로와 대충 맞아떨어진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이 강했고, 그 덕에 이 곳 슬라브들도 동방정교를 신봉하게 됐지만 해안가는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도 강하다.  

14세기 경에 이 지역을 다스린 유력가문으로 츠르노예비치Crnojević가가 융성했는데, 레베카 웨스트는 이 때 당주 츠르노예 때문에, 이 지역 이름이 츠르나 고라 즉 블랙 마운틴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살던 지역의 산색이 거뭇해서 생긴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 가문이 15세기 오토만(또는 베니스 공화국)에 의해 궁벽한 산속으로 쫓겨나면서 수도로 삼은 것이 오늘 날의 체티녜Cetinje다.

몬테네그로 체티녜에 설치된 최후의 슬라브 봉건영주 이반 츠르노예비치의 동상. 황량한 산속에 들어선 체티녜는 왕궁이 있기에는 부적합한 궁벽한 도시지만, 바다는 베니스 평지는 오토만이 장악하면서 이곳 몬테네그로 슬라브들의 정신적 본거지가 됐다.

여느 슬라브 영주와 마찬가지로 오토만의 서진은 몬테네그로에도 두고두고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웃민족인 알바니아계가 전반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민족 간의 분쟁은 종교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오토만 조정이나 이곳에 파견된 행정관의 입장에서는 산속의 슬라브족들 언제든지 쓸어버릴수도 있었지만, 황량한 산속의 슬라브족을 굳이 치고들어갈 전략적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몬테네그로의 산지를 두고서 '두개의 군대가 싸우면, 작은 군대는 맞아죽고, 큰 군대는 굶어죽는 곳'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그만큼 척박한 땅이다. 몬테네그로의 산악지역에는 오토만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15세기 이후 몬테네그로를 독립국으로 볼 수 있을까? 몬테네그로 산지의 물질적 여건이 중앙집권형 왕국이 나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 슬라브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강력한 왕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족 더 나아가 소속 부족 밖에 없었다.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실질적으로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유사한 부족사회 체제가 유지됐다. 우리나라와 빗대어 보자면 3국시대 이전 시기와도 비슷한 경우? 지금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외지인이 아니라면 자기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3 : 히틀러의 작난

근세사에서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불안이 가장 크게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2차대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독, 이, 일의 3국동맹에 참여했던 유고슬라비아 섭정  파블레공이 쿠데타로 쫓겨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반응을 기다려주질 않았다. 1차대전 후 각 참전국의 명운을 결정한 베르사이유 조약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작했던 히틀러로서는 그 산물인 유고슬라비아 자체도 존중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유고슬라비아군 수뇌부로서는 한 20일은 버티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지만, 왕정 유고슬라비아군이 백기투항한 데 든 시간은 열흘 남짓. 가볍게 유고슬라비아를 접수한 독일(과 이태리 등)은 유고의 국경을 다시 그렸다. 이렇게 해서 과거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은 독립 크로아티아, 동쪽에는 괴뢰 세르비아를 앉혀 놓고,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독일과 이태리가 반분하는 형태였다. 보스니아는 하루 아침에 독립 크로아티아의 영역이 된다. 

2차대전의 시작과 더불어 만들어진 독립크로아티아NDH, 보스니아를 꼴랑 다 먹어 버렸다. 보라색으로 처리된 해변지역은 NDH가 이태리에게 넘겨준 지역이다.  

크로아티아로 들어선 우스타샤 정권은 독일과 이태리의 '순수성'을 벤치마크해서 유태인은 물론 영내의 세르비아계를 잡도리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본토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같은 난리가 극대화하되는 곳은 역시 세 민족이 모여사는 보스니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립크로아티아NDH 정부는 보스니아에서도 일단 사라예보를 거점으로, 체계적으로 유태인들하고 세르비아계들을 잡도리질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 정권은 희한하게 무슬림들에게는 관대했다. 아무래도 보스니아에서 겪는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슬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여기에 무슬림들의 일부가 호응을 했다. 

