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7일 금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2 : 멀어진 꿈

니콜라의 영토확장의 꿈은 오토만 터키에서 1908년 청년터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야무지게 영글어 간다. 국민개병제, 근대적 조세제도, 오토만 중심의 근대 교육제도 등 청년터키들이 생각했던 근대적 개혁이 곧바로 부메랑 역효과를 일으키기 시작했거든.  오토만 중심의 교육이란 것이 소수민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인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국민 개병도 문제였다. 지금까지 오토만 땅에서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군면제였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차별없는 징집제란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나가기만 하면 지는 군대를 가는 게 영 마뜩찮았을 것이다.

알바니아가 문제였다. 당장 북부 카톨릭계열의 하이랜더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반발을 찍어 누르기 위해 무장해제까지 시켰더니, 이게 알바니아 산중의 마초들에게는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이런 틈을 몬테네그로가 비집고 들어왔다. 국경을 넘어서 도움을 청하는 이들 부족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등 은밀한 지원활동에 들어갔다.

거리를 걷는 알바니아 두카진Dukagjin 하이랜더들. '굿펠라' 같은 영화의 한장면 같다. 다른 민족에 비하면 알바니아와 오토만은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기독교계 하이랜더들도 용맹성을 인정받아 터키의 의용병Bashi-Bazouk으로 많이 차출됐다. 그게 또 자존심이었다. 이런 자존심을 구겨놨더니, 그길로 알바니아와 터키는 앙숙이 됐다.

하지만, 아무리 이들 부족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몬테네그로가 오토만 군대에 덤비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비슷했다. 이번에도 열강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1878년 맺은 베를린조약은 열강 간의 평화체제다. 다들 속이 빤한데, 어설픈 공작이 뽀록나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열강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전쟁 반댈세..가 열강들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에게는 다른 길이 있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 발칸의 이웃들이 그것이었다. 오토만 터키와 1대1로 붙을 깜냥은 안되지만, 다 같이 힘을 합치면 터키보다 군사력이 더 컸다. 마침 1911년 제국주의 발동이 걸린 이태리가 리비아로 쳐들어 갔다. 다급한 오토만이 여기에 군대를 투입하면서 발칸 전선이 엷어졌다.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 무슬림들이 봉기했다. 터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무슬림 알바니아에게 빼앗길 손가. 모처럼 마음이 맞은 발칸의 이웃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앞가림이 바쁜 오토만 터키에 똥침을 놨다. 바로 1912년 1차 발칸전쟁이다.

니콜라의 생각에는 승산이 있었다. 1870년대 헤르체고비나 봉기 때 다들 버벅거리는 가운데도 몬테네그로 만큼은 독야청청 상승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있었다.

이런 생각에 니콜라는 군대를 둘로 나눈다. 어차피 헤르체고비나는 버린 자식. 하나는 코소보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알바니아로 들어간다. 코소보의 최종 목적지는 프리즈렌Prizren, 세르비아 최전성기를 열었던 황제 두샨의 근거지다. 여기를 탈환하게 된다면, 페트로비치 왕조는 세르비아의 중심세력으로 우뚝 서게 된다는 계산이 섰다. 거기에 스쿠타리Scutari를 중심으로 알바니아 해변을 도모한다면 경제적인 기반도 넓힐 수 있다.

시나리오는 좋았는데, 연출이 꽝이었다. 코소보는 몬테네그로와 비슷한 산악환경이고, 알바니아계 무슬림 의병들이 터키군을 어느 정도 다듬어주는  바람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스쿠타리 공략은 평지의 대형 공성전이었다. 오토만 측에서도 일찍부터 요소요소에 기관총, 대포, 철조망을 달아놓고 철저히 대비해 놨다. 이런 곳을 뚫으려면 보급선을 차단하고 대포 등 근대적 무기의 지원을 받아 일사불란한 군사작전을 펴야 한다. 그런데 몬테네그로 군은 이런 대규모 작전을 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발이 묶였다. 게다가 목적했던 코소보의 프리즈렌은 세르비아군이 먼저 점령했다.

스쿠타리 인근 타라보쉬Tarabosh 고지에 휘날리는 몬테네그로깃발. 상처 뿐인 영광이다. 오토만 터키군이 이 고지에 대포와 기관총을 설치하는 바람에 갈길이 바쁜 몬테네그로군에는 막대한 피해를 줬다. 

어떻게 어떻게 세르비아군의 힘까지 빌어서 스쿠타리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열강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막대한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 가면서 들어간 성인데, 다시 내놓으라고 한다.  이걸 줘 말어.... 니콜라는 고민했다. 열강들의 눈에는 이런 니콜라가 계란 후라이하려고 집에 불지르는 철부지 같았다. 이번엔 러시아조차도 노발대발. 망설임 끝에 니콜라는 결국 철수를 선택한다.

