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6 : 거래와 대장정

41년 겨울 공세를 기점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를 전전하다 이듬해 5월 몬테네그로 체트닉들의 거점으로 옮겼다. 도착하고 보니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신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체트닉들이 점령군인 이태리군과 오손도손 공생관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42년 몬테네그로에서 미하일로비치. 왼쪽의 인사는 영국 특작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소속 빌 허드슨 Bill Hudson 대위다. 영국은 41년 9월 허드슨 요원을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했다. JVO가 망명정부 하의 '합법적' 저항군이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이 연합군의 일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태리군, 지긋하게 말안듣는 몬테네그로를 혼자서 다스리자니 막막했다. 이태리의 원래 생각은 이랬다. 몬테네그로를 일단 독립시키고 이태리의 보호령으로 관리해주면 그럭저럭 지나가지 않겠는가라고.... 그러나 몬테네그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일로 자존심 상한 몬테네그로 마초들이 41년 봉기를 일으켜, 이태리군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몬테네그로의 꼴마초들, 과거 세기때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사람을 잡으면 반드시 신체를 훼손하는 버릇이 남아 있다. 코나 목이 없는 시체들을 보니 이태리군도 꼭지가 돌았다. 일단 봉기세력은 가혹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독일군 처럼 두당 몇명 식의 보복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협력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파시즘의 철천지 원수니까 무시하기로 하고, 체트닉들과 손을 잡기로 한다. 체트닉들도 쌀한톨 안나오는 산속에서 지내자니 아쉬운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태리가 도와준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달라 붙었다. 이런 거래관계가 성립됐다. 체트닉들에게 탄약과 식량을 대주는 대신 공산당을 같이 몰아내고 더 이상 이태리군에 딴지걸지 말기. 도시지역은 이태리군이 시골지역은 체트닉들이 접수.

우리가 너무 다정했나? 이태리 장교와 사진을 찍은 사람(왼쪽)은 달마시아 지역의 체트닉 대장 몸칠로 주이치Momčilo Đujić. 이태리군과의 공생관계는 살자고 하는 짓이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는 책잡힐 행동이었다. 직할대도 없고, 나눠줄 물자도 없는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이런 거래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관계는 몬테네그로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달마시아, 헤르체고비나, 이태리군이 진주한데서는 비슷한 거래관계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태리군 점령지역에서는 세르비아인들에 더해서 덤으로 유태인들까지도 이태리군의 보호를 받게 됐다. 좋은게 좋았던 이태리인들, 아무리 파시즘 파트너이긴 하지만 나찌독일이 무슨 억하심정에 사람을 저리 험하게 대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덕분에 이태리군 진주지역은 유고 여타지역에 비해서는 개중 상황이 나았다는 평을 듣는다.
 
명색이 연합군의 일원인 미하일로비치는 이런 상황이 불만이었지만, 체트닉 대장들을 대놓고 면박하질 못했다. 살자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체트닉 대장들은 게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보니, 우스타샤들의 폭주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의 보복을 추진하다보니 중간에 낀 무슬림들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거래나 행동 방식은 나중에 심각한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42년 1월 보스니아 동남부 포차Foča에 똬리를 튼 공산당. 아무래도 세르비아에서 제대로 된 민중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게 찝찝했던 지도부는 여기서 향후 봉기의 방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즉 투쟁의 성격을 인민해방운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개념까지 정립한 것은 좋았는데, 또 독일군, 우스타샤, 이태리군이 압박해 왔다. 일단 살아야 한다. 5월에는 포차에서도 쫓겨나와 목표를 보스니아 북서부 비하치Bihać로 잡았다. 논리적으로 거기 밖에 없었다. 일단 독일군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만만한 체트닉이나 우스타샤를 주로 상대하면서 NDH 치하 보스니아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행정공백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대장정도. 지도 우측 하단 포차(네모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좌측 상단의 비하치(네모안)까지의 장정로. 붉은색 화살표가 빨치산들의 행로인데, 행군이라기 보다는 거의 관운장 오관돌파다. 관우? 이 같은 유사경험이 있어서였는지, 중국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와 할 말이 많았다. 요새도 중국 외교관들이 티토의 고향인 쿰로베츠Kumrovec를 곧잘 들린다고한다. 자그레브에서 그리 멀지않다.