무슬림들의 상징인 페즈를 착용한 NDH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 그 스스로가 보스니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르체고비나) 출신이다. 석회암으로 팍팍한 헤르체고비나 땅을 두고 세르비아인들은 '돌과 뱀 그리고 우스타샤 만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우스타샤 정권이 유화의 손길을 준다고 해서 무슬림들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다종교 사회를 살아온 대다수 무슬림들에게는 우스타샤가 벌이는 학살극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때는 사라예보 무슬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우스타샤와 일부 무슬림 '쓰레기'들의 살륙극을 중단하라는 청원이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도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슬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비전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스타샤의 장단에 얼결에 선무당 칼춤을 췄던 무슬림들이 NDH가 자신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시작하면서 NDH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 무리의 무슬림들이 히틀러에게 독일의 보호하에 자치와 별도의 무장조직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선심쓰는 척하면서 보스니아 무슬림들로 이뤄진 친위돌격대 SS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원성을 듣는 단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계 역시 팔짱끼고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세르비아계는 어디까지나 1940년대에서 보스니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민족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의 꼬불탕 산악지역이 NDH 나 독일군이 생각하듯이 쉽게 접수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Četnik 조직이 들고 일어났다. '눈에는 눈' 여기저기서 당한 학살에 대한 앙갚음으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였다. 

보스니아의 산악지형은 게릴라 전을 벌이기 딱 좋은 지형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여기를 주무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을 두고 독일과 이태리 등 파시스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의 기치가 걸렸지만, 내용은 결국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 세르비아계 체트닉,  공산주의 빨치산의 3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작난질은 보스니아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파생시켰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12 : 얼떨결에 유고슬라비아

정작 사라예보에서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는 하지만, 대전 내내 보스니아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의 전세가 기울어 가는 데에도 보스니아는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소요가 없었다. 다만 전시경제 하에서의 곤궁함은 지속됐다.

1차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에 점점 불리하게 흐르면서 남슬라브 제민족을 하나로 묶는 유고슬라비아 운동이 정치적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패전 무드가 무르익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형성됐고, 허망하게 도시를 떠난 제국의 관료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세르비아군이 진주했고, 일부 유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 간의 갈등으로까지 격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세르비아계들은 환희용약했다. 드디어 대세르비아가 실현되는 때였으니까. 세르비아 본토에서 건너온 군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 터키의 잔재인 무슬림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세르비아 인사 중에는 무슬림들의 강제개종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12년 발칸전쟁 때 잔학한 인종청소로 인해서 '야만인'으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로서는 애먼 무슬림들을 쫓아낼 도덕적 명분도 없었거니와 국력도 고갈된 마당이었다.

어쨌거나 보스니아도 역시 얼떨결에 남슬라브의 일원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에 편입됐다. 보스니아가 원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무슬림들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대충은 맞는 국호이긴 하다 하지만, 무슬림들로서는 꺼림직했다. 난 도대체 누구야?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스스로가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 둘 중의 하나일꺼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기해 무슬림들 간의 독자적 정치조직화가 이뤄졌다. 1919년 2월에는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브 무슬림 기구'Yugoslav Muslim Organization이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왕정시대 무슬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했다. 초반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해 낸 사람이 바로 메흐메드 스파호Mehmed Spaho다. 이 사람의 주장인 즉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정치체제 하에서 독자적 정체성과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모습. 비엔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두 동생 중에 하나는 세르비아계로 다른 하나는 크로아티아계로 천명했다. 한마디로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은 애매하고 모호했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정치적 입장은 민족이건 아니건 그 이후로도 무슬림들의 전통적 자기주장이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로서의 통합성은 여전히 난제였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언제든 기댈 언덕이 있었지만, 무슬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중간자적 입장, 국외자적 정치적 토대는 새로 형성된 왕국에서 희한하게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캐스팅 보트 권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1, 2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서의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세르비아 왕가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손을 들어줘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대협약Sporazum이 형성됐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제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에 반분되는 결과가 나온다. 유력 무슬림 정치인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메흐메드 스파호도 1939년 대협약이 막바지 협상단계에 들어섰을 때  죽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내일이 어떻게 됐건, 시간은 급박하게 흘렀다. 대충 뭔가 정리될 시간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9: 세브다흐의 젊은 얼굴

젊은 층들이 보기에는 더 없이 '구릴 수 있는' 장르인 세브다흐가 환골탈퇴하는 데는 1990년대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구유고 내전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때를 기점으로 젊은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세브다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주방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모험적인 길을 택한 신진 세브다흐 장인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Amira Medunjanin이 가장 대표적이다.

