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과 체트닉. 침입자에 항거한다는 면에서 존재의의는 같았지만, 현실인식, 전술, 전략, 비전 등에서 달라도 너무 달랐다. 41년 9월과 10월 양대세력의 지도자, 미하일로비치와 티토는 두번에 걸쳐 만난다. 같이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만나도 뭔가 앗쌀하게 투합되는 것은 없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의 징벌적인 보복전략도 있고, 이웃 NDH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인종청소, 불가리아, 헝가리 등으로 할양된 지역에서 쫓겨나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 전례없는 민족절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고 느꼈다. 지금 단계에서 맞서 싸우다가 진짜 멸종을 당하는 것보다는 일단 연합군이 다시금 승기를 잡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 망명정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41년 9월 유고 전역의 봉기지도. 붉게 표시된 지역이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체트닉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당 봉기지역의 상당부분은 체트닉과 겹쳐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체트닉과 공산당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다.
티토는 생각이 달랐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 소련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소련의 즉각적 승리를 믿었던 그로서는 지속적인 후방교란을 통해서 소련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슬림, 크로아티아까지 포괄한 유고슬라브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했다. 망명정부? 그딴 거 관심없음.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큰데다, 양대 세력의 중간보스들 간의 경합의식도 강했다. 언제든 상대편을 쓸어버리고자 하는 강경파들이 곳곳에 포진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독일의 징벌적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양자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리게 되어, 독일의 토벌작전과 더불어 양자 간의 교전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초기의 티토는 한가지 더 실수를 했다. 혁명까지 생각하다보니 계급의 적까지 처단해야 했는데, 이게 민심을 더 이반시켰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별로 없는 나라에서 무슨 사회주의 혁명이겠는가. 일단 또아리를 튼 우지체가 지역의 경제중심지이긴 하지만, 그 주변지역 주민 대부분은 '왕과 조국'을 믿는 순진한 소농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하는 사상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이 41년 11월 25일. 티토의 빨치산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결국 우지체를 떠나기로 한 것이 11월 29일의 일이다. 꼼짝없는 패주의 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운명은 티토만 겪은 것은 아니다. 12월초에는 미하일로비치가 가까스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같은 패주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티토는 41년 12월 산작지방Sandžak에서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는 기동군,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prva proleterska udarna brigada을 만들었다. 이 상시군들을 데리고 그대로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콘스탄틴 '코차' 포포비치Konstantin Koča Popović. 세르비아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을 전공한 인테리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였다. 티토와의 인연은 1936년 스페인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 당시, 티토가 유고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참여시키는 알선책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고산 스페인 내전 베테랑들은 나중에 빨치산 지휘부의 중핵을 차지하게 된다.
체트닉은 이게 안됐다. 일단 미하일로비치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때는 주위에 달랑 참모들 몇명 밖에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체트닉 조직이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방위조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도 봐야 하고, 소도 키워야 하는 관계로 살던 동네를 떠나기 싫다. 41년 겨울 나찌 독일의 공세를 겪으면서 미하일로비치가 거느리던 체트닉들은 투항하거나 아니면 '합법화'의 길을 걸었다.
합법화된 체트닉? 미하일로비치가 라브나 고라에서 만든 군사조직에 체트닉 분대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체트닉과 관련된 상표권을 등록한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저항조직으로서 체트닉도 있었지만, 세르비아에는 괴뢰정부, 점령군과도 협력하는 '합법' 체트닉이 있었다. 괴뢰정권의 수장 네디치Nedić는 미하일로비치 잔당에게도 비슷한 기회를 줬고, 여기에 다수의 저항 체트닉들이 포섭됐다. 미하일로비치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부하들이 이렇게 합법화되는 것을 부러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괴뢰정부에 침투하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미하일로비치는 2차대전 내내 직할 부대가 없었다. 도망다닐 때도 항상 몇명의 참모와 스탭들 뿐이었다. 일단은 각 지역에 웅거한 체트닉 대장들을 망명정부가 인정한 군사령관인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 산악지역으로 숨어든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의 징벌적인 보복전략도 있고, 이웃 NDH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인종청소, 불가리아, 헝가리 등으로 할양된 지역에서 쫓겨나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 전례없는 민족절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고 느꼈다. 지금 단계에서 맞서 싸우다가 진짜 멸종을 당하는 것보다는 일단 연합군이 다시금 승기를 잡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 망명정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티토는 생각이 달랐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 소련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소련의 즉각적 승리를 믿었던 그로서는 지속적인 후방교란을 통해서 소련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슬림, 크로아티아까지 포괄한 유고슬라브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했다. 망명정부? 그딴 거 관심없음.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큰데다, 양대 세력의 중간보스들 간의 경합의식도 강했다. 언제든 상대편을 쓸어버리고자 하는 강경파들이 곳곳에 포진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독일의 징벌적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양자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리게 되어, 독일의 토벌작전과 더불어 양자 간의 교전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초기의 티토는 한가지 더 실수를 했다. 혁명까지 생각하다보니 계급의 적까지 처단해야 했는데, 이게 민심을 더 이반시켰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별로 없는 나라에서 무슨 사회주의 혁명이겠는가. 일단 또아리를 튼 우지체가 지역의 경제중심지이긴 하지만, 그 주변지역 주민 대부분은 '왕과 조국'을 믿는 순진한 소농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하는 사상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이 41년 11월 25일. 티토의 빨치산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결국 우지체를 떠나기로 한 것이 11월 29일의 일이다. 꼼짝없는 패주의 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운명은 티토만 겪은 것은 아니다. 12월초에는 미하일로비치가 가까스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같은 패주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티토는 41년 12월 산작지방Sandžak에서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는 기동군,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prva proleterska udarna brigada을 만들었다. 이 상시군들을 데리고 그대로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콘스탄틴 '코차' 포포비치Konstantin Koča Popović. 세르비아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을 전공한 인테리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였다. 티토와의 인연은 1936년 스페인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 당시, 티토가 유고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참여시키는 알선책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고산 스페인 내전 베테랑들은 나중에 빨치산 지휘부의 중핵을 차지하게 된다.
체트닉은 이게 안됐다. 일단 미하일로비치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때는 주위에 달랑 참모들 몇명 밖에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체트닉 조직이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방위조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도 봐야 하고, 소도 키워야 하는 관계로 살던 동네를 떠나기 싫다. 41년 겨울 나찌 독일의 공세를 겪으면서 미하일로비치가 거느리던 체트닉들은 투항하거나 아니면 '합법화'의 길을 걸었다.
합법화된 체트닉? 미하일로비치가 라브나 고라에서 만든 군사조직에 체트닉 분대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체트닉과 관련된 상표권을 등록한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저항조직으로서 체트닉도 있었지만, 세르비아에는 괴뢰정부, 점령군과도 협력하는 '합법' 체트닉이 있었다. 괴뢰정권의 수장 네디치Nedić는 미하일로비치 잔당에게도 비슷한 기회를 줬고, 여기에 다수의 저항 체트닉들이 포섭됐다. 미하일로비치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부하들이 이렇게 합법화되는 것을 부러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괴뢰정부에 침투하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미하일로비치는 2차대전 내내 직할 부대가 없었다. 도망다닐 때도 항상 몇명의 참모와 스탭들 뿐이었다. 일단은 각 지역에 웅거한 체트닉 대장들을 망명정부가 인정한 군사령관인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 산악지역으로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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