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7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8 : 사라진 민족의 노래

옛날의 유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무슬림, 집시들 뿐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유태인들도 수백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발칸반도에 유태인들이 흘러 들어온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다. 일찍부터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유태인 본거지가 만들어지고, 보스니아나 세르비아를 남슬라브족보다 먼저 왔던 침입자들 중에서도 유태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태인 집단이 발칸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의 일이다.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력에 축출되면서, 도매급으로 유태인들도 같이 쫓겨났다. 당시 관용이라고는 전혀없었던 기독교인들에게 몰려난 유태인들을 받아준 것은 오토만 터키였고 그들 중의 일부가 보스니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몰려온 유태인들은 세파르딤Sephardim 계열로 스페인어 버캐뷸러리의 영향을 받은 라디노Ladino를 썼다.

1918년 경, 보스니아에 살던 세파르딤 계열의 유태인 여성 (출처 : Journey East)

17세기에는 세파르딤과 양대계열을 이루던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태인들이 보스니아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잃어버린던 때이다. 아쉬케나짐들의 언어는 라디노와는 전혀 딴판인 이디쉬Yeedish다. 언어 탓이었는지 양대 세력이 같은 신을 같은 방식으로 믿었지만, 정작 보스니아에서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보스니아에서의 유태인들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단순한 숫자를 능가했다. 무엇보다 상업민족으로서 항상 부를 축적해왔다는 것도 있지만, 유럽 각지에 퍼진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로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의약, 외교 분야의 지식으로 보스니아의 총독이나 토호들의 자문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근동식 전제군주 체제 하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항상 자의적이기 쉬운 행정관이나 총독의 불알을 잡아놓지 않을 경우 뒷탈이 있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초 한때 변학도 같은 오토만 총독이 트라브닉에서 유태인 부자들을 붙잡아서 평양감사식으로 털어먹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무슬림들이 집단봉기를 일으켜서 즉각 석방을 요구하자, 총독이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슬림들이 굳이 유태인들을 선호해서라기 보다는, 이에는 외지인 총독과 보스니아 토종 무슬림들 간의 권력갈등이 중첩되어 있었지만, 어쨌던 다민족 사회로 살아가던 보스니아의 내부사정이 이런 식으로도 풀릴 수 있었다.

난리가 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유태인들은 언제나 이웃민족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차 대전을 맞아 히틀러가 폭주하면서 발칸에서 이런 감초같은 매개자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보스니아 3대 마초 민족 간의 관계도 팍팍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이런 보스니아에서 얼마전부터 Arkul이라는 2인조 밴드가 결성되어 오래된 세파르딤 유태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오늘날 보스니아에서 쓰는 사람이 500명 남짓하다는 라디노어로... 뭔가 스페인스러운 어투로 부르는 노래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노랫말에 나오는 Te kero는 스페인어로 Te Quiero와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같은 것을 알겠다.  라이너 노트에 나온 가사를 보면 이런 저런 일상적인 차제에 부른 노래인듯 싶다. 세브다흐와 같은 절절한 내러티브는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내가 이쪽 방면으로 과문한 탓에 뭐라고 말하긴 어렵다. 곡조는 중근동 색채가 스레인의 플라멩코 만큼은 완연하다. 세브다흐와의 상호영향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듣자니 세브다흐 대표곡 중의 하나인 '내가 벰바슈를 지날 때'Kad ja pođoh na Bebmašu가 세파르딤 민요곡조에 남슬라브어 가사를 붙인 것이라고 하니 이들의 조우를 허투로 볼 것은 아닌 듯 하다.

2집 타이틀곡, Il bastidor. 비디오 트레일러에 나오는 아트워크는 보컬 블라디미르와 그 동생 요십이 같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라이너 노트에도 삽입되어 있다. 가사의 뜻은 금요일날은 뭐하고, 안식일(토요일) 날에는 뭐하고 일요일 날은 뭐하고... 식이다. 주부가 부르는 노동요라고 봐야할 듯 하다.

