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유고 삼국지 7 : 사면초가 백색작전

빨치산이나 체트닉이나 42년 내내 쫓겨 다니느라 바빴다. 우스타샤는 쫓겨다닐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뭐 하나 속시원히 정리해 놓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풀이 같은 이들의 폭주는 빨치산과 체트닉 운동을 키워주는 효과를 냈다. 그 결과 우스타샤의 실질적인 통치권역은 NDH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자그레브에 파견된 독일군수뇌부는 우스타샤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시키지 않은 분란을 만들어 놓은 엑스멘, 고문관에 다름이 아니었다. 누가 용기를 내서 총통에게 우스타샤와 파벨리치를 내치자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순수'를 사랑하는 총통, '순결'을 지향하는 꼴통들과 통하는 데가 있었다. 결과는 꽝이었다.

이 상황에서 2차대전의 향배가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내둥 밀리던 영국군이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발목이 잡혔다. 41년 여름, 독일에 징한 똥침을 맞았던 스탈린은 당초부터 처칠에 유럽에서 '제2전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대충 유고군을 대표하는 미하일로비치를 띄우는 것으로 퉁쳤던 영국이 드디어 그 제2전선을 만들 수 있는 계제에 도달한 것이다. 처칠이 모락모락 연합군 발칸상륙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칸은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Soft underbelly of Europe'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발칸을 치고 들어가면 독일과 이태리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1942년 유럽의 전황도. 나찌 독일의 절정기이기도 하다. 일부 몇나라를 제외한 전유럽을 석권했다. 발칸의 소요를 생각하면 처칠이 생각한 '하복부론'이 설득력을 가진다. 발칸이 하복부면 이태리는 X인가? 자료원 : wikimedia

그게 42년말의 이야기다. 전황이 이렇게 흐르자 나찌 독일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발칸을 안돈하기 위해서 저항세력을 조속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계산 속에서 독일은 일단 보스니아의 골치꺼리 빨치산을 소탕하기로 한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이다. 43년 1월 이태리군이 남쪽, 독일군과 우스타샤가 북서 방면에서 빨치산의 근거지 비하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누군가. 도망의 달인 아니던가. 포위섬멸을 피해서 일단 남동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름 급했다.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급하게 날렸지만, 소련이라고 당장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알아서 잘 살라'가 답이었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대장정을 거치느라 나온 부상병들까지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독일 주도 '백색작전'으로 인해 네레트바강을 건너 몬테네그로로 들어가는 빨치산 퇴로. 비하치에서 다시금 남동방면으로 내려가니 바로 작년에 왔던 길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피같은 고도'라는 말을 쓰는데, 빨치산들에게는 '피같은 위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차제에 미하일로비치도 머리가 복잡해 졌다. 어떻게든 지금 공산당 세력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발칸의 유일한 저항세력이자 해방자로서 포지셔닝이 불가능하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발칸에 상륙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동부, 몬테네그로, 달마시아의 체트닉분대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네레트바 강 건너에서 빨치산을 기다렸다. 빨치산을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덫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체트닉들에게는 오히려 함정이 됐다. 사학자 스테반 파블로위치Stevan Pavlowitch는 체트닉과 점령군의 동침이 '우연한 일'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작전 때 나찌는 빨치산 뿐만 아니라 체트닉 부대도 같이 소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적 선택으로 체트닉에게는 나찌/파시스트들과의 내통 혐의가 붙었다.

우연이건 아니건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멸을 면하는 것이 목표다. 헤르체고비나를 갈라 남쪽으로 흐르는 네레트바강의 서안에 도착, 어떻게 어떻게 잡은 고위 독일군 포로를 미끼로 나찌와의 협상에 들어간다. '체트닉 때문에 힘들지? 우리가 정리해 줄까?', '만약 영국이 발칸에 상륙하고자 하면 우리가 혼내 줄께'. 이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덕에 5-6주를 벌었다. 독일한테는 배수의 진을 치듯이 보이려고 네레트바강의 다리를 부러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끊어진 다리 사이사이로 잔도를 만들어, 병력을 차곡차곡 서안으로 옮겼다.


