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9 : 정교 분리와 세속정치의 시작

1851년 녜고쉬가 죽자, 그의 조카로 후계자로 지명된 스물다섯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 직을 수행할 차례가 됐다. 그런데 다닐로는 생각이 달랐다. 원로와 족장들에게 사제로 서품받는 것을 거부하고 왕자의 자리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개명천지에 신정합일은 너무했다는 생각이었던지 러시아가 그 생각을 지지해 줬다. 해서 그가 1852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짜르를 만날 때에는 그는 사제가 아니라 공Knez (Prince) 대접을 받았다.

몬테네그로 사람치고는 키가 작았고, 덕분에 현지인 사이에 별명이 토끼Zeko였다. 그러나 별명과 달리 성격이 강했다. 정교분리 이슈를 처음으로 끄집어내고 실행에 옮긴 것 만 봐도 그렇고 매사에 대응하는 거의 대부분이 이랬던 것 같다. 

이제 블라디카가 아니라 군주에 해당되니 장가를 가야할 때. 어디서 점지했는지 1855년 트리에스테 출신 세르비아계 사업가의 딸과  결혼했다. 기왕에 가는 장가, 왕녀에게 가는 것이 낮지 않겠냐는 측근들의 충언도 소용없었다.

세속군주로서 장가도 갔고 상비군 등 각종 구상도 실현해야 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당연히 조세징수가 강화됐다. 산중의 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다닐로는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맞섰다. 반기를 든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에 어린 아이까지 험하게 다뤘다고 한다.

몬테네그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다링카Darinka. 초상화. 도도하고 씀씀이도 컸다고 한다. 그래도 문명의 세례를 받고 와서 그런지 체티녜 궁전 주변에 걸려있는 수급들을 다 치우게 한 것도 그녀 때문이라고 한다. 다닐로와의 사이에서는 공주를 하나 낳았다.

다 좋은데, 오토만의 심기가 편할리가 없다. 아직까지 몬테네그로라는 나라가 따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아직도 오토만 땅인데, 이런 데서 자기 마음대로 공이니 뭐니 따다 붙이는 셀프벼슬아치들이 영 거슬렸다.

1853년 오토만이 움직였다. 수장은 보스니아 총독인 오메라 파샤 라타스Omer Pasha Latas. 무능과 폭압을 일삼던 전임관료들과 달리 유능했다. 오토만의 군제 개혁 등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는, 다음 순서로 작정하고 몬테네그로로 들어왔다. 그것도 가장 아픈데를 골라서. 다닐로의 똥줄이 탔다. 당장 열강들에게 SOS를 타전.

강적 오메르 파샤 라타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계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보스니아로 망명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찌 어찌 터키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한마디로 희한하고도 복잡한 이력의 사나이였다.  국제적인 외교력과 전술감각이 좋아서 망해가는 오토만의 생명줄을 연장시켰다.

오스트리아가 나섰다. 불편부당한 중재자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오토만과 몬테네그로 간의 평화협약을 성립시켰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왜? 몬테네그로가 이뻐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나서서 몬테네그로를 도와주고, 그것을 기화로 발칸에 발을 뻗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열강들간의 힘겨루기가 발칸 정치의 아웃풋을 결정한 셈인데, 19세기에는 이게 하나의 고정된 패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몬테네그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러시아는 때마침 터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그래서 1853년 말에 터진 난리가 크리미아 전쟁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러시아가 바다까지 기어나오겠다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터키를 도와주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쟁 후 1856년 파리에서 전후 처리를 놓고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등 당사자들이 협약을 벌이는 이걸 받고 저걸 주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 마련됐다. 이런 복잡한 북새통 속에서도 몬테네그로와 오토만과의 접경에서는 사투가 지속됐는데, 그러다가 1858년 몬테네그로군이 두브로브닉에서 50km 가량 떨어진 그라호보Grahovo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뒀다. 사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열강들이 또 나섰다.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는 새로운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열강들의 관계에서 몬테네그로의 자기 주장이 또 한번 먹힌 것이다.

정작 내외로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다닐로를 가로 막은 것은 숙적 오토만 터키도 서구 열강들도 아니었다. 1860년 휴양차 나와있던 코토르Kotor에서 그는 같은 몬테네그로인에게 암살당한다. 암살자는 다닐로의 독주에 앙심과 불만을 품은 비옐로파블리치족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폭압적인 전제군주는 아니었지만, 매사를 권위적으로 처리하던 카르마가 험하게 돌아온 셈이다. 이렇게 해서 몬테네그로 첫 세속군주는 삼십 중반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8 : 산상의 르네상스맨

페타르1세는 몬테네그로에서 단순히 땅만 넓히는 역할 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구황 작물인 감자를 몬테네그로로 들여온 것도, 빈민 구제에 교회의 역할을 강화한 것도, 더 나아가서는 부족적인 틀을 벗어나 뭔가 뼈대가 있는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것도 다 그의 공적이다.