이태리군과 독일군/우스타샤 간의 공백지대를 절묘하게 타고 북서쪽으로 걸어나갔다. 이것이 속칭 유고판 대장정이다. 총 이동거리는 300km에 지나지 않았지만, 컨셉이나 목적 자체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과도 거의 동일했다. 산악지역을 타고 나가면서 보급도 해결해야하니까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빨치산 개념 자체가 지역을 기반한 것이 아니니까, 부상자까지 데리고 다녀야 한다.

천신만고의 개고생이었지만, 이 대장정은 하나의 자산이 됐다. 특히 일반대중들에게 스스로를 부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산당 지도부가 초기의 극좌적 오류를 시정하고, 점령군이나 우스타샤, 체트닉 세력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스타샤들이 하도 분탕질을 치고 체트닉들의 가차없는 보복작전 바람에 잠재적 빨치산들은 차고 넘쳤다. 당초에는 세르비아계가 주축이었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유태계, 크로아티아계나 무슬림계들이 빨치산들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면에서 대장정은 인민해방전선의 실질적 모태가 됐다.

그래서 목적지 비하치에 도착한 것이 42년 11월. 일단 한숨 돌리고 난 다음, 티토는 '뭔가 정부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대표들을 소집해서 11월 26-27일,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인민해방위원회Antifašistički veće/vijeće narodnog oslobođenja Jugoslavije (AVNOJ)를 구성했다. 혁명은 일단 잊고 침략자에 맞서 싸우자는 결사체다. 이에는 이전 농민당, 세르비아계 민주당, 무슬림 조직등의 대표가 54명이 모였다. 정부까지는 아니지만 해방운동 세력의 대표기구가 됐다. 티토 그 자신은 이 자리를 빌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 최고 사령관이 됐다.  이 때가 빨치산들에게는 속칭 '비하치 공화국' 체제다.

비하치에서 열린 1차 AVNOJ회의. 상단에 쓰여있는 글씨는 '파시즘에 죽음을, 인민에게 자유를'smrt fašizmu-sloboda narodu, AVNOJ의 공식 구호였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5 : 41년 겨울, 패주의 길

공산당과 체트닉. 침입자에 항거한다는 면에서 존재의의는 같았지만, 현실인식, 전술, 전략, 비전 등에서 달라도 너무 달랐다. 41년 9월과 10월 양대세력의 지도자, 미하일로비치와 티토는 두번에 걸쳐 만난다. 같이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만나도 뭔가 앗쌀하게 투합되는 것은 없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의 징벌적인 보복전략도 있고, 이웃 NDH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인종청소, 불가리아, 헝가리 등으로 할양된 지역에서 쫓겨나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 전례없는 민족절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고 느꼈다. 지금 단계에서 맞서 싸우다가 진짜 멸종을 당하는 것보다는 일단 연합군이 다시금 승기를 잡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  망명정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41년 9월 유고 전역의 봉기지도. 붉게 표시된 지역이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체트닉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당 봉기지역의 상당부분은 체트닉과 겹쳐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체트닉과 공산당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다.

티토는 생각이 달랐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 소련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소련의 즉각적 승리를 믿었던 그로서는 지속적인 후방교란을 통해서 소련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슬림, 크로아티아까지 포괄한 유고슬라브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했다. 망명정부? 그딴 거 관심없음.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큰데다, 양대 세력의 중간보스들 간의 경합의식도 강했다. 언제든 상대편을 쓸어버리고자 하는 강경파들이 곳곳에 포진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독일의 징벌적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양자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리게 되어, 독일의 토벌작전과 더불어 양자 간의 교전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초기의 티토는 한가지 더 실수를 했다. 혁명까지 생각하다보니 계급의 적까지 처단해야 했는데, 이게 민심을 더 이반시켰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별로 없는 나라에서 무슨 사회주의 혁명이겠는가. 일단 또아리를 튼 우지체가 지역의 경제중심지이긴 하지만, 그 주변지역 주민 대부분은 '왕과 조국'을 믿는 순진한 소농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하는 사상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이 41년 11월 25일. 티토의 빨치산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결국 우지체를 떠나기로 한 것이 11월 29일의 일이다. 꼼짝없는 패주의 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운명은 티토만 겪은 것은 아니다. 12월초에는 미하일로비치가 가까스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같은 패주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티토는 41년 12월 산작지방Sandžak에서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는 기동군,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prva proleterska udarna brigada을 만들었다. 이 상시군들을 데리고 그대로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콘스탄틴 '코차' 포포비치Konstantin Koča Popović. 세르비아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을 전공한 인테리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였다. 티토와의 인연은 1936년 스페인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 당시, 티토가 유고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참여시키는 알선책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고산 스페인 내전 베테랑들은 나중에 빨치산 지휘부의 중핵을 차지하게 된다.

