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토요일

구유고의 음악 17 : Mother of Gypsy Soul

릴랴나 부틀레르 페트로비치Ljiljana Buttler Petrović. 보스니아산 구유고의 가수로 대스타라고 부르기는 조금 모자란다. 본령은 집시뮤직이지만, 세브다흐도 능통하다. 에트노 뮤지션으로도 분류할 수 있겠지만, 본질은 로컬 카페 가수다.

1944년 아코디온 주자 집시 아빠 가수 크로아티아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아빠가 도망가고, 보스니아 로컬 카페에서 가수로 일하는 엄마 슬하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아파서, 대신 나가서 노래를 부른 것이 그대로 데뷔로 연결됐다. 그러다 편모로서의 삶이 고됬던지 엄마도 도망가버리고, 여사는 십대 나이에 홀홀 단신으로 남게 된다. 카페 가수로 살면서 어쩌다 하게 된 임신 끝에 첫 애를 낳았을 때가 14살 때라고 하니까, 초장부터 곡절이 많은 인생이다.

83년 발표작 커버에 실린 릴랴나 여사. 부틀레르라는 성을 붙이기 전의 모습이다. 언뜻 동양인 같은 인상도 있는데 어찌보면 강부자 여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70년대 들어 가수로 인정받게 되고 음반을 내면서 집시 뮤지션으로 어느 정도 인기도 끌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80년대 들어와서 유고의 대중음악이 더욱 서구화되거나 민요의 대중가요화가 진행되면서, 집시음악은 구린 음악이 됐던 듯 하다. 고심 끝에 여사는 1989년 점점 개판이 되가는 유고슬라비아를 뒤로 애들을 끌고 독일로 떴다.

말해봐 왜 날 버렸는지kaži zašto me ostavi. 2005년 발표작 첫곡으로 수록된 노래다. 시골구석 카페에서 집시가수가 부르는 정경을 상상해 보면 되겠다. 스스로가 일찍부터 여러번의 버림을 받아서 그런지, 노래 속에 버려진 사람의 흉금이 절실하다. 

독일이라는 이름의 타향, 한물간 여가수를 알아줄 사람은 없다. 전혀 유고스럽지 않은 이름 부틀레르Buttler는 독일에서 얻은 성이다. 영주권을 얻고자 위장결혼한 결과라고 한다. 유고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으로, 호텔 청소부 등 허드렛일로 호구했다.

이러던 그녀를 다시금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의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다. 어느날 우연히 옛날 레코드를 듣다가 삘받았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은퇴 여가수. 한번 다시 해보자는 프로듀서. 여사는 망설였다고 한다.

2002년 보스니아로 돌아와서 낸 앨범이 Mother of Gypsy Soul. 반응이 좋았다. 2005년 다시금 판을 냈다. Legends of Life라는 이름으로. 첫판이 몸이 덜풀린 서먹한 기가 있다면, 2005년판은 가수로서의 워밍업이 끝난 그야말로 완숙한 '작품'이 됐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맘에 드는 앨범이다.

또다른 2차 복귀작 수록곡. 나는 작은 집시소녀Ciganka sam mala. 여사가 '밤새워 노래부르고 춤추는 나는 당신의 작은 집시소녀...'의 생활을 살았으니 이런 해석이 나온다. 원래는 업템포의 곡인데 여사는 미드템포로 불렀다. 노래의 이면에 남을 즐겁게 해야하는 집시 여가수의 신산한 삶이 읽힌다.

릴랴나 여사의 매력은 낮은 중저음, 인생의 곡절이 베어있는 속깊은 노래들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버림받고 카페가수로 살다보니, 여사에게는 예술가나 인기가수로서의 고아한 자의식이 없다. 그런만큼 내려 놓고 불러서 그런가. 여사의 노래는 가식없고 진솔하다. 달관이랄까 체념이랄까. 전반적으로 고달픈 인생에 맞춰진 노래들이다. 그래서 붙었을 것이다. 집시 쏘울의 대모라는 별명도.

이 양반,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인생 좀 피나 싶었는데, 아쉽게도 2009년 예순 다섯에 돌아가셨다. 아쉬울 뿐이다. 고생 많으셨다. 편히 쉬시라.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유고 삼국지 9 : 쥐구멍에 뜬 볕

야이체Jajce에서 한숨 돌린 티토.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소위 야이체 공화국Jajice Republic 국면이다. 하지만 이때는 지난 우지체, 비하치 때하고는 뭔가가 달랐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독일군의 포위섬멸작전을 연거퍼 피했더니, 티토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다.

