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0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2: 마자르와의 조우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토미슬라브 사후 내분과 크로아티아를 둘러싼 열강의 획책 등으로 인해 지리멸렬한 양태를 답습하게 된다. 1089년 그나마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인사가 죽자 헝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왕 라슬루Laszlo 1세가 크로아티아 북부를 침입해서 달마시아 지역을 제외한 크로아티아를 접수했다.

헝가리 영토를 대폭 늘린 라슬루 1세는 나중에는 카톨릭의 성인으로까지 추대됐는데, 이 양반이 오늘 날의 자그레브를 주교령으로 지정하면서 자그레브가 크로아티아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놨다.

라슬루의 사후 그 후계자인 칼만Kalman이 12세기 초에 달마시아 지역 크로아티아 세력을 패퇴시키고 1102년 크로아티아의 족속들과 협약Pacta Conventa을 맺었다. 크로아티아의 귀족들 또는 영향력 있는 족속들은 헝가리의 왕을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협약이다. (흔히 말하는 2중 왕국dual monarchy 체제) 이로 인해 '법적으로' 크로아티아가 이 때부터 약 800년에 걸쳐 헝가리 지배를 받게 된다. 이같은 도식에 따라 13세기 초 유럽지도를 보면 얼추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서기 1100년 유럽의 판도 :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흡수된 모습이 보인다. 헝가리가 한때는 이렇게 잘 나가던 나라였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헝가리인들도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크로아티아를 자신과는 별개의 슬라보니아 왕국Kingdom of Slavonia라고 불렀으니, 어쨌거나 크로아티아를 슬라브족의 땅으로 본 것이다. 왕의 직위는 헝가리 왕들이 맡았지만, 실질적 자치에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크로아티아를 보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다스려보려는 헝가리인들의 야욕이 커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또 이 같은 이중왕국 Dual Monarchy 정치 체제를 통해서 발전한 것이 있으니, 거버너 또는 총독의 의미를 지닌 Ban과 대의결사체인 의회 사보르Sabor다. 왕이 따로 있으니 Ban은 세습보다는 선출에 의해서 추대됐다. 또한 Ban은 사보르를 통해서 귀족들의 중지를 모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행정부 입법부와 기묘하게 병치되는 부분이 있다. 

Pacta Conventa가 체결됐을 때만 하더라도 헝가리 사람들도 그렇게 크로아티아를 본격적으로 구워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헝가리에서 원격으로 크로아티아를 지배하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Pacta Conventa를 통해서 보스니아까지 자동적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스니아에 사는 슬라브족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게다가 달마시아를 비롯한 아드리아 해변지방은 지속적으로 해상대국인 베니스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실효적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 입장에서는 이들에 맞서 싸워주는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이 그저 고마웠고, 베니스가 실질적으로 지배를 하던 지역들에 대해서는 몇번 수복을 시도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마자르 족이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다고는 했지만, 헝가리 역시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이 13세기에 몽골족이 유럽까지 처들어오면서 헝가리왕이 크로아티아의 해변까지 피난을 다니는 일이 발생했다. 중간에 징기스칸의 후예인 오고타이가 죽지만 않았어도 발칸지역에 몽골에서 뻗어난 분국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그레브를 병풍처럼 안고 있는 슬례메산에 있는 메드베드그라드Medvedgrad. 몽고의 침입 때문에 만든 성이다.>

몽골침략 이후에도 헝가리 나름의 내전과 내분이 지속됐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는 즈린스키Zrinski나 프랑코판Frankopan 등의 호족세력의 실효적 지배가 이어졌으며, 왕권을 강화해보려는 헝가리의 시도는 간헐적으로나 성공을 거뒀을 뿐이었다. 