어쨌거나 몬테네그로는 이번 전쟁에서도 승전국이다. 덕분에 땅은 넓어졌다. 하지만 전략적 목표는 뭐 하나 달성한 것이 없었다. 없는 살림에 칼춤 잔치 한번 벌렸더니 돌아온 계산서가 장난이 아니었다. 터키 놈들이나 다름없던 알바니아는 이제부터 독립국이란다. 다른 것은 다좋은데, 세르비아하고는 국경을 바로 접하게 됐다. 이게 스트레스의 근원이다.

1912, 1913 두차례에 걸친 발칸전쟁으로 또 다시 바뀐 국경.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모두 땅을 넓혔는데 아무래도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소득이 크다. 1차 전쟁 후 영토배분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는 한번 더 깽판을 부렸다가 집단 다구리를 당했다.

1914년 열린 선거에서는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정파가 정권을 잡았다. 국경 너머 세르비아의 왕은 다름아닌 사위 페타르다. 원래부터 데면데면했는데, 시집간 딸도 유명을 달리해서 지금은 더 서먹하다. 국경을 획정하는 협의에서도 사위네는 강퍅하게 굴지 않고 몬테네그로 쪽에 후하게 쳐줬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이것들이 나를 깔보나? 대세르비아의 꿈.... 그래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니콜라로서는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국제환경이 30년전과는 판이하게 바뀌었다. 고만고만한 작은 민족의 쟁투가 이어지면서 '발칸화'Balkanization이라는 말이 국제사회에 등장했다. 에디스 더햄Edith M. Durham같이 동시대를 겪었던 외국인사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몬테네그로의 동정자에서 극렬 비판자가 됐다. 몬테네그로는 30년전까지만 해도 오토만의 압제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숭고한 야만인'이었으나 이번 전쟁을 기점으로 '그냥 야만인'으로 바뀌었다.





2014년 1월 12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1 : 대세르비아는 나의 것

니콜라공이 동방위기의 틈을 타고 몬테네그로를 세계지도에 올린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878년 이전과 이후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달랐다. 오직 오토만에 대한 증오 만으로 국가성립의 동력을 삼았던 몬테네그로, 이런 변화를 깨닫고는 있었나?

1878년 이전까지 몬테네그로는 오토만 터키에 3면 포위된 형국이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북서쪽 헤르체고비나는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이 됐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여전히 오토만 땅이다. 하지만 같은 오토만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와 달랐다. 이제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알바니아. 스스로를 쉬칩타르Shqiptar라고 부른다(알바니아의 자칭 정식국명은 쉬치퍼리아Shqiperia). 오토만 터키에서 알바니아 출신 인재들을 많이 발굴하면서 인구의 상당부분이 17-18세기 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발칸의 다른 민족들이 서로 독립을 향해 달려가면서 거의 마지막까지 오토만의 신민 노릇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생각이 없었겠나?

오토만이 러시아에 깨지고, 서구의 열강들이 발칸의 국경을 새로 그리고 있던 1878년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이 코소보 프리즈렌에 모여서 그들만의 연맹League of Prizren을 발족했다. 술탄에게 청하노니, 알바니아 민족이 사는 비얄렛(오토만 행정구역)을 하나로 통일하고 자치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한참 정신이 없던 터키는 대충 알아듣는 척 만하고 깔아 뭉겠다. 1878년 이후 넓어진 몬테네그로 땅에는 알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이 편입됐다. 니콜라는 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겠다는 명쾌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알바니아 전사. '형제를 배반한적이 없고 적을 용서한 적이 없는' 싸나이 상남자의 모습이다.  알바니아 역시 몬테네그로와 비슷한 부족 중심의 사회로, 몬테네그로 못지 않은 마초사회였다.