체트닉은 이게 안됐다. 일단 미하일로비치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때는 주위에 달랑 참모들 몇명 밖에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체트닉 조직이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방위조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도 봐야 하고, 소도 키워야 하는 관계로 살던 동네를 떠나기 싫다. 41년 겨울 나찌 독일의 공세를 겪으면서 미하일로비치가 거느리던 체트닉들은 투항하거나 아니면 '합법화'의 길을 걸었다.

합법화된 체트닉? 미하일로비치가 라브나 고라에서 만든 군사조직에 체트닉 분대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체트닉과 관련된 상표권을 등록한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저항조직으로서 체트닉도 있었지만, 세르비아에는 괴뢰정부, 점령군과도 협력하는 '합법' 체트닉이 있었다. 괴뢰정권의 수장 네디치Nedić는 미하일로비치 잔당에게도 비슷한 기회를 줬고, 여기에 다수의 저항 체트닉들이 포섭됐다. 미하일로비치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부하들이 이렇게 합법화되는 것을 부러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괴뢰정부에 침투하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미하일로비치는 2차대전 내내 직할 부대가 없었다. 도망다닐 때도 항상 몇명의 참모와 스탭들 뿐이었다. 일단은 각 지역에 웅거한 체트닉 대장들을 망명정부가 인정한 군사령관인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 산악지역으로 숨어든다.




2014년 3월 9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15: 나는 록스타 Bijelo Dugme

60년대 선구적인 밴드들의 뒤를 이어, 70년대는 록밴드들이 쏟아져 나타나기 시작했다. 팬덤도 커진 것은 물론이다. 봉황이 한마리 나오려면 닭이 천마리 있어야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록스타가 나타났다.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다.

비옐로 두그메 초기시절 모습.  중앙에 폼잡고 있는 사람이 베벡, 고란 브레고비치는 맨 왼쪽에 있다. 이 사진에서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태도다. 불량끼+쇼맨십이 넘치는 이 밴드를 전유고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비옐로 두그메는 197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5인조 밴드다. 밴드의 중심축은 아무래도 젤코 베벡Željko Bebek(45년생, 보컬)과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50년생, 기타). 베벡이 69년에 고란을 꼬셔서 이태리 등지에서 밴드활동을 하다가  74년에 비옐로 두그메로 까지 연결이 된 것이다. 

초기에 사라예보의 레이블 디스코톤Diskoton이 뻣뻣하게 나와서 자그레브의 유고톤Jugoton과 계약을 했는데, 디스코톤 입장에서는 유고 팝음악 역사상 최대의 패착을 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1974년부터 1989년 해체 때까지 비옐로 두그메가 내는 앨범들마다 적어도 기십만장씩은 팔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차분했던 유고 록 씬에서 이들은 록스타로서의 아우라와 태도로 록스타처럼 행동했던 최초의 밴드라고 할 수 있겠다.

1978년(79년?) 인민해방군 스타디움 공연 모습. 미쳐날뛰는 청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히 유고식 아레나 록이라 할 만하다. '내 자동차 뒷좌석에서' Na zadnjem sjedištu moga auta.  눈치를 챈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가사 내용도 약간 19금적 암시가 있다.

비옐로 두그메의 음악을 두고 유고의 평론가들은 '양치기 록'Pastirski rok(목가록, 전원록...)이라고들 평한다. 포크송적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데뷔 앨범을 들어보면, 딥퍼플이나 레드제플린 등의 서구 록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사의 세팅은 '시골'이다. 예컨대는 노래 가사 중에는, '당신과 놀기 위해서라면, 집도 팔고, 영혼도 팔고, 말도 팔고..(말?)', '내가 하얀단추라면... 당신과 붙어있는 것을 동네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고...', '동네에선 날 주정뱅이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어쩌라고?'...

후기로 갈수록 포크송의 영향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세팅뿐만 아니라 테마자체가 음악에 활용되는 빈도가 점점 많아진다. 이 같이 유고록의 중심점에 올라선 비옐로 두그메는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자 극복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잠들지 말아요, 그대여,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엔..'Ne spavaj, mala moja, muzika dok svira. 데뷔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딱맞는 락커빌리 넘버로, 베벡의 금속성 목소리하고도 잘 맞는듯 하다.