독일의 '백색작전'으로 나온 빨치산의 도망담은 1969년 '네레트바강 전투'bitka na neretvi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율브린너, 오손웰즈, 프랑코 네로, 하디 크루거, 세르게이 본다르축 등 호화 출연진에도 불구, 영화의 질은 여느 관제영화와 마찬가지로 영 꽝이다. 빨치산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부상병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결과적으로 지연/기만전술은 먹혔다. 병력의 대부분을 네레트바강 동안으로 옮기고, 기다리고 있던 체트닉들의 저지선을 깨고 들어갔다. 장비가 우월한 독일이나 이태리군에 비하면 기율도 없고, 코디네이션이 안되는 체트닉들은 훨씬 만만한 적이었다. 티토의 주력이 몬테네그로 산중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린 것은 그해 4월의 일이다.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구유고의 음악 16 : 슐라게르 또는 샨손 - Adult Contemporary 장르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서구식 어덜트 컨템포러리 장르도 번성했다. 보통 슐라게르Šlager 또는 샨손Šanson이라고도 일컫기도 한다. 샨손은 프랑스의 샹송에서 온 건 알겠는데, 슐라게르는? 독일어의 Schlager다. 뭔가 찾아봤더니 Hit라는 뜻이란다. 히트송, 한마디로 유행가 되겠는데, 주로 서구형 발라드 또는 어덜트 컨템포러리물들이다. 이 장르에서 유고를 대표하는 인사라고 한다면 크로아티아의 아르센 데디치Arsen Dedić, 드라고 디클리치Drago Diklić에서 부터 세르비아의 조르제 발라셰비치Đorđe Balašević 등이 주옥같은 발라드를 많이 만들었다. 누구는 슐라게르, 누구는 샹송, 누구는 칸쪼네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노래를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짠한 노래는 드라간 스토이니치Dragan Stojnić가 부른 '내맘은 또다시 너만을 꿈꾼다'I opet mi duša sve o tebi sanja다. 보스니아 대시인의 알렉샤 산티치가 지은 시 3수를 교묘히 섞어서 하나의 노래로 만들었다. 알렉사 샨티치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 수작으로, 가사를 음미할 수 있다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왼편이 노래를 부른 스토이니치, 오른편이 본의아닌 작사가 알렉사 샨티치. 원래는 90년대 초에 방영된 TV시리즈 '내 형제 알렉사'Moj brat Aleksa 수록곡이다 . 스토이니치는 불어를 전공해서 주로 샹송 장르를 소화한 발라드 가수다. 샨티치와 같이 보스니아 출신이다.

I opet mi duša sve o tebi sanja
I kida mi srce i za tobom gine.

Što te nema , što te nema , što te nema

Bog zna gdje si sada i da l' živiš jošte!
Ali dragi spomen negdanje milošte
Kao mlado sunce svu mi dušu moju grije

I ja snova cujem zveket tvojih grivna,
Po licu me tice tvoja kosa divna,
Dok mjesec kroz vrbu cisto srebro lije.

Što te nema , što te nema , što te nema

내 맘은 또다시 너만을 꿈꾼다
단장은 끊어지고 너는 더욱 생각나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네가 어딨는지 아니 살아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언젠가 아름다웠던 너와의 기억이
마치 젊은 태양처럼 나의 마음을 달군다

꿈속에서 너의 팔찌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내 얼굴엔 당신의 풍성한 머리결이 닿고
달은 버드나무 새로 순결한 은빛을 쏟는다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왜 너는 여기 없는가,
가사만 본다면 닳고 닳은 유행가겠지만, 이 시가 나온 때는 100년 전 보스니아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내 얼굴에 니 머리결 닿듯이' 훨씬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지켜보면 이런 정조는 보스니아 시가Sevdah의 전통에 이미 잘 살아 있었다. 샨티치가 접하고 살았던 무슬림들의 러브송들의 가사에는 사랑에 대한 찬미, 못이뤄진 사랑에 대한 절망, 예상외의 외설까지 사랑과 관련된 풀 스펙트럼이 들어있다. 샨티치는 그것을 자신만의 '근대'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발라드 장르가 주로 이런 알캉달캉/씁쓸짭쪼롬한 사랑 이야기를 재생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조르제 발라셰비치의 88년 발표작 부른 레퀴엠Rekvijum은 재미있는 예다. 이 노래는 80년대 말 각 공화국내 민족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어지러워진 사회상황을 마치 티토에게 일러바치듯 불러낸 노래다. 이 노래는 유고슬라비아의 파국가 불안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아니면 당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로 꺼낸 것이 그였을 수도 있겠다.

