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3일 화요일

보스니아 유사 5 : 오토만 점령후 15-16세기

보스니아 역사에서는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중심세력으로서의 토착 귀족세력이 없었다. 이것은 봉건제를 유지해 오면서 뼈대있는 집안들을 만들어낸 유럽의 전통과도 다른 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오토만 시스템이 세습귀족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소아시아 지역에 흘러들어온 근본없는 유목 부족이던 오토만이 귀족이고 뭐고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귀족제도가 없다보니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능력주의 인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잘한 놈한테 떡을 더 주니, 잘한 놈은 더 잘하려고 하고, 아직 잘하지 않은 놈도 앞으로 잘하려고 애썼다. 데비쉬르메와 같은 공출제도를 통해서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붙잡혀간 슬라브(와 알바니아, 그리스)의 소년들이 성장해 가면서 오토만 조정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걸리적 거리는 기득권 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세한 이들이 술탄에게 하사받은 토지를 대대손손 유지해 가면서 지역에 기반한 귀족으로 자라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만의 최전성기를 전후로 해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상비군단이던 정예보병이자 군사 엘리트 층이던 예니체리는 술탄으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기마 무사인 스파히Spahi는 술탄으로부터 봉토Timar를 하사받았는데, 이 땅 역시 군역이 끝나면 다시 술탄에게 회수됐다. 전제군주의 왕토사상이 그대로 적용됐던 것이다.

오토만 기마무사Spahi. 서양의 기사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서로 싸우면서 배운 것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총기가 개인 화기로 널리 쓰이면서, 이 기마무사의 쓰임새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스파히로 구성된 기마병단은 오토만에서 예니체리와 더불어 최고의 군사엘리트집단이었다. 

이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효과적인 관료제도가 필요하다. 술탄에게 충성하는 관료들이 없이는, 어디에 놀고 있는 땅이 있는지, 누가 제대로 세금을 바치고 있는지, 농땡이치는 자는 없는지를 파악할 길이 없지 않겠는가? 오토만 전성기 터키가 점령한 유럽 지역에는 이 같은 메카니즘이 작동했다. 이 당시 터키를 방문했던 당대의 유럽인들도 안정적 관료제에 기반한 술탄의 강력한 중앙집권 때문에, 오토만이 유럽을 한참 앞설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티마르가 됐건 봉토가 됐건 적어도 상위계급을 위해서 누군가는 땅을 경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서양의 농노에 비견될 만한 경작자들이 있었으며, 오토만 지배층들은 이들을 라야raja(영어로는 rayah)라고 불렀다. 라야, 원래는 가축/짐승 무리herd/flock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주에게 소작을 내거나 나라에 세금을 내는 오토만 경제의 중추였지만, 신분상으로는 하위계층이다. 라야라는 말은 이후 보스니아에서 의미전환을 거쳐 '오손도손한 친한 사람들끼리의 인적 써클'을 뜻하는 말이 된다. 세르비아에서는 오토만에서 순응하고 살았던 다수의 기층민중의 의식상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됐다. 세르비아에서 '라야 멘탈리티'라 하면 '저항을 못하는 피지배자의 순응의식'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오토만 정복 초기에 보스니아에서 라야의 역할은 기층 기독교인들이 전담했다. 그러나 한동안 전란에 귀족들이 지역을 뜨면서 남은 사람들이다. 프란시스코파 수도사들이 들어와서 일궈놓은 카톨릭계 주민들의 상당수는 이웃 크로아티아 등으로 이주했다. 보스니아 교회 조직이나 체계가 그리 탄탄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일부는 이때를 계기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공백을 계기로 세르비아 등에서 정교계 인구가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보스니아 토착교회는 정교라기도 하고 어렵고, 카톨릭이라도 하기 어려운 묘한 상황이었다. 카톨릭이 이 지역에서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자 봉건영주나 왕들조차도 긴가민가하는 상황에서 카톨릭을 받아들였지만, 보스니아 카톨릭의 뎁쓰는 그리 깊지 못했다. 이 같은 공백을 배경으로 헤르체고비나 등을 중심으로 있던 정교계 주민들이 보스니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부 세르비아계 정교신자들은 아예 무슬림들의 지배를 벗어나 크로아티아, 달마시아, 헝가리 등에 정착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황제가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군사특별구Vojna Krajna에 집중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못 간 사람들이 무슬림들 지배 하의 보스니아에 주저 앉았다. 이러한 경계선 상의 군사적 충돌의 상당수는 결국은 양대 세력을 등에 업은 세르비아인 간의 다툼에 지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지배세력으로 보스니아를 들어온 만큼, 일단 도시를 중심으로 생활했다. 사라예보를 보스니아 중심도시로 만든 것도 이들이다, 이들의 주요 생업이 정치, 행정, 그리고 상업에 있었던 만큼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건 이들은 이차저차한 경로를 통해 점차적으로 농촌지역에까지 퍼지게 된다.

오토만 터키가 보스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또 한번 인구지도가 바뀌었다. 끊임없는 이동, 이것이 슬라브의 전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당시 인구이동과 교류의 다이나믹스는 복잡다단했다. 슬라브 틈새에 끼여사는 각종 소수민족들(블라흐, 알바니아, 집시 등)까지 합치면, 경우의 수는 훨씬 많아진다.

1991년 현재 보스니아의 민족 지도. 그러니까 유고 내전이 일어나기 전의 인구지도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무슬림계가 서로 이리저리 얽힌 모습이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인구구성의 변화가 만들어 놓은 맨얼굴이라고나 할까. 민족별 구획이 나이스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쭉 이러고들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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