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만의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에는 보스니아로서도 외부의 입김이 강해져 갔다. 현저하게 도드라진 새로운 현상은 역시 세르비아 자치령의 탄생이다. 400년 동안의 질곡에서 해방된 어린 민족의 자기주장이 보스니아에서도 투영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정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hrišćani이 아니라 '세르비아인'srbi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새롭게 서구열강의 인정을 획득해나가던 몬테네그로 역시 헤르체고비나를 끊임없이 도모하기 시작했다. 대세르비아의 주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쪽의 크로아티아에서도 마찬가지 민족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슬라브주의와 평행선을 이루면서 순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1860년대 보스니아 내에서 혁명조직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들의 움직임을 발각하고 탄압한 것은 오토만과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오토만 터키에서 종교/민족 간의 차별을 철폐하는 술탄의 칙령이 발표되는 등 탄지마트Tanzimat 개혁운동이 일어났던 때이다. 이 같은 소식은 보스니아에서는 아직 딴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여러가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가 향상되기 시작하는 등 개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트라브닉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카톨릭과 정교 교회당 신축이 허가되는 한편 초중등학교들이 건설됐다.
하지만 취약한 행정체계나 문화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도입된 징세 시스템은 기존에 크게 악화된 지주/소작농 간의 관계와 더불어 보스니아의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저해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겹쳐지면서 19세기 보스니아는 지속적으로 흔들거렸다. 거기에 더해서 무슬림들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경계, 이를 넘어선 혐오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 새롭게 건립되는 교회당 종탑의 높이 등은 안그래도 위협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사라예보 중심부의 세르비아 정교 교회Саборна Црква Рођења Пресвете Богородице. 성모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1863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완공 즈음해서 기득권 무슬림들이 종탑의 높이를 두고 딴지를 거는 바람에 하나의 정치적 이슈로까지 비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건곤을 일척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Herzegovina Uprising다. 1874년 대흉년으로 헤르체고비나의 작황이 엉망이었지만, 징세관들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에 소작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보스니아 총독과 지주들이 가혹하게 대처했다. 서구 국제사회에서 야만적 오토만에 대한 지탄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산속에 매복한 헤르체고비나 반군. 디나릭 알프스 산악지대가 이들의 앞마당이다. 어려운 지형, 어려운 생활환경 등이 이들을 터프한 전사들로 만들었고, 이 같은 문화는 후대에까지 전승된다.
슬라브(세르비아) 동포들의 고난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명목으로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똑같이 오토만 터키에 전쟁을 선포했다. 두 신생국가 사이에는 보스니아 본토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접수하기로 밀약이 있었다고 한다. 국지적 봉기가 국제적 분쟁으로 흘러가는 순간이다.
몬테네그로는 잘 싸웠지만, 세르비아는 덤벙대다 오히려 곤경에 빠졌다. 좀 진전이 더디다 싶자, 1877년 큰 형님 러시아가 불가리아 문제까지 패키지로 들고나와, 곧장 이스탄불 코앞까지 군대를 끌고 들어갔다. 숙적 러시아까지 발칸의 올망졸망한 민족과 더불어 떼로 덤비자, 오토만 터키가 결국 백기를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맺어진 것이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San Stefano Treaty. 이 때 그려진 지도는 러시아의 요구가 대폭 반영된 것이다. 가만 나뒀다간 러시아가 지중해로 삐져 나오겠다 싶었던 오스트리아와 서구열강들이 협상 테이블을 다시 꾸몄다. 이래서 나온 것이 1878년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좌)과 베를린 조약(우)에 의해 달라진 유럽 지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대불가리아가 만들어졌다가,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의 요구로 인해 국경이 다시 조정됐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 참에 땅도 넓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왜 보스니아가? 발칸에서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앞세워 세력을 넓혔으니, 오스트리아도 여기에 균형을 맞추자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터키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의 형태다. 내용인 즉 보스니아의 국권은 오토만이 지속 보유하되, 경영만 오스트리아가 하자는 소리다. 그러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실소유주는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지방의 봉기가 지정학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희한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 봉기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이나, 이를 탄압하던 보스니아 정부군 누구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순간에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세르비아계들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는 더 멀어지게 됐다.