조르제 발라셰비치의 시대만가Rekvijum. 발라셰비치는 90년대에도 반전, 정치비판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했지만,  권력이 장악한 방송계가 노래를 틀어주지 않는 바람에 한참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의 노랫말에도 등장하지만, '씹X 90년대'jebite se devedesete가 아닐 수 없었다.
Kad god prođem ulicom sa tvojim imenom
Pomislim na onu pesmu...
Već je godinama ne pevam,
Stari refren nikom ne treba.

A ljudi pesme kratko pamte, Komandante...

Ostaće u knjigama i priča o nama:
Balkan krajem jednog veka.
Svako pleme crta granicu.
Svi bi hteli svoju stranicu...

Tope se snovi kao sante, ej Komandante...

Na barikadama su opet zastave,
Svet ide k'o na praznike.
I decu izvode s jutarnje nastave
Da vide gladne radnike...

A gde smo mi, naivni,
Što smo se dizali na "Hej Sloveni"?
Kao da smo uz tu priču izmišljeni...

Vremena su nezgodna za momka kao ja
Koji gleda svoja posla...
Nisam lutak da me naviju.
Imam samo Jugoslaviju...

Sve druge baklje bez mene plamte, e Komandante...

I svi su tu da dobiju na toj lutriji...
Na barikadama su uvek najbrži,
Al' nikad i najmudriji.

A gde smo mi, naivni,
Što smo se dizali na "Hej Sloveni"?
Kao da smo uz tu priču izmišljeni...

I prevareni...

Kad god prođem ulicom sa tvojim imenom
Pomislim na Panta rei...
Baciće se, tako, neki lik
Kamenom i na tvoj spomenik.

Jer sve se menja, i sve teče... čoveče.
Jer sve se menja, i sve teče... čoveče.

당신 이름이 걸린 거리를 걸을 때 마다
그 노래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부르지 않은지도 꽤 오래
오래된 후렴구는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사령관 동지, 사람들은 노래를 짧게만 기억할 뿐입니다.

책과 이야기들에는 이렇게 남을 것입니다;
발칸, 세기말을 맞아
모든 족속들이 국경을 그리고
모두가 자신만의 페이지를 원하다
마치 빙산처럼 가라앉았다고 말이지요... 사령관 동지
바리케이드에는 다시 깃발이 올라서고
모두가 마치 휴일인 듯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오전수업 마치고
배고픈 근로자들을 보고 있을 뿐...

아, 우린 어디에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헤이 슬라브여'를 부르면서 우리가 쌓아올린 것은 무엇이었나요.
마치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라도 한것 처럼

이 시대는 제 앞가림이 급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불편합니다.
나는 누가 감아줘야 움직이는 태엽인형이 아닙니다.
유고슬라비아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서는 나말고 모두 휏불을 들고있습니다, 사령관 동지

사람들은 일확천금의 복권에 혹하고
바리케이드에는 가장 잽싼놈들만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지요.

아, 우린 어디에 있나요, 아무 생각없이,
'헤이 슬라브여'를 부르면서 우리가 쌓아올린 것은 무엇이었나요.