하지만 정작 돌파구는 해변이었다. 파시스트 이태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43년 7월에는 연합군이 시실리에 상륙했고, 안되겠다 싶었던 왕가가 나서 무솔리니를 쳐냈다. 이태리가 우왕좌왕하면서, 나찌는 똥쭐이 바짝 탔다. 여기저기 손을 쓴다고 썼지만, 역부족. 이태리는 9월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렇게 2차대전 내내 사고만 치더니, 끝까지 나찌에게 도움이 안됐다.

야이체에서 한숨돌리던 티토에게도 이건 분명한 기회였다. 이태리군이 보유하던 군수품이 목표다. 이걸 빨리 접수해야겠는데, 달라면 줄까? 빨치산의 지위는 연합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잡히면 포로대접도 못받았다. 이런 사이에 뻘쭘하게 있는게 거시기했던지, 영국 군사사절 디킨Deakin까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이태리군 거점으로 병력을 급파해서 이태리군을 무장해재시키고 군수품을 쓸어담아 왔다.

9월에는 디킨보다 더 고위인사 피츠로이 맥클린Fitzroy McLean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사사절단이 야이체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빨치산과 영국 사이에는 보다 공식적이고 고위급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맥클린은 나중에 이 임무를 두고 '누가 더 독일군을 잘 죽이고, 더 잘 죽일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미션'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이 공산당에게만 사절단을 보낸 것이 아니라, 미하일로비치에게도 보냈다.)

맥클린과 같이 사진을 찍은 티토. 맥클린 준장은 007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의 걸물이다. 2차대전이 터지자 외교관을 사직하고 일병으로 자원입대해서 준장까지 됐다.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인데다, 현역 국회의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듯 하다. 어쨌건 현역의원이 군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태리군들에게 쓸어담은 무기들, 거기에 거의 공식적인 거나 다름없는 영국정부의 인정, 빨치산의 어깨에서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이런 달라진 상황과 위상을 정리할 정치적 이벤트가 필요했다. 43년 11월 빨치산 최고사령부는 2차 AVNOJ 회의를 야이체에서 개최한다. 포맷은 지난해와 비슷했지만, 미래의 정치체제를 두고 몇가지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1. 연방공화국으로서의 유고슬라비아 : 여섯개의 공화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의 연합체로서 정치체제
2. 임시정부적 조직으로서 인민해방위원회 설립
3. 티토를 인민해방군의 원수 및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상으로 추대
4. 왕의 귀환 여부는 종전 후 국민투표 실시로 결정
2차 AVNOJ에서 연설하는 티토. 연설자 뒤에 있는 동상이 눈길을 끈다.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개인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토는 같은 빨치산에게도 신비의 인물이었다.

티토, 단순 무장집단 수괴에서 군대의 원수가 됐다. 이때부터 티토를 부를 때는 꼭 원수라는 칭호가 따라 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부적인 사정이야 어찌됐건 더 중요한 것은 외부의 눈길이다. 2차 AVNOJ 회의에는 영국과 미국의 군사사절단이 옵저버로 있었다. 맥클린, 디킨 등이 쓴 보고서는 그대로 처칠에게 전달됐고, 그 내용이 그대로 연합국 테헤란 회담에서 공유됐다.

당시 2차 AVNOJ회의가 열렸던 건물은 지금은 기념관이다. 내부를 보면 당시의 좌석배열을 그대로 해놓고 티토의 동상을 비치했다. 민족간의 피의 분쟁을 막았다는 이력때문에 그런지, 보스니아에서는 티토향수가 좀더 강한 것 같다.

같은 시점의 미하일로비치. 연합국의 정신적 지원을 오롯이 받다가, 공산당이 그림에 끼어들어 영 심기가 불편했다. 뭐라도 한 건 해야하는데, 손발이 말을 안듣는다.  각 지역의 체트닉 사령관들이 지각각으로 움직였다. 무엇보다 이태리가 전쟁에서 손을 떼니, 지금까지 이태리군과 공생하던 체트닉들이 마땅한 대체 보급선을 찾을 수 없었다.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가 뼈를 잡아가는 가운데, 크로아티아를 장악했어야 할 또 다른 권력 우스타샤의 실효적 지배범위는 자그레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같은 편인 독일군들 조차 파벨리치를 '자그레브 시장'이라고 비꼬아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동요가 일어났다. 이 정권 믿어도 돼? 기층에서 뿐만 아니라 괴뢰정부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이 만약 대열을 이탈한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체트닉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보스니아 투즐라에서는 우스타샤 정권 치하의 방위군 2,200여명이 한꺼번에 빨치산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43년이 저물 즈음, 전략적 꽃놀이 패를 쥐고 있는 것은 티토의 공산당이었다.