그 멤버, 블라디미르 미츠코비치Vladimir Mićković(보컬)와 아틸라 악소이Atilla Aksoj(어쿠스틱 기타)는 모두 모스타르 출신이다. 그 덕이었는지 Mostar Sevdah Reunion 등 현지 뮤지션들과 가깝고, 최근에는 그들의 앨범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보컬의 목소리가 여리고 톤이 높은데, 라틴계열의 부드러운 언어에 워낙에 유태인들이 겪었던 간난과 신고가 겹친 탓인지, 노래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하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진다. 내가 듣기에 그냥 안쓰러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청승맞게 불러야 제맛인 노래들인가.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유고 삼국지 11 : 갈려지는 승패

연합국이 체트닉에서 빨치산으로 파트너를 바꾸기로 하면서, 덩그라니 홀로 남겨진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닉. 뭐라도 해야했다. 1944년 1월 세르비아 바Ba에서 나름 전국적 규모의 회의를 개최했다. 왕조를 존속하되 '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가미한 선언문이 나왔다. 하지만 반향도 작았고, AVNOJ 2차 회의의 짝퉁처럼 보이고 말았다. 무엇보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다민족적 절실함이 없었다.

전쟁 초기부터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된 영국의 군사사절단은 1944년 체트닉의 부역혐의를 들어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하면서 지금까지 체트닉들에게만 제공됐던 보급도 끊겼다. 하필이면 전황이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시점이다. 이 때 만을 기다려왔던 미하일로비치로서는 뭔가 아다리가 안맞아도 한참 안맞았다. 대기전술의 한계인가, 기회주의의 응보인가 아니면 연합국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것인가. 8월에는 왕까지 그를 최고사령관 지위를 박탈했다.

연합국의 공식 파트너가 된 티토는 영국 등으로부터 6만톤에 달하는 보급품을 공수받았다. 안면을 바꾼 처칠, 이제는 카라조르제 왕가를 대하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20대 젊은 왕을압박해서 티토를 내각에 임명할 것을 압박한다. 물론 영국이 무작정 왕가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조리돌림한 것은 아니다. 왕가가 어떻게든 빨치산과 정치적 접합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티토는 아쉬울 게 없었다.

1944년 10월 빨치산이 드디어 베오그라드를 입성했다. 아무리 사회주의 조국에서 왔다고 하지만 인근에 도착한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었다. 탱크나 야포. 기계화된 근대전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수준이었지만,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 다음 달인 11월에는 영국에 거처한 임시정부가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페타르 왕은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라는 내용의 방송까지 내보냈다. 하지만, 티토는 왕가에 대해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44년 10월에 해방된 베오그라드. 퍼레이드 중인 빨치산. 소련군이 중화기를 지원해줬지만, 빨치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어떠랴 개선군의 입장이다.

전황이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그레브에 거처한 우스타샤 수뇌부들의 계산 속도 바빠졌다. 44년 7월, 파벨리치는 연합국과의 공모를 통한 쿠데타 혐의를 들어 몇몇 동지들을 처단했다. 이 때 쯤 들어 NDH 대열 안에 있는 누구에게나 상황은 분명해 졌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히 우스타샤 대열에 속해있던 상당수가 빨치산으로 편을 바꿨다.

1945년 봄이 되자,  빨치산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평원을 강하게 압박했다. 산악지대에서 펄펄 날던 빨치산들도 평지에 내려오자 이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빨치산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한번 맛이 간 전황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5월 들어 독일군은 크로아티아내 모든 추축국 군 작전권을 파벨리치에게 양도했다. 파벨리치로서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빨치산이 이미 자그레브에서 50km 떨어진 카를로바츠까지 진격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틀 뒤인 5월 8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슬로베니아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리고는 다시 이태리로 운신했다가 아르헨티나로 망명한다. 남미에서 몇번의 암살위기를 모면하고 1938년 스페인에서 병사했다.  2차대전 전범으로, 병상에서 죽은 얼마안되는 사람이다. 크로아티아를 탈출하는 데는 교황청이 도와줬다는 말도 있고 아직도 미스테리다.


