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군사특별구의 모습이다. 군사특별구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는 헝가리도 포함)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가 세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Republika Srpska Krajina의 판도와 어느 정도 겹친다. 아울러 왜 나라 이름에 '크라이나'라는 말이 들어갔는가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을 대표할 만한 정치체제가 없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사특별구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곳의 정주민들은 기존 귀족에 복속된 농노가 아니라 자유민이었다. 그만큼 세금에서도 자유로왔다. 오스트리아가 특별구민들에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특별구민들은 황제가 원할 때 언제든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르비아 귀족들이 오토만과의 동맹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 세력과의 대결에 참여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스스로 오토만의 서진을 막았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때 오스트리아가 동원한 군사력의 상당부분이 세르비아계였기 때문이다.
18세기 군사특별구 지역민의 모습. 군인의 모습이다. 특별구 안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대충 이러고 살았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부류들을 국경사람Graničar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오토만 치하에 있는 세르비아계는? 일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토만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에게 무기소지, 승마 등을 금지했다.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면 칼을 들어야 하는 시기에 상당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군문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세르비아 사람이 아니라 터키인Turci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오토만은 너무 광활한 지역에 팽창하다 보니 한 때는 인구의 80%가 기독교계였다. 문제는 군사력. 기독교인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이 미심쩍었던 오토만은 항상 밀리터리 엘리트가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토만은 한동안 데브쉬르메Devşirme 시스템이라는 엽기적 인력공급 방식을 유지했다. 공출과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독교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을 징발한다.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어려서부터 군사교육을 시킨다. 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술탄의 충성스런 정예 직할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예니체리Yeni Çeri (영어로는 Janissary로 표기)다. 예니체리의 주요공급처는 당연히 발칸의 피지배민족들,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인들이었다.
이태리의 벨리니가 그렸다는 예니체리. 신분상으로는 노예였다. 하지만, 고정적 급여를 받았다. 잘 하면 행정관으로 나가는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한 터키 전사 중에서 많은 수가 세르비아인이었을 것이다.
술탄이 원정 때마다 대동하고 다녔던 이들 정예병들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 또는 백척간두의 타이밍에 투입되어 전투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 쏟아지는 화살과 투석 속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깨뜨린 사람들도 이들이었다. 오토만이 한참 잘 나가던 시기에는 능력위주의 인사가 이뤄지다보니, 여기에서 전공을 세운 자들은 황제의 대리인 Grand6 Vizier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하기도 했다. 이 부류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sha Sokolovic다. 나중에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상 수상작 '드리나강의 다리'가 바로 이 사람이 만든 다리의 이야기다.
곁가지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출세길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일부 마을에서는 아예 데비쉬르메로 뽑혀갈 아이들을 미리 뽑아놓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조금 잘나간다 싶을 때가 항상 문제, 예니체리 시스템은 나중에 세습으로 변질됐다. 아이들을 강제로 납치해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능력위주의 인사시스템이 기득권 체제로 변질되면서 오토만은 부패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토만 제국의 생성부터 절정기까지의 모습을 한꺼번에 표시한 지도. 한참 때는 유럽에서는 비엔나가 코 앞이다. |
어쨌거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오토만을 피해 정처없이 방랑과 이주를 반복했던 세르비아 남자들은 성직자가 아니면 군인의 길을 걸었다. (아예 성직자 겸 군인도 상당수 존재.) 오토만 시대는 세르비아에 상무 문화를 착근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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