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 이전의 부족 연합체. 제정합일의 신정정치. 이런 모습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인들이 형편없는 원시종족 같이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내습으로 봉건제가 깨지면서 산중으로 흩어져 들어간 이들을 중심으로 부족사회 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해서 사가들은 몬테네그로의 부족생활이 15세기 쯤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말엽의 블라디카의 모습. 정교의 체계 내에서는 보통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맡았다. 이 때 쯤 와서는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민간권력에게 이양된 상황이었지만, 동방정교는 몬테네그로의 살림살이에서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세르비아 정교냐 몬테네그로 정교냐는 것.
슬라브족이 발칸으로 들어와서 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산중에는 이미 알바니아계 하이랜더나 그 연원이 묘연한 블라흐Vlah족들이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가 부족생활이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특히 알바니아계나 블라흐계 부족들도 차차 세월이 지나면서 숫적으로 우세한 슬라브에 동화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딱히 경작할 땅이 없는 산 속에서 목축생활을 했지만, 이 역시 지속가능한 생활의 자량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산 아래 정착한 무슬림 마을을 터는 산적Hajduk 생활이 이들의 주요한 밥벌이였다. 따라서, 오토만과의 갈등이라는 것도 종교가 달라서 또는 가슴에 주체할 수 없는 민족정기 때문에 .. 등과 같은 상부구조적 요인보다는 결국은 이런 원초적 생활 패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랜 세월의 더케가 쌓이다 보니 밥벌이를 위한 원초적 다툼이 고아한 민족의식이 서로를 북돋으며 몬테네그로인들의 뇌리에 남은 듯 하다.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전사간의 싸움.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의 상당수는 오토만 편에서 싸웠다. 전사로서의 명예/투쟁의식은 몬테네그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알바니아계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몬테네그로 대 오토만의 싸움이었지만, 19세기 언제부턴가 몬테네그로 대 알바니아 간의 쟁투로 점차 변질되어 갔다.
외부민족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부족간 또는 구성원 간의 반목도 심했다. 티핑 포인트였던가 블링크였던가. 말콤 맥도웰Malcolm McDowell은 스코트랜드 등 하이랜더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러가지 나열한 적이 있다. 몬테네그로(나 알바니아에서) 하이랜더들 사이에서도 대충 그 비슷한 원인으로 분규가 잦았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인들의 눈을 가장 많이 끄는 대목은 '피의 복수'Blood Feud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받은 만큼은 되돌려준다는 이 간단한 룰은 몬테네그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근 알바니아 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영화 '대부'의 본거지 시실리, 더 넓게는 파푸아 뉴기니 원시종족에도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지위는 제한적이었지만, 가사부터 경작, 목축에 이르는 경제활동은 모두 여성의 일이었다. 남성들의 일이 싸움질이었다면 여성의 일은 그 나머지 다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런 의식이 오랜세월을 거쳐 축적되고 체화된 탓인지, 몬테네그로 남성들에 대한 구유고국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게으르다'는 것이다.
코토르Kotor 시장으로 물건 팔러 나가는 몬테네그로인들을 묘사한 그림. 여성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고, 남자는 총만 달랑들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병참은 여성의 일이었다.
19세기 알바니아 카톨릭 수도사가 알바니아 하이랜더들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룰Kanuni i Lekë Dukagjinit을 문서로 정리한 적이 있다. 관혼상제 여러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런거다: 원수는 피로 갚는다. 피로 갚을 때는 백주대낮에 다들 보이는 데서 한다.... 손님한테는 정성을 다해서 대접한다. 우리집 손님의 안전을 헤쳐서 집안의 명예를 실추한 놈은 집안의 원수다... 이런 놈에게는 피로 원수를 갚는다... 결국 피의 복수란 강력한 가부장제, 명예의식, 중앙사법권력의 부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자고 만들어 놓은 생존전략 때문에 사람들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때문에 20세기 초가 되도록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사망원인은 '살인'이었다. 알바니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룰이 몬테네그로에서도 통용됐다고 보면 된다. 몬테네그로의 정치권력이 점차 중앙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가장 큰 골치꺼리는 이것을 어떻게 근절하느냐 였다.