크로아티아 모처에서는 요새도 해마다 안테 파벨리치를 위한 미사가 열린다. 유태인 단체가 반대성명을 내지만, 크로아티아 신부님들은 묵묵하다. 이 죄많은 사람을 용서해달라는 뜻일까? 물론 반대시위도 열린다. '야세노바츠에서 2만명의 아동이 죽었고,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죽은 인물들만 20만명. 모두 파벨리치가 명령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2013년 일이다. 이런 걸 보면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도자가 이렇게 가족 만을 챙겨서 도망간 사이에 남아있는 우스타샤 잔당을 비롯해서 NDH 추종자들 역시 도주길에 올랐다. 빨치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그래도 빨치산보다는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로의 월경을 시도하다, 여단 급의 영국군을 만났다. 협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국경 바깥에 수용된다'는 조건으로 영국군에 항복하고 고스란히 무장해제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을 태운 기차는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다시금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갔다. 속은 것이다. 빨치산의 손에 다수가 죽고 상하고 그 결과는 '블라이부르크 학살극'Bleiburg Massacre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2차대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났던 다수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시종과 희생자수는 제대로 밝혀진게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으로 2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까지는 아니고 한 3만명 정도가 희생되지 않았겠나들 보고 있다. 영국군의 행동 자체는 어차피 국제법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 빨치산도 총격을 가했지만, 항복과정에서 발생한 오해가 있었다는 등 아직도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빨치산들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이 해외로 나가서 임시 또는 망명정부가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우스타샤와 빨치산 사이에서는 제네바 협정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유고 삼국지 10 : 인생역전

43년11월에 개최된 2차 AVNOJ 회의는 어떻게 보면 연합국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도발이었다. 영국이 이미 세르비아 왕가와 망명정부를 품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의 연관성을 전면 부정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스탈린으로서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섣불리 사회주의 정권의 뒷배를 대다가 동맹간의 신뢰를 흔들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유고공산당이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새였다면, 43년 2차회의는 지령에 의하지 않고 유고공산당 독자적으로 만든 이니셔티브였다.
"우리 사고쳤다. 니들 어쩔래?"

빨치산을 국제적으로 인정하자는 제안을 처음 꺼냈던 것도 스탈린이 아니라 처칠이었다. 영국의 보수정치인이 공산당 주도 빨치산을 밀어준다는 것. 2차대전과 같은 화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소련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던 매클린은 볼셰비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빨치산을 지원하면 전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처칠에게 전했다. 처칠이 그런 매클린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네, 거기서(유고슬라비아) 쭈욱 살라구?"

전쟁 목적에 대한 순수한 집착이 보인다. 처칠은 그런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매클린은 이 때 티토와 만들어놓은 인연으로 나중에 코르출라에 집을 마련했다. 아이러니다.

한편 이 같은 결정을 두고 2차대전 후에도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빨치산에 파견했던 디킨과 매클린은 영국 최고의 엘리트들로 처칠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반면, 같은 시기에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했던 인사들은 그저그런 학벌과 집안 사람들이었다. 처칠은 테헤란 회의에 참석하기 이전에 디킨으로부터 대면보고를 받은 반면, 미하일로비치 측에 파견된 사절단의 보고서는 읽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유고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을 두고 디킨과 맥클린이 처칠의 안목을 가렸다는 후세의 비난이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이미 사절단을 파견하기 전부터 빨치산과 체트닉의 활동 동향을 독일측 암호문 해독을 통해 현지 상황을 충분히 입수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굳이 사절단을 보낸 것은 과연 빨치산을 주도하는 유고공산당이 말이 통하는 사람들인지 알아보려는 사후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43년 말, 테헤란에서 만난 연합국 영수 3인. 여기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주도 빨치산이 처음으로 연합국사이에서 의제로 제시됐다. 처칠이 이야기를 꺼냈고, 스탈린은 표정관리 중이었고, 루즈벨트는 내 알바 아님.