마치 없던 거짓말이라도 만들어내기라도 한것 처럼

당신 이름이 붙은 거리를 걸을 때 마다
'모든것이 흐른다'(Panta rei)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어떤 놈들은 당신의 동상에도
돌을 던질겁니다.
2014년 어느 때인가 자그레브 리신스키 극장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웬 줄을 이렇게 섰나 싶더니, 그게 발라셰비치의 콘서트 표를 구하는 줄이었다. 이 양반은 한번 콘서트를 열면 4시간이 넘는 공연으로 유명한데 그게 노래 중간 중간에 만담까지 섞어가면서 청중을 즐겁게 하기로 유명하다. 53년생이니까 이제 환갑을 넘었는데, 아직 왕성하다. 발라셰비치는 원래부터 티토를 숭모해서 젊었을 때 부터, 그에게 헌정하는 찬가를 여러곡 만든 바 있다. 아부꾼 취급을 받을 법도 한데, 이와는 관계없이 전 구유고지역에서 아직 인기가 높다.




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6 : 거래와 대장정

41년 겨울 공세를 기점으로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를 전전하다 이듬해 5월 몬테네그로 체트닉들의 거점으로 옮겼다. 도착하고 보니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신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체트닉들이 점령군인 이태리군과 오손도손 공생관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42년 몬테네그로에서 미하일로비치. 왼쪽의 인사는 영국 특작대(Special Operations Executive, SOE) 소속 빌 허드슨 Bill Hudson 대위다. 영국은 41년 9월 허드슨 요원을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했다. JVO가 망명정부 하의 '합법적' 저항군이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비치는 자신이 연합군의 일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태리군, 지긋하게 말안듣는 몬테네그로를 혼자서 다스리자니 막막했다. 이태리의 원래 생각은 이랬다. 몬테네그로를 일단 독립시키고 이태리의 보호령으로 관리해주면 그럭저럭 지나가지 않겠는가라고.... 그러나 몬테네그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일로 자존심 상한 몬테네그로 마초들이 41년 봉기를 일으켜, 이태리군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몬테네그로의 꼴마초들, 과거 세기때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사람을 잡으면 반드시 신체를 훼손하는 버릇이 남아 있다. 코나 목이 없는 시체들을 보니 이태리군도 꼭지가 돌았다. 일단 봉기세력은 가혹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독일군 처럼 두당 몇명 식의 보복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협력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파시즘의 철천지 원수니까 무시하기로 하고, 체트닉들과 손을 잡기로 한다. 체트닉들도 쌀한톨 안나오는 산속에서 지내자니 아쉬운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태리가 도와준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달라 붙었다. 이런 거래관계가 성립됐다. 체트닉들에게 탄약과 식량을 대주는 대신 공산당을 같이 몰아내고 더 이상 이태리군에 딴지걸지 말기. 도시지역은 이태리군이 시골지역은 체트닉들이 접수.

우리가 너무 다정했나? 이태리 장교와 사진을 찍은 사람(왼쪽)은 달마시아 지역의 체트닉 대장 몸칠로 주이치Momčilo Đujić. 이태리군과의 공생관계는 살자고 하는 짓이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는 책잡힐 행동이었다. 직할대도 없고, 나눠줄 물자도 없는 미하일로비치로서는 이런 거래를 막을 수 없었다.

이런 관계는 몬테네그로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달마시아, 헤르체고비나, 이태리군이 진주한데서는 비슷한 거래관계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이태리군 점령지역에서는 세르비아인들에 더해서 덤으로 유태인들까지도 이태리군의 보호를 받게 됐다. 좋은게 좋았던 이태리인들, 아무리 파시즘 파트너이긴 하지만 나찌독일이 무슨 억하심정에 사람을 저리 험하게 대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덕분에 이태리군 진주지역은 유고 여타지역에 비해서는 개중 상황이 나았다는 평을 듣는다.
 
명색이 연합군의 일원인 미하일로비치는 이런 상황이 불만이었지만, 체트닉 대장들을 대놓고 면박하질 못했다. 살자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체트닉 대장들은 게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보니, 우스타샤들의 폭주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의 보복을 추진하다보니 중간에 낀 무슬림들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거래나 행동 방식은 나중에 심각한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

