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4 : 사기꾼 황제

카리스마 만땅 다닐로가 1735년에 죽고 블라디카의 자리는 그 사촌인 사바Sava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사바는 사촌 답지 않게 내향적인 사람으로 뭘 장악하고자하는 권력욕이 없었다. 덕분에 모처럼 열린 시대의 몬테네그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가 지속됐다. 오토만과의 갈등, 부족과 씨족간의 분규가 지속되면서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라고 해야겠지만, 원래 중앙정부랄 만한 것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바 페트로비치. 종교인 답게 생겼다. 페트로비치 씨족의 첫번째  블라디카 후계자. 영적인 문제는 몰라도 세속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세인들은 성격이 강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다닐로가 어떻게 사바 같은 이를 후계로 지목했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다.

다닐로의 조카로  보다 젊고 에너지가 있는 바실리예Vasilije가 1750년 어찌어찌 당시 세르비아 정교수장으로부터 서품을 받음으로써 사바와 블라디카 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형국이 됐지만, 대외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가난하고 못살았으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라였다. 바실리예는 베니스, 러시아 등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1766년에 죽었다. 다시 블라디카 자리는 오롯이 리더십 결핍증에 시달리는 사바에게 넘어갔다.

바실리예 페트로비치. 얌전한 사바보다는 활동력이 있었다. 베니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을 순회하면서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시운 탓인지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권력의 공백기에 몬테네그로에는 사기꾼이 하나 흘러들어왔다. 몬테네그로 산속의 무지렁이들에게 자기가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의 남편으로 궁중 권모로 암살당한 (암살당하려다가 도망나온) 표트르 3세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나중에 "작은 스체판"Sćepan Mal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름으로 미루어 체구가 작았을 것으로 는 추정되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달마시아 산간과 해변지역에서 약초를 캐던 약장수가 몬테네그로까지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로 추정되는 데, 이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적어도 떠돌이 약장수를 하면서 익힌 언변으로 바깥 사정에 어두운 몬테네그로 산사람들을 홀린게 아닌가라는 것 까지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홀리고 다니더니 그 수가 제법 불어났다. 블라디카 사바가 나서서 족장들에게 표트르 3세는 실제로 죽었음을 알리려 했으나 오히려 (잠시나마) 구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오토만, 러시아가 아연해서 서로를 의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화 속의 삽화처럼 그려진 작은 스체판.  왜소한 체격으로 전통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마초를 선호했던 몬테네그로 산악부족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6년 동안 이들을 쥐락펴락했다. 

오토만이 우선 1768년 거병해서 산중 부족들의 세가 결집되는 것을 막고자 나섰다. 그러나 산중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니면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쟁이 나는 등등의 이유로 여의치 않았다. 러시아가 나섰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특사가 몬테네그로까지 와서 부족들에게 스체판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운 족장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특사는 결국 두 손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설에는 아예 스체판에게 러시아 장교복까지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변의 강국들이 자기 앞가림하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스체판을 실질적으로 몬테네그로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사법시스템을 도입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한편 시장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진보에도 불구, 1773년에 스체판은 오토만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나는 왕이로소이다'The man who would be King(1976)라는 영화가 있다. 션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 주연으로 영국의 사기꾼 두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가서 알렉산더 대왕을 참칭, 현지 부족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비슷한 일이 18세기 중엽 몬테네그로에서 일어난 것이다. 영화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체판의 참칭은 비극으로 끝났다.

사기꾼의 왕노릇이었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를 통해 몬테네그로의 대 오토만 항쟁과 호전성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대군과 맞서는 산중의 부족들. 게다가 낭만주의 시대 아닌가. 뭐하나 대승을 거둔 적은 없어도 압도적 무력 앞에서 근근히 버티는 몬테네그로 산중부족들은 자유를 그리는 서유럽 낭만가들의 몽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스체판이 죽고 난 뒤에도 블라디카는 여전히 사바였다. 이 무기력한 장수왕의 시대에 스체판은 산중 사람들의 단순 무식에 힘입어 강렬하게 매운 조미료 역할은 한 듯 하다.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3 : 리더의 탄생과 시대의 개막