아미라 메두냐닌. 보스니아의 빌리 홀리데이 또는 보스니아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라고도 칭송된다. 두 가수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정조를 극대화하는 노래실력 때문이다. 

아미라 메두냐닌은 사라예보 출신 여성 세브다흐 가수다. 90년대 유고 내전에 사라예보가 근대사상 최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생존이 급한 시대에 음악 교육을 따로 받을 여유가 없었지만, 그 어려운 때에도 지하에서 열리는 게릴라성 콘서트는 꾸준히 찾아갔다고 한다. 가수가 된 것은 좀 뜬금없는데, 전시 사라예보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조직하던 오늘날 남편을 만나서, 우연찮게 노래를 따라부르던 것이 가수가 되는 길이 됐다. 그녀의 테이프를 들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MSR)이 객원 가수로 초빙해서, 2003년 Secret Gate 제작에 참여한 것이 직업가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아미라가 부르는 세브다흐는 슬픔의 정조에 더욱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하여 카라 세브다흐Kara Sevdah (Black Sevdah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콘서트에서는 항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온다. 극도의 슬픔을 다한 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 그것이 그녀 음악의 지향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세브다흐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어쩔 때는 서양재즈에 어쩔 때는 바로크 류트와 같은 고악기를 반주로 나오는 그녀의 세브다흐는 기존의 음악을 상당부분 해체/재구성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것이 모던 세브다흐인가? 아티스틱한 면모가 더 분명해 지는 것은 분명하고, 또 이 같은 시도로 인해서 그 지평이 넓어지는 것 역시 분명한 듯 하다. 더 나아가 아미라의 시도를 두고 세브다흐의 본질을 훼손했느니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가까운 역사에서 쓴 맛을 봐서 그런지 그녀가 우울한 노래들에 대한 이 지역 대중들의 반응도 좋다.

류트 연주자 에딘 카라마조프Edin Karamazov와 같이 한 2010년 이스탄불 공연모습. 서구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오리엔트의 노래가 예상외로 잘 맞는다. 부르는 노래는 '아 사랑을 숨겨야 하다니'Ah što ćemo ljubav kriti. 에딘 카라마조프는 스팅과 더불어 존 다울랜드의 노래를 앨범으로 낸 사람이다. 아미라 메두냐닌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 출신. 

지금까지 네장의 독집 앨범을 냈는데, 앨범 마다 새로운 컨셉트를 채용했다. 세브다흐 장르의 혁신자로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항상 대담한 실험을 동반하면서 MSR 등과 같은 선배 뮤지션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됐다. MSR의 최근 앨범, Tales From A Forgotten City는 전례없는 실험을 하다가 망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 따라하다 망한게 아닌가 싶다.

아미라가 내놓은 앨범 모두 하나 같이 들을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2009년 앨범 Zumra에 수록된 '엄마가 메흐메드를 깨웠다'Mehmeda Majka Budila다. 단순한 노래인데, 가사가 심상치 않다.

내용인 즉 엄마가 아들 메흐메드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메흐메드가 이야기한다. 여동생이 자기의 팔을 묶고, 아버지가 눈을 가리고, 엄마가 심장을 도려내는 꿈을 꿨다고. 노래는 잠을 깨우는 노래라고 하지만, 곡조는 어째 자장가인가? 평안한 집안에 왜 메흐메드는 이런 악몽을 꿨는가? 한두가지가 수상치 않은 이 곡을 아미라가 메리마 클류초의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듣는 사람 기분이 서늘해 진다. 노약자와 임산부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앨범에 수록된 Mehmeda Majka Budila. 자장가풍의 단순한 노래에 섬뜩한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를 태워서 가사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전복적 성격을 극대화했다. 