42년 1월 보스니아 동남부 포차Foča에 똬리를 튼 공산당. 아무래도 세르비아에서 제대로 된 민중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게 찝찝했던 지도부는 여기서 향후 봉기의 방향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즉 투쟁의 성격을 인민해방운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런 개념까지 정립한 것은 좋았는데, 또 독일군, 우스타샤, 이태리군이 압박해 왔다. 일단 살아야 한다. 5월에는 포차에서도 쫓겨나와 목표를 보스니아 북서부 비하치Bihać로 잡았다. 논리적으로 거기 밖에 없었다. 일단 독일군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만만한 체트닉이나 우스타샤를 주로 상대하면서 NDH 치하 보스니아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행정공백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대장정도. 지도 우측 하단 포차(네모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좌측 상단의 비하치(네모안)까지의 장정로. 붉은색 화살표가 빨치산들의 행로인데, 행군이라기 보다는 거의 관운장 오관돌파다. 관우? 이 같은 유사경험이 있어서였는지, 중국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와 할 말이 많았다. 요새도 중국 외교관들이 티토의 고향인 쿰로베츠Kumrovec를 곧잘 들린다고한다. 자그레브에서 그리 멀지않다.

이태리군과 독일군/우스타샤 간의 공백지대를 절묘하게 타고 북서쪽으로 걸어나갔다. 이것이 속칭 유고판 대장정이다. 총 이동거리는 300km에 지나지 않았지만, 컨셉이나 목적 자체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과도 거의 동일했다. 산악지역을 타고 나가면서 보급도 해결해야하니까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빨치산 개념 자체가 지역을 기반한 것이 아니니까, 부상자까지 데리고 다녀야 한다.

천신만고의 개고생이었지만, 이 대장정은 하나의 자산이 됐다. 특히 일반대중들에게 스스로를 부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산당 지도부가 초기의 극좌적 오류를 시정하고, 점령군이나 우스타샤, 체트닉 세력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스타샤들이 하도 분탕질을 치고 체트닉들의 가차없는 보복작전 바람에 잠재적 빨치산들은 차고 넘쳤다. 당초에는 세르비아계가 주축이었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유태계, 크로아티아계나 무슬림계들이 빨치산들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면에서 대장정은 인민해방전선의 실질적 모태가 됐다.

그래서 목적지 비하치에 도착한 것이 42년 11월. 일단 한숨 돌리고 난 다음, 티토는 '뭔가 정부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대표들을 소집해서 11월 26-27일,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인민해방위원회Antifašistički veće/vijeće narodnog oslobođenja Jugoslavije (AVNOJ)를 구성했다. 혁명은 일단 잊고 침략자에 맞서 싸우자는 결사체다. 이에는 이전 농민당, 세르비아계 민주당, 무슬림 조직등의 대표가 54명이 모였다. 정부까지는 아니지만 해방운동 세력의 대표기구가 됐다. 티토 그 자신은 이 자리를 빌어서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 최고 사령관이 됐다.  이 때가 빨치산들에게는 속칭 '비하치 공화국' 체제다.

비하치에서 열린 1차 AVNOJ회의. 상단에 쓰여있는 글씨는 '파시즘에 죽음을, 인민에게 자유를'smrt fašizmu-sloboda narodu, AVNOJ의 공식 구호였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5 : 41년 겨울, 패주의 길

공산당과 체트닉. 침입자에 항거한다는 면에서 존재의의는 같았지만, 현실인식, 전술, 전략, 비전 등에서 달라도 너무 달랐다. 41년 9월과 10월 양대세력의 지도자, 미하일로비치와 티토는 두번에 걸쳐 만난다. 같이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만나도 뭔가 앗쌀하게 투합되는 것은 없었다.

미하일로비치는 독일의 징벌적인 보복전략도 있고, 이웃 NDH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인종청소, 불가리아, 헝가리 등으로 할양된 지역에서 쫓겨나는 세르비아인들을 보고 전례없는 민족절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고 느꼈다. 지금 단계에서 맞서 싸우다가 진짜 멸종을 당하는 것보다는 일단 연합군이 다시금 승기를 잡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  망명정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세르비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41년 9월 유고 전역의 봉기지도. 붉게 표시된 지역이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체트닉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공산당 봉기지역의 상당부분은 체트닉과 겹쳐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이 때 당시만 해도 체트닉과 공산당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지 않았다.