15세기 경에는 아예 헝가리가 왕위 승계 문제로 골치가 아팠을 때, 왕위계승자 하나가 아예 자다르Zadar와 주변지역을 10만 듀카트에 베니스에 양도했다. 양도라고 표현은 했지만, 기실 아드리아 해변을 중심으로 한 베니스가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를 헝가리가 약간의 깽값을 뜯으면서 인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보른다. 15세기 이후부터 18세기 말까지 이탈리아 세력이 크로아티아 해변을 법적, 실효적으로 지배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 기원

우리나라에서 크로아티아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떠올릴 이름은 아마 크로캅이 아닐까 싶다. 크로캅은 2000년대 초반 K1, 프라이드 등 이종격투기 무대를 풍미하면서 크로아티아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한국인(주로 남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더 나아가 축구팬들은 1998년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갔던 일, 농구 팬들은 90년대를 풍미한 시카고 불스의 식스맨 토니 쿠코치 정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최근에는 광고에도 몇번 등장해서 그런지, 관광대국으로서의 크로아티아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현대의 크로아티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6개 공화국 중의 하나에서 출발한다.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식 정식 국명 표현은 Republika Hrvatske, 즉 흐르밧인들의 공화국이다. 흐르밧Hrvat은 부족민족 이름이다. 크로아티아라는 말은 흐르밧이라는 이름의 라틴식 오독이다. 슬라브말에서는 목구멍 깊숙이 나는 'ㅎh' 발음이 외부 사람들에게는 'ㅋc/k'라는 말로 들렸던 것이 그 연원이다.

오늘날 흐르밧족에게는 오늘날의 이란 부근, 폴란드 남부에서 왔다는 등의 다양한 기원설이 존재한다. 적어도 남슬라브 민족의 일원이었던 이 족속은 기원 후 4-5세기 정도에 오늘 날의 크로아티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들 스스로가 다른 지방으로부터 온 도래인이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로마시대 이태리의 바로 이웃에 있는 만큼, 로마제국의 땅이었고, 그 만큼 유적들도 많이 남아있다. 지금도 크로아티아에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 유적 등이 그 가장 대표적인 예다..

크로아티아 풀라Pula의 원형경기장, 기원전후로 만들어졌다. 로마 경기장 중에서 보존상태가 양호한 경기장이다.

스플릿Split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발칸(오늘날의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의 황제다. 다스리기 점점 어려워지는 로마제국을 4분할한 황제로 유명하다. 기독교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정작 딸이 기독교 신자로 살다가 박해를 받아 살해당하는 등, 사연이 많은 황제다. 이 궁전은 은퇴 후 살던 곳이다.

로마의 지배 당시, 원래 이땅에는 일리리아Illyria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로마제국의 힘이 시들해지면서 고트Goth족, 아바르Avar족 등 외부 야만인들이 물을 흐려놓기 시작한다. 이들 등쌀에 일리리아 족이 이리 밀리고 저리 쫒겨날 때, 바로 이 때 슬라브 민족들도 이 지역으로 유입되는데, 흐르밧은 그 민족들 중의 일 족속이었던 것이다.

슬라브 족들이 약탈이 주업이었던 다른 야만 족들과 달랐던 것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주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연히 로마의 지배와 기독교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로마의 황제들은 그래도 이 사람들이 좀 말이 통한다 싶었던지, 아바르 족이나 여타 야만족들을 물리치는 데 이 사람들을 활용하고 이에 따라 정식으로 정주도 허가하는 사례가 나온다.

이 사람들이 역사에 제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AD 800년 경으로 부족사회의 틀을 깨고 나와서 봉건영주의 틀을 갖춘 리더들이 역사서에 간간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크로아티아 해안가 도시인 닌Nin을 중심으로 이들이 초기국가 형태로 나라를 세웠고, 10세기 초 토미슬라브Tomislav가 달마시아 지방(오늘 날의 크로아티아 남쪽 해변가 지역이다)과 파노니아(헝가리까지 들어가는 내륙의 평야지대)를 통일하면서 교황의 허락 하에 '왕'Kralj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때가 크로아티아로서는 처음으로 국가 체제가 형성된 때라고 볼 수 있을 듯 할 것 같다.


