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만 제국이 16세기 초에 들어 모하치 전투 등을 통해 헝가리를 발라버리면서 중부유럽-발칸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는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이 공고화되는 결과가 나왔고 크로아티아는 바로 문명권의 경계선이자 최전방이 됐다.
기독교 문명의 보루 Antemurale Christianitatis. 1519년에 카톨릭 교황 레오10세가 크로아티아에게 내린 이름이다. 영광스런 이름이지만, 헝가리가 오토만의 매타작으로 지리소멸하고, 국권이 오스트리아 왕가로 넘어가면서 크로아티아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 영광스런 이름 빼고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크로아티아 땅의 1/3가량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인 군사특별구.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어울리는 말은 나머지의 나머지Reliquiae Reliquiarum라는 말이다. 오토만과의 알력, 쉽지만은 않은 베니스와의 교류 등으로 남은 것은 과거의 크로아티아 왕국의 극히 일부 만 남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교황이 했다는 이 말은 자기 땅을 오토만에게 잃어버린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한탄으로 남아 계속 구전됐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고토회복이라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열망보다는 오토만과의 협상을 통한 지역안정을 택했다. 걸핏하면 전쟁이 터지는 이웃나라들과의 알력 속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인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의 귀족들로서는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166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 Leopold I가 오토만과 평화협정Peace of Vasvar을 체결하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합스부르크와의 결별을 꿈꾸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크로아티아에서 그나마 영지를 보존한 즈린스키Zrinski가문과 프랑코판Frankopan가문. 크로아티아에서 반Ban*을 역임하던 니콜라Nikola Zrinski가 이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다 사고로 죽자, 그 동생인 페타르Petar가 그 유지를 이어받았다. 사돈인 프랑코판Frankopan 등과 더불어 프랑스, 베니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밀담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아예 오토만과도 내통할 생각도 했다. 사단이 된게 바로 이 오토만과의 불장난이었으니...세력 확장보다는 만사 귀차니즘에 물들기 시작하던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IV가 이 계획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에게 일러바친다.
안그래도 이들의 거동들이 의심스러웠던 레오폴드 황제는 유럽 최장수 왕가의 일원답게 시간을 놓고 지켜보다가, 1670년부터 헝가리에서 관련자 대량 색출/체포/구금 등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황한 두 가문은 전국적 봉기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읍소 작전. 안그래도 비엔나의 궁정에서도 모든 것을 불고 참회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시그널이 왔다. 1671년 페타르Petar Zrinski와 프란Fran Frankopan이 사태를 수습해보려 비엔나를 들어갔지만 상대는 범유럽 인증 정치9단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변방 촌티나는 귀족들의 말빨이 설리가 없었다. 그 날로 체포되고, 신속한 재판 끝에 참수당했다.
이 두 잘나가던 가문이 멸망은 여러가지 면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에 반향을 남겼다. 크로아티아 출신 귀족들이 망하고, 몰수된 영지는 대부분 독일-오스트리아계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모하치 전투가 끝난 후(1527년) 부터 이 음모가 발각된 때(1670년)까지 크로아티아에는 13명의 반Ban*이 모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가 발각되고 난 직후 부터 60년 간 이 직위를 역임한 크로아티아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더 길게 잡아 1848년까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반은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크로아티아는 이 때를 기해 정치적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어차피 공화정, 입헌군주정이 도입되면서 없어질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크로아티아 중심 귀족들의 내파와 붕괴는 향후 크로아티아가 역사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상치 않은 결핍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즈린스키 가문은 16세기 초 오토만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Nikola Šubić Zrinski와 같은 영웅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대표집안 3인 Nikola Šubić, Nikola, Petar에게 자그레브 시내에 명당자리에 즈리녜바츠 공원 Zrinjevac을 헌정하여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기독교 문명의 보루 Antemurale Christianitatis. 1519년에 카톨릭 교황 레오10세가 크로아티아에게 내린 이름이다. 영광스런 이름이지만, 헝가리가 오토만의 매타작으로 지리소멸하고, 국권이 오스트리아 왕가로 넘어가면서 크로아티아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 영광스런 이름 빼고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크로아티아 땅의 1/3가량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인 군사특별구.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어울리는 말은 나머지의 나머지Reliquiae Reliquiarum라는 말이다. 오토만과의 알력, 쉽지만은 않은 베니스와의 교류 등으로 남은 것은 과거의 크로아티아 왕국의 극히 일부 만 남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교황이 했다는 이 말은 자기 땅을 오토만에게 잃어버린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한탄으로 남아 계속 구전됐다.