티토는 생각이 달랐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 소련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소련의 즉각적 승리를 믿었던 그로서는 지속적인 후방교란을 통해서 소련의 승리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슬림, 크로아티아까지 포괄한 유고슬라브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했다. 망명정부? 그딴 거 관심없음.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큰데다, 양대 세력의 중간보스들 간의 경합의식도 강했다. 언제든 상대편을 쓸어버리고자 하는 강경파들이 곳곳에 포진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독일의 징벌적 토벌작전이 시작되면서 양자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져 버리게 되어, 독일의 토벌작전과 더불어 양자 간의 교전까지 일어난다.

여기에 초기의 티토는 한가지 더 실수를 했다. 혁명까지 생각하다보니 계급의 적까지 처단해야 했는데, 이게 민심을 더 이반시켰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별로 없는 나라에서 무슨 사회주의 혁명이겠는가. 일단 또아리를 튼 우지체가 지역의 경제중심지이긴 하지만, 그 주변지역 주민 대부분은 '왕과 조국'을 믿는 순진한 소농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하는 사상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이 41년 11월 25일. 티토의 빨치산들이 어떻게든 버텨보려다 결국 우지체를 떠나기로 한 것이 11월 29일의 일이다. 꼼짝없는 패주의 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운명은 티토만 겪은 것은 아니다. 12월초에는 미하일로비치가 가까스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같은 패주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티토는 41년 12월 산작지방Sandžak에서 언제 어디서든 싸울 수 있는 기동군,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prva proleterska udarna brigada을 만들었다. 이 상시군들을 데리고 그대로 보스니아로 들어갔다.

제1프롤레타리아 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콘스탄틴 '코차' 포포비치Konstantin Koča Popović. 세르비아 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법을 전공한 인테리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였다. 티토와의 인연은 1936년 스페인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내전 당시, 티토가 유고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참여시키는 알선책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고산 스페인 내전 베테랑들은 나중에 빨치산 지휘부의 중핵을 차지하게 된다.

체트닉은 이게 안됐다. 일단 미하일로비치가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때는 주위에 달랑 참모들 몇명 밖에 없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체트닉 조직이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방위조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애도 봐야 하고, 소도 키워야 하는 관계로 살던 동네를 떠나기 싫다. 41년 겨울 나찌 독일의 공세를 겪으면서 미하일로비치가 거느리던 체트닉들은 투항하거나 아니면 '합법화'의 길을 걸었다.

합법화된 체트닉? 미하일로비치가 라브나 고라에서 만든 군사조직에 체트닉 분대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체트닉과 관련된 상표권을 등록한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저항조직으로서 체트닉도 있었지만, 세르비아에는 괴뢰정부, 점령군과도 협력하는 '합법' 체트닉이 있었다. 괴뢰정권의 수장 네디치Nedić는 미하일로비치 잔당에게도 비슷한 기회를 줬고, 여기에 다수의 저항 체트닉들이 포섭됐다. 미하일로비치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부하들이 이렇게 합법화되는 것을 부러 막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괴뢰정부에 침투하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미하일로비치는 2차대전 내내 직할 부대가 없었다. 도망다닐 때도 항상 몇명의 참모와 스탭들 뿐이었다. 일단은 각 지역에 웅거한 체트닉 대장들을 망명정부가 인정한 군사령관인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하일로비치는 몬테네그로 산악지역으로 숨어든다.




2014년 3월 9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15: 나는 록스타 Bijelo Dugme

60년대 선구적인 밴드들의 뒤를 이어, 70년대는 록밴드들이 쏟아져 나타나기 시작했다. 팬덤도 커진 것은 물론이다. 봉황이 한마리 나오려면 닭이 천마리 있어야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록스타가 나타났다.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다.

비옐로 두그메 초기시절 모습.  중앙에 폼잡고 있는 사람이 베벡, 고란 브레고비치는 맨 왼쪽에 있다. 이 사진에서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태도다. 불량끼+쇼맨십이 넘치는 이 밴드를 전유고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비옐로 두그메는 197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결성된 5인조 밴드다. 밴드의 중심축은 아무래도 젤코 베벡Željko Bebek(45년생, 보컬)과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50년생, 기타). 베벡이 69년에 고란을 꼬셔서 이태리 등지에서 밴드활동을 하다가  74년에 비옐로 두그메로 까지 연결이 된 것이다. 