그러나 후계를 정하는 것 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후계자는 페트로비치 일족에다 성직자에다가 배운것도 많아야 한다. 후계자 1은 러시아에서 유학보냈으나 병에 걸려 죽었고, 후계자 2는 기껏 러시아로 보내놨더니 사제보다는 사관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어쩔수 없이 후계구도에서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1830년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페타르1세가 죽고 말았다.

권력의 공백기. 몬테네그로 산중 씨족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베네치아가 부여한 바, 지사guvernadur직을 세습하는 라도니치 일족이 들썩이자, 기왕에 잡은 권력을 놓칠 수없었던 페트로비치 문중이 나서서 가문의 17살짜리 청년 라데 토모브Rade Tomov를 서둘러 사제로 만들어 블라디카로 선출했다. 사제로 서품을 받으면서 아예 이름도 아저씨를 따라 페타르Petar로 바꿨다. 그러니 이 사람은 페타르 2세Petar II가 되는 것이다. 후세에는 녜고쉬Njegoš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왜 궂이 녜고쉬라는 부족명을 성처럼 썼을까? 그것은 러시아를 방문해서 황제를 알현하다가 붙인 습관이란다. 페타르 페트로비치. 러시아어를 배운 사람은 페트로비치 같은 남슬라브의 성씨가 러시아에서는 누구의 아들을 지칭하는 파트로님patronym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녜고쉬라는 부족이름을 붙임으로서 적어도 러시아인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녜고쉬의 초상. 2m가 넘는 거구에 영화배우 못지 않은 미남이다. 가히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이상형이라고 할 만도 하다. 이전까지의 블라디카가 주로 사제복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면, 녜고쉬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몬테네그로 전통의 속복을 즐겨입었다. 

19살 되던 해 1933년 녜고쉬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메트로폴리탄으로서의 서품은 물론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약속 받았다. 1834년에는 죽은 아저씨 페타르1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물론 거국적 성원을 받는 조치였지만, 아직은 어리고 약한 자신을 다잡고, 더 나아가서는 페트로비치 일족의 권력 장악을 공고하는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몬테네그로 부족사회에 없던 '세금'을 도입했다. 도입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에 대한 부족들의 불만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안그래도 없어서 산아래 노략질까지 하는데 세금은 무슨 세금.... 반항하는 부족들에게는 가차없는 처벌이 내려졌다. 국가의 세금으로 펀딩한 경찰 및 경호병도 두고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수도원에서 벗어난 궁전도 만들었다.

녜고쉬가 건설한 블라디카의 궁전...이라기보다는 사저 빌랴르다Biljarda. 녜고쉬가 산길을 뚫고 당구대를 갖다놨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중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고자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는 데, 19세기 당대의 궁전에 비교해서 매우 투박하다. 게다가 녜고쉬를 방문한 외국 손님들은 궁전 주변에 걸어놓은 무슬림들의 목때문에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집중된 권력으로 변사또 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몬테네그로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도입했다. 원로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도 만들었다. 경찰도 창설해서 몬테네그로인들 간의 사적인 복수를 제어코자 했다. 한마디로 그의 치세에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녜고쉬 당대에 땅을 늘리거나 뭐 이런 것을 한 것은 없지만, 적어도 다음 대가 공고해진 권력을 바탕으로 튀어나갈 기틀은 만들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녜고쉬가 이쪽 지역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인으로서의 업적이다. 녜고쉬가 1847년에 발표한 장편서사시 산중화환Gorski Vijenac(Mountain Wreath)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중심으로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안그래도 19세기 초반은 민족주의 바람으로 인해 유럽 군소민족의 가슴이 벌렁벌렁해질 때였다.

녜고쉬의 산중화환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정념을 표현한 걸작으로 숭앙받고 있다. 합스부르크 황태자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찝은 아예 이 시를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녜고쉬도 이 시를 세르비아의 국부(실제로 녜고쉬가 쓴 말이다) 카라조르제에게 헌정한다.

서사시이며 등장인물이 명확하기 때문에 산중화환은 연극이나 영화로도 만들 수 있는 구조다.  1997년 세르비아와의 갈등이 커진 몬테네그로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서 올렸다. 반오토만/범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 작품의 초연에는 몬테네그로 그랜드 무프티가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산중의 부족들 간의 회의가 소집되는 날, 블라디카 다닐로는 어지러운 마음을 주체 못한다. 극심한 고독감(오토만 터키에 포위된 데 따른) 그리고 그 가운데 버릴 수 없는 사명감(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이에서 다닐로는 번뇌하고 있는 것이다. 당면의 이슈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몬테네그로 종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블라디카 다닐로는 이들에게 회심과 (역)개종을 권한다. 이들이 이를 거부했을 때, 다닐로가 취한 길은 절멸의 길이었다.
As wide and long that Cetinje Plain is, not one witness was able to escape to tell his tale about what happened there. 
20세기 후반 유고 내전에서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인종청소가 자행됐을 때, 사람들은 다시금 녜고쉬와 산중화환을 마치 예언처럼 떠올렸다. 내전도 끝난 지금 녜고쉬의 시를 어린 백성의 순진하지만 야만적인 자기표현이라고 봐야 할까? 굳이 변론을 하자면 누구도 역사를 넘어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해야겠다. 녜고쉬나 몬테네그로의 부족들이나 가파른 산중에서 오토만 터키와 사활을 건 쟁투 중이었다. 누구 하나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인정해주는 열강이 없었다. 고립무원 속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길은 결국 손에 와닿고 가슴에 절실한 말을 하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단일민족/국민국가로 나가는 길이 그것 밖에 없었냐는 물음은 우화를 실화로 착각한 후대에 할 질문이다.