산속에 처박힌 몬테네그로인들. 코토르를 비롯한 바닷가는 베네치아인가 평야 지역은 오토만의 지배체제가 들어앉았다. 몬테네그로는 이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사실은 그 두세력이 산으로 까지 굳이 쫓아들어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와 오토만 터키는 과거 츠르노예비치 가문의 땅이 온전히 오토만의 것임을 합의했지만, 츠르노예비치의 마지막 농성장소인 체티녜를 중심으로 다단한 부족과 씨족들이 살았다. 삶은 단순했다. 국가도 없고 세금도 없다. 귀족도 없고 농노도 없다. 이것이 바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부족pleme(tribe), 씨족bratsvo(clan) 등의 단어가 근세까지 살아서 남아있게 된 연유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없는 사회라는 것은 지극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오토만과 같은 강대한 적이 있을 때는. 그래서 산중의 부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뽑았다. 누구에게도 불편부당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블라디카Vladika라는 직함을 가지게 됐다. 정치적 스킬도 있어야 하지만, 군사적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고 큰 사람이면 더욱 좋다.

블라디카 다닐로의 모습. 당연히 직접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후세에 보다 로만틱하게 각색한 그림이다. 정교 승려라기 보다는 댄디한 군인처럼 보인다. 군사지도자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도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블라디카를 중심으로 몬테네그로는 초록동색 베네치아와의 연합을 통한 오토만 군과의 대항전선을 만들었고 베네치아와 오토만 사이에서 일어난 다단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만과 항상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시세와 풍향에 따르는 잡초와도 같은 삶이다.

그러나 17세기를 기점으로 오토만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던 베니스 포위(1683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산속의 바람도 슬슬 동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녜구시Njeguši족 페트로비치Petrović 집안의 25살짜리 승려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에 선출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1697). 오토만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과 야망이 있었다. '체티녜 주석 블라디카 겸 세르비아의 령(!)도자' Vladika of Cetinje and Vojvodić of Serbian Land. 그의 (자칭) 공식 직함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한 다닐로는 몬테네그로사에서는 지금까지 없던 두가지 유산을 남겼다.

그 하나가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함대 구축, 부동항 건설을 국가적 목표로 내놓고 뛰어다닐 때다. 항해술 습득을 위해 청년 장교들을 서방으로 보낼 때, 베네치아가 관리하던 코토르Kotor에도 몇사람 보냈다. 이곳에서 이들은 산중에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호전적인 부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몬테네그로와 러시아 간의 관계가 시작된다. 동일한 정교를 신봉하는 데다 오토만과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신흥강대국 러시아에 몬테네그로가 홀딱 빠졌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일까 몬테네그로의 러시아 숭배는 거의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를 처음으로 열어나간 것이 다닐로였다. 블라디카 다닐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원조를 바탕으로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화력과 더불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몬테네그로 부족들의 유일한 생명줄 노릇을 해왔던 베네치아가 가만히 만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인연이 있던 족장들을 초치하고 그 중 대장급에게 지사guvernadur의 명함을 달아줬다. 이간책이었다. 다닐로는 정치적 수완으로 이같은 외세의 개입을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뜨는 해라면 베네치아는 지는 해였다. 표트르 대제를 중심으로 오토만 못지 않은 국토확장을 추진하는 러시아, 그리고 지중해 무역의 위상이 옛날같지 않은데다 곧 있으면 나폴레옹에게 망할 베네치아.

또 블라디카직의 세습...

다닐로 때부터 블라디카 직이 다닐로가 속해있던 페트로비치 씨족에만 전승되는 전통이 생겼다. 다닐로의 카리스마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사는 정교 승려의 신분에 후사가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조카가 이어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습군주는 아니지만, 어느 집안을 구심점으로 중요한 정치적 권력이 전승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민주적 부족사회의 전통과는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집중되고 집약되기를 바라는 권력의 구심력이 어디선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블라디카에게 없던 권력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산중의 부족장들은 여전히 말을 안들었고 이들에게 다닐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문'이라는 위협과 협박 뿐이었다.

17세기 벽두에 다닐로가 건립한 체티녜 수도원Cetinjski manastir. 옛날 츠르노예비치 왕가가 만들었다는 수도원 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체티녜를 들이닥치는 바람에 여러번 불탔지만, 그 때마다 다시 세웠다.  페트로비치 가문의 또다른 성자 페타르의 유골이 봉헌된 곳이기도 한 만큼, 몬테네그로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만 하다. 

오토만과의 다단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구축한 블라디카 다닐로가 워낙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지 몬테네그로의 후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학살'Christmas Eve Masacre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702년에 일어났다는 이 사건은 다닐로의 명하에 마르티노비치Martinović 가문의 다섯 형제(와 그 권속)들이 무슬림 (배교자) 마을을 찾아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사건의 역사적 진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후세 몬테네그로인들은 이를 통해 다닐로를 더욱 살갑게 기억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서사시도 여러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도 나오지만 몬테네그로 국민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중화환Mountain Wreath이다.