매클린과 디킨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접수한 처칠은 1943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의 영수들, 즉 루즈벨트와 스탈린에 빨치산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람들, 도와줘야겠다"는 이야기였다. 나찌를 패퇴시켜야 한다는 연합국의 이해타산에 카라조르제 집안, 망명정부,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닉 모두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반면에 전쟁전까지 만 해도 뭐하나 봐 줄 것 없던 공산당이 1943년에 건국세력이 됐다. 초년 역마살 고생, 일부 횡액수에도 불구, 계미년 들어 서방에서 귀인을 만나서 운수대통. 이것이 티토의 사주팔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티토로서는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44년 5월 말경 보스니아 산동네 드르바르Drvar에 짱박혀 있던 티토의 산채에 독일 낙하산 부대가 들이닥쳤다. 빨치산 역사가들은 이것을 독일의 7차공세라고 명명한다. 아슬아슬한 탈출로 또 다시 위기를 모면한 티토는 그해 8월 이태리에서 처칠을 만난다. 영국의 지원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패셔니스타 산적두목과 노회한 노정객의 만남.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과 어울려 놀던 처칠의 편안한 태도와 긴장한 듯 각잡힌 티토 모습이 대조적이다. 1944년 8월 15일 나폴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7 : Mother of Gypsy Soul

릴랴나 부틀레르 페트로비치Ljiljana Buttler Petrović. 보스니아산 구유고의 가수로 대스타라고 부르기는 조금 모자란다. 본령은 집시뮤직이지만, 세브다흐도 능통하다. 에트노 뮤지션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로컬 카페 가수다.

1944년 아코디온 주자 집시 아빠 가수 크로아티아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아빠가 도망가고, 보스니아 로컬 카페에서 가수로 일하는 엄마 슬하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아파서, 대신 나가서 노래를 부른 것이 그대로 데뷔로 연결됐다. 그러다 편모로서의 삶이 고됬던지 엄마도 도망가버리고, 여사는 십대 나이에 홀홀 단신으로 남게 된다. 카페 가수로 살면서 어쩌다 하게 된 임신 끝에 첫 애를 낳았을 때가 14살 때라고 하니까, 초장부터 곡절이 많은 인생이다.

83년 발표작 커버에 실린 릴랴나 여사. 부틀레르라는 성을 붙이기 전의 모습이다. 언뜻 동양인 같은 인상도 있는데 어찌보면 강부자 여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70년대 들어 가수로 인정받게 되고 음반을 내면서 집시 뮤지션으로 어느 정도 인기도 끌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80년대 들어와서 유고의 대중음악이 더욱 서구화되거나 민요의 대중가요화가 진행되면서, 집시음악은 구린 음악이 됐던 듯 하다. 고심 끝에 여사는 1989년 점점 개판이 되가는 유고슬라비아를 뒤로 애들을 끌고 독일로 떴다.

말해봐 왜 날 버렸는지kaži zašto me ostavi. 2005년 발표작 첫곡으로 수록된 노래다. 시골구석 카페에서 집시가수가 부르는 정경을 상상해 보면 되겠다. 스스로가 일찍부터 여러번의 버림을 받아서 그런지, 노래 속에 버려진 사람의 흉금이 절실하다. 

독일이라는 이름의 타향, 한물간 여가수를 알아줄 사람은 없다. 전혀 유고스럽지 않은 이름 부틀레르Buttler는 독일에서 얻은 성이다. 영주권을 얻고자 위장결혼한 결과라고 한다. 유고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으로, 호텔 청소부 등 허드렛일로 호구했다.

이러던 그녀를 다시금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의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다. 어느날 우연히 옛날 레코드를 듣다가 삘받았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은퇴 여가수. 한번 다시 해보자는 프로듀서. 여사는 망설였다고 한다.