또 하나 부각된 것이 있다면 세르비아와의 관계다. 동포 의식이 강했지만, 몬-세 양국의 정치리더들은 모두 자기만이 과거 세르비아의 영광을 재현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라이벌 의식이 싹트기 마련이다. 니콜라의 치세에 골치가 아팠던 것은 당시를 풍미하던 민족주의 탓에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공공연히 요구하는 몬테네그로인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의 통치스타일은 전제적 압제는 아니지만, 권위주의적인 건 사실이었다. 바깥문물을 접한 청년들이 몬테네그로 체제가 그런대로 입헌왕정체제를 잡아가는 세르비아에 비해 '구리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일부 세르비아 통일론자들이 니콜라 암살계획을 세웠다가 들통나는 일이 있었다. 세르비아보다 인구도 훨씬 적고 물산도 없는 몬테네그로 왕자 니콜라의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애증관계는 몇가지 개인적인 면모도 있다. 맏딸 조르카Zorka가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장자 페타르의 청혼을 받아 1883년 시집갔다. 후에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의 왕이 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장가갈 때만 하더라도 집도 절도 없는 낭인신세였다. 하지만, 페타르는 헤르체고비나 봉기 때도 자원해서 참가했던 열혈청년이었던 만큼,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장인에게는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니콜라는 이런 사위하고 살가워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오브레노비치 집안과도 친해지지 못했다.

1910년 즉위 때 쯤해서 찍은 니콜라 1세 가족사진.  3남 9녀를 낳았다. 딸들은 대부분 유럽/러시아의 대공들에게 시집보냈는데, 가장 큰 히트상품은 이태리의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에게 시집간 5녀 옐레나. 호사가들은 몬테네그로 최대수출품을 공주들이라고 하고 니콜라 1세를 '유럽의 장인어른'이라 칭했다.

어쨌거나 근대국가로 발돋음은 해야하니까 1905년 헌법도 만들긴 만들었는데, 촌사람 니콜라공에게는 영 마뜩치 않았다. 꼭 이런 게 있어야 돼? 골치가 아팠던 공은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910년 왕으로 즉위했다. 몬테네그로가 공국(Principality)에서 왕국(Kingdom)으로 승격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 보다 땅도 넓어지고 왕국도 됐다지만, 이때 인구는 20만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황실의 보조금 등 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왕실을 지킬 재정이 없었다. 터키놈들 몰아낸다고 무슬림들을 영토에서 쫓아냈더니 그나마 있던 장인이나 상인들까지 없어졌다. 한평생 전사로만 자라난 몬테네그로 남성들은 노동과 경제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몬테네그로의 지속가능성은 매우 취약했던 것이다.

왕이 된 니콜라는 결국 믿을 건 땅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는 항상 헤르체고비나를 노렸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아갈 방향은 오토만 지배하의 코소보와 알바니아 밖에 없다.

특히 코소보는 세르비아를 제국의 반열에까지 올렸던 네마냐 왕조의 중심근거지다. 여기를 지배하게 된다면, 세르비아에 뒤지지 않는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세르비아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몬테네그로. 정작 세르비아와의 라이벌 의식이 몬테네그로 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0 : 몬테네그로, 날다

뜻하지 않게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 다닐로는 아들이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조카 니콜라가 1860년 그 후계를 이어 니콜라 1세Nikola I가 됐다.
 
약관의 나이에 삼춘의 뒤를 이어 공의 지위에 오른 니콜라. 시운과 더불어 리더쉽으로 몬테네그로를 거의 세배 가량 키워놨다. 하지만, 결국 시운으로 인해 몬테네그로 최초이자 최후의 왕이 된다.

왕자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몬테네그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립된 나라도 아니고 자치령도 아닌 어중간한 지위였다. 선대인 다닐로가 몬테네그로 역사상 최초로 센서스를 실시해 본 결과, 그 인구가 8만에 지나지 않았다. 열강들과의 유대가 중요했다. 때문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번갈아 방문하는 한편, 초록동색 세르비아와는 조약을 체결했다.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각자 도모하는 것으로 입을 맞췄다.

얼마 안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1875년 바로 옆동네 헤르체고비나에서 가렴주구에 죽을 고생을 하던 기층민중이 봉기한 것이 보스니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1876년에는 불가리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오토만 총독들이 가혹하게 대응했다. 보다 못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황이 모여 한소리했다. 
'오토만 터키는 내정을 개혁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하지만 터키도 미칠 노릇이었다. 때마침 기왕의 술탄이 쫓겨나고, 신임술탄이 스트레스로 미쳐버리고, 결국 제3의 인물 압둘하미드가 술탄으로 옹립되는 등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문제Eastern Question가 위기Eastern Crisis로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1875년경 싸움에 나가는 몬테네그로의 전사들. 이 때 이미 몬테네그로인들이 헤르체고비나에서 의용병으로 활동 중이었다.  근대군의 모습은 아니지만, 용맹과격함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초에도 니콜라는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이때다 싶은 니콜라. 1876년 세르비아와 더불어 오토만에 선전포고하고 거병했다. 사나운 몬테네그로 전사들이 닉시치Nikšić, 포드고리차Podgorica, 울친Ulcinj 등을 함락시켰다. 몬테네그로의 무명이 다시 한번 만방에 드날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여기저기서 찌질이 노릇을 하고, 불가리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봉기가 진압당했다.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나 싶었지만, 오토만의 잔학한 처사를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가 움직였다. 러시아군은 터키군을 파죽분쇄하고 이스탄불 코 앞까지 내달았다.

