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4 : 사기꾼 황제

카리스마 만땅 다닐로가 1735년에 죽고 블라디카의 자리는 그 사촌인 사바Sava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사바는 사촌 답지 않게 내향적인 사람으로 뭘 장악하고자하는 권력욕이 없었다. 덕분에 모처럼 열린 시대의 몬테네그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가 지속됐다. 오토만과의 갈등, 부족과 씨족간의 분규가 지속되면서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라고 해야겠지만, 원래 중앙정부랄 만한 것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바 페트로비치. 종교인 답게 생겼다. 페트로비치 씨족의 첫번째  블라디카 후계자. 영적인 문제는 몰라도 세속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세인들은 성격이 강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다닐로가 어떻게 사바 같은 이를 후계로 지목했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다.

다닐로의 조카로  보다 젊고 에너지가 있는 바실리예Vasilije가 1750년 어찌어찌 당시 세르비아 정교수장으로부터 서품을 받음으로써 사바와 블라디카 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형국이 됐지만, 대외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가난하고 못살았으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라였다. 바실리예는 베니스, 러시아 등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1766년에 죽었다. 다시 블라디카 자리는 오롯이 리더십 결핍증에 시달리는 사바에게 넘어갔다.

바실리예 페트로비치. 얌전한 사바보다는 활동력이 있었다. 베니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을 순회하면서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시운 탓인지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권력의 공백기에 몬테네그로에는 사기꾼이 하나 흘러들어왔다. 몬테네그로 산속의 무지렁이들에게 자기가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의 남편으로 궁중 권모로 암살당한 (암살당하려다가 도망나온) 표트르 3세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나중에 "작은 스체판"Sćepan Mal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름으로 미루어 체구가 작았을 것으로 는 추정되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달마시아 산간과 해변지역에서 약초를 캐던 약장수가 몬테네그로까지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로 추정되는 데, 이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적어도 떠돌이 약장수를 하면서 익힌 언변으로 바깥 사정에 어두운 몬테네그로 산사람들을 홀린게 아닌가라는 것 까지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홀리고 다니더니 그 수가 제법 불어났다. 블라디카 사바가 나서서 족장들에게 표트르 3세는 실제로 죽었음을 알리려 했으나 오히려 (잠시나마) 구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오토만, 러시아가 아연해서 서로를 의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화 속의 삽화처럼 그려진 작은 스체판.  왜소한 체격으로 전통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마초를 선호했던 몬테네그로 산악부족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6년 동안 이들을 쥐락펴락했다. 

오토만이 우선 1768년 거병해서 산중 부족들의 세가 결집되는 것을 막고자 나섰다. 그러나 산중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니면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쟁이 나는 등등의 이유로 여의치 않았다. 러시아가 나섰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특사가 몬테네그로까지 와서 부족들에게 스체판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운 족장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특사는 결국 두 손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설에는 아예 스체판에게 러시아 장교복까지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변의 강국들이 자기 앞가림하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스체판을 실질적으로 몬테네그로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사법시스템을 도입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한편 시장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진보에도 불구, 1773년에 스체판은 오토만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나는 왕이로소이다'The man who would be King(1976)라는 영화가 있다. 션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 주연으로 영국의 사기꾼 두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가서 알렉산더 대왕을 참칭, 현지 부족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비슷한 일이 18세기 중엽 몬테네그로에서 일어난 것이다. 영화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체판의 참칭은 비극으로 끝났다.

사기꾼의 왕노릇이었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를 통해 몬테네그로의 대 오토만 항쟁과 호전성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대군과 맞서는 산중의 부족들. 게다가 낭만주의 시대 아닌가. 뭐하나 대승을 거둔 적은 없어도 압도적 무력 앞에서 근근히 버티는 몬테네그로 산중부족들은 자유를 그리는 서유럽 낭만가들의 몽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스체판이 죽고 난 뒤에도 블라디카는 여전히 사바였다. 이 무기력한 장수왕의 시대에 스체판은 산중 사람들의 단순 무식에 힘입어 강렬하게 매운 조미료 역할은 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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