도시적 감성을 지향하는 후배 밴드들은 두그메의 노래들에 대해서 '가사에 양들이 나오고, 백살까지 산다는 둥'의 가사가 뭔소린질 모르겠다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사실 당대는 물론 후대의 유고 록음악에서 비옐로 두그메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아마 인기라는 척도로 비교가능한 밴드로는 세르비아의 리블랴 쵸르바Riblja Čorba를 들 수 있겠지만, 시대를 열어간 것은 아무래도 두그메로 봐야할 것 같다. (쵸르바 역시 두그메와 더불어 양치기 록으로 레이블링되기도 한다)

여느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비옐로 두그메의 활동 역시 1991년 유고 내전을 끝으로 거의 해체가 확실해 졌다. 크로아티아계 출신인 베벡은 83년에 밴드를 떠나서 솔로커리어를 추구하다가 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 살고 있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베벡이 없는 가운데 밴드를 끝까지 이끌다가, 결국  밴드 해체 후 지금은  주로 세르비아에서 활동하면서 현재는 발칸을 대표하는 뮤지션이 됐다.  


포크송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들어간 넘버로 대중적인 호응도 많이 끌어낸 비옐로 두그메 곡으로는, 역시 '성조지의 날'Đurđevdan(또는 에데를레지)을 들 수 있다. 1988년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향후 고란의 음악적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참 이때의 보컬은 알렌 이슬라모비치Alen Islamović인데, 2005년 밴드 재결성 공연인 듯 하다.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4 : 맞고만은 못살아서 일으킨 봉기

독일군이 유고를 신속하게 정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국을 장악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군대는 하나의 결집된 폭력집단일 뿐이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잘조직된 행정체계와 경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없었다. 점령된 유고에는. 그게 다 빈틈이 됐다.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까지 끼워넣어서 명목상으로 '독립'까지 시켜줬지만, 세르비아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직접 챙겼다. 그렇다고, 직접 다스리자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려 끝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 유고 침공 후 넉달이 지난 8월 때의 일이다. 정부라고 세우긴 세웠지만,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의의와 자격도 없는 하수인 집단이었다. 이러다 보니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 비해서도 빈틈이 더 컸다.  이 빈틈을 타고 반항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트닉과 공산당이다. 유고 침공 이후 공산당이 본거지를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구 유고군 출신 드라골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가 보스니아 주둔지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세르비아의 라브나 고라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 1941년 5월의 일이다. 독일군의 세력이 닿지 않은 고원지대에 웅거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조국군Jugoslovenska vojska u otadžbini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자타 공히 회자된 명칭은 역시 체트닉이다. 미하일로비치의 활동은 진작에 망명정부에 보고가 되고 마침 9월 달에는 런던에 임시정부를 차린 왕가와도 무선교신이 닿았다. 독일과 힘겨운 싸운을 벌이던 영국으로서도 천군만마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처음으로 나온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1월에는 BBC가 방송으로 미하일로비치가 국방군의 사령관임을 지목했다.

마을을 시찰하는 미하일로비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행색 자체가 세르비아 농촌의 가치관을 대변했다. 별명도 '드라쟈 아저씨'다. 추종자들의 애착이 묻어나는 별명이다. 세르비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망명정부와와 영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미하일로비치에게도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저항을 할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는 전면적 맞짱은 불가능하고, 철도, 통신 등 사보타지다. 미하일로비치도 영국이 군수품만 제대로 보급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한편 또다른 세력이 저항운동에 등장했다. 유고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이다. 원래부터 활동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조직 재정비의 필요가 없었다. 진작에 독일에 저항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941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독일과 소련이 '강철'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본격 저항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이 소련을 처들어간 6월의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산당은 정치국을 고스란히 군 사령부로 바꿨다.

빨치산 부대 시찰 중인 티토. 허름하고 수염까지 길렀던 미하일로비치와 달리 말끔한 면도에 멋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자신은 물론 동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숨어다니는 와중에도 말끔한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였다.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베오그라드에 있던 공산당 수뇌부는 6월 소련 침공 직후 전국적인 봉기를 결의하고, 각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수뇌부를 파견했다. 8월에는 티토가 직접 세르비아 남부에 설치된 본부로 내려갔다. 남서부의 상업도시 우지체Užice를 접수해서 해방구로 삼았다. 스스로 총도 만들고 돈도 찍어냈다. 이 때가 바로 '우지체 공화국' 국면이다.