터키는 자빠지고 강대국 간의 상호견제가 한번 있고 난 다음에 나온 유럽의 평화구도가 1878년 베를린 협약Treaty of Berlin이다. 이 때를 계기로 불가리아가 자치권을 인정받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

서구의 열강들은 누구할 것 없이 숫자는 적지만 자기보다 훨씬 큰 오토만의 뒷꼭지를 잡아 흔든 몬테네그로의 용맹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계관시인 테니슨Lord Tennyson이 몬테네그로를 기리는 시를 썼으니, 마이클 잭슨이 애국가 만들어준 격이다.

          Montenegro (1877)

                             Alfred Lord Tennyson

THEY rose to where their sovereign eagle sails,
They kept their faith, their freedom, on the height,
Chaste, frugal, savage, arm'd by day and night
Against the Turk; whose inroad nowhere scales
Their headlong passes, but his footstep fails,
And red with blood the Crescent reels from fight
Before their dauntless hundreds, in prone flight
By thousands down the crags and thro' the vales.
O smallest among peoples! rough rock-throne
Of Freedom! warriors beating back the swarm
Of Turkish Islam for five hundred years,
Great Tsernogora! never since thine own
Black ridges drew the cloud and brake the storm
Has breathed a race of mightier mountaineers.
니콜라공. 드디어 한껀 했다.

1878 년 베를린 조약 이후 넓어진 몬테네그로. 닉시치, 포드고리차, 바르, 울친, 자블략 등 평지의 주요 도시들이 이 때를 기해서 몬테네그로의 영토로 편입됐다.  게다가 바다로 나가는 길도 뚤렸다.  몬테네그로 입장에서는 고토회복의 순간이다.








2014년 1월 4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2 : 유고슬라브 뉴 웨이브 1 - Šarlo Akrobata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권 치고 드물게 록음악이 성했다. 프로그레시브, 펑크, 하드록 등 다양한 장르의 록음악이 나왔고 음악적 성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아주는 마냥 입안의 혀처럼 남모를 유고 청년의 고민을 대변하고 표현한 록의 하위장르가 있다면 단연 80년대 초 대유행한 뉴웨이브가 아닐까 한다.

왜 하필이면 뉴웨이브였을까?

우선 시운이다. 유고슬로비아 뉴웨이브(이 나라 말로는 Novi Val 또는 Novi Talas)가 본격화된 것이 80년대 초의 일이다. 80년은 유고 원맨쇼의 주인공 티토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개막했던 거물이 죽고 난 다음, 유고 사회는 놀랄만큼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도 한참 어려울 때다. 여기저기 실업율도 높아지고, 당연히 사회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이들 앞에 마침 뉴웨이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 나온 음악인 만큼 사회주의 체제비판적이거나 불만적인 가사가 많았다.

거기에 뉴웨이브 음악의 기본적인 특성도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유고슬라비아에는 블루스/컨트리 등의 록의 기본 자양 자체가 없었다. 뉴웨이브 같이 특별하게 천착해야할 역사도 없고 너무 과격하지 않으면서 만들기도 쉽고 듣기도 쉬운(적어도 그렇게 느껴지는..) 음악이 유고 도시 청년들의 감성에는 더 잘맞았던 것같다.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의 신호탄이 된 Paket Aranžman(패키지 딜이라는 뜻). 1981년 Jugoton 발매. 주로 펑크 음악에서 한 발 더 나간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장르 음악들을 담았는데, 베오그라드의 3두마차 밴드 Idoli (Idols), Šarlo Akrobata(Charles of Acrobat), Električni Orgazam (Electric Orgasm)의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쉽게도 절판이다. 당장은 유튜브에서 듣는 수 밖에는 길이 없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처음에는 서구에 대한 선망의식과 뽕짝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록을 시작했던 것은 유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유고의 뉴웨이브 밴드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Bijelo Dugme나 Riblja Čorba 등의 선배들을 '시골'록 이라고 폄하했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치고 나간다고 앞세대를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록의 고유한 변증법이 발현된 결과였다.

같은 뉴웨이브라고 하더라도 지역적인 특성이 없지는 않았다. 자그레브의 뉴웨이브가 Azra, Haustor, Prljavo Kazalište 등을 중심으로 좀더 대중적이고 멜로딕했다고 한다면 Idoli, Šarlo Akrobata, Električni Orgazam 등이 대표하는 베오그라드씬은 훨씬 더 전위적이고 리듬 중심적이었다.

