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이나 체트닉이나 42년 내내 쫓겨 다니느라 바빴다. 우스타샤는 쫓겨다닐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뭐 하나 속시원히 정리해 놓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풀이 같은 이들의 폭주는 빨치산과 체트닉 운동을 키워주는 효과를 냈다. 그 결과 우스타샤의 실질적인 통치권역은 NDH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자그레브에 파견된 독일군수뇌부는 우스타샤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시키지 않은 분란을 만들어 놓은 엑스멘, 고문관에 다름이 아니었다. 누가 용기를 내서 총통에게 우스타샤와 파벨리치를 내치자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순수'를 사랑하는 총통, '순결'을 지향하는 꼴통들과 통하는 데가 있었다. 결과는 꽝이었다.
이 상황에서 2차대전의 향배가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내둥 밀리던 영국군이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발목이 잡혔다. 41년 여름, 독일에 징한 똥침을 맞았던 스탈린은 당초부터 처칠에 유럽에서 '제2전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대충 유고군을 대표하는 미하일로비치를 띄우는 것으로 퉁쳤던 영국이 드디어 그 제2전선을 만들 수 있는 계제에 도달한 것이다. 처칠이 모락모락 연합군 발칸상륙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칸은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Soft underbelly of Europe'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발칸을 치고 들어가면 독일과 이태리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1942년 유럽의 전황도. 나찌 독일의 절정기이기도 하다. 일부 몇나라를 제외한 전유럽을 석권했다. 발칸의 소요를 생각하면 처칠이 생각한 '하복부론'이 설득력을 가진다. 발칸이 하복부면 이태리는 X인가? 자료원 : wikimedia
그게 42년말의 이야기다. 전황이 이렇게 흐르자 나찌 독일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발칸을 안돈하기 위해서 저항세력을 조속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계산 속에서 독일은 일단 보스니아의 골치꺼리 빨치산을 소탕하기로 한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이다. 43년 1월 이태리군이 남쪽, 독일군과 우스타샤가 북서 방면에서 빨치산의 근거지 비하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누군가. 도망의 달인 아니던가. 포위섬멸을 피해서 일단 남동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름 급했다.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급하게 날렸지만, 소련이라고 당장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알아서 잘 살라'가 답이었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대장정을 거치느라 나온 부상병들까지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독일 주도 '백색작전'으로 인해 네레트바강을 건너 몬테네그로로 들어가는 빨치산 퇴로. 비하치에서 다시금 남동방면으로 내려가니 바로 작년에 왔던 길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피같은 고도'라는 말을 쓰는데, 빨치산들에게는 '피같은 위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차제에 미하일로비치도 머리가 복잡해 졌다. 어떻게든 지금 공산당 세력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발칸의 유일한 저항세력이자 해방자로서 포지셔닝이 불가능하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발칸에 상륙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동부, 몬테네그로, 달마시아의 체트닉분대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네레트바 강 건너에서 빨치산을 기다렸다. 빨치산을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덫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체트닉들에게는 오히려 함정이 됐다. 사학자 스테반 파블로위치Stevan Pavlowitch는 체트닉과 점령군의 동침이 '우연한 일'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작전 때 나찌는 빨치산 뿐만 아니라 체트닉 부대도 같이 소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적 선택으로 체트닉에게는 나찌/파시스트들과의 내통 혐의가 붙었다.
우연이건 아니건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멸을 면하는 것이 목표다. 헤르체고비나를 갈라 남쪽으로 흐르는 네레트바강의 서안에 도착, 어떻게 어떻게 잡은 고위 독일군 포로를 미끼로 나찌와의 협상에 들어간다. '체트닉 때문에 힘들지? 우리가 정리해 줄까?', '만약 영국이 발칸에 상륙하고자 하면 우리가 혼내 줄께'. 이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덕에 5-6주를 벌었다. 독일한테는 배수의 진을 치듯이 보이려고 네레트바강의 다리를 부러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끊어진 다리 사이사이로 잔도를 만들어, 병력을 차곡차곡 서안으로 옮겼다.
