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녜고쉬가 죽자, 그의 조카로 후계자로 지명된 스물다섯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 직을 수행할 차례가 됐다. 그런데 다닐로는 생각이 달랐다. 원로와 족장들에게 사제로 서품받는 것을 거부하고 왕자의 자리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개명천지에 신정합일은 너무했다는 생각이었던지 러시아가 그 생각을 지지해 줬다. 해서 그가 1852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짜르를 만날 때에는 그는 사제가 아니라 공Knez (Prince) 대접을 받았다.
몬테네그로 사람치고는 키가 작았고, 덕분에 현지인 사이에 별명이 토끼Zeko였다. 그러나 별명과 달리 성격이 강했다. 정교분리 이슈를 처음으로 끄집어내고 실행에 옮긴 것 만 봐도 그렇고 매사에 대응하는 거의 대부분이 이랬던 것 같다.
이제 블라디카가 아니라 군주에 해당되니 장가를 가야할 때. 어디서 점지했는지 1855년 트리에스테 출신 세르비아계 사업가의 딸과 결혼했다. 기왕에 가는 장가, 왕녀에게 가는 것이 낮지 않겠냐는 측근들의 충언도 소용없었다.
세속군주로서 장가도 갔고 상비군 등 각종 구상도 실현해야 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당연히 조세징수가 강화됐다. 산중의 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다닐로는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맞섰다. 반기를 든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에 어린 아이까지 험하게 다뤘다고 한다.
몬테네그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다링카Darinka. 초상화. 도도하고 씀씀이도 컸다고 한다. 그래도 문명의 세례를 받고 와서 그런지 체티녜 궁전 주변에 걸려있는 수급들을 다 치우게 한 것도 그녀 때문이라고 한다. 다닐로와의 사이에서는 공주를 하나 낳았다.
다 좋은데, 오토만의 심기가 편할리가 없다. 아직까지 몬테네그로라는 나라가 따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아직도 오토만 땅인데, 이런 데서 자기 마음대로 공이니 뭐니 따다 붙이는 셀프벼슬아치들이 영 거슬렸다.
1853년 오토만이 움직였다. 수장은 보스니아 총독인 오메라 파샤 라타스Omer Pasha Latas. 무능과 폭압을 일삼던 전임관료들과 달리 유능했다. 오토만의 군제 개혁 등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는, 다음 순서로 작정하고 몬테네그로로 들어왔다. 그것도 가장 아픈데를 골라서. 다닐로의 똥줄이 탔다. 당장 열강들에게 SOS를 타전.
강적 오메르 파샤 라타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계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보스니아로 망명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찌 어찌 터키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한마디로 희한하고도 복잡한 이력의 사나이였다. 국제적인 외교력과 전술감각이 좋아서 망해가는 오토만의 생명줄을 연장시켰다.
오스트리아가 나섰다. 불편부당한 중재자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오토만과 몬테네그로 간의 평화협약을 성립시켰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왜? 몬테네그로가 이뻐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나서서 몬테네그로를 도와주고, 그것을 기화로 발칸에 발을 뻗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열강들간의 힘겨루기가 발칸 정치의 아웃풋을 결정한 셈인데, 19세기에는 이게 하나의 고정된 패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몬테네그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러시아는 때마침 터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그래서 1853년 말에 터진 난리가 크리미아 전쟁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러시아가 바다까지 기어나오겠다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터키를 도와주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쟁 후 1856년 파리에서 전후 처리를 놓고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등 당사자들이 협약을 벌이는 이걸 받고 저걸 주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 마련됐다. 이런 복잡한 북새통 속에서도 몬테네그로와 오토만과의 접경에서는 사투가 지속됐는데, 그러다가 1858년 몬테네그로군이 두브로브닉에서 50km 가량 떨어진 그라호보Grahovo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뒀다. 사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열강들이 또 나섰다.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는 새로운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열강들의 관계에서 몬테네그로의 자기 주장이 또 한번 먹힌 것이다.
