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유럽으로 들어오는 오토만 역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커다란 위기가 15세기 초에 티무르 칸과의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나타났다. 술탄 바예지트가 티무르에게 생포되고 그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벌여서 내분이 정리되는 데만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때를 기해서 세르비아의 대표호족, 즉 라자르의 후계자 스테판Stefan은 헝가리와 연합한다. 때마침 헝가리는 국력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었다. 스테판이 죽자 그 사촌 주라지 브랑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그 뒤를 이었다. 주라지는 변방국가 만이 할 수 있는 줄타기 외교의 달인이었다. 두명의 딸 중 한 명 마라Mara는 오토만 술탄에게, 또다른 한 명은 헝가리 왕의 사촌동생에게 출가시키면서 중간역할을 했다. 오토만-헝가리 평화조약인 세게드 평화조약Peace of Szeged(1444)를 중재하면서 세르비아의 국권을 일으키는 희귀한 일도 바로 이 사람의 치세 때 일이다.
세르비아의 거의 마지막 왕Despot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1430년에 거처 스메데레보Smederevo(베오그라드 남동쪽 다뉴브강변)에 지은 성이다. 오토만 쓰나미는 이 성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구-이슬람 문명의 평화체계가 지속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카톨릭 교회가 '이교도와의 약속은 안지켜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헝가리가 중심이 된 십자군이 오늘날 불가리아 지방으로 침입하면서 모처럼의 평화조약이 깨져버렸고, 주라지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 게다가 주라지는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야노쉬 훈냐디에게 뇌물까지 주지 않았나. 십자군과 오토만 간의 대결은 1444년 바르나 전투로 연결됐다. 결과는 십자군 패배.
헝가리의 야노쉬 훈냐디가 1448년 다시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코소보 들판에서는 두번째 서구와 오토만 간의 전투가 있었다. 또다시 헝가리의 패배. 이 전투에서 주라지는 중립을 지켰지만, 헝가리 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낱낱이 오토만 쪽에 알리고 전략적 자문을 제공했다고 한다. 세게드 평화조약을 망친 것은 훈냐디 때문이라는 개인적 악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오토만간의 일진일퇴 공방이 지속되고 이 자리에서 불안하게 나마 세르비아는 정치적인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는 1456년말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79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또다시 지긋지긋한 후계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를 틈타 오토만은 조용하게 세르비아를 병탄했다. 브랑코비치 왕가가 망하면서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정치체제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다뉴브강 북쪽으로 도망친 세르비아인들과 일부 귀족들이 잠깐 잠깐 왕국을 만들기는 했지만, 오래 끌지 못했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 하에서, 모하치 전투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하에서 오토만 항전의 최전선을 맡았다. 나라가 없어진 세르비아인들의 일부는 다뉴브를 넘어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슬라보니아 평야를 거쳐, 아니면 보스니아를 거쳐 달마시아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이동을 했다. Tim Judah가 말한 바 이 같은 세르비아의 이주 패턴은 결국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종청소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체제를 피한 정처없는 방랑 아니면 기존의 이주민들을 뿌리부터 드러내는 모습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됐다.
국가적 혹은 정치적 체제로서의 세르비아가 사라지게 된 때는 오토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정복왕 메흐메드Mehmed II the Conqueror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술레이만 대제의 치세였으니까, 오토만으로서는 최대 전성기를 찍고 있을 때다.
2012년 터키에서 개봉된 영화 Fetih 1453은 주라지의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서방세계를 괴롭히던 메흐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비잔틴제국) 정복을 다루고 있다. 최근 경제사정이 나아지니까, 터키에서는 과거의 영화를 영화로 재현하려는 움직임들이 커지는 듯 하다.
과연 오토만 터키가 과연 압제와 폭압 만을 앞세운 야만민족이었을까? 세르비아 사람들은 코소보 전투 이후부터 세르비아 민족의 암흑기로 들어서면서 내내 오토만의 압제가 지속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미지는 대부분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상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압제 만으로는 500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토만 제국은 세르비아를 병합하면서 무슬림 엘리트들과 샤리아 율법 체제를 발칸으로 도입했지만, 현지의 실정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아서 세르비아에서 통용되던 세속법quanuns을 대폭적으로 수용했다. 전제주의 오토만의 군사적 파상공세로 발칸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는데, 15, 16세기 오토만의 사회 시스템과 체제는 서구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앞서있었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란 말로 대표되듯 무자비하고 강제적인 개종작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것도 다 서구가 만든 편견이다. 물론 일부는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강제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오늘 날의 기준에서 보면 에누리가 있지만 오히려 오토만 치세는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하는 관용Tolerance의 시대였다. 동방정교던 카톨릭이던 기독교를 믿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과거 서구 문명권이 틈만 나면 박해하고 쫓아낸 유태인들을 받아 준 것도 오토만이었다.
사회 및 정치 체제가 이슬람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것은 세르비아 정교 교회였다. 정교 교회가 코소보에서 오토만과 싸우다가 전사한 라자르 Lazar를 비롯한 주요 민족의 영웅들을 성인으로 추존하고 숭앙하면서, 다시금 부활하게될 세르비아 민족의 신화를 전승해왔지만, 이 역시 건드리지 않았다.
오토만 제국은 정교, 카톨릭, 이슬람, 유대교 종교 신봉자들이 별도의 구역에서 살도록 하는 구획 시스템Mahala을 유지해왔다. 귀족들이 사라지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주로 농촌 대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결속한다. 하나의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세금을 제 때 내는 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토만의 원칙이었으므로 이들 대가족 커뮤니티Zadruga는 세르비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 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어떻게 보면 우리 기준에서 보면 전혀 다른 민족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이들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된데는 이 같은 시스템을 통해서 형성된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민족을 언어공동체 중심으로 규정하던 서구 사람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근원이었다.
문제는 지배세력의 타자성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관용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서구사회가 표방하는 것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토만이 유럽의 병자로 이 강대국 저 강대국에게 돌아가면서 따귀를 맞게 되면서, 애꿎은 화풀이를 지역내 기독교인들에게 했던 것이 두고두고 오토만의 압제로 기억되게 된다. 18-19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맞아 세르비아의 자기 주장은 결국 어떻게 하면 오토만 유산을 극복하고 몰아낼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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