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1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8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1 - 1912-13 발칸전쟁

19-20세기 격동기에서 세르비아를 규정하는 중심적 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은 세르비아 이데올로기Greater Serbia Ideology다. 민족으로서 이런 꿈을 가지지 않은 족속이 없었지만, 발칸에서 Greater라는 말은 유독 세르비아와 결부되어 사용되는 감이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을 제치고, 이를 정말로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탓이 크다.

세르비아어 개혁자인 북 카라지치Vuk Karadžic(1787-1864)는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 슈토Što를 쓰는 민족은 모두 세르비아인이라고 봤다. 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의 상당부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는 물론 몬테네그로에 사는 남슬라브계는 모두 세르비아 민족이 된다. 다만 일부는 카톨릭을 믿고, 일부는 이슬람을 믿는 차이 뿐이다. 언어공동체를 중심으로 민족을 규정하는 초기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류데빗 가이가 주창한 일리리아 운동Ilyrian Movement가 비슷한 궤를 그리고 있었다. 다만, 남슬라브족을 세르비아로 통칭하는 데 대해서는 분명 이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서 이 원초적 아이디어를 보다 고도화되고 구체적인 국가비전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일리야 가라샤닌Ilija Garašanin (1812-74)이다.

가라샤닌(1812-74)의 초상. 근대적 관료제 도입 등 세르비아의 국체를 세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역사상 세르비아 및 발칸 정치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1844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나체르타니예Načertanije (Outline 또는 Draft라는 뜻)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대세르비아Greater Serbia의 목표, 전략 및 방법을 기술한 이 문건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현 국경선 바깥에 있는 세르비아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어우를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비전대로라면 결국 오늘날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에 이르는 상당한 영토를 세르비아가 흡수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1850년 경 유럽의 지도. 가라샤닌이 문건을 작성할 때 만 해도 세르비아의 처지는 오토만내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는 자기를 둘러싼 제국들에 대한 대항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물론, 14세기 두샨의 제국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당시 세르비아는 오토만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둘러쌓여 있었고 제대로 독립을 인정받은 나라도 아니고 오토만 터키의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세르비아에는 아직도 오토만 터키 군대가 주둔) Načertanije는 결국 이들 강대국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작성하고 나서도 상당기간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문건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비밀주의, 음모론의 냄새가 강하게 베어들게 된다. 하지만 정책입안가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으로 회람됐고, 그 내용은 왕정하 세르비아 정부에 지속적인 방향성을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19세기 세르비아 역사는 이 비전을 실현시키는 과정이 됐다.

물론 만만치는 않았다. 1876년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후원을 업고 오토만을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마 사정이 뜻대로 흐르지 않아서,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1877년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도와 오토만과의 전쟁에 뛰어들고 오토만이 여지없이 밀리면서 발칸의 세력균형이 크게 바뀌게 될 처지에 이르렀다.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서구 열강들이 1878년 베를린 회의(Congress of Vienna)를 소집한다.

이 회의를 통해서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또 영토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가 경영하기로 하고, 불가리아가 자치를 획득하면서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입장이 됐다. 강대한 오스트리아, 형님형제격 러시아보다는 만만한 오토만을 상대하길 원했던 세르비아로서는 동서 방향 팽창의 길이 막힌 셈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에는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던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885년에는 갓독립한 불가리아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어이없는 완패. 때문에 세르비아의 국왕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국민의 멸시를 받게 된다.

1878년의 유럽지도. 독립을 인정받은 세르비아 색깔이 드러난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독립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르비아의 남부인 니쉬Niš까지 영토를 넓혔다. 자력은 아니지만 세르비아가 더 커진 것Greater은 사실이다.

답답한 가운데 새로운 계기는 1903년 왕조가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으로 교체되면서 나타났다. 1910년 대는 발칸에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과거 오토만 지배하의 독립국들이 자리를 잡은 때다. 러시아가 살살 슬라브 형제국들을 부추키고, 그리스가 이에 합세하면서 이들 간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형성된다. 이들 간의 군사력을 모아놨더니 대충 70만, 지역내 터키 군사력을 두배나 상회했다. 1912년 발칸 전쟁은 이런 구도 하에 일어났다. 결과는 터키가 참패. 오토만 터키가 유럽에서 발을 떼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그러나 이들 신흥국가들의 야망은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1912년 런던조약(Treaty of London)에서 서구 열강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가 지중해에 발을 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알바니아가 얼떨결에 독립을 당하게 됐다(?). 코소보를 넘어 알바니아를 집어먹을 생각을 하던 세르비아의 기도가 틀어지면서, 발칸 동맹국 간의 마찰이 일어났다.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공모해서 마케도니아의 상당부분을 발라먹은데 대한 앙심으로 1913년 불가리아가 전쟁을 선포, 2차 발칸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불가리아의 패배. 덕분에 세르비아는 원하던 바다를 얻지는 못했지만, 코소보를 넘어, 마케도니아 쪽 영토를 공고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4년의 유럽지도. 세르비아가 올챙이 자라듯 커졌다. 이번에는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일부까지 먹고 들어간 모습이다. 특히 코소보는 고토회복의 의미가 크지만, 이 때 쯤 이미 알바니아계가 인구의 과반을 넘고 있었다.  

세르비아가 대세르비아의 꿈을 실현해 나가면서 국운이 뻗어가는 듯 보이지만, 이 같은 팽창은 지역 내에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 냈다.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신흥민족의 팽창과 더불어 대대적 인종청소가 일어났다. 누구나 지역내 정착한 무슬림들을 축출했다. 터키에는 19세기 말부터 발칸지역의 정정불안을 피해서 거의 100만 명의 인구가 터키로 이주했다. 발칸전쟁 덕으로는 거의 20만 가량의 무슬림등이 다시 터키로 도망갔다. 남아있는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폈다. 언어 상으로 불가리아 쪽에 가까웠던 마케도니아에서 이런 정책이 제대로 펴질 리가 없었다.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의 활동이 더욱 거세졌고, 그 결과는 1934년 알렉산다르의 암살로 연결됐다.

이는 20세기 초 발칸이 왜 화약고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밖으로는 한치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국간의 긴장, 안으로는 갓태어난 신생민족들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의 그늘이었다. 발칸전쟁을 통해 코소보를 복수한다는 꿈은 실현됐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불안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