2002년 보스니아로 돌아와서 낸 앨범이 Mother of Gypsy Soul. 반응이 좋았다. 2005년 다시금 판을 냈다. Legends of Life라는 이름으로. 첫판이 몸이 덜풀린 서먹한 기가 있다면, 2005년판은 가수로서의 워밍업이 끝난 그야말로 완숙한 '작품'이 됐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맘에 드는 앨범이다.

또다른 2차 복귀작 수록곡. 나는 작은 집시소녀Ciganka sam mala. 여사가 '밤새워 노래부르고 춤추는 나는 당신의 작은 집시소녀...'의 생활을 살았으니 이런 해석이 나온다. 원래는 업템포의 곡인데 여사는 미드템포로 불렀다. 노래의 이면에 남을 즐겁게 해야하는 집시 여가수의 신산한 삶이 읽힌다.

릴랴나 여사의 매력은 낮은 중저음, 인생의 곡절이 베어있는 속깊은 노래들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버림받고 카페가수로 살다보니, 여사에게는 예술가나 인기가수로서의 고아한 자의식이 없다. 그런만큼 내려 놓고 불러서 그런가. 여사의 노래는 가식없고 진솔하다. 달관이랄까 체념이랄까. 전반적으로 고달픈 인생에 맞춰진 노래들이다. 그래서 붙었을 것이다. 집시 쏘울의 대모라는 별명도.

이 양반,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인생 좀 피나 싶었는데, 아쉽게도 2009년 예순 다섯에 돌아가셨다. 아쉬울 뿐이다. 고생 많으셨다. 편히 쉬시라.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9 : 쥐구멍에 뜬 볕

야이체Jajce에서 한숨 돌린 티토.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소위 야이체 공화국Jajice Republic 국면이다. 하지만 이때는 지난 우지체, 비하치 때하고는 뭔가가 달랐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독일군의 포위섬멸작전을 연거퍼 피했더니, 티토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다.

하지만 정작 돌파구는 해변이었다. 파시스트 이태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43년 7월에는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했고, 안되겠다 싶었던 왕가가 나서 무솔리니를 쳐냈다. 이태리가 우왕좌왕하면서, 나찌는 똥쭐이 바짝 탔다. 여기저기 손을 쓴다고 썼지만, 역부족. 이태리는 9월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렇게 2차대전 내내 사고만 치더니, 끝까지 나찌에게 도움이 안됐다.

야이체에서 한숨돌리던 티토에게도 이건 분명한 기회였다. 이태리군이 보유하던 군수품이 목표다. 이걸 빨리 접수해야겠는데, 달라면 줄까? 빨치산의 지위는 연합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잡히면 포로대접도 못받았다. 이런 사이에 뻘쭘하게 있는게 거시기했던지, 영국 군사사절 디킨Deakin까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이태리군 거점으로 병력을 급파해서 이태리군을 무장해재시키고 군수품을 쓸어담아 왔다.

9월에는 디킨보다 더 고위인사 피츠로이 맥클린Fitzroy McLean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사사절단이 야이체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빨치산과 영국 사이에는 보다 공식적이고 고위급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맥클린은 나중에 이 임무를 두고 '누가 더 독일군을 잘 죽이고, 더 잘 죽일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미션'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이 공산당에게만 사절단을 보낸 것이 아니라, 미하일로비치에게도 보냈다.)

맥클린과 같이 사진을 찍은 티토. 맥클린 준장은 007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의 걸물이다. 2차대전이 터지자 외교관을 사직하고 일병으로 자원입대해서 준장까지 됐다.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인데다, 현역 국회의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듯 하다. 어쨌건 현역의원이 군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태리군들에게 쓸어담은 무기들, 거기에 거의 공식적인 거나 다름없는 영국정부의 인정, 빨치산의 어깨에서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이런 달라진 상황과 위상을 정리할 정치적 이벤트가 필요했다. 43년 11월 빨치산 최고사령부는 2차 AVNOJ 회의를 야이체에서 개최한다. 포맷은 지난해와 비슷했지만, 미래의 정치체제를 두고 몇가지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1. 연방공화국으로서의 유고슬라비아 : 여섯개의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의 연합체로서 정치체제
2. 임시정부적 조직으로서 인민해방위원회 설립
3. 티토를 인민해방군의 원수 및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상으로 추대
4. 왕의 귀환 여부는 종전 후 국민투표 실시로 결정
2차 AVNOJ에서 연설하는 티토. 연설자 뒤에 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개인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토는 같은 빨치산에게도 신비의 인물이었다.