무장봉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자간의 무력 격차가 너무나 컸다. 대신 철도 사보타지는 나찌독일을 엿먹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철도는 구리, 보크사이트, 납 등의 광물을 독일로 옮기거나, 군수품,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나찌독일 역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군사력을 보충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있다보니, 손이 모자른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독일군이 생각해 낸 전략은 처절한 보복이다. 공포감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뜻이겠다. 독일군 사상자 한명에 100명, 부상자 한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애초부터 공표했다.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닉과 빨치산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다쳤다. 그러자 그 근방에서 1,700여명을 처형했다. 같은 시기에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가 기십명 나오자 또 2,800명 가량을 죽였다. 

41년 10월에 크라구예바츠에서 일어난 학살극. 이 사진은 독일군 장교가 '어? 쟤는 안죽었는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2차대전 때 구유고 각지에서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뇌리에 깊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남겼다.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그런데 빨치산이나 체트닉에게는 이번 시험문제가 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달랐다는 것...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3 : 우스타샤의 폭주

1941년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세력판도에서 가장 빠르게 자리를 잡은 것은 역시 같은 파시스트들인 우스타샤들이다. 유고를  점령한 나찌독일은 당장은 우스타샤에게 크로아티아를 넘기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고 한다. 우스타샤Ustaša의 대중적 기반이 너무 취약한 것도 문제였지만, 너무 오랫동안 무솔리니의 보호를 받았던 것도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스타샤 심볼. '봉기'라는 뜻의 우스타샤 첫 글자 U에 십자가를 그려넣은 형상이다. 우스타샤는 무식한 만큼이나 신심이 강했다. 요새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길거리 그래피티 등으로 가끔 보인다. 도저한 역사의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

나찌독일이 먼저 접근한 것은 크로아티아에서 대중기반이 탄탄한 농민당HSS이었다. 만약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면, 초대 당수 라디치Radić 이후 크로아티아에서는 거의 절대적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농민당이 적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디치의 후계자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측과의 오랜 협상을 거쳐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권력분할 협정Sporazum을 체결한 사람이다. 때문에 2차대전이 났을 때만해도 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부수상이었다.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를 버리고, 점령군에 협력하는 것이 꺼림직했던 것 같다. 마첵은 정중히 거절한다. 그럼, 차례는 우스타샤에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우스타샤는 이의없다. 독일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그 수령 파벨리치가 자그레브를 입성한 것이 4월 15일의 일이다. 입성해서 당장 한 일이 독립크로아티아Nezavisna Država Hrvatska(NDH)를 선포했다. 물론 자신은 그 수령Poglavnik이다. 평소 슬라브인들을 경멸하는 독일인들의 눈치를 본 탓인지 그는 크로아티아 민족은 어쩌다 슬라브 언어를 쓰게 된 동고트족이라는 해괴한 개드립을 쳤다.
 국호를 독립크로아티아라고 까지는 했지만, 우스타샤 정권은 내정 외치 등 어느 면에서도 홀로 '독립'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라를 반쪽으로 나눠 북쪽은 독일의 영향권, 남쪽은 이태리 영향권으로 분리하고, 독/이 양대 파시스트 군대의 주둔과 작전을 허용했다.

또 설명하기 복잡한 지도다. 크로아티아를 반분해서 독일과 이태리의 영향권으로 나뉜 모습이다. 짙은 회색으로 표시된 해변지역은 아예 이태리로 넘어갔고, 노란색 부분은 명목상 NDH에 주권이 있었지만, 이태리는 크로아티아군의 주둔을 막았다. 이태리는 원래 합병지역에만 군대를 주둔시킬 계획이었으나, 우스타샤 폭주가 시작되면서 이 노란색 부분에까지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우스타샤 X맨이 맞는거다.

같은 파시스트라고 하더라도 독일과 이태리의 전략적 접근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태리 쪽이 '땅'과 과거의 영화에 집착했다고 한다면, 독일의 접근은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발칸에서 나오는 자원 확보, 그리고 자그레브-베오그라드-테살로니키로 이어지는 철도보급선 확보가 이들의 주요 목적이였다. 따라서 독일군이 NDH 여기저기 포진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라예보에 1개사단 만을 남겨두고 우스타샤가 그리고 크로아티아내 독일계로 구성된 '로컬' 돌격대가 이들의 주력이었다.