정작 내외로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다닐로를 가로 막은 것은 숙적 오토만 터키도 서구 열강들도 아니었다. 1860년 휴양차 나와있던 코토르Kotor에서 그는 같은 몬테네그로인에게 암살당한다. 암살자는 다닐로의 독주에 앙심과 불만을 품은 비옐로파블리치족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폭압적인 전제군주는 아니었지만, 매사를 권위적으로 처리하던 카르마가 험하게 돌아온 셈이다. 이렇게 해서 몬테네그로 첫 세속군주는 삼십 중반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몬테네그로 사람치고는 키가 작았고, 덕분에 현지인 사이에 별명이 토끼Zeko였다. 그러나 별명과 달리 성격이 강했다. 정교분리 이슈를 처음으로 끄집어내고 실행에 옮긴 것 만 봐도 그렇고 매사에 대응하는 거의 대부분이 이랬던 것 같다.
이제 블라디카가 아니라 군주에 해당되니 장가를 가야할 때. 어디서 점지했는지 1855년 트리에스테 출신 세르비아계 사업가의 딸과 결혼했다. 기왕에 가는 장가, 왕녀에게 가는 것이 낮지 않겠냐는 측근들의 충언도 소용없었다.
세속군주로서 장가도 갔고 상비군 등 각종 구상도 실현해야 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당연히 조세징수가 강화됐다. 산중의 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다닐로는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맞섰다. 반기를 든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에 어린 아이까지 험하게 다뤘다고 한다.
몬테네그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다링카Darinka. 초상화. 도도하고 씀씀이도 컸다고 한다. 그래도 문명의 세례를 받고 와서 그런지 체티녜 궁전 주변에 걸려있는 수급들을 다 치우게 한 것도 그녀 때문이라고 한다. 다닐로와의 사이에서는 공주를 하나 낳았다.
다 좋은데, 오토만의 심기가 편할리가 없다. 아직까지 몬테네그로라는 나라가 따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아직도 오토만 땅인데, 이런 데서 자기 마음대로 공이니 뭐니 따다 붙이는 셀프벼슬아치들이 영 거슬렸다.
1853년 오토만이 움직였다. 수장은 보스니아 총독인 오메라 파샤 라타스Omer Pasha Latas. 무능과 폭압을 일삼던 전임관료들과 달리 유능했다. 오토만의 군제 개혁 등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는, 다음 순서로 작정하고 몬테네그로로 들어왔다. 그것도 가장 아픈데를 골라서. 다닐로의 똥줄이 탔다. 당장 열강들에게 SOS를 타전.
강적 오메르 파샤 라타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계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보스니아로 망명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찌 어찌 터키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한마디로 희한하고도 복잡한 이력의 사나이였다. 국제적인 외교력과 전술감각이 좋아서 망해가는 오토만의 생명줄을 연장시켰다.
오스트리아가 나섰다. 불편부당한 중재자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오토만과 몬테네그로 간의 평화협약을 성립시켰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왜? 몬테네그로가 이뻐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나서서 몬테네그로를 도와주고, 그것을 기화로 발칸에 발을 뻗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열강들간의 힘겨루기가 발칸 정치의 아웃풋을 결정한 셈인데, 19세기에는 이게 하나의 고정된 패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몬테네그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러시아는 때마침 터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그래서 1853년 말에 터진 난리가 크리미아 전쟁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러시아가 바다까지 기어나오겠다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터키를 도와주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쟁 후 1856년 파리에서 전후 처리를 놓고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등 당사자들이 협약을 벌이는 이걸 받고 저걸 주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 마련됐다. 이런 복잡한 북새통 속에서도 몬테네그로와 오토만과의 접경에서는 사투가 지속됐는데, 그러다가 1858년 몬테네그로군이 두브로브닉에서 50km 가량 떨어진 그라호보Grahovo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뒀다. 사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열강들이 또 나섰다.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는 새로운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열강들의 관계에서 몬테네그로의 자기 주장이 또 한번 먹힌 것이다.
정작 내외로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다닐로를 가로 막은 것은 숙적 오토만 터키도 서구 열강들도 아니었다. 1860년 휴양차 나와있던 코토르Kotor에서 그는 같은 몬테네그로인에게 암살당한다. 암살자는 다닐로의 독주에 앙심과 불만을 품은 비옐로파블리치족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폭압적인 전제군주는 아니었지만, 매사를 권위적으로 처리하던 카르마가 험하게 돌아온 셈이다. 이렇게 해서 몬테네그로 첫 세속군주는 삼십 중반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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