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9 : 쥐구멍에 뜬 볕

야이체Jajce에서 한숨 돌린 티토.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소위 야이체 공화국Jajice Republic 국면이다. 하지만 이때는 지난 우지체, 비하치 때하고는 뭔가가 달랐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독일군의 포위섬멸작전을 연거퍼 피했더니, 티토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다.

하지만 정작 돌파구는 해변이었다. 파시스트 이태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43년 7월에는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했고, 안되겠다 싶었던 왕가가 나서 무솔리니를 쳐냈다. 이태리가 우왕좌왕하면서, 나찌는 똥쭐이 바짝 탔다. 여기저기 손을 쓴다고 썼지만, 역부족. 이태리는 9월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렇게 2차대전 내내 사고만 치더니, 끝까지 나찌에게 도움이 안됐다.

야이체에서 한숨돌리던 티토에게도 이건 분명한 기회였다. 이태리군이 보유하던 군수품이 목표다. 이걸 빨리 접수해야겠는데, 달라면 줄까? 빨치산의 지위는 연합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잡히면 포로대접도 못받았다. 이런 사이에 뻘쭘하게 있는게 거시기했던지, 영국 군사사절 디킨Deakin까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이태리군 거점으로 병력을 급파해서 이태리군을 무장해재시키고 군수품을 쓸어담아 왔다.

9월에는 디킨보다 더 고위인사 피츠로이 맥클린Fitzroy McLean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사사절단이 야이체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빨치산과 영국 사이에는 보다 공식적이고 고위급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맥클린은 나중에 이 임무를 두고 '누가 더 독일군을 잘 죽이고, 더 잘 죽일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미션'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이 공산당에게만 사절단을 보낸 것이 아니라, 미하일로비치에게도 보냈다.)

맥클린과 같이 사진을 찍은 티토. 맥클린 준장은 007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의 걸물이다. 2차대전이 터지자 외교관을 사직하고 일병으로 자원입대해서 준장까지 됐다.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인데다, 현역 국회의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듯 하다. 어쨌건 현역의원이 군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태리군들에게 쓸어담은 무기들, 거기에 거의 공식적인 거나 다름없는 영국정부의 인정, 빨치산의 어깨에서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이런 달라진 상황과 위상을 정리할 정치적 이벤트가 필요했다. 43년 11월 빨치산 최고사령부는 2차 AVNOJ 회의를 야이체에서 개최한다. 포맷은 지난해와 비슷했지만, 미래의 정치체제를 두고 몇가지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1. 연방공화국으로서의 유고슬라비아 : 여섯개의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의 연합체로서 정치체제
2. 임시정부적 조직으로서 인민해방위원회 설립
3. 티토를 인민해방군의 원수 및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상으로 추대
4. 왕의 귀환 여부는 종전 후 국민투표 실시로 결정
2차 AVNOJ에서 연설하는 티토. 연설자 뒤에 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개인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토는 같은 빨치산에게도 신비의 인물이었다.

티토, 단순 무장집단 수괴에서 군대의 원수가 됐다. 이때부터 티토를 부를 때는 꼭 원수라는 칭호가 따라 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부적인 사정이야 어찌됐건 더 중요한 것은 외부의 눈길이다. 2차 AVNOJ 회의에는 영국과 미국의 군사사절단이 옵저버로 있었다. 맥클린, 디킨 등이 쓴 보고서는 그대로 처칠에게 전달됐고, 그 내용이 그대로 연합국 테헤란 회담에서 공유됐다.

당시 2차 AVNOJ회의가 열렸던 건물은 지금은 기념관이다. 내부를 보면 당시의 좌석배열을 그대로 해놓고 티토의 동상을 비치했다. 민족간의 피의 분쟁을 막았다는 이력때문에 그런지, 보스니아에서는 티토향수가 좀더 강한 것 같다.

같은 시점의 미하일로비치. 연합국의 정신적 지원을 오롯이 받다가, 공산당이 그림에 끼어들어 영 심기가 불편했다. 뭐라도 한 건 해야하는데, 손발이 말을 안듣는다.  각 지역의 체트닉 사령관들이 지각각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이태리가 전쟁에서 손을 떼니, 지금까지 이태리군과 공생하던 체트닉들이 마땅한 대체 보급선을 찾을 수 없었다.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가 뼈를 잡아가는 가운데, 크로아티아를 장악했어야 할 또 다른 권력 우스타샤의 실효적 지배범위는 자그레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편인 독일군들 조차 파벨리치를 '자그레브 시장'이라고 비꼬아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동요가 일어났다. 이 정권 믿어도 돼? 기층에서 뿐만 아니라 괴뢰정부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이 만약 대열을 이탈한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체트닉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보스니아 투즐라에서는 우스타샤 정권 치하의 방위군 2,200여명이 한꺼번에 빨치산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43년이 저물 즈음, 전략적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것은 티토의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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