그럼 열강들과 대충 판을 짰으니, 이제 슬슬 국내를 정리할 때가 됐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미워하니까, 따라서 미워하기는 하는데, 유태인보다 더 미운 족속은 세르비아인들이다. 어떻게든 쫓아내야 겠다. 그래서 나온 것이 '1/3론'이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죽이고,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 낸다는 소리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스타샤는 무슬림들에게 접근했다. 1차대전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긴 일부 무슬림들이 옳타꾸나 편승했다. 우스타샤들이 폭주하면서 세르비아 촌락을 쑥대밭을 만들기 시작하자, 진짜로 일부는 개종하고 일부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2 차대전도 끝난지 한참되는 2013년 월드컵 예선 경기. 크로아티아 대표팀 주장 요십 시무노비치Josip Simunović가 결선진출이 확정된 것이 기뻤던지, 홈스타디움을 메운 관중들에게 구호를 선창했다. '조국을 위해!'Za dom. 여기에 관중들이 화답했다. '준비끝!'Spremni! 기분좋자고 한 일인데 이 일로 FIFA는 시무노비치의 월드컵 본선 출전기회를 박탈했다. 이게 우스타샤 구호였거든...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된 나라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 때 NDH에 있는 세르비아계는 190만 정도니까 전체 인구의 1/3가량이다. 이 인구를 쫓아내면 누가 물산을 만들고 누가 세금을 내나? 게다가 여기저기 주요 세르비아계 거주지를 중심으로 당장 봉기가 터졌다. 오래된 지역 자위세력 체트닉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됐다.

자그레브 주재 독일 사령부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소련침공이 준비되는 마당에 NDH에 군사력을 박아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1년 6월 쯤에는 아예 본부에 전문을 쳤다; '우스타샤놈들, 완전 미쳤음.' 이태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배후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도륙나기 시작하자 그 영향이 주둔지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 보다 못한 이태리군이 우스타샤 세력을 무장해제까지 시키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지역을 안돈코자 앉힌 우스타샤가 뜻하지 않은 X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세르비아계 저항세력이 일부는 체트닉으로 일부는 공산당에 합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슬림계나 크로아티아계 역시 우스타샤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계에게는 그래도 체트닉들이라고 있었지, 무슬림계나 크로아티아계나 불길처럼 일어나는 내전 속에서 갈데가 없었다. 공산당 말고는....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구유고 음악 14 : 유고 록의 큰형님 Indexi

유고슬라비아 록과 관련해서 80년대 뉴웨이브를 특필하는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유고록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고, 뉴웨이브는 그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화산폭발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록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마치 헤비메탈은 어느 밴드가 시작했을까라는 것 만큼이나 비슷한 바보같은 소리지만, 나름 잡히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바로 보스니아의 록밴드 인덱시Indexi다. 1962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이 밴드는 2001년 해체 때까지 40년 역사를 보유한 유고록의 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바깥 문물인 록을 수용했던 얼리어댑터는 역시나 학생 층이다. 인덱시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기록한 장부라는 뜻이란다. 밴드 인덱시 역시 스스로가 '학출'임을 시사하는 강력한 징표다. 처음에는 단순히 외국 밴드의 곡을 커버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인덱시가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의 67년 자작곡 '손을 잡아요'Pružam ruke가 유고 최초의 '오센틱' 록음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역사 속에 기십명의 멤버들이 들락거렸지만, 46년 개띠 동갑내기 트리오가 가장 오래 머물면서 인덱시 음악의 뼈대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다보린 포포비치Davorin Popović(보컬), 파딜 레지치Fadil Redžić(베이스), 슬로보단 코바체비치Slobodan Kovačević(기타).

처음 연주했던 음악은 비틀즈류의 멜로디록이었는데, 이게 중기에 들어 싸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록으로까지 변모해 나갔다. 때문에 인덱시는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비조로도 지목된다. 원래 이 밴드의 건반을 맡았던 코르니예 코바치Kornelije Kovač가 독립하면서 베오그라드에서 프로그레시브밴드 코르니 그루파Korni Grupa를 만들고, 또 여기에서 보컬하던 다도 포피치Dado Popić가 자그레브에서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그룹 타임Time을 만들었으니 인덱시는 한 집안 족보의 첫페이지에 위치한 셈이다.