어쨌거나 다닐로를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몬테네그로의 새 시대가 열렸다. 물론 다닐로는 이 역사적 길목에서 스스로를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포지셔닝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어떻게 몬테네그로라는 별도의 지향점으로 빠져들었는가가 역사의 미묘한 점이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2 : 산 속의 생활

15-6세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오토만의 물결을 피해서 산으로 달아난 몬테네그로인들. 산으로 들어가고 보니 사방이 막막했다. 디나릭 알프스 자락의 산악 지형은 카르스트 암반 위주의 지형이다. 몬테네그로에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은 돌덩어리들을 이쪽지역에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당연히 거칠고 황폐하다.

코토르 만을 둘러친 몬테네그로의 산들. 물가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산위는 보기는 좋지만 살기는 영 아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19세기말까지 산에서 내려오질 못했고 이들 해변 도시를 제대로 접수한 것 역시 20세기 전후의 일이다.

이런 산속에서 최후까지 반 오토만 전선의 선봉이었던 이반 츠르노예비치도 몇 년 살아보다가, 15세기 말 베니스로 투항했다. 츠르노예비치의 후예로 이반의 세째 아들 스타니샤Staniša는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토만 술탄의 대리자로서 지역을 군림했다. 그러나, 지역에 뿌리박은 호족으로서가 아니라  행정관료로서였다.

산속에서 지배계급이 없어진 만큼 몬테네그로 인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다. 억센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도 그만큼 억세어지지 않으면 안됐다. 그렇다고 개개인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던 만큼 대가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들이 나타났다.

목축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지만, 이것 역시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산아래로 내려와서 약탈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주된 약탈의 대상은 주로 어느정도 윤택했던 무슬림 대갓댁이었지만, 부족들 끼리도 목축지를 둘러싸고 험한 싸움이 지속됐다.

위의 그림은 산 아래를 내다보는 몬테네그로 전사의 모습. 마초들이 다스리는 남성우위사회다.  고산지대를 배경으로 강팍한 스파르타 생활을 영위했으니까 가히 하이랜더라 할만 하다.

누군가 나의 원한과 원망을 풀어주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줄 중앙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는 부족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룰이 금과옥조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룰은 부족간의 쟁패를 불식하기는 커녕 더 확산시킬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산 아래는 오토만이라는 강적이 있지 않은가?

해서 부족간의 분규 해결이나 쟁송 협의를 위해서 부족회의Opšti Crnogorski zbor가 구성됐다. 오늘 날 의회와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되려나? 또 누군가 불편부당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블라디카Vladika, 부족간 회의를 통해서 선출된 지역 정교교회의 수장이다. 영어로는 Prince-Bishop으로 번역되는 데, 만약 번역 그대로라면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제정일치 또는 신정합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금 제도가 없다 보니 중앙집권적 정부가 나올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오토만에 먹히던 내분으로 망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방책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이런 권력을 몰아주기는 어려우니 어느정도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종교인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카가 받은 권력이라는 것 역시 실제적 물리력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블라디카의 궁극적 역할은 군사지도자이자 중재자였다. 군사지도자라 함은 오토만에 대한 군사지도자, 중재자라 함은 부족간의 알력을 막는 타협의 매개체 역할인데, 말 안듣는 족장에게는 '파문' 으름짱을 놓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몬테네그로 산중의 생활. 터키식 칼 야타간과 총을 찬 남자들의 무대였다. 이들에게 '무장해제'란 '거세'와 비슷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19세기까지 몬테네그로의 정치체제는 정교일치였다고 하지만, 오늘 날의 이란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의 블라디카의 권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봉건 영주가 없는 무계급 사회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산에서 사는 만큼 삶은 강팍해졌지만, 개인을 찍어누르는 계급은 없어진 셈이다. 무정부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 이것이 몬테네그로 산중생활의 실체였다. 이 같은 생활양식이 18-19세기 서유럽의 낭만주의적 영감을 자극했다.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10 : 록에서 집시 뮤직까지 Goran Bregović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는 보스니아 출신의 락/에트노 뮤지션이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2차대전 후 사회적 긴장이 완화된 틈을 타서 민족 간의 혼인이 성했다. 고란 브레고비치도 이런 예로, 아빠는 세르비아, 엄마는 크로아티아계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근 모습. 90년대 유고 내전이후 고향이 보스니아를 떠나 세르비아에 눌러 앉기는 했지만 이기 팝Iggy Pop 등 서구 락스타에게 곡을 주고 크로아티아의 팝스타 세베리나Severina 등과 교류하는 등 국제적 지명도도 높다.  