2014년 4월 9일 수요일

유고 삼국지 8 : 흑색작전과 영국에서 온 손님

'말랑말랑한 유럽의 하복부'. 처칠이 흘린 말이지만, 이것은 독일을 홀리기 위한 기만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의 대부분을 점한 크로아티아나 몬테네그로 해변을 와 본 사람들은 안다. 대부분 모래 해변이 아니라 암벽해변이다. 걸어서 상륙은 언감생심, 여기에 오르려면 처음부터 기어야 한다. 여기에 어떻게 군을 상륙시킨다 해도,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곧바로 바다에서 솟아난 듯한 디나릭 알프스를 넘어야 한다. 보병들이라면 걸어서 넘겠지만, 여기에 탱크, 야포 등까지 옮기자면 전략적으로는 몰라도 전술적으로는 악몽이다.

그랬다. 처칠은 처음부터 발칸에 연합군을 상륙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발칸에서 독일군의 혼을 빼놓을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상륙 카드를 쥐고 계속해서 살살 흔들었다. 그게 독일군을 속인 것은 좋았는데, 아군 미하일로비치까지 속인 셈이다. 처칠에게 남은 선택지는 카드의 설득력을 더해주기 위해 발칸 저항세력의 힘을 키워주는 것 뿐이었다.

이런 처칠의 귀에 발칸에서 예상치않은 노이즈가 접수됐다. 독일군의 암호문을 해독하자, 기대했던 미하일로비치보다 빨치산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던 것. 처칠은 궁금했다. 현장 상황을 보다 잘 파악하기 위해 빨치산 쪽에 사람을 파견하기로 한다. 43년 5월 27일 영국 중동사령부 소속 특작대 요원들이 몬테네그로의 야음을 틈타 낙하산으로 잠입, 티토와의 접선에 성공한다. F.W.D 디킨Deakin을 포함한 3인이 그 주인공이다.

소련이라면 모를까 티토는 영국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왕가를 중심으로 한 망명정부도 영국에 있고, 미하일로비치에게는 41년말부터 영국 연락책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미하일로비치와 붙어 나에게 총질할 사람들... 이라는 게 뇌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국 군사사절단을 붙이고 다니는 것은 선전에는 엄청난 힘이 됐다.  '봐라.. 우리를 연합군도 인정하는 우리으 위용'..이라는 아우라가 더 붙었다.


디킨과 티토.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 디킨은 처칠의 문필 비서로도 일한 경력이 있다. 독일군의 흑색작전이 전개되던 가운데, 티토 사령부로 투입됐다. 때문에 디킨이 남긴 회고록 '전장의 산'Embattled Mountain은 전형적 영국신사가 남긴 글 치고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연합군과의 접선, 아우라 다 좋았는데, 앉아서 전황을 논할 타이밍이 아니다. 5월부터 독일/이태리 연합군이 빨치산 소탕을 위한 '흑색작전'Operation Schwarz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백색작전 때보다 상황이 더 안좋았다. 몬테네그로 옹색한 산골에 빨치산 주력이 집결하다 보니, 포위섬멸이 더 쉬웠다. 총알과 식량은 이미 바닥이다. 부상병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훨씬 어려웠다. 빨치산 정예 제1프롤레타리아 사단이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공군까지 동원한 독일군의 폭격에 티토도 부상을 당했다. 영국 군사사절단 멤버 중의 하나까지 죽었다. 포위망을 뚫다가 빨치산 사단장급까지 전사했다. '총소리가 안들리면, 다 죽은 줄 알라'.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할 여유도 없었다.

죽을 맛이란 이런 것. 수톄스카 전투가 한참 벌어지던 때 행군하는 빨치산의 모습. 이렇게 걍 드러누워버린 모습이라도 남기니 나찌를 비롯한 파시즘에 맞서 어디서 싸웠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됐다.

티토를 중심으로한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수톄스카 강을 천신만고 끝에 건넌것이 6월달의 일이다. 독일/이태리/체트닉 일부까지 투입된 포위섬멸작전 덕에 빨치산 병력은 1/3(약 7천명 이상)이 무너졌다. 엄청난 손실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티토는 다시금 북서방향으로 이동했다. 수송용으로 썼던 말들을 잡아먹고 걷는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빨치산 최고사령부가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 보스니아 북서부 요충지인 야이체Jajce에 도착한 것이 43년 8월의 일이다.

야이체의 모습. 브르바스Vrbas강과 플리바Pliva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다, 언덕에 지은 성채까지 가려면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옛날부터 요새로 활용됐고, 봉건시대 때 만든 성벽이 두텁게 도시를 감싸고 있다.


야이체라면 당초 은거지 비하치하고도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빨치산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똥개훈련 징하게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빨치산 입장에서는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