티토, 단순 무장집단 수괴에서 군대의 원수가 됐다. 이때부터 티토를 부를 때는 꼭 원수라는 칭호가 따라 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부적인 사정이야 어찌됐건 더 중요한 것은 외부의 눈길이다. 2차 AVNOJ 회의에는 영국과 미국의 군사사절단이 옵저버로 있었다. 맥클린, 디킨 등이 쓴 보고서는 그대로 처칠에게 전달됐고, 그 내용이 그대로 연합국 테헤란 회담에서 공유됐다.

당시 2차 AVNOJ회의가 열렸던 건물은 지금은 기념관이다. 내부를 보면 당시의 좌석배열을 그대로 해놓고 티토의 동상을 비치했다. 민족간의 피의 분쟁을 막았다는 이력때문에 그런지, 보스니아에서는 티토향수가 좀더 강한 것 같다.

같은 시점의 미하일로비치. 연합국의 정신적 지원을 오롯이 받다가, 공산당이 그림에 끼어들어 영 심기가 불편했다. 뭐라도 한 건 해야하는데, 손발이 말을 안듣는다.  각 지역의 체트닉 사령관들이 지각각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이태리가 전쟁에서 손을 떼니, 지금까지 이태리군과 공생하던 체트닉들이 마땅한 대체 보급선을 찾을 수 없었다.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가 뼈를 잡아가는 가운데, 크로아티아를 장악했어야 할 또 다른 권력 우스타샤의 실효적 지배범위는 자그레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편인 독일군들 조차 파벨리치를 '자그레브 시장'이라고 비꼬아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동요가 일어났다. 이 정권 믿어도 돼? 기층에서 뿐만 아니라 괴뢰정부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이 만약 대열을 이탈한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체트닉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보스니아 투즐라에서는 우스타샤 정권 치하의 방위군 2,200여명이 한꺼번에 빨치산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43년이 저물 즈음, 전략적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것은 티토의 공산당이었다.





2014년 4월 9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8 : 흑색작전과 영국에서 온 손님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 처칠이 흘린 말이지만, 이것은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의 대부분을 점한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 해변을 와 본 사람들은 안다. 대부분 모래 해변이 아니라 암벽해변이다. 걸어서 상륙은 언감생심, 여기에 오르려면 처음부터 기어야 한다. 여기에 어떻게 군을 상륙시킨다 해도,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곧바로 바다에서 솟아난 듯한 디나릭 알프스를 넘어야 한다. 보병들이라면 걸어서 넘겠지만, 여기에 탱크, 야포 등까지 옮기자면 전략적으로는 몰라도 전술적으로는 악몽이다.

그랬다. 처칠은 처음부터 발칸에 연합군을 상륙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발칸에서 독일군의 혼을 빼놓을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상륙 카드를 쥐고 계속해서 살살 흔들었다. 그게 독일군을 속인 것은 좋았는데, 아군 미하일로비치까지 속인 셈이다. 처칠에게 남은 선택지는 카드의 설득력을 더해주기 위해 발칸 저항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것 뿐이었다.

이런 처칠의 귀에 발칸에서 예상치않은 노이즈가 접수됐다. 독일군의 암호문을 해독하자, 기대했던 미하일로비치보다 빨치산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던 것. 처칠은 궁금했다. 현장 상황을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해 빨치산 쪽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한다. 43년 5월 27일 영국 중동사령부 소속 특작대 요원들이 몬테네그로의 야음을 틈타 낙하산으로 잠입, 티토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F.W.D 디킨Deakin을 포함한 3인이 그 주인공이다.