아미라 메두냐닌의 가수로서의 활동은 앨범보다는 콘서트에 방점이 더 맞춰져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에딘 카라마조프 등과의 협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유럽의 주요도시가 그녀의 콘서트 무대다. 기본적으로 깔고들어가는 기조 때문인지 무대의상은 유난히 검다. 노래는 주로 슬프지만, 공연 중간에 실없는 웃긴 소리도 많이 한다. 2013년 최근에는 같은 보스니아 출신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 보쉬코 요비치Boško Jović와 같이 순회하고 있다. 이 역시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콘서트를 참여할 수 있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콘서트를 참여할 수 만 있다면...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1 : 1914년 운명의 날

1878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보스니아 통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가운데, 둘 사이에 놓인 무슬림들. 무슬림들도 스스로를 누구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사뭇 팽팽하게 돌아가던 팽이에 다른 각도에서 스핀이 들어왔다. 1908년 터키 본토에서 '청년 터키' Young Turk 쿠데타가 일어났다. 젊은 군인들이 술탄을 압박해서 근대적 의회주의에 근거한 입헌군주국을 도모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난제였다. 입헌군주, 의회, 다 좋은 데, 오토만 터키 정부가 법적 주권을 지닌 보스니아에서도 지역대표를 소집한다 치면 어쩔건가? 오스트리아 통치 지역의 대표들이 터키의 국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지금까지 맘속으로만 간직하던 '합병'을 선포한다. 보스니아는 실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땅이 된 것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발표는 지역에서 일련의 정치적 소요와 위기를 야기했다. 흔히들 말하는 합병 위기annexation crisis가 바로 이것이다. 가장 흥분한 것은 세르비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들이었다. 흉중의 대세르비아로 가는 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각종 비밀결사와 혁명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스니아에서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 라는 이름의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배경의 학생운동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가 세르비아 본토의 민족주의 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보타지, 폭탄제조 및 무기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 중의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이었다.

민족주의 청년의 초상.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ncip. 1912-13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 군에 자원했으나 '너무 병약하고 왜소해서' 복무를 거부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큰 사고를 치는 데는 큰 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암살 당시 미성년(20세 이하)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징역 도중 병몰.

이렇게 벌집 쑤셔놓은 듯한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뜬금없이 방문한다. 당연히 열혈청년들이 암살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날짜는 1914년 6월 28일, 성 비투스의 날Vidovdan.

암살범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너무 명확했다. 황태자를 기다리던 암살자들은 모두 여섯명. 밀랴츠카 강변에 새로 조성된 길을 따라 시청으로 향하던 황태자 부부. 환영인파들에 대한 황실 서비스의 일환으로 무개차를 탔다. 기다리던 암살자1. 너무 떨려서 차를 그냥 보낸다. 조금 뒤의 암살자2는 좀더 대범했다. 수류탄을 던졌는데, 황태자는 무사하고 그 뒤를 따라오던 수행차량으로 떨어져 사상자가 나왔다. 암살자는 망명도생코자 그 자리에서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접질렸다.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족사진. 황태자는 나름 로맨티스트였던지 황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비깜이 아니었던 색씨과 결혼했다. 총을 맞고 부인을 부르면서, '애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사는 것은 황가라고 다르지 않았던 듯.

소란 속에 얼마 안떨어진 시청까지는 도착했으나 황태자는 환영사고 축사고 공식일정을 소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수행원이 다쳤다니 문병이나 갈까? 그 자리에 있던 보스니아 총독이 말린다. 일단 숙소에 짱박히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최종 행선지가 1호차 운전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시 밀랴츠카 강변길을 내려가다 운전사는 황태자를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우회전을 튼다. 뒤에서 호통이 터졌다. '이봐 어디가. 거기가 아니지!' '어렵쇼. 여기가 아녀?' 차를 멈췄다. 바로 그 자리에 프린찝이 있었다. 무개차, 코 앞에 황태자 부부, 내 손에 총. 나머지는 역사가 됐다.

암살 직후 혼란통에 포착된 체포 장면. 쥐어터지는 프린찝. 시아나이드 독약을 깨물었으나, 불량품이었는지 그대로 토하고 잡혔다. '황태자 부부가 죽었다는 것' 빼 놓고는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암살 기도였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나섰다. 그 책임을 놓고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전될 줄 몰랐던 세르비아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년간 발칸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면서 한참 기세를 올렸지만, 국력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 손들어 말리고 싶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민족의 화약고, 발칸이라는 악명은 이 사건으로 더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들을 멸시하던 고아한 서유럽은 더 큰 야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