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4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7 : 오토만의 유산 세브다흐Sevdah

구유고 지역의 대부분이 거의 500년 동안 오토만의 지배를 받다보니, 그 문화적 유산도 만만치 않게 남아있다. 음악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브다흐Sevdah라는 장르다. 세브다흐. 무슨 뜻인가. 위키를 찾아봤더니, 그 어원은 아랍어로 뜻이 '검은 담즙'black bile(또는 흑담즙)이란다. 검은 담즙이 음악과 무슨 상관? 

'검은 담즙'은 원래 의학용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등이 '4대 성정性情론'Four Temperaments을 주창한 바 있다. 중세 아랍의 학자들이 이 고대 그리스 의학 파라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고, 그것이 서양까지 전해져서 18세기까지 의학적 사고의 근간이 됐다.

'4대성정론'이 이야기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의 4대 성정, 즉 냉정(또는 침착), 분노, 낙천, 우울은 4대 체액의 분비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 바 '검은 담즙'은 우울(멜랑콜리)을 유발하는 체액이다. 

4대 성정 : 이 파라다임을 표현한 설명 중에서 위의 이모티콘보다 더 잘된 예를 본 적이 없다. 왼쪽부터, 분노, 우울, 냉정, 낙천을 뜻한다.

4대성정론이 서구문화에 영향은 예상외로 넓고도 깊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멜랑콜리 과다증후군을 앓은 대표적인 인사다. 생전에 되는 일이 별로 없었던 보들레르는 '빠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영국의 르네상스 작곡가 존 다울랜드John Dowland는 당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멜랑콜리 열풍에 충실히 부응하여 변진섭, 신승훈 못지 않게 슬픈 노래를 많이 남겼다. 

이름이 암시하듯, 세브다흐(더 친근하게는 세브달링카Sevdalinka)는 원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슬픈 보스니아 민속노래들이다. 사람이 왜 슬픈가? 가장 큰 이유는 실연이다. 때문에 세브다흐는 보스니아의 사랑 노래Bosnian Love Song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꼭 이런 연애 이야기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일단 기조는 슬픔이지만, 그 가사에는 해학, 익살, 로맨스, 음란, 외설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노래들은 원래 마을 잔치, 회합이 주무대였다. 누군가 카수가 나서면 너도 나도 같이 따라부르는 방식이다. 가사가 너무 슬프다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울었다고 한다.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주된 기능이었던 셈이다.

싸즈Saz라는 보스니아 전통악기를 반주로 부르는 세브다흐.  이웃들과 옹기종기 모인 사랑방이 주된 연주 장소였다. 

아무래도 오토만 터키에서 유입된 장르다 보니, 음계나 분위기가 오리엔탈하다. 이 같은 문화적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변화와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구 유고지역의 음악 중에서 세브다흐 만큼 커다란 변화와 트랜스포메이션을 거친 장르가 없다. 지금도 거침없이 변화 중이다.

세브다흐 장르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아무래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다. 오스트리아인들이 가지고 온 아코디온, 바이올린, 베이스 등이 보스니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세브다흐 장인들이 음량 등 여러가지 면에서 한계가 많았던 싸즈를 버리고 근대식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주 장소도 대가집 사랑방, 마을회관이 아니라 카페로 바뀌었다. 합창보다는 공연 중심으로 음악적 소비의 성격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1945년 종전 이후 , 보스니아에서는 힘조 폴로비나Himzo Polovina, 자임 이마모비치Zaim Imamović 등의 가수들이 나와서 여러 앨범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우리나라의 김정구, 배호 등과 같은 전설적 위치를 누리는 가수들이다. 오케스트라, 아코디온 반주를 극대화한 이들에게는 서양의 크루너crooner적인 면모가 보인다.

힘조 폴로비나가 부른 에미나Emina. 대체적으로 세브다흐/세브달링카는 녹음시간이 4분을 넘지 않았는데, 폴로비나는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이 곡을 7분이 넘는 대곡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탄조의 탄식이 가득한 이곡은 같은 동네 이맘댁 처녀 에미나에게 연심을 품은 젊은 화자의 심정을 절절히 담고 있다. 너무 절절하다 보니 꼭 신파조로 느껴지는 폐단이 있다. 그래도 이 노래는 아마 세브다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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