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이 유고를 신속하게 정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국을 장악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군대는 하나의 결집된 폭력집단일 뿐이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잘조직된 행정체계와 경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없었다. 점령된 유고에는. 그게 다 빈틈이 됐다.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까지 끼워넣어서 명목상으로 '독립'까지 시켜줬지만, 세르비아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직접 챙겼다. 그렇다고, 직접 다스리자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려 끝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 유고 침공 후 넉달이 지난 8월 때의 일이다. 정부라고 세우긴 세웠지만,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의의와 자격도 없는 하수인 집단이었다. 이러다 보니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 비해서도 빈틈이 더 컸다. 이 빈틈을 타고 반항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트닉과 공산당이다. 유고 침공 이후 공산당이 본거지를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구 유고군 출신 드라골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가 보스니아 주둔지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세르비아의 라브나 고라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 1941년 5월의 일이다. 독일군의 세력이 닿지 않은 고원지대에 웅거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조국군Jugoslovenska vojska u otadžbini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자타 공히 회자된 명칭은 역시 체트닉이다. 미하일로비치의 활동은 진작에 망명정부에 보고가 되고 마침 9월 달에는 런던에 임시정부를 차린 왕가와도 무선교신이 닿았다. 독일과 힘겨운 싸운을 벌이던 영국으로서도 천군만마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처음으로 나온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1월에는 BBC가 방송으로 미하일로비치가 국방군의 사령관임을 지목했다.
마을을 시찰하는 미하일로비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행색 자체가 세르비아 농촌의 가치관을 대변했다. 별명도 '드라쟈 아저씨'다. 추종자들의 애착이 묻어나는 별명이다. 세르비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망명정부와와 영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미하일로비치에게도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저항을 할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는 전면적 맞짱은 불가능하고, 철도, 통신 등 사보타지다. 미하일로비치도 영국이 군수품만 제대로 보급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한편 또다른 세력이 저항운동에 등장했다. 유고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이다. 원래부터 활동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조직 재정비의 필요가 없었다. 진작에 독일에 저항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941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독일과 소련이 '강철'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본격 저항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이 소련을 처들어간 6월의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산당은 정치국을 고스란히 군 사령부로 바꿨다.
빨치산 부대 시찰 중인 티토. 허름하고 수염까지 길렀던 미하일로비치와 달리 말끔한 면도에 멋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자신은 물론 동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숨어다니는 와중에도 말끔한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였다.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베오그라드에 있던 공산당 수뇌부는 6월 소련 침공 직후 전국적인 봉기를 결의하고, 각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수뇌부를 파견했다. 8월에는 티토가 직접 세르비아 남부에 설치된 본부로 내려갔다. 남서부의 상업도시 우지체Užice를 접수해서 해방구로 삼았다. 스스로 총도 만들고 돈도 찍어냈다. 이 때가 바로 '우지체 공화국' 국면이다.
무장봉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자간의 무력 격차가 너무나 컸다. 대신 철도 사보타지는 나찌독일을 엿먹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철도는 구리, 보크사이트, 납 등의 광물을 독일로 옮기거나, 군수품,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나찌독일 역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군사력을 보충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있다보니, 손이 모자른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독일군이 생각해 낸 전략은 처절한 보복이다. 공포감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뜻이겠다. 독일군 사상자 한명에 100명, 부상자 한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애초부터 공표했다.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닉과 빨치산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다쳤다. 그러자 그 근방에서 1,700여명을 처형했다. 같은 시기에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가 기십명 나오자 또 2,800명 가량을 죽였다.
41년 10월에 크라구예바츠에서 일어난 학살극. 이 사진은 독일군 장교가 '어? 쟤는 안죽었는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2차대전 때 구유고 각지에서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뇌리에 깊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남겼다.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그런데 빨치산이나 체트닉에게는 이번 시험문제가 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달랐다는 것...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까지 끼워넣어서 명목상으로 '독립'까지 시켜줬지만, 세르비아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직접 챙겼다. 그렇다고, 직접 다스리자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려 끝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 유고 침공 후 넉달이 지난 8월 때의 일이다. 정부라고 세우긴 세웠지만,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의의와 자격도 없는 하수인 집단이었다. 이러다 보니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 비해서도 빈틈이 더 컸다. 이 빈틈을 타고 반항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트닉과 공산당이다. 유고 침공 이후 공산당이 본거지를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구 유고군 출신 드라골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가 보스니아 주둔지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세르비아의 라브나 고라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 1941년 5월의 일이다. 독일군의 세력이 닿지 않은 고원지대에 웅거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조국군Jugoslovenska vojska u otadžbini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자타 공히 회자된 명칭은 역시 체트닉이다. 미하일로비치의 활동은 진작에 망명정부에 보고가 되고 마침 9월 달에는 런던에 임시정부를 차린 왕가와도 무선교신이 닿았다. 독일과 힘겨운 싸운을 벌이던 영국으로서도 천군만마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처음으로 나온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1월에는 BBC가 방송으로 미하일로비치가 국방군의 사령관임을 지목했다.
마을을 시찰하는 미하일로비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행색 자체가 세르비아 농촌의 가치관을 대변했다. 별명도 '드라쟈 아저씨'다. 추종자들의 애착이 묻어나는 별명이다. 세르비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망명정부와와 영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미하일로비치에게도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저항을 할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는 전면적 맞짱은 불가능하고, 철도, 통신 등 사보타지다. 미하일로비치도 영국이 군수품만 제대로 보급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한편 또다른 세력이 저항운동에 등장했다. 유고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이다. 원래부터 활동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조직 재정비의 필요가 없었다. 진작에 독일에 저항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941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독일과 소련이 '강철'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본격 저항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이 소련을 처들어간 6월의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산당은 정치국을 고스란히 군 사령부로 바꿨다.
빨치산 부대 시찰 중인 티토. 허름하고 수염까지 길렀던 미하일로비치와 달리 말끔한 면도에 멋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자신은 물론 동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숨어다니는 와중에도 말끔한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였다.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베오그라드에 있던 공산당 수뇌부는 6월 소련 침공 직후 전국적인 봉기를 결의하고, 각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수뇌부를 파견했다. 8월에는 티토가 직접 세르비아 남부에 설치된 본부로 내려갔다. 남서부의 상업도시 우지체Užice를 접수해서 해방구로 삼았다. 스스로 총도 만들고 돈도 찍어냈다. 이 때가 바로 '우지체 공화국' 국면이다.
무장봉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자간의 무력 격차가 너무나 컸다. 대신 철도 사보타지는 나찌독일을 엿먹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철도는 구리, 보크사이트, 납 등의 광물을 독일로 옮기거나, 군수품,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나찌독일 역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군사력을 보충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있다보니, 손이 모자른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독일군이 생각해 낸 전략은 처절한 보복이다. 공포감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뜻이겠다. 독일군 사상자 한명에 100명, 부상자 한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애초부터 공표했다.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닉과 빨치산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다쳤다. 그러자 그 근방에서 1,700여명을 처형했다. 같은 시기에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가 기십명 나오자 또 2,800명 가량을 죽였다.
41년 10월에 크라구예바츠에서 일어난 학살극. 이 사진은 독일군 장교가 '어? 쟤는 안죽었는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2차대전 때 구유고 각지에서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뇌리에 깊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남겼다.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그런데 빨치산이나 체트닉에게는 이번 시험문제가 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달랐다는 것...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