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만은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에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바로 이 거침없는 확장의 시대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병합된 것이다.
1463년 여름 보스니아 왕국이 오토만 터키 세력에 망하고 난 뒤에도, 또다른 슬라브 영역인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가 어느 정도 이들을 버텨냈다. 헤르체고비나는 독일식 귀족 타이틀인 헤어쪼그Herzog에서 비롯됐다. 이 땅의 지도자가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헤어쪼그의 변형인 헤르체그Herceg로 지칭하면서 굳어진 이름이다. 이곳이 오토만에 완전히 접수된 것이 1481/1482년간의 일이다.
19세기 말에 오토만이 워낙 형편없이 무너지다 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터키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세력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유럽세력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토만의 서진이 막힌 것도 오스트리아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이스탄불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가는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술탄의 거병은 항상 봄철 이스탄불에서부터 시작됐고,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나야 했다. 비엔나 문앞에서 번번히 기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서구에서는 오토만이 보스니아를 오래 다스리다보니 보스니아의 진보가 늦어졌다고 하는 시각이 팽배했고, 아직도 이런 견해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15-16세기의 오토만 시스템은 어느모로나 동시대 유럽의 봉건제도에 비해서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중의 하나)라고 극찬했던 모스타르의 다리. 16세기 술레이만 대제 때 만들어졌고, 오토만 건축기술의 극치로 평가를 받는다. 오토만의 기술로 이런 다리를 만들었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19세기 서구인들은 이 다리가 로마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활발한 정복노선을 견지했던 오토만은 궁극적으로는 군사집단이었다. 더 많은 정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인력(=병력)과 물자(=세금) 만 별 문제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슬람으로의 강제개종 노력도 없었고 종교를 빌미로 싸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만, 군인들이 필요하니까 데비쉬르메deviširme라는 엽기적인 소년 공출제도(영어로 번역하면 collection이라는 뜻)가 있기는 있었다.
데비쉬르메로 인해서 공출된 소년들 역시 미국의 흑인노예들처럼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정예병 예니체리로 교육을 받아 정기적인 급여를 받았고, 그것이 다수에게는 출세의 길이 됐다. 오토만의 전성기인 술레이만 대제 당시 총리Grand Vizier는 모두 10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데비쉬르메를 거친 슬라브 계였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따로 세습귀족이 없는 터키가 제국으로 거듭난 데는 이 같은 능력위주의 인사도 한 몫을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ša Sokolović(1506-1579)다. 오늘날 보스니아의 소콜라츠Sokolac에서 세르비아계 부모 슬하에 태어난 그는 데비쉬르메를 통해 출세한 대표적 인물이다. 술레이만부터 세명의 술탄 하에서 총 14년에 걸쳐서 총리Grand Vizier를 역임했으니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양반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역사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세르비아 정교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메흐메드 파샤는 페치Peć(오늘날 코소보에 있다)에 총대주교 관할구를 재건하고, 그 수장Patriarch으로 자신의 형제(친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인 마카리예Makarije를 앉혔다. 그 교회 시스템이 500년 동안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토만 터키의 가장 뚜렷한 유산은 뭐니뭐니 해도 사라예보Sarajevo다. 원래는 브르흐보스나Vrhbosna라는 이름의 한미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토만 터키가 들어서면서 보스니아 행정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탈바꿈했다. (이름 자체가 궁정 또는 성을 뜻하는 Sarai에 슬라브어의 형용형 어미 jevo가 붙으면서 나왔다) 당초 무슬림들의 도시였지만, 이런 저런 경제적 이유로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유태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거점이 됐다.
19세기 말에 오토만이 워낙 형편없이 무너지다 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터키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세력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유럽세력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토만의 서진이 막힌 것도 오스트리아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이스탄불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가는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술탄의 거병은 항상 봄철 이스탄불에서부터 시작됐고,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나야 했다. 비엔나 문앞에서 번번히 기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서구에서는 오토만이 보스니아를 오래 다스리다보니 보스니아의 진보가 늦어졌다고 하는 시각이 팽배했고, 아직도 이런 견해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15-16세기의 오토만 시스템은 어느모로나 동시대 유럽의 봉건제도에 비해서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중의 하나)라고 극찬했던 모스타르의 다리. 16세기 술레이만 대제 때 만들어졌고, 오토만 건축기술의 극치로 평가를 받는다. 오토만의 기술로 이런 다리를 만들었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19세기 서구인들은 이 다리가 로마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활발한 정복노선을 견지했던 오토만은 궁극적으로는 군사집단이었다. 더 많은 정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인력(=병력)과 물자(=세금) 만 별 문제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슬람으로의 강제개종 노력도 없었고 종교를 빌미로 싸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만, 군인들이 필요하니까 데비쉬르메deviširme라는 엽기적인 소년 공출제도(영어로 번역하면 collection이라는 뜻)가 있기는 있었다.
데비쉬르메로 인해서 공출된 소년들 역시 미국의 흑인노예들처럼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정예병 예니체리로 교육을 받아 정기적인 급여를 받았고, 그것이 다수에게는 출세의 길이 됐다. 오토만의 전성기인 술레이만 대제 당시 총리Grand Vizier는 모두 10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데비쉬르메를 거친 슬라브 계였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따로 세습귀족이 없는 터키가 제국으로 거듭난 데는 이 같은 능력위주의 인사도 한 몫을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ša Sokolović(1506-1579)다. 오늘날 보스니아의 소콜라츠Sokolac에서 세르비아계 부모 슬하에 태어난 그는 데비쉬르메를 통해 출세한 대표적 인물이다. 술레이만부터 세명의 술탄 하에서 총 14년에 걸쳐서 총리Grand Vizier를 역임했으니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양반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역사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세르비아 정교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메흐메드 파샤는 페치Peć(오늘날 코소보에 있다)에 총대주교 관할구를 재건하고, 그 수장Patriarch으로 자신의 형제(친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인 마카리예Makarije를 앉혔다. 그 교회 시스템이 500년 동안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경계선을 이루는 드리나강과 그 위에 세워진 180m 길이의 메흐메드 파샤 다리의 정경. 1577년 완공된 이 다리는 컨셉트의 과감성, 미학적 가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또다른 걸작이다. 보스니아의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 다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Na Drini ćuprija를 집필하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오토만 터키의 가장 뚜렷한 유산은 뭐니뭐니 해도 사라예보Sarajevo다. 원래는 브르흐보스나Vrhbosna라는 이름의 한미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토만 터키가 들어서면서 보스니아 행정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탈바꿈했다. (이름 자체가 궁정 또는 성을 뜻하는 Sarai에 슬라브어의 형용형 어미 jevo가 붙으면서 나왔다) 당초 무슬림들의 도시였지만, 이런 저런 경제적 이유로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유태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거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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