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8일 월요일

보스니아 유사 3 : 보스니아와 이슬람

결국  15세기에는 오토만 터키가 이래저래 외우와 내환이 겹친 보스니아를 접수하게 됐다. 그런데 보스니아가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오토만이 접수한 여타 유럽지역과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이슬람 유산이 상당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과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학설들이 많지만, 틀린 견해도 많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보스니아 무슬림. 1906년.  Rudolf Bruner-Dvořák이라는 양반이 보스니아와 관련해서 다수의 사진을 남겼다. 관련 링크 참조 요망

가장 많이 유통된 속설은, 한손에는 칼, 다른 한손에 코란을 든 이슬람 세력이 유럽에 들어오면서 강제개종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서구가 만들어낸 썰이다. 식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허구는 오늘날에도 상당히 일반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뿌리박았다.

오토만 터키는 당대의 서구국가들에 비해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훨씬 관용적이었다. 서구에서는 17세기 후반까지 종교전쟁이 있었지만, 오토만 하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동방정교, 카톨릭 기왕의 신앙에 대해서는 기본적 자유를 인정했다. 세금만 잘 회수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말을 타서는 안되네, 칼을 차서는 안되네, 교회를 신증축해서는 안되네 등의 간섭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로비를 하면 교회신축, 증축과 관련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토만에서도 기독교 양대 교파에 대한 태도상의 온도차는 있었다. 십자군하고 징하게 대적했던 오토만은 바티칸의 영향을 받는 카톨릭에 비해서는 동방정교 쪽에 좀 더 관대했다고 한다.

유럽땅에서 심심하면 털리고 축출당하기 일쑤이던 유태인들을 받아준 것도 오토만이다. 보스니아에서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과 같이 쫓겨난 세파르딤Sephardim 유태인들이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여기에 동유럽에 살던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태인들이 들어온 것은 근세의 일이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커다란 유태인 집결지가 된 곳은 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다. 이들 반도의 유태인들을 다시금 작살낸 것이 2차 대전 나찌 독일이었고....

사라예보의 모습. 모스크, 정교교회, 카톨릭성당, 유태교 회당이 다 들어있다. 런던, 파리 같은 거대도시에는 모스크가 들어섰지만, 이렇게 다양한 종교시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광경은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찾기 어렵다. 종교적 관용은 오랜 기간 보스니아의 자랑이었다. 

두번째 속설은 보스니아에 결집된 보고밀Bogomil 이단이 집단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설이다. 같은 기독교계의 이지메에 학을 띤 이단들이 한꺼번에 이슬람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나이쓰한 스토리 라인이기는 하지만, 개연성은 떨어진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보스니아가 그렇게 이단의 온상이었는지도 의심을 받는 상황이다.

세째 속설은 기존의 귀족들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단체로 개종을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아니면 군인이나, 정치인, 행정가로의 출세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 발칸 진출 초기에는 기독교 무사들도 오토만 군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활약에 따라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술탄으로부터 식읍을 하사 받았다. 후세의 실증연구에 따르면 일부 귀족가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가 있지만, 그 같은 연결선은 뚜렷하지가 않다. 오히려 다수의 귀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네째,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경제적이었다는 속설이다.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정 세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조상대대의 믿음까지 저버릴 정도로 큰 것이었나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무슬림들의 경우 종교적 의무에 따라 별도의 자선세alms tax를 내야했다. 또한 병역 역시 법적으로 무슬림들에게만 부과된 의무사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말 이외를 제하고는 설득력이 크지는 않다. 만약 사정이 이러했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보스니아에서 더 많은 개종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요즘 학자들은 보스니아에서의 이슬람은 상당히 점진적으로 퍼졌으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착근됐다고 본다.

다만 보스니아의 경우 이런 것은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는 기성 교단의 조직력도 약하고, 유자격 성직자들이 부족했다. 이런 것이 이슬람 전파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기는 했을 것이다.

사라예보의 중앙광장 바쉬차르시야Baščaršija의 옛모습. 바쉬차르시야 또는 차르시야는 미디어가 없던 시기에 정보가 모이고 확산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 험담, 뒷다마까지 포함해서..

이러던 것이 오토만 세력이 17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헝가리, 크로아티아 일부지역까지 진출했던 무슬림들이 보스니아로 다시 쫓겨나면서, 인구의 밸런스에 영향을 줬다. 더 나아가 보스니아는 인근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에 비해 토착 무슬림들이 조금은 더 잘 조직화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보스니아는 1878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면서, 당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에서 일어났던 인종청소가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발칸 지역 국가들의 독립하면서 엄청난 무슬림 인구 이동이 있었다. 남은 무슬림들은 강제개종을 당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세기 중후반의 정치적 소란으로 발생한 무슬림 난민이 약 100만 정도. 20세기초 발칸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무슬림 난민이 약 50만.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이스탄불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뇌리에 남아있어서인지, 90년대 유고내전 당시에도 보이슬라브 셰셀Vojslav Šešelj 같은 극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아나톨리아로 다 쫓아낼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하지만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아나 불가리아보다는 그나마 문명화된(?) 오스트리아가 장악하면서 이런 난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긴, 무슬림들을 다 쫓아내면, 최대다수 세르비아계를 맞닥뜨려야 하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서도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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