초기에 사라예보의 레이블 디스코톤Diskoton이 뻣뻣하게 나와서 자그레브의 유고톤Jugoton과 계약을 했는데, 디스코톤 입장에서는 유고 팝음악 역사상 최대의 패착을 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1974년부터 1989년 해체 때까지 비옐로 두그메가 내는 앨범들마다 적어도 기십만장씩은 팔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차분했던 유고 록 씬에서 이들은 록스타로서의 아우라와 태도로 록스타처럼 행동했던 최초의 밴드라고 할 수 있겠다.

1978년(79년?) 인민해방군 스타디움 공연 모습. 미쳐날뛰는 청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히 유고식 아레나 록이라 할 만하다. '내 자동차 뒷좌석에서' Na zadnjem sjedištu moga auta.  눈치를 챈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가사 내용도 약간 19금적 암시가 있다.

비옐로 두그메의 음악을 두고 유고의 평론가들은 '양치기 록'Pastirski rok(목가록, 전원록...)이라고들 평한다. 포크송적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데뷔 앨범을 들어보면, 딥퍼플이나 레드제플린 등의 서구 록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사의 세팅은 '시골'이다. 예컨대는 노래 가사 중에는, '당신과 놀기 위해서라면, 집도 팔고, 영혼도 팔고, 말도 팔고..(말?)', '내가 하얀단추라면... 당신과 붙어있는 것을 동네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고...', '동네에선 날 주정뱅이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어쩌라고?'...

후기로 갈수록 포크송의 영향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세팅뿐만 아니라 테마자체가 음악에 활용되는 빈도가 점점 많아진다. 이 같이 유고록의 중심점에 올라선 비옐로 두그메는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에게는 하나의 귀감이자 극복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잠들지 말아요, 그대여,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엔..'Ne spavaj, mala moja, muzika dok svira. 데뷔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분위기 띄우는데는 딱맞는 락커빌리 넘버로, 베벡의 금속성 목소리하고도 잘 맞는듯 하다.

도시적 감성을 지향하는 후배 밴드들은 두그메의 노래들에 대해서 '가사에 양들이 나오고, 백살까지 산다는 둥'의 가사가 뭔소린질 모르겠다고 대놓고 깠다. 하지만, 사실 당대는 물론 후대의 유고 록음악에서 비옐로 두그메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아마 인기라는 척도로 비교가능한 밴드로는 세르비아의 리블랴 쵸르바Riblja Čorba를 들 수 있겠지만, 시대를 열어간 것은 아무래도 두그메로 봐야할 것 같다. (쵸르바 역시 두그메와 더불어 양치기 록으로 레이블링되기도 한다)

여느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비옐로 두그메의 활동 역시 1991년 유고 내전을 끝으로 거의 해체가 확실해 졌다. 크로아티아계 출신인 베벡은 83년에 밴드를 떠나서 솔로커리어를 추구하다가 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 살고 있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베벡이 없는 가운데 밴드를 끝까지 이끌다가, 결국  밴드 해체 후 지금은  주로 세르비아에서 활동하면서 현재는 발칸을 대표하는 뮤지션이 됐다.  


포크송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들어간 넘버로 대중적인 호응도 많이 끌어낸 비옐로 두그메 곡으로는, 역시 '성조지의 날'Đurđevdan(또는 에데를레지)을 들 수 있다. 1988년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향후 고란의 음악적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참 이때의 보컬은 알렌 이슬라모비치Alen Islamović인데, 2005년 밴드 재결성 공연인 듯 하다.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4 : 맞고만은 못살아서 일으킨 봉기