서기 900년경 유럽의 판도: 프랑크 제국, 동로마 등이 보이지만, 이 때만 해도 불가리아가 발칸의 패왕이었다.
* 자료원 : http://www.euratlas.net/history/europe/fr_index.html

이 때 당시 크로아티아를 근대적 의미에서 독립국으로 봐야할 것인지는 잘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면 시대 자체가 특정 영주의 발흥에 따라 세력판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중세시대이기 때문이다. 봉건영주나 부족들이 그 때 그 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신종하는 리더들이 달라졌던 때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비잔틴계 동로마 제국이 주권을 주장했던 적도 있고,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프랑크 왕국이 주권을 주장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이들의 주장은 실효지배를 의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그레브 중앙역 앞 광장에 세워진 토미슬라브왕의 동상 : 크로아티아의 통일왕국을 이룬 위인이지만 정작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거나 크로아티아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 프란뇨 투지만Franjo Tudjman 박사 스스로가 크로아티아를 1,000년의 꿈을 담은 나라 thousand year dream of statehood 라는 말로 형용한 만큼,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적어도 이때 당시가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때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또 우연찮게도 토미슬라브 이후에는 몇몇 직계 후손을 제외하고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는 '왕'의 칭호를 쓰는 실력자가 없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크로아티아가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는 오늘날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 족이 발흥하기 시작하고, 가장 전성기를 구가한 토미슬라브왕이 죽고 난 다음에는 힘의 균형이 마자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Latinica, Glagolica, Cirilica

지난 번에는 크로아티아어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이번에는 문자를 좀 짚어볼까 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라틴 알파벳을 약간 변형한 라티문자Latinica(라티니차라고 발음)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흔히 서구에서 쓰는 라틴 알파벳이라고 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어를 표현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슬라브어의 특성 상, 치찰음(예컨데는 츠, 치, 쯔, 스, 쉬 등) 등이 많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를 슬라브 족에게 전파하던 수도사들에게는 이게 하나의 딜레마였던 모양이다.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출신이라고 하던데, 키릴과 메토디우스Saint Cyril and Methodius라는 슬라브 출신 형제가 9세기 무렵에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냈으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글라골문자Glagolica라고 하는 문자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새로운 문자체계를 이들 형제에게 위임한 사람은 당시 한참 잘 나가던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다. 슬라브 문자를 잘 표현하는 문자 체계를 만든다는 것도 있었지만, 보리스 1세 입장에서는 슬라브 교회를 그리스 문자체계가 지배하던 비잔틴 하 동방정교로부터 독립시키고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독립성까지 획득하려던 획책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키릴 형제가 당시에 만든 문자는 오늘날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에서 활용되는 키릴문자 체제와는 현저하게 다르게 생겼는데, 현재 활용되는 키릴 문자는 형제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갈고 닦아서 정립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키릴 형제의 초기 작품 글라골문자Glagoljica는 달마시아 지방으로 전달되면서 크로아티아에 정착하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쓰였다는 것이다.

     <글라골 문자, Glagoljica 또는 Glagolica>

* 자료원: http://fly.cc.fer.hr/~zox/glagoljica.html

설교, 전교, 기도문 작성 등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문자였던 만큼, 글라골문자는 교회에서 주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으로 라틴어를 교회 공식언어로 활용하던 카톨릭에는 조금은 맞지 않는 것이어서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일정한 알력이 있었다.

라틴어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다보니, 당연히 기층민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고, 이런 데 대해서 슬라브 출신 주교들이 글라골 문자를 공공연히 활용한다. 10세기 쯤 바티칸에서 이것을 고쳐 보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닌Nin 지역의 주교이던 그르구르Grgur (그레고리의 슬라브식 표현)등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13세기 당시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아예 달마시아 남부지역에 글라골 문자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까지 한다.


