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9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2 - 1차대전의 결과

동맹들과의 협력과 알력을 통해 일으킨 발칸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꿈에 그리던 고토 코소보를 회복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동포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차대전 직전 보스니아의 경우 인구의 43%가 세르비아인들이었으며, 크로아티아에서도  군사특별구Krajna Vojna를 중심으로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세르비아의 꿈은 이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는 것이었다.

오스만 터키와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 형태로 보스니아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병합annexation하여 지역의 긴장도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때문에 1912-13년 발칸전쟁이 끝난 다음을 기점으로 세르비아의 민족적 원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토만 터키에 비해 헛점이 없었다. 국력 면에서도 실력 차이가 너무 확실했다(인구 : 오-헝 5천만, 세르비아 발칸전쟁 이후 440만).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에서는 청년적 이상주의와 군부의 팽창주의가 만난다.

1911년 이상주의적 청년장교들이 '통일 아니면 죽음'Ujedinjenje ili Smrt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 축출과 쿠데타 주동자들이 만든 단체다. 그것이 나중에는 훨씬 간지나는 '검은손회'Crna Ruka로 이름이 굳어버렸다. 시작은 단촐했지만, 군내유력인사가 시대정신을 담아 만든 것이다 보니 1914년 경에는 2,50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대세르비아의 실현. 이를 위해서 보스니아 등지에서 활동할 다양한 사보퇴르, 게릴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했다. 어느날 이들에게 보스니아 촌뜨기 청년들이 찾아와서 거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 중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cip이었다. 1914년 6월 . 이 보스니아 청년이 얼떨결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암살하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1차대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검은손회 주동자 중의 한사람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역사적으로는 아피스Apis라는 암호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당시 대령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 햇병아리 암살자들에게 총과 폭탄을 건내주라고 한 사람이 바로 이 양반이다.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세르비아 정부에서 1차 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살로니카(오늘날 테살로니키)에서 반란혐의로 체포, 총살했다.  

1차대전을 만나 자기보다 훨씬 강한 적을 만나게 세르비아는 전쟁 초기 예상외로 잘 싸웠다. 이미 발칸 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병사들의 훈련상태나 전투준비도가 훨씬 높았던 것도 있었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다민족군을 이끌다 보니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가 많았다. 1차대전 협상강대국Entente Powers 측의 최초 승리 역시 세르비아군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해를 넘긴 1915년부터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동맹국Central Powers이 불가리아를 꼬드겼다. 발칸전쟁으로 피해의식이 컸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잃은 땅을 되찾아주겠다는 말에 홀딱 넘어갔다. 오스트리아-불가리아의 양면협공이 시작되자, 세르비아도 바로 만세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포위를 피해 선택한 퇴로는 알바니아 해변.

알바니아 해안까지 후퇴하는 길은 너무나도 고단했다. 험악한 지형, 악천후, 추위, 전염병, 패잔병을 노린 알바니아 산악부족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민간인과 군인 약 20만명이 이 퇴각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1916년 3월 동사, 아사, 피로사 등에서 살아남은 병력 12만명이 아드리아해에 있던 연합국 해군군의 도움으로 그리스의 코르푸Corfu로 이동했다. 왕과 수상을 비롯한 중요 정부요인들만 이곳에 남고, 병사들은 다시 그리스-마케도니아 쪽의 살로니카전선으로 투입됐다.

알바니아로의 후퇴 장면. 한겨울에 산길이다. 당시는 죽을 맛이었겠지만, 1차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때, 세르비아 민족에게는 유구한 국난극복의 역사에서 또 다른 기념비적 순간이 됐다. 

이 같은 고난을 버틴 세르비아는 편을 잘 선택한 탓에 결국 1차대전 승전국이 됐다. 대세르비아를 노려왔던 세르비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전의 결과 세르비아 왕가에게는 정작 기대하던 대세르비아보다 커다란 선물이 배달됐다. 유고슬라비아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사들이 세르비아와의 병합을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에 요청해 온 것이다.

1918년 왕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 통칭 SHS라고도 부른다. 보스니아라는 이름이 빠져있는 게 눈에 띈다)의 결성을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세르비아는 이 참에 기존 왕가를 내치고 몬테네그로까지 합병했다.

1918년 새왕국의 지도. 얼추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비슷한 모습이다. 1차대전 승리로 세르비아는 원래 영토(옅은 황색)에 헝가리의 보이보디나Vojvodina(연홍색),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를 추가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반도는 이태리가 가져갔다. 제국의 한축을 담당했던 헝가리는 루마니아한테도 땅을 빼았기고 1차대전 이후 크게 위축됐다.  헝가리가 2차대전 당시 독일 편에 붙은 이유는 히틀러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고토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어쨌거나 봉기 이후 100년이 지나고, 독립을 인정받은지 40년 만에 세르비아는 이루고 싶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뤘다. '싸우면 이긴다'는 세르비아의 호전적 상승의식은 1차대전을 기점으로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에 또다른 그늘이 있었다. 무엇보다 1차대전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구 1/4, 15-55세 남성인구의 2/3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1차대전 참전국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특히 대학 졸업자들이 대거 전사하면서 넓어진 왕국을 다스릴 엘리트층이 괴멸됐다. 나라는 몇 배 커졌지만, 왕가와 세르비아에게는 좀 벅찬 짐이 됐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