어쨌거나 녜고쉬는 시를 발표한 지 3년 후 1851년 서른 여덟의 나이로 죽었다. 척박한 몬테네그로에 태어난 르네상스맨이었다. 민족주의자에 잘 맞는 낭만주의자로 그를 묘사할 수도 있지만, 그는 처한 현실은 낭만주의가 발붙일 역사적 배경이나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표방한 시적 지향은 결국 당대 낭만주의적 아이디얼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그만의 독특함이 있다. 그가 죽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어느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지만 일단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게 되면 모든 인간의 빈곤상을 보게됩니다.... 시란 풍우의 연안에서 외치는 유한한 인간의 비명이요, 시인이란 황야의 외로운 고함일 뿐입니다.  - But once man rises above himself, then he sees the poverty of all things human... a poem is the cry of a mortal from this stormy strand of ours, the poet is 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

한 (유사)국가의 정치지도자가 하기에는 궁상스러운 언사다. 그의 시가 보편적 인간의 대의에 복무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의 고독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진정했던 것이다. 성직자도 문맹이 많은 몬테네그로 사회에서 나온 그의 시작들은 그야말로 작가적 저작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큰 업적이었으니 가히 산골짝이 배출한 르네상스맨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죽을 때 로브첸 산 정상의 작은 교회당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는 그 자리에 묘당mausoleum을 만들어 그를 기렸다.

로브첸Lovćen산 정상에 마련된 녜고쉬 묘당. 몬테네그로인들에게는 백두산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묘당 아래까지 찻길이 마련되어 있지만, 상태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맑은 날에나 갈 수 있다. 올라가 본 사람 말에 따르면 경치가 끝내준다고 한다.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7 : 몬테네그로의 부족들

20세기 초까지 몬테네그로 사회의 근간은 부족시스템이었다.

커다란 혈연적 범위 내에서 부족pleme(tribe)이 있고 그 아래 보다 응집력이 강한 소집단으로 씨족bratstvo(clan)이 있다. 예컨대는 이런 거다. 페타르 1세의 경우 녜구쉬족Njeguši의 페트로비치씨족Petrović clan에 속했다. 녜구쉬족은 몬테네그로에서 유서깊고 뼈다귀가 있는 부족이다. 그에 소속된 페트로비치씨족은 18세기부터 블라디카 직을 세습했고, 나중에는 국왕까지 배출했으니 그 중에서도 명망씨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녜구쉬족이라고 페트로비치 씨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가 몬테네그로에 부러 선사한 지사guvernadur직은 녜고쉬족의 라도니치씨족Radonjići에 세습되면서, 양 씨족의 갈등은 몬테네그로의 지배구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올드 몬테네그로, 그러니까 페타르 1세 시절 제타강 넘어 브르다를 합병하기 이전의 부족 분포도. 1번지역이 체티녜Cetinje족, 2번이 명문 녜구쉬Njeguši족, 6번이 오즈리니치Ozrinići족의 영토


1796년을 기점으로 몬테네그로와 융합하게 된 브르다 지역의 일곱부족 중에서 숫적으로도 많고 가장 용맹스럽고 호전적이라는 평판을 받는 족속은 바소예비치족Vasojevići이다. 이 부족 출신으로 우리가 알만한 인물을 몇명 꼽아보자.

19세기 초 들어 형성된 부족 세력도. 올드 몬테네그로라고 지정한 부분이 바로 위의 지도에 해당하고 더 나아가서 브르다의 일곱 부족, 바소예비치, 피페리, 쿠치 등이 몬테네그로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

기억 나시는가? 이 블로그의 앞에서 언급한 세르비아의 창업자이자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비조 카라조르제다. 그 스스로는 세르비아에서 태어났지만, 그 조상은 몬테네그로 바소예비치족 출신이다.

카라조르제는 세르비아 1차봉기 당시부터도 그 격렬한 성격과 용맹+흉폭함으로 잘 알려져 있어 바소예비치 집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약간은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카라조르제는 전형적인 세르비아 인간형의 한 축(하이랜더형)으로 곧잘 언급되고는 한다. 이에 반해 2차봉기를 주도했지만 타협과 정치를 통해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이끈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그 반대적 형질(로우랜더형)을 대표한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90년대 유고내전의 제1원흉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결국 헤이그에서 전범재판 중에 죽었다.