<닌의 그루그르>
* 출처 : wikipedia

글라골 문자는 적어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는 카톨릭 교세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슬라브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다르니까 다른 문자를 쓰겠다는..... 물론 이 문자체제는 역사를 걸쳐서 라틴 알파벳으로 대체되지만, 만약 크로아티아가 헝가리나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지 않고, 터키 같은 강력한 외세에 적대할 일이 없었다면, 아직도 이 문자를 활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약소 민족의 역사가 정체성을 지키려는, 잊혀지지 않으려는 일련의 투쟁과정이라면, 적어도 크로아티아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했던 것 처럼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것을 더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까?

크로아티아는 지금 라틴문자 체제로  획일화되어 있지만, 세르비아의 경우에는 키릴 문자가 전해졌으니 현지에서는 치릴리차Cirilica라고 부른다. 키릴 문자는 세르비아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이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크로아티아어 또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어디에서 쓰나

크로아티아인들이 쓰는 언어는 스스로 부르기에 보통 크로아티아어(Croatian)라고 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말은 세르보 크로아티아어(Serbo-Croatian)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 네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어대학교 동유럽대학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과(http://yugo.hufs.ac.kr/)에서 가르치고 있다.

슬라브어 계통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금방 배우기는 꽤 어려운 언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거나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보다 쉽게 접근이 되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자 바로 옆나라 슬로베니아에서 쓰는 슬로베니아어와는 상당히 많은 부분 비슷하지만, 전화로 통화하면 서로 잘 못알아 듣는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슬로베니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한 80% 비슷하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인 마케도니아의 경우에는 불가리아어가 더 가깝다. 세르비아 사람들 평으로는 서로 천천히 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불가리아에서는 마케도니아에서 쓰는 말을 불가리아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마케도니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가장 최근 독립한 코소보의 경우에는 알바니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공용어가 알바니아어다. 이는 또 슬라브계통의 언어와는 천양지차의 언어인데, 코소보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알바니아어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거의 중국어와 영어만큼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알바니아어도 어차피 인도유럽 계통의 언어로 알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코소보 사람이 자기네는 세르비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쓴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쓰나

어쨌거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문자를 라틴계통 알파벳에서 받아왔기 때문에, 보통 자신들의 문자를 라티니차(Latinica)라고 한다. 세르비아에서는 키릴문자(또는 치릴리차, Cirilica)를 쓰기 때문에, 문자 자체가 민족을 가르는 중요한 분계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어 알파벳>

크로아티아 문자 영어발음 발음례
A /a/ a as in car
B /b/ b as in bat
C /ts/ c as in cats
Č /tʃ/ č as in chalk
Ć /tɕ/ ć as in church
D /d/ d as in dig
/dʒ/ dž as in gin
Đ /dʑ/ đ as in jack
E /e/ e as in let
F /f/ f as in fit
G /ɡ/ g as in game
H /x/ h as in heaven
I /i/ i as in east
J /j/ j as in year
K /k/ k as in cut
L /l/ l as in love
Lj /ʎ/ lj as in million
M /m/ m as in mice
N /n/ n as in nice
Nj /ɲ/ nj as in onion
O /o/ o as in autmn
P /p/ p as in pick
R /r/ r as in Fritz
S /s/ s as in sound
Š /ʃ/ š as in shut
T /t/ t as in time
U /u/ u as in shoot
V /ʋ/ v as in verb
Z /z/ z as in zest
Ž /ʒ/ ž as in pleasure


* 출처 : http://mylanguages.org/croatian_alphabet.php

위의 글자체계를 보시면 알겠지만, 총 30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보통 우리가 두개의 낱글자로 오인하기 쉬운 Lj, Dž, Nj 같은 글자는 크로아티아어의 입장에서는 한개의 낱글자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발음자체를 소리나는 대로 글자로 옮겼기 때문에 읽는 것 자체는 매우 쉽다. 글자가 눈에 안들어오는 것이 문제지..


