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5 : 반란과 봉기

세르비아인들의 자랑 중의 하나는 불굴의 민족혼, 외세 오토만에 대해 허다한 봉기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집단이주는 이와 같은 봉기 시기에 맞춰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봉기는 어디에나 일어나기 마련. 과연 세르비아인들의 봉기라고 할 만한 것을 찾는 데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

역사에 기록된 봉기 중에서 가장 최초이자 그 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봉기가 1596년 오늘날 보이보디나 지방인 바나트Banat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 반란에는 약간은 종교전쟁의 성격도 채색되어 있었는데, 정교 주교가 주동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반란군은 성 사바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들고 다녔다. 이 때 오토만군을 이끌던 시난 파샤Sinan Pasha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정교가 배출한 최고의 성인 성 사바Saint Sava의 유해를 베오그라드에서 화형? 소각? 화장해 버렸다. 물론 한참 오토만의 세력이 전성기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은 얼마 안가 진압됐다.

<베오그라드에 있는 성사바교회는 발칸 최대, 세계에서 두번째(또는 세번째?)로 큰 정교교회라고 한다. 터 자체는 바로 시난 파샤가 성사바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이 아름답고 야심찬 교회를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사바에게 봉헌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일이다. 1935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교회는 2차대전, 사회주의, 유고 내전 등 다사다난한 세르비아 역사 탓에 아직도 완성이 안됐다. 공사진도가 민족주의의 발흥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

세르비아 민족이 오토만에 대한 반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결국 17세기 오토만 세력의 쇠퇴와 일치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연합군의 도움으로 1683년 오토만의 비엔나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기 시작하면서 오토만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1683년부터 1699년까지는 서양사에서는 신성동맹Holy League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니스)과 오토만 간의 대전쟁Great War에 돌입하면서 오토만 지배 하의 기독교를 신봉하는 민족들의 봉기를 부추키고 다녔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정교의 수장인 아르세니예 3세 Arsenije III Čarnojević와 접촉, 거국적 봉기를 요청했으며, 아르세니예 3세가 이에 협조한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을 간다고 아직 오토만의 힘이 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발칸으로 들어서면서 보급선도 아슬아슬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을 빼기 시작한다. 덕분에 입장이 난처해진 아르세니예 3세는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과 더불어 다뉴브강을 건너 슬라보니아 평야로 다수 세르비아인들을 이끌고 이주했다. 이때 이주민들이 오스트리아가 만들어 놓은 군사특별구의 새로운 인력공급원이 됐다. 누구든 와서 군사특별구에 인구를 채워주길 기다렸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들을 대환영하고 각종 특권을 베풀었다.

1690년 아르세니예 3세가 주도하는 세르비아 민족의 대이동을 재현한 역사화. 파야 요바노비치Paja Jovanović가 1896년에 완성한 그림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이를 민족의 대이동The Great Migration이라고 부른다. 아르세니예 3세가 주석하던 곳은 다름 아닌 오늘날 코소보의 역사도시 페치Peć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때 세르비아인들의 대이주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인구가 줄어들게 된 결정적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그 공백을 알바니아계가 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동의 규모와 영향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많다.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의 존재가 이전에는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코소보에 대한 집착은 이 같은 역사적 경향을 수정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코소보 패전, 그리고 오토만 지배 하에서 강요된 대이동 등이 결국 세르비아계에 대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꼭 이 같은 이동이 세르비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150년 가량 살던 무슬림들이 개종을 하거나 다시금 발칸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땅을 잃고 쫓겨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리가 없다. 이 때를 맞춰 오토만의 영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복의 잔인성과 강도도 더욱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 같은 지역의 불안은 문명권의 조류와 더불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오스트리아, 베니스, 러시아 등 서구열강들의 오토만 터키에 대한 견제, 더 나아가 범 게르만, 범 슬라브 등의 민족주의의 발흥은 세르비아 인들의 맘을 설레게 한다. 특히 세르비아인들을 흥분시킨 것은 정교 형제국 러시아의 굴기였다.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꼬드겨서 그 장단에 춤을 몇번 추기는 했지만, 문제는 카톨릭 교회와의 긴장. 카톨릭 교회가 세르비아 이주민들에게 자꾸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정교 사제들의 맘에 상처를 줬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흑해를 주변으로 오토만과 쟁패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에도 '우리도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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