이 사람은 몬테네그로에서 태어났고 그 중에서도 바소예비치족의 혈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용맹함이나 용감함보다는 교활한 정치공학으로 집권했다. 하지만, 이 양반이 1989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기댄 연설을 했을 때,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가 카라조르제에 못지 않은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인 투쟁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레지던트 이블 씨리즈의 히로인 밀라 요보비치도 바소예비치의 후예라고 한다. 아빠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엄마가 우크라이나인이다. 몬테네그로인들은 남녀모두 잘났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데, 그에 부끄럽지 않은 딸이 태어난 셈이다. 과거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를 러시아, 우크라이나, 몬테네그로인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


바소예비치족은 카라조르제 등이 자신의 혈족인 탓이었는지, 강한 세르비아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2006년 독립을 두고 몬테네그로에서 국민투표가 벌어졌을 때, 바소예비치족의 근거지에서는 압도적인 반대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혈통 그 자체가 민족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중에는 알바니아 혈통의 부족이  세월이 흐르면서 몬테네그로/세르비아계로 전환하는 일이 있었다. 예컨대 올드몬테네그로의 동북방 경계인 제타강 넘어 브르다 일곱 부족 중에 볠로파블리치Bjelopavlići족의 조상 비옐로 파블레Bijelo Pavle는 원래 알바니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웃 알바니아 산중 부족과의교류, 동맹과 적대의 역사가 복잡다기한 융합, 포섭, 분화의 과정을 거쳐서 몬테네그로의 부족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민족이라는 이미지만한 허상이 없다. 어떻게 보면 그런 허상을 기본으로 근대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6 : 산중의 법도

고대국가 이전의 부족 연합체. 제정합일의 신정정치. 이런 모습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인들이 형편없는 원시종족 같이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내습으로 봉건제가 깨지면서 산중으로 흩어져 들어간 이들을 중심으로 부족사회 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해서 사가들은 몬테네그로의 부족생활이 15세기 쯤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말엽의 블라디카의 모습. 정교의 체계 내에서는 보통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맡았다. 이 때 쯤 와서는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민간권력에게 이양된 상황이었지만, 동방정교는 몬테네그로의 살림살이에서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세르비아 정교냐 몬테네그로 정교냐는 것.

슬라브족이 발칸으로 들어와서 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산중에는 이미 알바니아계 하이랜더나 그 연원이 묘연한 블라흐Vlah족들이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가 부족생활이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특히 알바니아계나 블라흐계 부족들도 차차 세월이 지나면서 숫적으로 우세한 슬라브에 동화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딱히 경작할 땅이 없는 산 속에서 목축생활을 했지만, 이 역시 지속가능한 생활의 자량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산 아래 정착한 무슬림 마을을 터는 산적Hajduk 생활이 이들의 주요한 밥벌이였다. 따라서, 오토만과의 갈등이라는 것도 종교가 달라서 또는 가슴에 주체할 수 없는 민족정기 때문에 .. 등과 같은 상부구조적 요인보다는 결국은 이런 원초적 생활 패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랜 세월의 더케가 쌓이다 보니 밥벌이를 위한 원초적 다툼이 고아한 민족의식이 서로를 북돋으며 몬테네그로인들의 뇌리에 남은 듯 하다.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전사간의 싸움.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의 상당수는 오토만 편에서 싸웠다. 전사로서의 명예/투쟁의식은 몬테네그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알바니아계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몬테네그로 대 오토만의 싸움이었지만, 19세기 언제부턴가 몬테네그로 대 알바니아 간의 쟁투로 점차 변질되어 갔다.

외부민족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부족간 또는 구성원 간의 반목도 심했다. 티핑 포인트였던가 블링크였던가. 말콤 맥도웰Malcolm McDowell은 스코트랜드 등 하이랜더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러가지 나열한 적이 있다. 몬테네그로(나 알바니아에서) 하이랜더들 사이에서도 대충 그 비슷한 원인으로 분규가 잦았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인들의 눈을 가장 많이 끄는 대목은 '피의 복수'Blood Feud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받은 만큼은 되돌려준다는 이 간단한 룰은 몬테네그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근 알바니아 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영화 '대부'의 본거지 시실리, 더 넓게는 파푸아 뉴기니 원시종족에도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지위는 제한적이었지만, 가사부터 경작, 목축에 이르는 경제활동은 모두 여성의 일이었다. 남성들의 일이 싸움질이었다면 여성의 일은 그 나머지 다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런 의식이 오랜세월을 거쳐 축적되고 체화된 탓인지, 몬테네그로 남성들에 대한 구유고국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게으르다'는 것이다.  

코토르Kotor 시장으로 물건 팔러 나가는 몬테네그로인들을 묘사한 그림. 여성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고, 남자는 총만 달랑들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병참은 여성의 일이었다.