19세기 말엽의 블라디카의 모습. 정교의 체계 내에서는 보통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맡았다. 이 때 쯤 와서는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민간권력에게 이양된 상황이었지만, 동방정교는 몬테네그로의 살림살이에서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세르비아 정교냐 몬테네그로 정교냐는 것.
슬라브족이 발칸으로 들어와서 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산중에는 이미 알바니아계 하이랜더나 그 연원이 묘연한 블라흐Vlah족들이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가 부족생활이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특히 알바니아계나 블라흐계 부족들도 차차 세월이 지나면서 숫적으로 우세한 슬라브에 동화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딱히 경작할 땅이 없는 산 속에서 목축생활을 했지만, 이 역시 지속가능한 생활의 자량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산 아래 정착한 무슬림 마을을 터는 산적Hajduk 생활이 이들의 주요한 밥벌이였다. 따라서, 오토만과의 갈등이라는 것도 종교가 달라서 또는 가슴에 주체할 수 없는 민족정기 때문에 .. 등과 같은 상부구조적 요인보다는 결국은 이런 원초적 생활 패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랜 세월의 더케가 쌓이다 보니 밥벌이를 위한 원초적 다툼이 고아한 민족의식이 서로를 북돋으며 몬테네그로인들의 뇌리에 남은 듯 하다.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전사간의 싸움.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의 상당수는 오토만 편에서 싸웠다. 전사로서의 명예/투쟁의식은 몬테네그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알바니아계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몬테네그로 대 오토만의 싸움이었지만, 19세기 언제부턴가 몬테네그로 대 알바니아 간의 쟁투로 점차 변질되어 갔다.
외부민족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부족간 또는 구성원 간의 반목도 심했다. 티핑 포인트였던가 블링크였던가. 말콤 맥도웰Malcolm McDowell은 스코트랜드 등 하이랜더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러가지 나열한 적이 있다. 몬테네그로(나 알바니아에서) 하이랜더들 사이에서도 대충 그 비슷한 원인으로 분규가 잦았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인들의 눈을 가장 많이 끄는 대목은 '피의 복수'Blood Feud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받은 만큼은 되돌려준다는 이 간단한 룰은 몬테네그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근 알바니아 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영화 '대부'의 본거지 시실리, 더 넓게는 파푸아 뉴기니 원시종족에도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지위는 제한적이었지만, 가사부터 경작, 목축에 이르는 경제활동은 모두 여성의 일이었다. 남성들의 일이 싸움질이었다면 여성의 일은 그 나머지 다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런 의식이 오랜세월을 거쳐 축적되고 체화된 탓인지, 몬테네그로 남성들에 대한 구유고국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게으르다'는 것이다.
코토르Kotor 시장으로 물건 팔러 나가는 몬테네그로인들을 묘사한 그림. 여성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고, 남자는 총만 달랑들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병참은 여성의 일이었다.
19세기 알바니아 카톨릭 수도사가 알바니아 하이랜더들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룰Kanuni i Lekë Dukagjinit을 문서로 정리한 적이 있다. 관혼상제 여러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런거다: 원수는 피로 갚는다. 피로 갚을 때는 백주대낮에 다들 보이는 데서 한다.... 손님한테는 정성을 다해서 대접한다. 우리집 손님의 안전을 헤쳐서 집안의 명예를 실추한 놈은 집안의 원수다... 이런 놈에게는 피로 원수를 갚는다... 결국 피의 복수란 강력한 가부장제, 명예의식, 중앙사법권력의 부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자고 만들어 놓은 생존전략 때문에 사람들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때문에 20세기 초가 되도록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사망원인은 '살인'이었다. 알바니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룰이 몬테네그로에서도 통용됐다고 보면 된다. 몬테네그로의 정치권력이 점차 중앙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가장 큰 골치꺼리는 이것을 어떻게 근절하느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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