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베를린 협약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경영하기로 한 결정은 보스니아의 기득권 무슬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당장에 반항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사라예보 등 주요 거점 마다 무슬림(+일부 세르비아계)들의 봉기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이들 주요 도시를 접수하는 데는 이틀 이상이 걸리지 않았다.
1878년 이후 한창 때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판도. 2중 제국의 예법에 따라, 헝가리와 제국의 영역을 반으로 나눴다. 수도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보스니아와 달마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땅으로 지명되고 헝가리가 오늘날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본토를 관리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기는 했지만, 보스니아를 통치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스트리아로서도 숙고를 거듭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욕은 다양한 경로로 노출된 바는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의 장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말은 '살로니카로..'Nach Salonika였다고 한다. 오늘 날의 그리스 영토인 테살로니키까지 쭈욱 밀고 나가자는 말이다.
말은 호기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쪽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제국영토 안에 슬라브 민족이 더 많아진다는 것. 인구 비중의 균형추가 슬라브 쪽으로 더 기울어졌을 때 늘어나는 부담과 리스크가 분명했다. 헝가리가 관리하는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미 민족주의가 들썩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랬는지 보스니아는 헝가리 쪽에 넘기지 않고 황유지Crown Land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관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손을 대기로 한 이상, 어중간한 스탠스는 있을 수 없었다. 오토만 터키의 국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 땅을 제대로 경영해서 다시 오토만에게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독일, 러시아 등과는 적당한 때 '합병'한다는 합의가 이뤄진 마당이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를 환영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보스니아의 카톨릭 크로아티아계였다. 이제 카톨릭이 어깨좀 펴고 살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을 법도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점진주의를 표방했다. 특별하게 문제가 있지 않는한 오토만의 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사라예보를 비롯한 근대화의 물결을 끌고 들어왔다. 사라예보가 허다한 모스크와 바자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근대도시로 본격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 무슬림 도시 사라예보에 맥주집도 생겼다. 사진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맥주홀인 Pivnica HS의 모습이다. 바쉬차르쉬야에서 봤을 때 밀랴츠카Miljačka 강 건너편에 있다. 물이 있다보니 90년대 사라예보 포위 당시에 중요한 식수공급원이었다고 한다.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철도와 도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광산이 개발되는 한편 방직 등 공장들이 들어오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보스니아의 면모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뭔가 좀 보여주려 했던지 보스니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 물결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도 더 거세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것 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맘 대로 되나. 민족 별로 단체가 생기고 회합과 결사가 일어났다.
19세기 말, 사라예보에 들어선 근대식 숙박업소 에우로파 호텔 Hotel Europa 앞의 정경. 페즈를 눌러쓴 이슬람 신사와 더불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농민들이 주거니 받거니 거래 중이다. 보스니아는 민족갈등으로 유명해 졌지만, 실질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때는 많지 않다. 다수의 방문자들이 이들 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목도했다.
어떻게 하나 뻘쭘한 것은 무슬림들이었다.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것은 맞지만, 자신을 과연 크로아티아계로 봐야할지 아니면 세르비아계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지사들은 무슬림들이 실제로는 크로아티아 민족이라고 말하고, 세르비아 계는 기실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거기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너나 없는 남슬라브 민족주의까지 가세하니, 무슬림들은 더 헷갈리게 됐다.
1878년 이후 한창 때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판도. 2중 제국의 예법에 따라, 헝가리와 제국의 영역을 반으로 나눴다. 수도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보스니아와 달마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땅으로 지명되고 헝가리가 오늘날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본토를 관리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기는 했지만, 보스니아를 통치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스트리아로서도 숙고를 거듭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욕은 다양한 경로로 노출된 바는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의 장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말은 '살로니카로..'Nach Salonika였다고 한다. 오늘 날의 그리스 영토인 테살로니키까지 쭈욱 밀고 나가자는 말이다.
말은 호기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쪽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제국영토 안에 슬라브 민족이 더 많아진다는 것. 인구 비중의 균형추가 슬라브 쪽으로 더 기울어졌을 때 늘어나는 부담과 리스크가 분명했다. 헝가리가 관리하는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미 민족주의가 들썩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랬는지 보스니아는 헝가리 쪽에 넘기지 않고 황유지Crown Land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관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손을 대기로 한 이상, 어중간한 스탠스는 있을 수 없었다. 오토만 터키의 국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 땅을 제대로 경영해서 다시 오토만에게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독일, 러시아 등과는 적당한 때 '합병'한다는 합의가 이뤄진 마당이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를 환영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보스니아의 카톨릭 크로아티아계였다. 이제 카톨릭이 어깨좀 펴고 살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을 법도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점진주의를 표방했다. 특별하게 문제가 있지 않는한 오토만의 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사라예보를 비롯한 근대화의 물결을 끌고 들어왔다. 사라예보가 허다한 모스크와 바자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근대도시로 본격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 무슬림 도시 사라예보에 맥주집도 생겼다. 사진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맥주홀인 Pivnica HS의 모습이다. 바쉬차르쉬야에서 봤을 때 밀랴츠카Miljačka 강 건너편에 있다. 물이 있다보니 90년대 사라예보 포위 당시에 중요한 식수공급원이었다고 한다.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철도와 도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광산이 개발되는 한편 방직 등 공장들이 들어오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보스니아의 면모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뭔가 좀 보여주려 했던지 보스니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 물결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도 더 거세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것 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맘 대로 되나. 민족 별로 단체가 생기고 회합과 결사가 일어났다.
19세기 말, 사라예보에 들어선 근대식 숙박업소 에우로파 호텔 Hotel Europa 앞의 정경. 페즈를 눌러쓴 이슬람 신사와 더불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농민들이 주거니 받거니 거래 중이다. 보스니아는 민족갈등으로 유명해 졌지만, 실질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때는 많지 않다. 다수의 방문자들이 이들 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목도했다.
어떻게 하나 뻘쭘한 것은 무슬림들이었다.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것은 맞지만, 자신을 과연 크로아티아계로 봐야할지 아니면 세르비아계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지사들은 무슬림들이 실제로는 크로아티아 민족이라고 말하고, 세르비아 계는 기실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거기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너나 없는 남슬라브 민족주의까지 가세하니, 무슬림들은 더 헷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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