19세기 알바니아 카톨릭 수도사가 알바니아 하이랜더들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룰Kanuni i Lekë Dukagjinit을 문서로 정리한 적이 있다. 관혼상제 여러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런거다: 원수는 피로 갚는다. 피로 갚을 때는 백주대낮에 다들 보이는 데서 한다.... 손님한테는 정성을 다해서 대접한다. 우리집 손님의 안전을 헤쳐서 집안의 명예를 실추한 놈은 집안의 원수다... 이런 놈에게는 피로 원수를 갚는다... 결국 피의 복수란 강력한 가부장제, 명예의식, 중앙사법권력의 부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자고 만들어 놓은 생존전략 때문에 사람들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때문에 20세기 초가 되도록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사망원인은 '살인'이었다. 알바니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룰이 몬테네그로에서도 통용됐다고 보면 된다. 몬테네그로의 정치권력이 점차 중앙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가장 큰 골치꺼리는 이것을 어떻게 근절하느냐 였다.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1 : 몬테네그로 전사의 노래

몬테네그로에는 지난 번에도 소개했던 구슬레 서사시를 부르는 악사Guslar가 유난히 많다. 소박한 악기 자체가 공교롭기 어려운 산악의 단순한 삶에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몬테네그로가 배출한 최고 시인 네고쉬도 '구슬레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이라고 읊었을 정도였으니, 구슬레가 몬테네그로에서 가지는 의미가 알쪼다.

몬테네그로인들이 구슬레를 연주하면서 읊었던 서사시 중에는 영웅을 찬탄하는 류의 서사가 많은데, 이번에 소개할 '밀로 요보비치 사제의 죽음'Pobigija (또는 Smrt) Popa Mila Jovovića가 가장 대표이라 할 수 있겠다.

원초적 단순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구슬레 연주 버전의 '죽음'. 여기 소개하는 것은 1부고 2부까지 합치면 장장 20분이 조금 모자라는 서사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르면서 끝까지 듣기가 어렵다. 

내용인 즉 이렇다.

"닉시치Niksić(오늘날 몬테네그로 도시들의 대다수는 19세기까지 오토만 터키 지배하에 있었다. 닉시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은 몬테네그로 대표브랜드 맥주를 만드는 동네다) 공략을 모의하던 몬테네그로 진영에서 누군가 밀로 요보비치 사제를 중상하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런 참언을 들었기 때문인가? 부족의 족장이 여러 전사들 앞에서 밀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대는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로다.' 요보비치 사제는 이 말을 듣고 분기탱천, 분노에 몸을 떤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홀연 총칼을 차고 닉시치로 향한다.

닉시치 성문 앞에 선 요보비치. 터키 경비병들에게 말한다. '무쇼비치 대장kapetan 나오라 그래'. 이 말을 듣고 나온 무쇼비치 수비대장. '웬 일이야? 항복하러 왔으면 환영이야'. 요보비치가 답한다. '쓸 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당장 나와. 나랑 결투다!' 하지만 요보비치의 명성을 알고 있는 대장은 부하들을 시켜 성문 앞 요보비치를 저격한다.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요보비치의 목을 따라 터키의 병사들이 몰려나오고, 그의 목은 닉시치 탑 위에 걸린다. 그 날 밤 병사들 사이에선 잔치가 벌어지고, 터키식 하렘의 여인들은 창문 넘어 유명했던 영웅의 머리를 호기심 어린 듯 바라본다. 요보비치가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이 땅을 치며 울음을 터뜨린다."

시가의 형태로 음미하지 않고 줄거리만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몇가지 몬테네그로의 단면을 포착할 수 있다. 성직자가 전사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성직자 중에는 일자무식꾼도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적 용맹과 명예는 몬테네그로 부족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한 분노의 표출은 남자라면 응당해야할 사회적 행동이었다. 남성중심적 문화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면 빙고! 군사적으로는 득도 있지만 실도 크다.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은 산악 게릴라전에는 능했을지 몰라도 공성전과 같이 고도로 조직화된 군사적 행동에는 약했다.

이 오래된 노래는 80년대 등장한 몬테네그로 출신 랩퍼/로커 람보 아마데우스Rambo Amadeus가 모던한 랩으로 리바이벌한 적이 있다. 장장 20분 짜리 서사시가 5분 짜리 랩으로 축약되는 순간이다.

