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 처칠이 흘린 말이지만, 이것은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의 대부분을 점한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 해변을
와 본 사람들은 안다. 대부분 모래 해변이 아니라 암벽해변이다. 걸어서 상륙은 언감생심, 여기에 오르려면 처음부터 기어야 한다. 여기에 어떻게 군을 상륙시킨다 해도,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곧바로 바다에서 솟아난 듯한 디나릭 알프스를 넘어야 한다. 보병들이라면 걸어서 넘겠지만, 여기에 탱크, 야포 등까지 옮기자면 전략적으로는 몰라도 전술적으로는 악몽이다.
그랬다. 처칠은 처음부터 발칸에 연합군을 상륙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발칸에서 독일군의 혼을 빼놓을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상륙 카드를 쥐고 계속해서 살살 흔들었다. 그게 독일군을 속인 것은 좋았는데, 아군 미하일로비치까지 속인 셈이다. 처칠에게 남은 선택지는 카드의 설득력을 더해주기 위해 발칸 저항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것 뿐이었다.
이런 처칠의 귀에 발칸에서 예상치않은 노이즈가 접수됐다. 독일군의 암호문을 해독하자, 기대했던 미하일로비치보다 빨치산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던 것. 처칠은 궁금했다. 현장 상황을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해 빨치산 쪽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한다. 43년 5월 27일 영국 중동사령부 소속 특작대 요원들이 몬테네그로의 야음을 틈타 낙하산으로 잠입, 티토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F.W.D 디킨Deakin을 포함한 3인이 그 주인공이다.
소련이라면 모를까 티토는 영국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왕가를 중심으로 한 망명정부도 영국에 있고, 미하일로비치에게는 41년말부터 영국 연락책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미하일로비치와 붙어 나에게 총질할 사람들... 이라는 게 뇌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 군사사절단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선전에는 엄청난 힘이 됐다. '봐라.. 우리를 연합군도 인정하는 우리으 위용'..이라는 아우라가 더 붙었다.
디킨과 티토.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 디킨은 처칠의 문필 비서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독일군의 흑색작전이 전개되던 가운데, 티토 사령부로 투입됐다. 때문에 디킨이 남긴 회고록 '전장의 산'Embattled Mountain은 전형적 영국신사가 남긴 글 치고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연합군과의 접선, 아우라 다 좋았는데, 앉아서 전황을 논할 타이밍이 아니다. 5월부터 독일/이태리 연합군이 빨치산 소탕을 위한 '흑색작전'Operation Schwarz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백색작전 때보다 상황이 더 안좋았다. 몬테네그로 옹색한 산골에 빨치산 주력이 집결하다 보니, 포위섬멸이 더 쉬웠다. 총알과 식량은 이미 바닥이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훨씬 어려웠다. 빨치산 정예 제1프롤레타리아 사단이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공군까지 동원한 독일군의 폭격에 티토도 부상을 당했다. 영국 군사사절단 멤버 중의 하나까지 죽었다. 포위망을 뚫다가 빨치산 사단장급까지 전사했다. '총소리가 안들리면, 다 죽은 줄 알라'.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할 여유도 없었다.
죽을 맛이란 이런 것. 수톄스카 전투가 한참 벌어지던 때 행군하는 빨치산의 모습. 이렇게 걍 드러누워버린 모습이라도 남기니 나찌를 비롯한 파시즘에 맞서 어디서 싸웠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됐다.
티토를 중심으로한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수톄스카 강을 천신만고 끝에 건넌것이 6월달의 일이다. 독일/이태리/체트닉 일부까지 투입된 포위섬멸작전 덕에 빨치산 병력은 1/3(약 7천명 이상)이 무너졌다. 엄청난 손실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티토는 다시금 북서방향으로 이동했다. 수송용으로 썼던 말들을 잡아먹고 걷는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 보스니아 북서부 요충지인 야이체Jajce에 도착한 것이 43년 8월의 일이다.