소련이라면 모를까 티토는 영국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왕가를 중심으로 한 망명정부도 영국에 있고, 미하일로비치에게는 41년말부터 영국 연락책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미하일로비치와 붙어 나에게 총질할 사람들... 이라는 게 뇌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 군사사절단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선전에는 엄청난 힘이 됐다.  '봐라.. 우리를 연합군도 인정하는 우리으 위용'..이라는 아우라가 더 붙었다.


디킨과 티토.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 디킨은 처칠의 문필 비서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독일군의 흑색작전이 전개되던 가운데, 티토 사령부로 투입됐다. 때문에 디킨이 남긴 회고록 '전장의 산'Embattled Mountain은 전형적 영국신사가 남긴 글 치고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연합군과의 접선, 아우라 다 좋았는데, 앉아서 전황을 논할 타이밍이 아니다. 5월부터 독일/이태리 연합군이 빨치산 소탕을 위한 '흑색작전'Operation Schwarz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백색작전 때보다 상황이 더 안좋았다. 몬테네그로 옹색한 산골에 빨치산 주력이 집결하다 보니, 포위섬멸이 더 쉬웠다. 총알과 식량은 이미 바닥이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훨씬 어려웠다. 빨치산 정예 제1프롤레타리아 사단이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공군까지 동원한 독일군의 폭격에 티토도 부상을 당했다. 영국 군사사절단 멤버 중의 하나까지 죽었다. 포위망을 뚫다가 빨치산 사단장급까지 전사했다. '총소리가 안들리면, 다 죽은 줄 알라'.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할 여유도 없었다.

죽을 맛이란 이런 것. 수톄스카 전투가 한참 벌어지던 때 행군하는 빨치산의 모습. 이렇게 걍 드러누워버린 모습이라도 남기니 나찌를 비롯한 파시즘에 맞서 어디서 싸웠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됐다.

티토를 중심으로한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수톄스카 강을 천신만고 끝에 건넌것이 6월달의 일이다. 독일/이태리/체트닉 일부까지 투입된 포위섬멸작전 덕에 빨치산 병력은 1/3(약 7천명 이상)이 무너졌다. 엄청난 손실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티토는 다시금 북서방향으로 이동했다. 수송용으로 썼던 말들을 잡아먹고 걷는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 보스니아 북서부 요충지인 야이체Jajce에 도착한 것이 43년 8월의 일이다.

야이체의 모습. 브르바스Vrbas강과 플리바Pliva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다, 언덕에 지은 성채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옛날부터 요새로 활용됐고, 봉건시대 때 만든 성벽이 두텁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야이체라면 당초 은거지 비하치하고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빨치산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똥개훈련 징하게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빨치산 입장에서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니....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유고 삼국지 7 : 사면초가 백색작전

빨치산이나 체트닉이나 42년 내내 쫓겨 다니느라 바빴다. 우스타샤는 쫓겨다닐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뭐 하나 속시원히 정리해 놓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풀이 같은 이들의 폭주는 빨치산과 체트닉 운동을 키워주는 효과를 냈다. 그 결과 우스타샤의 실질적인 통치권역은 NDH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자그레브에 파견된 독일군수뇌부는 우스타샤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시키지 않은 분란을 만들어 놓은 엑스멘, 고문관에 다름이 아니었다. 누가 용기를 내서 총통에게 우스타샤와 파벨리치를 내치자고 말을 꺼냈다. 하지만 '순수'를 사랑하는 총통, '순결'을 지향하는 꼴통들과 통하는 데가 있었다. 결과는 꽝이었다.