독일군이 유고를 신속하게 정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국을 장악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군대는 하나의 결집된 폭력집단일 뿐이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잘조직된 행정체계와 경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없었다. 점령된 유고에는. 그게 다 빈틈이 됐다.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까지 끼워넣어서 명목상으로 '독립'까지 시켜줬지만, 세르비아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군이 주둔하면서 직접 챙겼다. 그렇다고, 직접 다스리자니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려 끝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 유고 침공 후 넉달이 지난 8월 때의 일이다. 정부라고 세우긴 세웠지만, 국제법상으로 아무런 의의와 자격도 없는 하수인 집단이었다. 이러다 보니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 비해서도 빈틈이 더 컸다.  이 빈틈을 타고 반항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트닉과 공산당이다. 유고 침공 이후 공산당이 본거지를 자그레브에서 베오그라드로 옮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구 유고군 출신 드라골륩 드라쟈 미하일로비치가 보스니아 주둔지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세르비아의 라브나 고라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 1941년 5월의 일이다. 독일군의 세력이 닿지 않은 고원지대에 웅거하면서 조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조국군Jugoslovenska vojska u otadžbini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자타 공히 회자된 명칭은 역시 체트닉이다. 미하일로비치의 활동은 진작에 망명정부에 보고가 되고 마침 9월 달에는 런던에 임시정부를 차린 왕가와도 무선교신이 닿았다. 독일과 힘겨운 싸운을 벌이던 영국으로서도 천군만마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처음으로 나온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1월에는 BBC가 방송으로 미하일로비치가 국방군의 사령관임을 지목했다.

마을을 시찰하는 미하일로비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행색 자체가 세르비아 농촌의 가치관을 대변했다. 별명도 '드라쟈 아저씨'다. 추종자들의 애착이 묻어나는 별명이다. 세르비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망명정부와와 영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미하일로비치에게도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저항을 할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는 전면적 맞짱은 불가능하고, 철도, 통신 등 사보타지다. 미하일로비치도 영국이 군수품만 제대로 보급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한편 또다른 세력이 저항운동에 등장했다. 유고 공산당Komunistička partija Jugoslavije이다. 원래부터 활동이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조직 재정비의 필요가 없었다. 진작에 독일에 저항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941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독일과 소련이 '강철'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본격 저항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이 소련을 처들어간 6월의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산당은 정치국을 고스란히 군 사령부로 바꿨다.

빨치산 부대 시찰 중인 티토. 허름하고 수염까지 길렀던 미하일로비치와 달리 말끔한 면도에 멋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자신은 물론 동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숨어다니는 와중에도 말끔한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였다.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베오그라드에 있던 공산당 수뇌부는 6월 소련 침공 직후 전국적인 봉기를 결의하고, 각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각 지역으로 수뇌부를 파견했다. 8월에는 티토가 직접 세르비아 남부에 설치된 본부로 내려갔다. 남서부의 상업도시 우지체Užice를 접수해서 해방구로 삼았다. 스스로 총도 만들고 돈도 찍어냈다. 이 때가 바로 '우지체 공화국' 국면이다.

무장봉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양자간의 무력 격차가 너무나 컸다. 대신 철도 사보타지는 나찌독일을 엿먹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철도는 구리, 보크사이트, 납 등의 광물을 독일로 옮기거나, 군수품,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기가 여기저기서 일어나자 나찌독일 역시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군사력을 보충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있다보니, 손이 모자른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독일군이 생각해 낸 전략은 처절한 보복이다. 공포감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뜻이겠다. 독일군 사상자 한명에 100명, 부상자 한명에 50명을 처형하겠다고 애초부터 공표했다. 10월 중순 크랄례보에서 체트닉과 빨치산 공동작전으로 독일군 10명이 죽고 14명이 다쳤다. 그러자 그 근방에서 1,700여명을 처형했다. 같은 시기에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 사상자가 기십명 나오자 또 2,800명 가량을 죽였다. 

41년 10월에 크라구예바츠에서 일어난 학살극. 이 사진은 독일군 장교가 '어? 쟤는 안죽었는데?'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2차대전 때 구유고 각지에서 일어난 세르비아인들의 뇌리에 깊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남겼다.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그런데 빨치산이나 체트닉에게는 이번 시험문제가 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달랐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