독일의 '백색작전'으로 나온 빨치산의 도망담은 1969년 '네레트바강 전투'bitka na neretvi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율브린너, 오손웰즈, 프랑코 네로, 하디 크루거, 세르게이 본다르축 등 호화 출연진에도 불구, 영화의 질은 여느 관제영화와 마찬가지로 영 꽝이다. 빨치산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부상병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결과적으로 지연/기만전술은 먹혔다. 병력의 대부분을 네레트바강 동안으로 옮기고, 기다리고 있던 체트닉들의 저지선을 깨고 들어갔다. 장비가 우월한 독일이나 이태리군에 비하면 기율도 없고, 코디네이션이 안되는 체트닉들은 훨씬 만만한 적이었다. 티토의 주력이 몬테네그로 산중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린 것은 그해 4월의 일이다.
이 상황에서 2차대전의 향배가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내둥 밀리던 영국군이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발목이 잡혔다. 41년 여름, 독일에 징한 똥침을 맞았던 스탈린은 당초부터 처칠에 유럽에서 '제2전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대충 유고군을 대표하는 미하일로비치를 띄우는 것으로 퉁쳤던 영국이 드디어 그 제2전선을 만들 수 있는 계제에 도달한 것이다. 처칠이 모락모락 연합군 발칸상륙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칸은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Soft underbelly of Europe'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발칸을 치고 들어가면 독일과 이태리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1942년 유럽의 전황도. 나찌 독일의 절정기이기도 하다. 일부 몇나라를 제외한 전유럽을 석권했다. 발칸의 소요를 생각하면 처칠이 생각한 '하복부론'이 설득력을 가진다. 발칸이 하복부면 이태리는 X인가? 자료원 : wikimedia
그게 42년말의 이야기다. 전황이 이렇게 흐르자 나찌 독일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발칸을 안돈하기 위해서 저항세력을 조속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계산 속에서 독일은 일단 보스니아의 골치꺼리 빨치산을 소탕하기로 한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이다. 43년 1월 이태리군이 남쪽, 독일군과 우스타샤가 북서 방면에서 빨치산의 근거지 비하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누군가. 도망의 달인 아니던가. 포위섬멸을 피해서 일단 남동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름 급했다.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급하게 날렸지만, 소련이라고 당장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알아서 잘 살라'가 답이었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대장정을 거치느라 나온 부상병들까지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 차제에 미하일로비치도 머리가 복잡해 졌다. 어떻게든 지금 공산당 세력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발칸의 유일한 저항세력이자 해방자로서 포지셔닝이 불가능하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발칸에 상륙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동부, 몬테네그로, 달마시아의 체트닉분대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네레트바 강 건너에서 빨치산을 기다렸다. 빨치산을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덫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체트닉들에게는 오히려 함정이 됐다. 사학자 스테반 파블로위치Stevan Pavlowitch는 체트닉과 점령군의 동침이 '우연한 일'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작전 때 나찌는 빨치산 뿐만 아니라 체트닉 부대도 같이 소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적 선택으로 체트닉에게는 나찌/파시스트들과의 내통 혐의가 붙었다.
우연이건 아니건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멸을 면하는 것이 목표다. 헤르체고비나를 갈라 남쪽으로 흐르는 네레트바강의 서안에 도착, 어떻게 어떻게 잡은 고위 독일군 포로를 미끼로 나찌와의 협상에 들어간다. '체트닉 때문에 힘들지? 우리가 정리해 줄까?', '만약 영국이 발칸에 상륙하고자 하면 우리가 혼내 줄께'. 이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덕에 5-6주를 벌었다. 독일한테는 배수의 진을 치듯이 보이려고 네레트바강의 다리를 부러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끊어진 다리 사이사이로 잔도를 만들어, 병력을 차곡차곡 서안으로 옮겼다.
독일의 '백색작전'으로 나온 빨치산의 도망담은 1969년 '네레트바강 전투'bitka na neretvi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율브린너, 오손웰즈, 프랑코 네로, 하디 크루거, 세르게이 본다르축 등 호화 출연진에도 불구, 영화의 질은 여느 관제영화와 마찬가지로 영 꽝이다. 빨치산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부상병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결과적으로 지연/기만전술은 먹혔다. 병력의 대부분을 네레트바강 동안으로 옮기고, 기다리고 있던 체트닉들의 저지선을 깨고 들어갔다. 장비가 우월한 독일이나 이태리군에 비하면 기율도 없고, 코디네이션이 안되는 체트닉들은 훨씬 만만한 적이었다. 티토의 주력이 몬테네그로 산중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린 것은 그해 4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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