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 다닐로는 아들이 없었다. 결국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조카 니콜라가 1860년 그 후계를 이어 니콜라 1세Nikola I가 됐다.
약관의 나이에 삼춘의 뒤를 이어 공의 지위에 오른 니콜라. 시운과 더불어 리더쉽으로 몬테네그로를 거의 세배 가량 키워놨다. 하지만, 결국 시운으로 인해 몬테네그로 최초이자 최후의 왕이 된다.
왕자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몬테네그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립된 나라도 아니고 자치령도 아닌 어중간한 지위였다. 선대인 다닐로가 몬테네그로 역사상 최초로 센서스를 실시해 본 결과, 그 인구가 8만에 지나지 않았다. 열강들과의 유대가 중요했다. 때문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번갈아 방문하는 한편, 초록동색 세르비아와는 조약을 체결했다.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각자 도모하는 것으로 입을 맞췄다.
얼마 안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1875년 바로 옆동네 헤르체고비나에서 가렴주구에 죽을 고생을 하던 기층민중이 봉기한 것이 보스니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1876년에는 불가리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오토만 총독들이 가혹하게 대응했다. 보다 못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황이 모여 한소리했다.
하지만 터키도 미칠 노릇이었다. 때마침 기왕의 술탄이 쫓겨나고, 신임술탄이 스트레스로 미쳐버리고, 결국 제3의 인물 압둘하미드가 술탄으로 옹립되는 등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문제Eastern Question가 위기Eastern Crisis로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1875년경 싸움에 나가는 몬테네그로의 전사들. 이 때 이미 몬테네그로인들이 헤르체고비나에서 의용병으로 활동 중이었다. 근대군의 모습은 아니지만, 용맹과격함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초에도 니콜라는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이때다 싶은 니콜라. 1876년 세르비아와 더불어 오토만에 선전포고하고 거병했다. 사나운 몬테네그로 전사들이 닉시치Nikšić, 포드고리차Podgorica, 울친Ulcinj 등을 함락시켰다. 몬테네그로의 무명이 다시 한번 만방에 드날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여기저기서 찌질이 노릇을 하고, 불가리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봉기가 진압당했다.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나 싶었지만, 오토만의 잔학한 처사를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가 움직였다. 러시아군은 터키군을 파죽분쇄하고 이스탄불 코 앞까지 내달았다.
터키는 자빠지고 강대국 간의 상호견제가 한번 있고 난 다음에 나온 유럽의 평화구도가 1878년 베를린 협약Treaty of Berlin이다. 이 때를 계기로 불가리아가 자치권을 인정받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
서구의 열강들은 누구할 것 없이 숫자는 적지만 자기보다 훨씬 큰 오토만의 뒷꼭지를 잡아 흔든 몬테네그로의 용맹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계관시인 테니슨Lord Tennyson이 몬테네그로를 기리는 시를 썼으니, 마이클 잭슨이 애국가 만들어준 격이다.
Montenegro (1877)
1878 년 베를린 조약 이후 넓어진 몬테네그로. 닉시치, 포드고리차, 바르, 울친, 자블략 등 평지의 주요 도시들이 이 때를 기해서 몬테네그로의 영토로 편입됐다. 게다가 바다로 나가는 길도 뚤렸다. 몬테네그로 입장에서는 고토회복의 순간이다.
약관의 나이에 삼춘의 뒤를 이어 공의 지위에 오른 니콜라. 시운과 더불어 리더쉽으로 몬테네그로를 거의 세배 가량 키워놨다. 하지만, 결국 시운으로 인해 몬테네그로 최초이자 최후의 왕이 된다.
왕자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몬테네그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독립된 나라도 아니고 자치령도 아닌 어중간한 지위였다. 선대인 다닐로가 몬테네그로 역사상 최초로 센서스를 실시해 본 결과, 그 인구가 8만에 지나지 않았다. 열강들과의 유대가 중요했다. 때문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번갈아 방문하는 한편, 초록동색 세르비아와는 조약을 체결했다.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각자 도모하는 것으로 입을 맞췄다.
얼마 안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1875년 바로 옆동네 헤르체고비나에서 가렴주구에 죽을 고생을 하던 기층민중이 봉기한 것이 보스니아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1876년에는 불가리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오토만 총독들이 가혹하게 대응했다. 보다 못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황이 모여 한소리했다.
'오토만 터키는 내정을 개혁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하지만 터키도 미칠 노릇이었다. 때마침 기왕의 술탄이 쫓겨나고, 신임술탄이 스트레스로 미쳐버리고, 결국 제3의 인물 압둘하미드가 술탄으로 옹립되는 등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문제Eastern Question가 위기Eastern Crisis로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1875년경 싸움에 나가는 몬테네그로의 전사들. 이 때 이미 몬테네그로인들이 헤르체고비나에서 의용병으로 활동 중이었다. 근대군의 모습은 아니지만, 용맹과격함은 누구 못지 않았다. 당초에도 니콜라는 국경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이때다 싶은 니콜라. 1876년 세르비아와 더불어 오토만에 선전포고하고 거병했다. 사나운 몬테네그로 전사들이 닉시치Nikšić, 포드고리차Podgorica, 울친Ulcinj 등을 함락시켰다. 몬테네그로의 무명이 다시 한번 만방에 드날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여기저기서 찌질이 노릇을 하고, 불가리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봉기가 진압당했다.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나 싶었지만, 오토만의 잔학한 처사를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러시아가 움직였다. 러시아군은 터키군을 파죽분쇄하고 이스탄불 코 앞까지 내달았다.
터키는 자빠지고 강대국 간의 상호견제가 한번 있고 난 다음에 나온 유럽의 평화구도가 1878년 베를린 협약Treaty of Berlin이다. 이 때를 계기로 불가리아가 자치권을 인정받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
서구의 열강들은 누구할 것 없이 숫자는 적지만 자기보다 훨씬 큰 오토만의 뒷꼭지를 잡아 흔든 몬테네그로의 용맹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계관시인 테니슨Lord Tennyson이 몬테네그로를 기리는 시를 썼으니, 마이클 잭슨이 애국가 만들어준 격이다.
Montenegro (1877)
니콜라공. 드디어 한껀 했다.Alfred Lord Tennyson
THEY rose to where their sovereign eagle sails,
They kept their faith, their freedom, on the height,
Chaste, frugal, savage, arm'd by day and night
Against the Turk; whose inroad nowhere scales
Their headlong passes, but his footstep fails,
And red with blood the Crescent reels from fight
Before their dauntless hundreds, in prone flight
By thousands down the crags and thro' the vales.
O smallest among peoples! rough rock-throne
Of Freedom! warriors beating back the swarm
Of Turkish Islam for five hundred years,
Great Tsernogora! never since thine own
Black ridges drew the cloud and brake the storm
Has breathed a race of mightier mountaineers.
1878 년 베를린 조약 이후 넓어진 몬테네그로. 닉시치, 포드고리차, 바르, 울친, 자블략 등 평지의 주요 도시들이 이 때를 기해서 몬테네그로의 영토로 편입됐다. 게다가 바다로 나가는 길도 뚤렸다. 몬테네그로 입장에서는 고토회복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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