유고의 뉴웨이브 밴드 중에서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존재는 샤를로 아크로바타Šarlo Akrobata다. 샤를로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유고사람들이 부르는 찰리 채플린의 애칭이란다. 그렇다면 밴드 이름의 뜻은 아크로바트하는 찰리 채플린 정도라고나 할까나?

밴드멤버. 왼쪽부터 기타 밀란 믈라데노비치Milan Mladenović, 가운데가 베이스 두샨 코야 코이치Dušan Koja Kojić, 오른쪽이 드럼 이반 브드 브도비치Ivan VD Vdović. 

기타, 드럼, 베이스 가장 단촐한 구성의 트리오지만, 가장 과격하고 실험적이었다. 특히 베이스 라인이 육중한데, 이건 아무래도 베이스를 담당했던 두샨 코이치(애칭 코야Koja)의 개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렇다고 밀란이나 이반이나 쉬운 성격은 아니었다.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Bistriji ili tuplji čovek biva kad'은 개성의 충돌이라고 할 만큼, 화려한 불협화음들이 가득 차있다. 그러나 같은 불협화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전위적/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청춘의 에너지 같은 느낌이다. 앨범 두번째 트랙 '애들 잘보시라'Pazi na decu I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괴성이 꼭 이런 느낌이다. 예컨대는 이런 거다. 밤 늦게 동네 굴다리나 한강 고수부지 같은 데를 지나가다보면, 고삘이 중삘이들이 모여 놀다가 씰데 없고 의미도 없는 괴성을 지를 때가 있다. 세상은 불가해하고,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고, 달리 풀어갈 방법도 없지만, 에너지만 남아돌아가는 청춘들의 자화상. 90년대 미국의 얼터너티브 붐이 청춘의 이유없는 열폭, 열패감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유고의 80년대 뉴웨이브도 그러한 느낌이 강하다.

위의 컴필 앨범에 수록되어있는 트랙 중의 하나, 내 머리 주위로oko moje glave. 트리오 멤버가 담당한 세 악기가 오직 리듬에만 복무하는 느낌이다.  화려한 애드립, 이런 거 없다. 그렇지만 악기 다루는 실력이 상당하다는 감은 강하게 온다.


개성이 강한 멤버들이 있다보니 밴드 활동 중 다툼이 심했다. 그 탓에 1981년 베오그라드의 다른 밴드들과 더불어 만든 컴필 앨범 Paket Aranžman에 이어, 독집 앨범를 발매하고는 해산했다.


코야의 회고에 따르면 독집앨범을 발표할 무렵에는 멤버들 간에 너무싸워서 이미 정이 다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앨범이 너무 늦게 나온 셈이라고나 할까. 발표한 앨범 자체가 별로 없다보니까 다른 밴드들이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베스트 앨범 격인 얼티밋 컬렉션 더블판을 발표해도 이 밴드는 그런게 없다. 애초에 더블 판을 채울 만큼의 노래도 없었거든.


유일한 방법이라면 리마스터 판을 내는 것인데, 발매사인 Croatia Records(유고슬라비아 록의 산실 Jugoton의 후신이다)가 2007년 반짝 박스세트로 재발매한 다음 다시 절판 상태다. 아쉬울 뿐이다.



81 년 나온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집 앨범 Bistriji ili tuplji čovek biva kad (사람은 이럴 때 똑똑해지거나 멍청해진다). 곡도 좋지만 뭣보다 놀라운 것은 에너지 레벨이다. 젊었을 때만 나오는 그런 레벨이다개인적으로는 수록곡 중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반 중의 명반이다. 이런 건 통째로 다 들어줘야 한다.  


헤어지고 난 후 멤버들 중 밀란과 이반은 에카테리나 대제Ekatarina Velika(EKV)를 구성해서 활동을 계속하다 90년대 각각 마흔도 못채우고 췌장암과 AIDS로 죽었다. 유일한 생존멤버인 코야는 Disciplina Kičme라는 리듬섹션으로만 만들어진 전위밴드를 만들어 요새도 음반을 내고 있다. (유고가 한참 어지러웠던 한 때 영국에서 활동한 덕에 밴드 이름을 Disciplin A Kitschme라고 고쳤다)

코야가 리드하는 Disciplina Kičme의 최신작 Uf!에 수록된 Ako ti je glasno(이게 너에게 시끄럽다면). 밴드 구성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강력/펑키하면서도 희한하다.  아무래도 샤를로의 아방가르드는 코야 담당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