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를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이 곳은 방어가 안된다는 것을...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오토만 터키는 산으로 둘러쌓인 이곳을 보스니아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1697년 사보이공 오이겐Eugen이 이끄는 합스부르크군 6,000명이 사라예보를 감싸고 있는 어느 고지에 나타났을 때도 이들을 막을 어떤 대책도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오토만 터키는 보스니아 총독Vizier의 주재지를 사라예보에서 트라브닉으로 옮겼다.
산으로 둘러쌓인 사라예보의 옛모습. 오토만 터키의 정복자들은 대체적으로 고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주변 어디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타운을 조성했다. 1990년대 스릅스카 공화국군도 주변 고지를 둘러싸고 3년 넘게 이 도시를 포위했다.
오토만이 쇠하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하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어느때부턴가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 3대륙에 걸친 방대한 제국의 손발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전제군주의 의사결정이 지방으로 하달이 되지 않았고, 지방의 사정이 전제군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방마다 유력 군벌들의 단독 행동이 많아졌다.
이 같은 사정은 보스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는 오토만 터키의 일개 지방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방 제국 세력에 대해서건 오토만에 대해서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보 안드리치의 트라브닉 연대기Travnička Hronika다. 나폴레옹 시대, 보스니아 행정수도 트라브닉Travnik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 소설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물론 오토만 술탄의 대리인인 총독에게 조차 마음을 열지 않는 보스니아인들의 완고함이 잘 드러나 있다. 법률적으로 보스니아는 오토만 황제의 대리인, 즉 총독이 다스리도록 되어있지만, 이들의 실질적 지배범위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트라브닉에 남아있는 성채. 일단 뒷산이 높고,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트라브닉은 사라예보보다는 방어상의 이점이 있다. 17세기 말부터 150년간 오토만의 총독이 주재하는 보스니아 행정수도 역할을 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도 트라브닉 출신이다.
무엇보다 지방토호들이 만만치 않았다. 보스니아는 특히 변경이기 때문에, 현장 군지휘자인 카페탄들의 정치적 권력이 강했다. 토호들도 만만치 않아 전쟁 때문에 세금이라도 올리려 치면 여기에 민란 등을 통해 극렬저항했고, 이들에게 쫓겨난 총독들도 적지 않다.
특히 사라예보는 과거에 오토만의 보스니아 점령 당시의 공적으로 인해 각종 면세혜택 등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파견되어 오는 총독들 역시 이들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사라예보에 비하면 훨씬 옹색한 트라브닉이 18세기는 물론 19세기까지 계속 총독주재지가 된 것 역시 트라브닉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사라예보인들의 텃세 때문이었다. 사라예보인들은 기본적으로 상전(총독)을 다시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사라예보의 태도는 특히 중요했는데, 모스타르 등 다른 도시들이 사라예보를 벤치마크로 삼은 탓이 크다.
그렇다고 보스니아의 기득권 세력들이 오토만의 정책에 대한 대안으로써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보스니아 토호들의 일관된 목소리는 언제나 수구/복고/반동 취향이었다. 현상유지가 이들의 목표였던 셈이다. 그러니, 서구 제국을 따라잡고자 술탄이 어떻게든 개혁을 추진코자 해도, 지방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때로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완고한 보스니아에도 변화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유럽의 정세가 또 한번 요동을 쳤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눌려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1820년대부터 다시금 오토만의 땅을 야금야금 먹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경계를 두고 있던 보스니아에서도 이 같은 영향이 슬슬 느껴지게 되는 시점이다.
산으로 둘러쌓인 사라예보의 옛모습. 오토만 터키의 정복자들은 대체적으로 고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주변 어디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타운을 조성했다. 1990년대 스릅스카 공화국군도 주변 고지를 둘러싸고 3년 넘게 이 도시를 포위했다.
오토만이 쇠하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현저하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어느때부턴가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 3대륙에 걸친 방대한 제국의 손발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전제군주의 의사결정이 지방으로 하달이 되지 않았고, 지방의 사정이 전제군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방마다 유력 군벌들의 단독 행동이 많아졌다.
이 같은 사정은 보스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스니아는 오토만 터키의 일개 지방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방 제국 세력에 대해서건 오토만에 대해서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사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보 안드리치의 트라브닉 연대기Travnička Hronika다. 나폴레옹 시대, 보스니아 행정수도 트라브닉Travnik에 파견된 외교관들의 관점에서 전개된 이 소설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물론 오토만 술탄의 대리인인 총독에게 조차 마음을 열지 않는 보스니아인들의 완고함이 잘 드러나 있다. 법률적으로 보스니아는 오토만 황제의 대리인, 즉 총독이 다스리도록 되어있지만, 이들의 실질적 지배범위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트라브닉에 남아있는 성채. 일단 뒷산이 높고,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어서 트라브닉은 사라예보보다는 방어상의 이점이 있다. 17세기 말부터 150년간 오토만의 총독이 주재하는 보스니아 행정수도 역할을 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보 안드리치도 트라브닉 출신이다.
무엇보다 지방토호들이 만만치 않았다. 보스니아는 특히 변경이기 때문에, 현장 군지휘자인 카페탄들의 정치적 권력이 강했다. 토호들도 만만치 않아 전쟁 때문에 세금이라도 올리려 치면 여기에 민란 등을 통해 극렬저항했고, 이들에게 쫓겨난 총독들도 적지 않다.
특히 사라예보는 과거에 오토만의 보스니아 점령 당시의 공적으로 인해 각종 면세혜택 등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파견되어 오는 총독들 역시 이들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사라예보에 비하면 훨씬 옹색한 트라브닉이 18세기는 물론 19세기까지 계속 총독주재지가 된 것 역시 트라브닉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사라예보인들의 텃세 때문이었다. 사라예보인들은 기본적으로 상전(총독)을 다시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사라예보의 태도는 특히 중요했는데, 모스타르 등 다른 도시들이 사라예보를 벤치마크로 삼은 탓이 크다.
그렇다고 보스니아의 기득권 세력들이 오토만의 정책에 대한 대안으로써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보스니아 토호들의 일관된 목소리는 언제나 수구/복고/반동 취향이었다. 현상유지가 이들의 목표였던 셈이다. 그러니, 서구 제국을 따라잡고자 술탄이 어떻게든 개혁을 추진코자 해도, 지방에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때로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완고한 보스니아에도 변화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유럽의 정세가 또 한번 요동을 쳤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눌려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1820년대부터 다시금 오토만의 땅을 야금야금 먹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경계를 두고 있던 보스니아에서도 이 같은 영향이 슬슬 느껴지게 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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