이 상황에서 2차대전의 향배가 서서히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내둥 밀리던 영국군이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를 공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군은 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발목이 잡혔다. 41년 여름, 독일에 징한 똥침을 맞았던 스탈린은 당초부터 처칠에 유럽에서 '제2전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대충 유고군을 대표하는 미하일로비치를 띄우는 것으로 퉁쳤던 영국이 드디어 그 제2전선을 만들 수 있는 계제에 도달한 것이다. 처칠이 모락모락 연합군 발칸상륙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칸은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Soft underbelly of Europe'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발칸을 치고 들어가면 독일과 이태리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1942년 유럽의 전황도. 나찌 독일의 절정기이기도 하다. 일부 몇나라를 제외한 전유럽을 석권했다. 발칸의 소요를 생각하면 처칠이 생각한 '하복부론'이 설득력을 가진다. 발칸이 하복부면 이태리는 X인가? 자료원 : wikimedia

그게 42년말의 이야기다. 전황이 이렇게 흐르자 나찌 독일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발칸을 안돈하기 위해서 저항세력을 조속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계산 속에서 독일은 일단 보스니아의 골치꺼리 빨치산을 소탕하기로 한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이다. 43년 1월 이태리군이 남쪽, 독일군과 우스타샤가 북서 방면에서 빨치산의 근거지 비하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치산이 누군가. 도망의 달인 아니던가. 포위섬멸을 피해서 일단 남동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름 급했다.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급하게 날렸지만, 소련이라고 당장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알아서 잘 살라'가 답이었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대장정을 거치느라 나온 부상병들까지 데리고 움직이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독일 주도 '백색작전'으로 인해 네레트바강을 건너 몬테네그로로 들어가는 빨치산 퇴로. 비하치에서 다시금 남동방면으로 내려가니 바로 작년에 왔던 길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피같은 고도'라는 말을 쓰는데, 빨치산들에게는 '피같은 위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차제에 미하일로비치도 머리가 복잡해 졌다. 어떻게든 지금 공산당 세력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발칸의 유일한 저항세력이자 해방자로서 포지셔닝이 불가능하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발칸에 상륙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동부, 몬테네그로, 달마시아의 체트닉분대들에 동원령을 내리고, 네레트바 강 건너에서 빨치산을 기다렸다. 빨치산을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덫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나중에 체트닉들에게는 오히려 함정이 됐다. 사학자 스테반 파블로위치Stevan Pavlowitch는 체트닉과 점령군의 동침이 '우연한 일'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 작전 때 나찌는 빨치산 뿐만 아니라 체트닉 부대도 같이 소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적 선택으로 체트닉에게는 나찌/파시스트들과의 내통 혐의가 붙었다.

우연이건 아니건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멸을 면하는 것이 목표다. 헤르체고비나를 갈라 남쪽으로 흐르는 네레트바강의 서안에 도착, 어떻게 어떻게 잡은 고위 독일군 포로를 미끼로 나찌와의 협상에 들어간다. '체트닉 때문에 힘들지? 우리가 정리해 줄까?', '만약 영국이 발칸에 상륙하고자 하면 우리가 혼내 줄께'. 이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덕에 5-6주를 벌었다. 독일한테는 배수의 진을 치듯이 보이려고 네레트바강의 다리를 부러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끊어진 다리 사이사이로 잔도를 만들어, 병력을 차곡차곡 서안으로 옮겼다.


독일의 '백색작전'으로 나온 빨치산의 도망담은 1969년 '네레트바강 전투'bitka na neretvi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됐다. 율브린너, 오손웰즈, 프랑코 네로, 하디 크루거, 세르게이 본다르축 등 호화 출연진에도 불구, 영화의 질은 여느 관제영화와 마찬가지로 영 꽝이다. 빨치산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부상병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결과적으로 지연/기만전술은 먹혔다. 병력의 대부분을 네레트바강 동안으로 옮기고, 기다리고 있던 체트닉들의 저지선을 깨고 들어갔다. 장비가 우월한 독일이나 이태리군에 비하면 기율도 없고, 코디네이션이 안되는 체트닉들은 훨씬 만만한 적이었다. 티토의 주력이 몬테네그로 산중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린 것은 그해 4월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