20대 초반이던 70년대 말, 고란은 보스니아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모색끝에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라는 뜻)라는 락 밴드를 결성했다. 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 뿐만 아니라 유고 락 음악 역사에서 다수의 기념비적 명반을 배출한 대표 밴드다. 초기작들은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락 계열이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류에 편승해서 뉴웨이브로 전환했다. 고란의 변신의 싹수는 여기서 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옐로 두그메 전성기 때의 모습.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만나다 보니 경제적으로 피지는 못해도 유고슬라비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비옐로 두그메 역시 가장 시골스런 곳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을 추구한 밴드 되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밴드음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고란 브레고비치는 결국 세르비아에 정착하고 본령인 락음악에서 집시음악을 중심으로 한 에트노/월드 뮤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하필이면 집시음악인가? 모를 일이지만, 비옐로 두그메 후기 앨범에서는 집시노래 번안곡이 들어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음악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형성된 듯 하다.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와의 공동작업(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 에밀 쿠스트리차 대표작의 음악은 모두 고란의 작품)을 통해 집시 뮤직에 기반을 둔 영화음악을 발표해서 그 성가는 일국을 넘어서 범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 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만가다. 헤쳤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남슬라브족의 처지가 정처없이 유랑하는 집시들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유고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가 부질없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적어도 90년대에 들어 사방에서 고립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고란표 집시음악이 상당히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왔던 것 같다. 고란은 음악적 방향을 바꾼 90년대 이후 다른 나라 민족음악인(속칭 월드뮤직)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혔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집시 음악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

고란 브레고비치작 집시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완급 조절이다. 하드 드라이브 일색의 집시음악에 고란은 긴장과 이완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 주류적 대중감성, 모던 프로덕션 기술로 사운드를 윤색하니까 정말로 성속聖俗, 귀천貴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잘된 음악이 나왔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섹스Sex. 원래 음반에서는 집시 음악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음성이 수록됐다. 샤반의 다른 음반과 비교해 보면 프로듀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 한데, 은밀하게 밀고 당기는 듯한 섹스의 정조가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나 허다한 작품 가운데에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대 히트곡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1989)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에데를레지'Ederlezi다. 90년대 세르비아에서는 시대의 송가처럼 불리워 졌다. 

전통적 집시 브라스밴드의 반주를 바탕으로 한 에데를레지. 2005년 이태리 아시시Asisi 성프란시스코 바실리카에서 개최된 크리스마스 라이브 현장이다.  

에데를레지는 발칸의 종교축일 '聖조지의 날'Đurđevdan(Saint George's Day)를 기리는 집시들의 노래다. 이 날을 전후로 사람들은 강가에서 몸을 씻고 새끼양 통구이를 먹는다. 종교축일의 틀을 빌렸지만, 실제 주민들에게는 다가오는 봄을 기리는 축제날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발칸의 주민들은 카톨릭, 정교, 무슬림 할 것 없이 이 날을 기념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이교도의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보 안드리치와 더불어 보스니아 대표문호 메샤 셀리모비치Meša Selimović의 대표작 더비쉬와 죽음Derviš i smrt은 바로 이 성조지의 날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슬람 성직자Derviš인 주인공이 밤중에 길을 걸어가면서 성조지의 날을 맞는 주민들을 보면서 제도화된 종교적 순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남과 여의 원초적 마그네티즘으로 형성되는 생명이란 순수와 고결을 숭배하는 화석화된 기성종교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에데를레지는 종잡을 수 없는 봄 또는 생명의 시작을 찬미하는 찬송이지만 그 가사는 애잔하기 그지없다.
Ederlezi 
All my friends are dancing the oro Dancing the oro, celebrating the day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But me, poor, I am sitting apart
A Romany day, our day
Our day, Ederlezi
They give, Dad, a lamb for us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 : 옛 로마의 도클레아

몬테네그로Montenegro.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현지어로된 정식명칭은 검은 산의 직역인 츠르나 고라Crna Gora. 라틴어를 애호했던 옛 식자들 덕분에 외지인들에게는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대한민국이 코리아가 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할까나.