또 이들의 음악적 거점 사라예보는 선후배/동료가 서로 당기고 끌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70년대 어느 때 건반에 공백이 생기자 인덱시는 이웃 밴드인 프로 아르테Pro Arte와 키보디스트를 공유(?)하는 희한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사라예보에 만연한 라야(동아리) 문화가 음악계에도 침투한 것이다. 그 덕에, 유고 팝 음악계에는 '사라예보 스쿨'이 형성되고, 보스니아의 3대 수출품 중의 하나가 음반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런 타이트한 음악적 유대 속에서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 같은 유고 최초의 수퍼밴드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덱시는 한마디로 유고 록의 큰형님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장르의 시도와 실험에도 불구하고, 인덱시의 음악에는 항상 기억할 수 있는 멜로디가 들어있다. 그런 면에서 인덱시는 철저한 대중음악 밴드였다. 보컬 다보린 포포비치의 미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70년대 전성기때의 음악적 '야심'에도 불구하고 멜로디 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1969 년 발표 대표작 '아침이면 모든게 변해있을거예요'Jutro će promijeniti sve. 연주모습을 찍은 것은 80년대 언제 쯤이 아닌가 싶다. 다 좋은 데, Flying V하고 나비 넥타이는 암만 봐도 눈에 걸린다. 이들의 삶이 서구의 Rock'n Roll Life Style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나긴 밴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정식으로 발표한 앨범은 딱 두 장이다. 나름대로는 유고 록음악 시장과도 관련이 있을 터인데, 아무래도 록 팬덤이 굳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의 주요 공연무대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이나 가요제였다. 거기에 곡을 발표해서 입상하는 게 이들의 주요 목표였던 것이다. 음반 역시 싱글이나 EP판이 주된 매체였다. 유고의 전설적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그만그만한 팝송을 만들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환경이야 어쨌건, 인덱시가 78년에 맘잡고 제작한 음반 '푸른 강물'Modra Rijeka은 이들의 음악적 열정과 욕심이 농축된 유고 프로그레시브의 걸작이다.

80년대에는 멤버들도 나이가 들고, 지금까지의 음악적 성과를 지키자는 수성의 멘탈리티가 강했는지 활동도 뜸해진다. 그러다 90년대 유고 내전이 터지면서 밴드가 산산이 흩어지게 됐다. 그래도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나. 사라예보가 근대 전쟁사상 최장기간의 포위를 겪게 되는 와중에도 보컬 다보린 형님은 끝내 사라예보를 떠나지 않았다. 


72 년에 발표된 '나는 꿈꾼다'Sanjam. 인덱시표 대표 발라드다. 클래식 기타 반주로 시작한 단조곡이 후렴에 들어가서 70년대 대중가요 풍 장조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원테마로 돌아올 때의 건반 트랜지션이 너무 맘에 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멤버들이 모여서 1999년 두번째 앨범 '돌꽃'Kameni Cvijet를 발표했다. 물론 전성기를 지나 만든 앨범이라 그런지, 곡들의 퀄리티는 전작에 못미친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겪은 밴드가 풍기는 인간적 아우라는 여전하다. 여담이지만, '돌꽃'은 2차대전때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수용소 야세노바츠Jasenovac 터에 조성해 놓은 기념조형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골육상쟁, 형제살륙의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음반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가 궁금하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살아 남았음을 남기고 싶었을까.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깐. 보컬 다보린 형님이 2001년 50대 아쉬운 나이로 죽으면서 밴드도 결국 막을 내린다. 굳이 다른 보컬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2004년에는 밴드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작곡했던 코바체비치 형님까지 죽었다. 주축 3인방 중에 레지치 형님은 전쟁에 학을 뗐는지 현재 미국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난리통 후 다시 공연에 나선 다보린 형님. 이 때는 록스타라기보다는 마을회관 노래자랑 이장님 아우라다. 주위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여러 애칭과 별칭이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가수'Pjevač로 불렸다. 이 별명에는 영어 정관사 The가 함께 붙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어쨌거나 밴드는 없어졌지만, 사라예보 시민들은 최악의 상황을 자기들과 함께했던 왕년의 스타를 여전히 잊지 않았다. 보스니아 대중음악계는 최고권위의 대중음악상 이름을 다보린상으로 개칭, 그를 기리고 있다




2014년 2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2 : 내전의 시작

유고에 진주한 나찌독일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유고의 분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르사이유 조약이라면 치를 떨었던 히틀러는 그 조약의 결과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거니와, 무솔리니 역시 달마시아 등 아드리아 해변지역에 복벽주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디바이드 앤 룰. 지배의 황금율이다. 유고라는 틀 아래서 세르비아와의 동거가 영 불편했던 크로아티아 민심을 이용한다. 이같은 지배자의 필요에 부응해서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사람이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941년 안테 파벨리치
1889년 오-헝 제국 치하 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이 사람. 부모를 따라 보스니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초등학교 한 때는 무슬림 학교 Maktab를 다니기도 해서 무슬림 문화와 경전에 익숙했고, 그것이 나중에 우스타샤의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파벨리치가 안착한 귀의처는 순혈적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였다.