80년대 유고슬라비아 락씬에 데뷔한 람보 아마데우스는 B급 정서에 기반한 풍자적 노래도 곧잘하고 전통적 요소와 최신 유행을 결합시킨 곡을 다수 발표했다. 90년대 세르비아를 풍미한 '투르보 포크'turbo folk라는 말도 그가 만들어낸 말로, 짧은 말로 사회의 단면을 잡아낼 줄도 알았다. 지금도 활동 중이다. 2013년 몬테네그로를 대표해서 경제위기에 빠진 EU를 풍자하는 Euro Neuro로 유로비전 송 컨테스트에 나가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5 : 산중에 들기시작한 볕

1782년, 블라디카 사바가 죽었다. 40년이 넘도록 권력없는 권좌에 앉아있었던 그가 죽자, 새 세대가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약간의 뜸을 들인후 새로운 블라디카로 추대된 것은 역시 페트로비치 가문의 청년 사제 페타르Petar였다. 이전 블라디카 중에서 페타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페타르 1세Petar I가 됐다.

딱히 물려받았달 것도 없는 초라한 권력이었지만, 페타르에게는 선대 다닐로 못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 하나가 있다면 그의 교육. 산중에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았던 선대 블라디카와 달리 페타르는 몬테네그로 산골에는 비할 수 없는 대처 러시아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사바와 공동으로 블라디카 직을 수행하다가 러시아에서 죽은 바실리예를 시봉하던 것도 바로 이 페타르였다.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수 있는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

페타르 1세의 모습. 동시대의 사람이 직접 그린 초상화다. 엄숙 경건한 성직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앞의 블라디카들의 초상화와 좀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은가? 머리 부분의 후광을 주목한 사람이 있다면 눈썰미가 날카롭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페타르 1세는 사후에 성자로 추존되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성 페타르다. 

페타르1세의 핵심주적은 역시 오토만.... 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몬테네그로에 바로 접한 스쿠타리 파샬릭Pashalik of Scutari의 총독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Kara Mahmud Bushati였다. 이야기가 약간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앞에서 퉁쳐서 오토만이라고 총칭했지만, 오토만은 하나의 일괴암적인 성격의 집단이 아니었다. 워낙 구성민족들도 다양했던 것도 있고,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도와 전통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들이 나중에는 지겹게 술탄의 말을 안들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원쑤 오토만이라고 여긴 족속에는 동일한 슬라브 혈통의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알바니아계였다. 카라 마흐무드 역시 알바니아계였던 것이다.

페타르 1세와 지역의 자웅을 다투던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 원초적으로 마초적인 모습이다. 카라라는 말은 터키어로 '검은색'을 의미한다. 거무튀튀한 얼굴색의 장사(속칭 소도둑 인상)들에게는 '카라'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 같다. 또다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르비아의 창업자 '카라' 조르제다. 

알바니아. 슬라브 족이 아니다. 언어 계통도 다르다. 슬라브족이 도래하기 전에 원래 발칸반도에 정주하고 있던 일리리아 원주민들이 바로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슬라브족에 이리 밀리고 저리 퉁겨 나가면서 디나릭 산중에 처박히게 됐다. 오토만이 발칸 반도로 들어오면서 다수의 카톨릭 또는 정교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나라가 됐다. 오토만 고유의 아동납치+영재교육 시스템Devşirme에 알바니아인 다수가 발탁된 결과, 오토만의 명재상이나 엘리트 중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나왔다.

알바니아는 발칸의 민족문제에 또다른 각도의 스핀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

카라 마흐무드는 오토만의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었다. 왜냐면 이 사람이 술탄의 말을 무던히 안들었거든. 빡친 술탄이 이 사람을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간단하게 격퇴당하고 만다. 이러니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오히려 마흐무드에게 반오토만 공동전선을 짜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오토만 내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페타르1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지배욕이 강한 마흐무드가 골목대장 노릇을 확실히 하려고 했거든. 즉위 초 한때는 체티녜가 이 양반에게 점령된 적도 있었다. 1796년 7월 이 마흐무드가 지역의 골치꺼리 산중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오토만군은 쨉도 안될 것 같은 페타르 휘하 몬테네그로 부족 연합군에게 일격을 당하고 만다. 마흐무드 본인은 부상까지 당하고....

몬테네그로인들의 전투모습. 이 동네의 쟁투에서는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양측 할 것 없이 목을 따는 것은 기본. 적의 목은 개인적 용맹과 전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도주나 퇴각시 머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상당한 전우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는 것이 예의였다고 한다. 

절치부심에 와신상담을 거듭한 한 마흐무드가 같은 해 9월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킨다. 오늘날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 근처인 크루시Krusi에서의 혈투. 오토만 3만 대 몬테네그로 7천. 그러나 얼마전 패배의 충격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마치 뭐라도 씌인 것처럼 마흐무드는 또다시 지고 만다. 진것 뿐만 아니라 마흐무드 자신은 생포/참수당해서 그 목이 체티녜 거리에 걸리고 말았다.

몬테네그로로서는 강적을 만나, 이긴 것도 좋았지만, 가장 큰 소득은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 블라디카의 말빨이 안먹히던 브르다Brda의 일곱 부족을 영향권 안에 거두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제적으로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명망을 얻었다. 영국 등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몬테네그로를 주목하게 된 계기다.