몇가지 용례 및 특징들

보통 영어 알파벳에서 곧잘 쓰는 y, w 등이 없다. y는 j가 대신하고, w는 v가 대표한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 말로 슬라브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미묘한 걸림돌은 역시 치찰음 계통이 아닐까 한다.

c는 대충 우리 발음으로 쯔 정도로 표기할 수 있다. 그러나 č, ć 는 모두 ㅊ 발음이며 사실 듣는 입장에서 구분이 쉽지 않다. 약간의 구분이 있다면,  č는 권설음이다. 즉 혀를 안으로 말고 발음하는 ㅊ가 되겠다. 크로아티아에서도 다양한 사투리 덕에 일부 지역에서는 이 두가지 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뉴스 앵커들도 이를 구분하지 않고 발음하는 일이 있다는데, 나 스스로가 이를 구분할 능력이 없기에 할말이 없다.

s는 ㅅ 발음이며, š는 ㅅ의 권설음이다. 쉬 발음이 가장 가깝다 하겠다.  z는 ㅈ 발음이 나며,  ž는 역시 ㅈ의 권설음, 쥐 발음이 난다. dž, đ는 모두 약간 강한 ㅈ 발음인데, đ는 ć와 비슷하게 해당 발음의 연음이다.


어쨌거나 서구 언어 중에서는 영어, 불어, 독어를 주로 배워온 우리 입장에서는 이 c 계통의 발음들을 일률적으로 ㅋ 발음으로 표현하는 수가 많다.

예컨대 Zenica: 이곳에서는 '제니짜'라고 읽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제니카'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발음과 관련해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오류는 사람 이름을 발음할 때 일어난다. Jurić :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백발백중 '주릭'이라고 읽지만, 제대로 된 크로아티아 발음은 '유리치'다. 이곳 사람들 성씨의 대부분은 ć로 끝나기 때문에 남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써주는 것이 좋다.

또하나 특징적인 면모는 r에서 찾을 수 있다. 크로아티아어에서는 r이 모음 역할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  덕분에 이곳 단어 중에서는 우리 입장에서는 순전히 자음만으로 이뤄진 단어가 있는데;

Trst (트르스트) : 이태리의 도시 Trieste(트리에스테)
Vrt(브르트) : 정원
Skrb(스크릅) : 복지
Srb (스릅) : 세르비아


얼마나 어려운가

크로아티아어는 우리나라 같이 별개의 독립언어족(우랄알타이어족) 입장에서는 매우 생경하고 생소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처음 자그레브 도착한 다음에 길 이름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단어도 생소하지만, 슬라브어 답게 우리한테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한 2음절 넘어가면 뒷부분은 어물쩍 넘어가야하는 상황이 한동안 지속된다. 만약 상대가 못알아 먹으면 참으로 난감한 시추에이션 되겠다.

일단 명사의 성별이 3성(남.여.중)인데다, 단복수가 엄연히 구분되고, 이것이 여섯가지 격변화(여기에서 호격 vocative를 합치면 모두 7격)를 거친다는 것. 이것만 해도 명사에서는 3x2x6=36가지의 버라이어티한 변화가 나오게 되고, 명사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도 명사가 들어가 있는 장단에 맞춰 복잡한 춤을 춘다. 이러한 변화를 한 눈에 외우는 것은 일반인으로써는 상당히 어려운 일로, 때문에 크로아티아어 독학은 거의 불가능하다.

문법 룰도 허다한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룰에 두 세가지 예외가 존재한다는 거.....

자그레브에서는 표준어가 광범위하게 통용되지만, 조금만 바깥으로 나가도 바로 사투리가 튀어나온다는 것이 또다른 써커펀치다. 이는 크로아티아 표준어가 자그레브 지역보다는 보다 동쪽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크로아티아어 순수론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개탄할 만한 일이지만, 이것도 어떻게든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 되겠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크로아티아 사람들 조차도  문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자평이다. 문법에서도 남녀유별이 존재해서 과거형을 개입한 문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하는 말이 유별하다.