 자그레브에서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정의당Hrvatska Stranka Prava 열혈당원이 됐다. 하지만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 헤게모니의 유고슬라비아가 등장하면서 순수 크로아티아의 꿈은 더욱 강해졌다. 왕국의 당국에 의해 활동이 금지된 것이 1929년. 이 때 파벨리치는 폭력노선을 걷는 우스타샤-크로아티아혁명운동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을 조직하고, 초록동색 무솔리니가 있는 이태리로 넘어가 웅거했다. 2차대전으로 파시즘 세력들이 유럽을 접수하면서 파벨리치에게도 햇볓이 들기시작한다. 1941년 독일의 유고 침공과 더불어 그는 급거 귀국, 총통Poglavnik의 자리에 올랐다.

1937년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구 유고왕국군인들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고군이 녹아나면서, 일부 장교들이 조직적인 저항활동에 돌입했다. 그 대표가 드라고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goljub Draža Mihailović다. 1893년 세르비아 남부에서 태어났으니까 파벨리치보다는 4살 어리다. 조실부모하고 군인이었던 삼춘 슬하에서 자라다가, 그길로 직업군인이 됐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보스니아 북부에 주둔한 2군단 참모장이었다. 허망한 항복 이후 그는 몇몇의 장교들과 더불어 부대를 이탈해서 세르비아의 산악지대인 라브나 고라Ravna Gora 지역에 숨어들었다. 따르던 사람들이 80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시작은 미약했다. 이들을 데리고 평소 지론이었던 체트닉Četnik게릴라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체트닉이란 용어가 보통명사이고, 나찌에 협력했던 체트닉들도 있다보니, 미하일로비치는 스스로의 정치/군사 활동을 '라브나 고라 운동'이라고 명했다. 

라브나 고라 운동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눈에 들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왕가는 미하일로비치를 장군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왕가보다 더 기뻐한 것은 영국정부였다. BBC는 1941년 11월 그를 유고슬라브군 사령관으로 지칭했다. 별다른 도움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미하일로비치 휘하 체트닉군의 도덕적, 법적 기반은 크게 높아졌다. 미하일로비치의 목표는 당연히 왕가의 복귀였다.

1928년 티토
이 같은 세력구도 하에서 또다른 풍파를 일으킨 제3세력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KPJ)이다. 유고 공산당 당수 요십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는 1892년 크로아티아 북서부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시삭Sisak에 있는 금속공 밑에서 도제 노릇을 하다가 1913년 군대에 징집됐다. 1차대전 오-헝제국군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우다가 러시아의 포로가 된 그는 수용소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접하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전쟁이 끝난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조활동을 조직하다가 당국에 잡혀서 5년 감옥생활을 한 이후, 지하에서 암약하면서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의 밀정 노릇을 했다. 티토Tito는 그를 지칭하는 암호명 중의 하나였다.

법학을 전공한 파벨리치나 사관학교를 졸업한 미하일로비치에 비해 가방끈은 짧다.레닌이나 마오쩌뚱과 같이 이론가를 자처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희한한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다. 그는 부모 탓에,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슬로베니아어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노동자 시절 독일, 포로 시절 러시아에서 습득한 어학으로 코민테른 등 국제무대에서도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다.

1937년 티토가 공산당수의 자리에 오를 때만해도 유고 공산당은 계급문제에 민족문제까지 겹쳐 당내 노선투쟁으로 오합지졸의 수준이었다. 가장 커다란 약점은 공산당 수뇌부가 비엔나에서 유(?)하면서 현장과의 유대감이 엷어졌다는 것. 스탈린이 소련공산당은 물론 코민테른까지 숙청하면서, 유고공산당 수뇌들까지 도륙을 내는 바람에, 항상 현장에만 있던 그에게 순서가 돌아왔다. 최악의 순간에 당을 맡았으니, 한마디로 유고공산당은 바닥부터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거나 2차대전을 기해 삼국지 같은 삼파전이 벌어졌다. 유고에서는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더해 자체적인 내전이 발발하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