1600년대 유럽 지도 : 16세기초까지 잘나가던 헝가리가 없어졌다. 헝가리 영토의 반의 반도 안되던 산골짜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흡수한 모습이다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고토회복이라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열망보다는 오토만과의 협상을 통한 지역안정을 택했다. 걸핏하면 전쟁이 터지는 이웃나라들과의 알력 속에서 가문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인 합스부르크 왕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의 귀족들로서는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166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드 1세 Leopold I가 오토만과 평화협정Peace of Vasvar을 체결하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합스부르크와의 결별을 꿈꾸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크로아티아에서 그나마 영지를 보존한 즈린스키Zrinski가문과 프랑코판Frankopan가문. 크로아티아에서 반Ban*을 역임하던 니콜라Nikola Zrinski가 이 아이디어를 만지작거리다 사고로 죽자, 그 동생인 페타르Petar가 그 유지를 이어받았다. 사돈인 프랑코판Frankopan 등과 더불어 프랑스, 베니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밀담을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아예 오토만과도 내통할 생각도 했다. 사단이 된게 바로 이 오토만과의 불장난이었으니...세력 확장보다는 만사 귀차니즘에 물들기 시작하던 오토만의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IV가 이 계획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에게 일러바친다.
안그래도 이들의 거동들이 의심스러웠던 레오폴드 황제는 유럽 최장수 왕가의 일원답게 시간을 놓고 지켜보다가, 1670년부터 헝가리에서 관련자 대량 색출/체포/구금 등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황한 두 가문은 전국적 봉기를 선언했지만, 아무도 이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읍소 작전. 안그래도 비엔나의 궁정에서도 모든 것을 불고 참회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시그널이 왔다. 1671년 페타르Petar Zrinski와 프란Fran Frankopan이 사태를 수습해보려 비엔나를 들어갔지만 상대는 범유럽 인증 정치9단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변방 촌티나는 귀족들의 말빨이 설리가 없었다. 그 날로 체포되고, 신속한 재판 끝에 참수당했다.
이 두 잘나가던 가문이 멸망은 여러가지 면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에 반향을 남겼다. 크로아티아 출신 귀족들이 망하고, 몰수된 영지는 대부분 독일-오스트리아계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모하치 전투가 끝난 후(1527년) 부터 이 음모가 발각된 때(1670년)까지 크로아티아에는 13명의 반Ban*이 모두 크로아티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가 발각되고 난 직후 부터 60년 간 이 직위를 역임한 크로아티아 출신은 아무도 없었다. 더 길게 잡아 1848년까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반은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크로아티아는 이 때를 기해 정치적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어차피 공화정, 입헌군주정이 도입되면서 없어질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크로아티아 중심 귀족들의 내파와 붕괴는 향후 크로아티아가 역사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상치 않은 결핍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특히 즈린스키 가문은 16세기 초 오토만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니콜라 슈비치 즈린스키Nikola Šubić Zrinski와 같은 영웅을 다수 배출한 집안이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대표집안 3인 Nikola Šubić, Nikola, Petar에게 자그레브 시내에 명당자리에 즈리녜바츠 공원 Zrinjevac을 헌정하여 이들을 기념하고 있다.
한겨울 크리스마스 때를 맞춰 한껏 전등으로 치장한 즈리녜바츠 공원, 주말마다 밴드 공연, 점잖게 춤추는 자그레브 시민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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