러시아어와 비교를 하면 비슷한 단어는 많지만, 기나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분화되어서, 서로 잘 못알아 듣는다. 다만, 이들 같은 경우에는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배울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어를 배우기 쉽다는 것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억양이 있긴 하지만, 러시아어만큼 쎄지는 않다. 발음도 좀 부드러워서, 우리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러시아나 프랑스 발음을 따라하는 데 들어가는 유별난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는 듯 하다.

몰라도 알아 보는 방법은

구글 번역기를 활용할 경우 크로아티아어를 여러 언어로 전환해 볼 수는 있지만, 아직도 상당히 많은 번역상의 오류가 나오기 때문에 믿고 사용하기는 어렵다. 번역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때 크로아티아 문법 상식이 있으면,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아는데 상당히 도움 된다.

다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편이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런대로 먹힌다. 특히 청장년층의 영어 구사 능력은 꽤 높은 편이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정서

크로아티아에 온지도 어언 1년 반이다. 뭔가 기록이라도 해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왤까?

1930년대 발칸지역을 방문한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방문과 기행의 동기가 묘연하다. '그냥'이라고 말하려면 좀 심할까 싶지만, 그의 저작 'Black Lamb and Grey Falcon'(1941)에서는 세르비아의 왕(Aleksandar Karadjordjevic)이 프랑스에서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냥, 뜬금없이 기행을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발칸 지역을 돌아다녔을까? 책이 너무 두꺼워서 다시 읽을 맘이 없지만, 웨스트는 이에 대해 끝까지 모호했다.

후대 사람인 로버트 카플란(Robert Kaplan) 역시 1980년대 발칸 지역을 방문하고, 'Balkan Ghosts'(1993)라는 .기행문을 남긴다. 그는 레베카 웨스트에 비해서는 보다 명확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서문에서 글로벌화로 인해 세계가 비슷비슷해지고 있는 가운데, 과거의 기억이 빠르게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는 발칸 지역은 바깥으로 목을 메어 소리쳤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쓰고 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역사와 예술 그리고 정치를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발칸을 방문했다는게 그의 변이다.

티토가 살아있던 시절,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이 지역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질 못했다. 20세기 말에 유고가 붕괴하고, 드럽고 지저분한 내전이 지속된 이유도 결국 누구도 발칸의 정서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대로 대응할 시기도 놓쳤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서, 발칸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들었고(혹은 강제됐고?), 이곳 사람들도 그럭저럭 '과거는 잊고 잘 지내자'고 하지만, 크로아티아를 포함해서 인근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깔린 도저한 흐름은 나같은 외지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2012년 말 크로아티아의 독립 전쟁영웅 안테 고토비나(Ante Gotovina) 장군이 헤이그 전범재판에서 사면을 받았을 때, 자그레브 여기저기에서 경적소리가 터지고, 도시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들어섰던 적이 있다. 헤이그 전범재판이란 과정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하여 이곳 사람들에게는 외계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닫히고 불투명한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사실은 누구도 깨끗하기 어려웠던 전쟁이기에, 그 결말은 예측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재판소가 무죄라고 평결을 내렸으니,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90% 이상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환영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크로아티아인 동료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이런 마음, 바깥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그 때서야 깨달았다. 이쪽 지역 사람들 마음에 다가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친절함, 상냥함, 순수함... 이런 외양적 모습들 저 너머에는 외부 사람들 누구도 알기 어려운 곡절이 있음을...내가 1년 좀 넘는 생활을 하면서 익혔던 이쪽 사람들 민심은 사실은 겉껍데기였음을...

어쨌거나 발칸의 정서를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연원과 심연을 드려다보려는 시도 자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발칸의 내력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아주 헛된 수고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부터 남기는 기록들은 크로아티아는 물론 주변 민족들의 정서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단서는 역사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이렇게 정리해 놓은 역사가 과연 그 결과로 오늘의 현실을 낳았는지, 아니면 오늘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역사속에서 이해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인지는 아닌지. 결국 발칸의 역사는 이곳 사람들 나름의 몫이다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끝을 맺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