발칸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슬라브족이 살았던 땅이 아니었다. 로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그리스 혹은 로마 시민들이 바닷가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내륙 일리리아의 부족들과 교류했다. 그 때 이 땅 이름이 도클레아Doclea(또는 디오클레아Dioclea, 원래 이땅에 살고 있던 일리리아 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였다. 나름대로 번성했던지 서력 3세기 경에는 이 땅에서 로마 황제를 배출했는데, 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릿Split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발칸이 배출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비대해진 로마를 다스리는 방책으로 4두정치체제를 구상한 사람이다. 이 궁전은 황제직에서 은퇴한 뒤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 만든 사저다. 

도클레아라는 이름은 슬라브족이 도래한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슬라브족은 이 땅을 두클랴Duklja라고 불렀다. 어쨌건 기존 토착민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한 슬라브족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패자가 명멸하는 봉건제가 지속됐다. 그 때를 기해 이 지역은 제타Ze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9세기 경의 지역 세력관계도. 도클레아가 바로 오늘날 몬테네그로와 대충 맞아떨어진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이 강했고, 그 덕에 이 곳 슬라브들도 동방정교를 신봉하게 됐지만 해안가는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도 강하다.  

14세기 경에 이 지역을 다스린 유력가문으로 츠르노예비치Crnojević가가 융성했는데, 레베카 웨스트는 이 때 당주 츠르노예 때문에, 이 지역 이름이 츠르나 고라 즉 블랙 마운틴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살던 지역의 산색이 거뭇해서 생긴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 가문이 15세기 오토만(또는 베니스 공화국)에 의해 궁벽한 산속으로 쫓겨나면서 수도로 삼은 것이 오늘 날의 체티녜Cetinje다.

몬테네그로 체티녜에 설치된 최후의 슬라브 봉건영주 이반 츠르노예비치의 동상. 황량한 산속에 들어선 체티녜는 왕궁이 있기에는 부적합한 궁벽한 도시지만, 바다는 베니스 평지는 오토만이 장악하면서 이곳 몬테네그로 슬라브들의 정신적 본거지가 됐다.

여느 슬라브 영주와 마찬가지로 오토만의 서진은 몬테네그로에도 두고두고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웃민족인 알바니아계가 전반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민족 간의 분쟁은 종교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오토만 조정이나 이곳에 파견된 행정관의 입장에서는 산속의 슬라브족들 언제든지 쓸어버릴수도 있었지만, 황량한 산속의 슬라브족을 굳이 치고들어갈 전략적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몬테네그로의 산지를 두고서 '두개의 군대가 싸우면, 작은 군대는 맞아죽고, 큰 군대는 굶어죽는 곳'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그만큼 척박한 땅이다. 몬테네그로의 산악지역에는 오토만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15세기 이후 몬테네그로를 독립국으로 볼 수 있을까? 몬테네그로 산지의 물질적 여건이 중앙집권형 왕국이 나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 슬라브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강력한 왕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족 더 나아가 소속 부족 밖에 없었다.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실질적으로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유사한 부족사회 체제가 유지됐다. 우리나라와 빗대어 보자면 3국시대 이전 시기와도 비슷한 경우? 지금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외지인이 아니라면 자기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3 : 히틀러의 작난

근세사에서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불안이 가장 크게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2차대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독, 이, 일의 3국동맹에 참여했던 유고슬라비아 섭정  파블레공이 쿠데타로 쫓겨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반응을 기다려주질 않았다. 1차대전 후 각 참전국의 명운을 결정한 베르사이유 조약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작했던 히틀러로서는 그 산물인 유고슬라비아 자체도 존중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유고슬라비아군 수뇌부로서는 한 20일은 버티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지만, 왕정 유고슬라비아군이 백기투항한 데 든 시간은 열흘 남짓. 가볍게 유고슬라비아를 접수한 독일(과 이태리 등)은 유고의 국경을 다시 그렸다. 이렇게 해서 과거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은 독립 크로아티아, 동쪽에는 괴뢰 세르비아를 앉혀 놓고,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독일과 이태리가 반분하는 형태였다. 보스니아는 하루 아침에 독립 크로아티아의 영역이 된다. 

2차대전의 시작과 더불어 만들어진 독립크로아티아NDH, 보스니아를 꼴랑 다 먹어 버렸다. 보라색으로 처리된 해변지역은 NDH가 이태리에게 넘겨준 지역이다.  

크로아티아로 들어선 우스타샤 정권은 독일과 이태리의 '순수성'을 벤치마크해서 유태인은 물론 영내의 세르비아계를 잡도리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본토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같은 난리가 극대화하되는 곳은 역시 세 민족이 모여사는 보스니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립크로아티아NDH 정부는 보스니아에서도 일단 사라예보를 거점으로, 체계적으로 유태인들하고 세르비아계들을 잡도리질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 정권은 희한하게 무슬림들에게는 관대했다. 아무래도 보스니아에서 겪는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슬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여기에 무슬림들의 일부가 호응을 했다. 