1796년의 전투로 넓어진 땅. 올드 몬테네그로라고 표시한 영역이 페타르가 물려받은 영토(?)다.  크루시 전투를 계기로 브르다 지역이 새롭게 몬테네그로 수중에 들어왔다. 오늘날의 몬테네그로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좁은 땅이지만 이게 어딘가. 

더 나아가 페타르 1세는 중앙정부(?)의 사법적 기능을 강화하고 법을 도입했다. 물론 이 이후에도 부족장들을 다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꿈같은 일이었다. 로브첸 산중에 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4 : 사기꾼 황제

카리스마 만땅 다닐로가 1735년에 죽고 블라디카의 자리는 그 사촌인 사바Sava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사바는 사촌 답지 않게 내향적인 사람으로 뭘 장악하고자하는 권력욕이 없었다. 덕분에 모처럼 열린 시대의 몬테네그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가 지속됐다. 오토만과의 갈등, 부족과 씨족간의 분규가 지속되면서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라고 해야겠지만, 원래 중앙정부랄 만한 것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바 페트로비치. 종교인 답게 생겼다. 페트로비치 씨족의 첫번째  블라디카 후계자. 영적인 문제는 몰라도 세속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세인들은 성격이 강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다닐로가 어떻게 사바 같은 이를 후계로 지목했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다.

다닐로의 조카로  보다 젊고 에너지가 있는 바실리예Vasilije가 1750년 어찌어찌 당시 세르비아 정교수장으로부터 서품을 받음으로써 사바와 블라디카 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형국이 됐지만, 대외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가난하고 못살았으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라였다. 바실리예는 베니스, 러시아 등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1766년에 죽었다. 다시 블라디카 자리는 오롯이 리더십 결핍증에 시달리는 사바에게 넘어갔다.

바실리예 페트로비치. 얌전한 사바보다는 활동력이 있었다. 베니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을 순회하면서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시운 탓인지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권력의 공백기에 몬테네그로에는 사기꾼이 하나 흘러들어왔다. 몬테네그로 산속의 무지렁이들에게 자기가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의 남편으로 궁중 권모로 암살당한 (암살당하려다가 도망나온) 표트르 3세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나중에 "작은 스체판"Sćepan Mal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름으로 미루어 체구가 작았을 것으로 는 추정되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달마시아 산간과 해변지역에서 약초를 캐던 약장수가 몬테네그로까지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로 추정되는 데, 이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적어도 떠돌이 약장수를 하면서 익힌 언변으로 바깥 사정에 어두운 몬테네그로 산사람들을 홀린게 아닌가라는 것 까지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홀리고 다니더니 그 수가 제법 불어났다. 블라디카 사바가 나서서 족장들에게 표트르 3세는 실제로 죽었음을 알리려 했으나 오히려 (잠시나마) 구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오토만, 러시아가 아연해서 서로를 의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화 속의 삽화처럼 그려진 작은 스체판.  왜소한 체격으로 전통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마초를 선호했던 몬테네그로 산악부족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6년 동안 이들을 쥐락펴락했다. 

오토만이 우선 1768년 거병해서 산중 부족들의 세가 결집되는 것을 막고자 나섰다. 그러나 산중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니면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쟁이 나는 등등의 이유로 여의치 않았다. 러시아가 나섰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특사가 몬테네그로까지 와서 부족들에게 스체판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운 족장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특사는 결국 두 손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설에는 아예 스체판에게 러시아 장교복까지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변의 강국들이 자기 앞가림하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스체판을 실질적으로 몬테네그로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사법시스템을 도입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한편 시장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진보에도 불구, 1773년에 스체판은 오토만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나는 왕이로소이다'The man who would be King(1976)라는 영화가 있다. 션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 주연으로 영국의 사기꾼 두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가서 알렉산더 대왕을 참칭, 현지 부족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비슷한 일이 18세기 중엽 몬테네그로에서 일어난 것이다. 영화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체판의 참칭은 비극으로 끝났다.

사기꾼의 왕노릇이었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를 통해 몬테네그로의 대 오토만 항쟁과 호전성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대군과 맞서는 산중의 부족들. 게다가 낭만주의 시대 아닌가. 뭐하나 대승을 거둔 적은 없어도 압도적 무력 앞에서 근근히 버티는 몬테네그로 산중부족들은 자유를 그리는 서유럽 낭만가들의 몽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스체판이 죽고 난 뒤에도 블라디카는 여전히 사바였다. 이 무기력한 장수왕의 시대에 스체판은 산중 사람들의 단순 무식에 힘입어 강렬하게 매운 조미료 역할은 한 듯 하다.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3 : 리더의 탄생과 시대의 개막

산속에 처박힌 몬테네그로인들. 코토르를 비롯한 바닷가는 베네치아인가 평야 지역은 오토만의 지배체제가 들어앉았다. 몬테네그로는 이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사실은 그 두세력이 산으로 까지 굳이 쫓아들어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와 오토만 터키는 과거 츠르노예비치 가문의 땅이 온전히 오토만의 것임을 합의했지만, 츠르노예비치의 마지막 농성장소인 체티녜를 중심으로 다단한 부족과 씨족들이 살았다. 삶은 단순했다. 국가도 없고 세금도 없다. 귀족도 없고 농노도 없다. 이것이 바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부족pleme(tribe), 씨족bratsvo(clan) 등의 단어가 근세까지 살아서 남아있게 된 연유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없는 사회라는 것은 지극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오토만과 같은 강대한 적이 있을 때는. 그래서 산중의 부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뽑았다. 누구에게도 불편부당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블라디카Vladika라는 직함을 가지게 됐다. 정치적 스킬도 있어야 하지만, 군사적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고 큰 사람이면 더욱 좋다.