야이체의 모습. 브르바스Vrbas강과 플리바Pliva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다, 언덕에 지은 성채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옛날부터 요새로 활용됐고, 봉건시대 때 만든 성벽이 두텁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야이체라면 당초 은거지 비하치하고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빨치산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똥개훈련 징하게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빨치산 입장에서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니....
그랬다. 처칠은 처음부터 발칸에 연합군을 상륙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발칸에서 독일군의 혼을 빼놓을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상륙 카드를 쥐고 계속해서 살살 흔들었다. 그게 독일군을 속인 것은 좋았는데, 아군 미하일로비치까지 속인 셈이다. 처칠에게 남은 선택지는 카드의 설득력을 더해주기 위해 발칸 저항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것 뿐이었다.
이런 처칠의 귀에 발칸에서 예상치않은 노이즈가 접수됐다. 독일군의 암호문을 해독하자, 기대했던 미하일로비치보다 빨치산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던 것. 처칠은 궁금했다. 현장 상황을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해 빨치산 쪽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한다. 43년 5월 27일 영국 중동사령부 소속 특작대 요원들이 몬테네그로의 야음을 틈타 낙하산으로 잠입, 티토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F.W.D 디킨Deakin을 포함한 3인이 그 주인공이다.
소련이라면 모를까 티토는 영국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왕가를 중심으로 한 망명정부도 영국에 있고, 미하일로비치에게는 41년말부터 영국 연락책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미하일로비치와 붙어 나에게 총질할 사람들... 이라는 게 뇌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 군사사절단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선전에는 엄청난 힘이 됐다. '봐라.. 우리를 연합군도 인정하는 우리으 위용'..이라는 아우라가 더 붙었다.
디킨과 티토.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 디킨은 처칠의 문필 비서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독일군의 흑색작전이 전개되던 가운데, 티토 사령부로 투입됐다. 때문에 디킨이 남긴 회고록 '전장의 산'Embattled Mountain은 전형적 영국신사가 남긴 글 치고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연합군과의 접선, 아우라 다 좋았는데, 앉아서 전황을 논할 타이밍이 아니다. 5월부터 독일/이태리 연합군이 빨치산 소탕을 위한 '흑색작전'Operation Schwarz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백색작전 때보다 상황이 더 안좋았다. 몬테네그로 옹색한 산골에 빨치산 주력이 집결하다 보니, 포위섬멸이 더 쉬웠다. 총알과 식량은 이미 바닥이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훨씬 어려웠다. 빨치산 정예 제1프롤레타리아 사단이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공군까지 동원한 독일군의 폭격에 티토도 부상을 당했다. 영국 군사사절단 멤버 중의 하나까지 죽었다. 포위망을 뚫다가 빨치산 사단장급까지 전사했다. '총소리가 안들리면, 다 죽은 줄 알라'.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할 여유도 없었다.
죽을 맛이란 이런 것. 수톄스카 전투가 한참 벌어지던 때 행군하는 빨치산의 모습. 이렇게 걍 드러누워버린 모습이라도 남기니 나찌를 비롯한 파시즘에 맞서 어디서 싸웠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됐다.
티토를 중심으로한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수톄스카 강을 천신만고 끝에 건넌것이 6월달의 일이다. 독일/이태리/체트닉 일부까지 투입된 포위섬멸작전 덕에 빨치산 병력은 1/3(약 7천명 이상)이 무너졌다. 엄청난 손실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티토는 다시금 북서방향으로 이동했다. 수송용으로 썼던 말들을 잡아먹고 걷는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 보스니아 북서부 요충지인 야이체Jajce에 도착한 것이 43년 8월의 일이다.
야이체의 모습. 브르바스Vrbas강과 플리바Pliva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다, 언덕에 지은 성채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옛날부터 요새로 활용됐고, 봉건시대 때 만든 성벽이 두텁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야이체라면 당초 은거지 비하치하고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빨치산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똥개훈련 징하게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빨치산 입장에서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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