무슬림들의 상징인 페즈를 착용한 NDH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 그 스스로가 보스니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르체고비나) 출신이다. 석회암으로 팍팍한 헤르체고비나 땅을 두고 세르비아인들은 '돌과 뱀 그리고 우스타샤 만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우스타샤 정권이 유화의 손길을 준다고 해서 무슬림들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다종교 사회를 살아온 대다수 무슬림들에게는 우스타샤가 벌이는 학살극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때는 사라예보 무슬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우스타샤와 일부 무슬림 '쓰레기'들의 살륙극을 중단하라는 청원이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도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슬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비전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스타샤의 장단에 얼결에 선무당 칼춤을 췄던 무슬림들이 NDH가 자신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시작하면서 NDH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 무리의 무슬림들이 히틀러에게 독일의 보호하에 자치와 별도의 무장조직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선심쓰는 척하면서 보스니아 무슬림들로 이뤄진 친위돌격대 SS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원성을 듣는 단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계 역시 팔짱끼고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세르비아계는 어디까지나 1940년대에서 보스니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민족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의 꼬불탕 산악지역이 NDH 나 독일군이 생각하듯이 쉽게 접수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Četnik 조직이 들고 일어났다. '눈에는 눈' 여기저기서 당한 학살에 대한 앙갚음으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였다. 

보스니아의 산악지형은 게릴라 전을 벌이기 딱 좋은 지형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여기를 주무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을 두고 독일과 이태리 등 파시스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의 기치가 걸렸지만, 내용은 결국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 세르비아계 체트닉,  공산주의 빨치산의 3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작난질은 보스니아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파생시켰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12 : 얼떨결에 유고슬라비아

정작 사라예보에서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는 하지만, 대전 내내 보스니아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의 전세가 기울어 가는 데에도 보스니아는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소요가 없었다. 다만 전시경제 하에서의 곤궁함은 지속됐다.

1차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에 점점 불리하게 흐르면서 남슬라브 제민족을 하나로 묶는 유고슬라비아 운동이 정치적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패전 무드가 무르익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형성됐고, 허망하게 도시를 떠난 제국의 관료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세르비아군이 진주했고, 일부 유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 간의 갈등으로까지 격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세르비아계들은 환희용약했다. 드디어 대세르비아가 실현되는 때였으니까. 세르비아 본토에서 건너온 군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 터키의 잔재인 무슬림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세르비아 인사 중에는 무슬림들의 강제개종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12년 발칸전쟁 때 잔학한 인종청소로 인해서 '야만인'으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로서는 애먼 무슬림들을 쫓아낼 도덕적 명분도 없었거니와 국력도 고갈된 마당이었다.

어쨌거나 보스니아도 역시 얼떨결에 남슬라브의 일원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에 편입됐다. 보스니아가 원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무슬림들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대충은 맞는 국호이긴 하다 하지만, 무슬림들로서는 꺼림직했다. 난 도대체 누구야?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스스로가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 둘 중의 하나일꺼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기해 무슬림들 간의 독자적 정치조직화가 이뤄졌다. 1919년 2월에는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브 무슬림 기구'Yugoslav Muslim Organization이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왕정시대 무슬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했다. 초반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해 낸 사람이 바로 메흐메드 스파호Mehmed Spaho다. 이 사람의 주장인 즉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정치체제 하에서 독자적 정체성과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모습. 비엔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두 동생 중에 하나는 세르비아계로 다른 하나는 크로아티아계로 천명했다. 한마디로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은 애매하고 모호했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정치적 입장은 민족이건 아니건 그 이후로도 무슬림들의 전통적 자기주장이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로서의 통합성은 여전히 난제였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언제든 기댈 언덕이 있었지만, 무슬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중간자적 입장, 국외자적 정치적 토대는 새로 형성된 왕국에서 희한하게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캐스팅 보트 권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1, 2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서의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세르비아 왕가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손을 들어줘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대협약Sporazum이 형성됐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제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에 반분되는 결과가 나온다. 유력 무슬림 정치인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메흐메드 스파호도 1939년 대협약이 막바지 협상단계에 들어섰을 때  죽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내일이 어떻게 됐건, 시간은 급박하게 흘렀다. 대충 뭔가 정리될 시간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