블라디카 다닐로의 모습. 당연히 직접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후세에 보다 로만틱하게 각색한 그림이다. 정교 승려라기 보다는 댄디한 군인처럼 보인다. 군사지도자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도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블라디카를 중심으로 몬테네그로는 초록동색 베네치아와의 연합을 통한 오토만 군과의 대항전선을 만들었고 베네치아와 오토만 사이에서 일어난 다단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만과 항상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시세와 풍향에 따르는 잡초와도 같은 삶이다.

그러나 17세기를 기점으로 오토만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던 베니스 포위(1683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산속의 바람도 슬슬 동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녜구시Njeguši족 페트로비치Petrović 집안의 25살짜리 승려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에 선출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1697). 오토만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과 야망이 있었다. '체티녜 주석 블라디카 겸 세르비아의 령(!)도자' Vladika of Cetinje and Vojvodić of Serbian Land. 그의 (자칭) 공식 직함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한 다닐로는 몬테네그로사에서는 지금까지 없던 두가지 유산을 남겼다.

그 하나가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함대 구축, 부동항 건설을 국가적 목표로 내놓고 뛰어다닐 때다. 항해술 습득을 위해 청년 장교들을 서방으로 보낼 때, 베네치아가 관리하던 코토르Kotor에도 몇사람 보냈다. 이곳에서 이들은 산중에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호전적인 부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몬테네그로와 러시아 간의 관계가 시작된다. 동일한 정교를 신봉하는 데다 오토만과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신흥강대국 러시아에 몬테네그로가 홀딱 빠졌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일까 몬테네그로의 러시아 숭배는 거의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를 처음으로 열어나간 것이 다닐로였다. 블라디카 다닐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원조를 바탕으로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화력과 더불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몬테네그로 부족들의 유일한 생명줄 노릇을 해왔던 베네치아가 가만히 만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인연이 있던 족장들을 초치하고 그 중 대장급에게 지사guvernadur의 명함을 달아줬다. 이간책이었다. 다닐로는 정치적 수완으로 이같은 외세의 개입을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뜨는 해라면 베네치아는 지는 해였다. 표트르 대제를 중심으로 오토만 못지 않은 국토확장을 추진하는 러시아, 그리고 지중해 무역의 위상이 옛날같지 않은데다 곧 있으면 나폴레옹에게 망할 베네치아.

또 블라디카직의 세습...

다닐로 때부터 블라디카 직이 다닐로가 속해있던 페트로비치 씨족에만 전승되는 전통이 생겼다. 다닐로의 카리스마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사는 정교 승려의 신분에 후사가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조카가 이어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습군주는 아니지만, 어느 집안을 구심점으로 중요한 정치적 권력이 전승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민주적 부족사회의 전통과는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집중되고 집약되기를 바라는 권력의 구심력이 어디선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블라디카에게 없던 권력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산중의 부족장들은 여전히 말을 안들었고 이들에게 다닐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문'이라는 위협과 협박 뿐이었다.

17세기 벽두에 다닐로가 건립한 체티녜 수도원Cetinjski manastir. 옛날 츠르노예비치 왕가가 만들었다는 수도원 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체티녜를 들이닥치는 바람에 여러번 불탔지만, 그 때마다 다시 세웠다.  페트로비치 가문의 또다른 성자 페타르의 유골이 봉헌된 곳이기도 한 만큼, 몬테네그로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만 하다. 

오토만과의 다단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구축한 블라디카 다닐로가 워낙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지 몬테네그로의 후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학살'Christmas Eve Masacre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702년에 일어났다는 이 사건은 다닐로의 명하에 마르티노비치Martinović 가문의 다섯 형제(와 그 권속)들이 무슬림 (배교자) 마을을 찾아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사건의 역사적 진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후세 몬테네그로인들은 이를 통해 다닐로를 더욱 살갑게 기억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서사시도 여러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도 나오지만 몬테네그로 국민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중화환Mountain Wreath이다.

어쨌거나 다닐로를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몬테네그로의 새 시대가 열렸다. 물론 다닐로는 이 역사적 길목에서 스스로를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포지셔닝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어떻게 몬테네그로라는 별도의 지향점으로 빠져들었는가가 역사의 미묘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