서쪽의 크로아티아에서도 마찬가지 민족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슬라브주의와 평행선을 이루면서 순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1860년대 보스니아 내에서 혁명조직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들의 움직임을 발각하고 탄압한 것은 오토만과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오토만 터키에서 종교/민족 간의 차별을 철폐하는 술탄의 칙령이 발표되는 등 탄지마트Tanzimat 개혁운동이 일어났던 때이다. 이 같은 소식은 보스니아에서는 아직 딴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여러가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가 향상되기 시작하는 등 개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트라브닉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카톨릭과 정교 교회당 신축이 허가되는 한편 초중등학교들이 건설됐다.
하지만 취약한 행정체계나 문화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도입된 징세 시스템은 기존에 크게 악화된 지주/소작농 간의 관계와 더불어 보스니아의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저해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겹쳐지면서 19세기 보스니아는 지속적으로 흔들거렸다. 거기에 더해서 무슬림들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경계, 이를 넘어선 혐오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 새롭게 건립되는 교회당 종탑의 높이 등은 안그래도 위협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사라예보 중심부의 세르비아 정교 교회Саборна Црква Рођења Пресвете Богородице. 성모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1863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완공 즈음해서 기득권 무슬림들이 종탑의 높이를 두고 딴지를 거는 바람에 하나의 정치적 이슈로까지 비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건곤을 일척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Herzegovina Uprising다. 1874년 대흉년으로 헤르체고비나의 작황이 엉망이었지만, 징세관들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에 소작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보스니아 총독과 지주들이 가혹하게 대처했다. 서구 국제사회에서 야만적 오토만에 대한 지탄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산속에 매복한 헤르체고비나 반군. 디나릭 알프스 산악지대가 이들의 앞마당이다. 어려운 지형, 어려운 생활환경 등이 이들을 터프한 전사들로 만들었고, 이 같은 문화는 후대에까지 전승된다.
슬라브(세르비아) 동포들의 고난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명목으로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똑같이 오토만 터키에 전쟁을 선포했다. 두 신생국가 사이에는 보스니아 본토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접수하기로 밀약이 있었다고 한다. 국지적 봉기가 국제적 분쟁으로 흘러가는 순간이다.
몬테네그로는 잘 싸웠지만, 세르비아는 덤벙대다 오히려 곤경에 빠졌다. 좀 진전이 더디다 싶자, 1877년 큰 형님 러시아가 불가리아 문제까지 패키지로 들고나와, 곧장 이스탄불 코앞까지 군대를 끌고 들어갔다. 숙적 러시아까지 발칸의 올망졸망한 민족과 더불어 떼로 덤비자, 오토만 터키가 결국 백기를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맺어진 것이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San Stefano Treaty. 이 때 그려진 지도는 러시아의 요구가 대폭 반영된 것이다. 가만 나뒀다간 러시아가 지중해로 삐져 나오겠다 싶었던 오스트리아와 서구열강들이 협상 테이블을 다시 꾸몄다. 이래서 나온 것이 1878년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좌)과 베를린 조약(우)에 의해 달라진 유럽 지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대불가리아가 만들어졌다가,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의 요구로 인해 국경이 다시 조정됐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 참에 땅도 넓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왜 보스니아가? 발칸에서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앞세워 세력을 넓혔으니, 오스트리아도 여기에 균형을 맞추자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터키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의 형태다. 내용인 즉 보스니아의 국권은 오토만이 지속 보유하되, 경영만 오스트리아가 하자는 소리다. 그러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실소유주는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지방의 봉기가 지정학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희한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 봉기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이나, 이를 탄압하던 보스니아 정부군 누구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순간에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세르비아계들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는 더 멀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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