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일요일

구유고의 집시 4 : 영화 속 집시 2 - Anđeo Čuvar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사회문제의 하나는 집시들의 앵벌이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집시들의 구걸이야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런 일들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앵벌이가 산업화되자 당연히 인신매매, 아동학대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집시들이 많이 모여사는 구유고 지역이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리가 없다

이 문제를 작심하고 들여다본 유고 영화가 '수호천사'Anđeo čuvar(1987)다.

스토리는 이렇다. 영화의 초두는 집시 마을 상공에서 천천히 마을, 특히 주인공 집시네 집으로 하강하는 부감샷으로 시작한다. 그야말로 수호천사의 하강을 보여주는 샷이다. 그럼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신문기자 드라간Dragan은 집시들의 인신매매 현황을 취재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집시아이들 중에서 샤인Šajn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 사회사업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음악(아코디온)에 재능이 있다는데, 다년간의 학대를 겪은 탓인지 맘을 좀처럼 열지 않는다.

신문기자 드라간Dragan. 1936년생 마케도니아 출신의 류비샤 사마르지치Ljubiša Samardžić가 역할을 맡았다. 슬라브인 답게 2m에 가까운 장신이다. 덕분에 상대역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훨씬 작아보인다.

샤인Šajn 역할을 맡은 야쿱 암지치Jakup Amzić. 이상한 일은 집시들은 주연을 맡아도 영화배우를 업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영화 속의 이 아이는 지금은 30대 후반 나이가 됐을 텐데, 후속작도 없고 뭐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샤인을 집으로 보내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한 드라간. 잘 사는지 집시 마을을 방문해 보기로 한다. 갔더니 왠 걸. 경제력 제로 아빠가 다시 샤인을 '조직'에 팔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도 얼마전에 죽고.. 기왕에 돋은 궁금증/측은지심으로 드라간은 베니스까지 샤인을 찾아 나선다.

이런 애 본 적있니? 당연히 애들은 모르쇠. 

드라간은 천신만고 끝에 경찰에게 잡힌 샤인을 다시 찾아낸다. 밥(+술)도 사주고 놀이동산도 같이 가주는 드라간에게 샤인은 마음을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드라간의 자동차 뒷자석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샤인. 창녀로 일하는 같은 처지의 집시소녀다.  

계속되는 '조직'의 학대를 참지 못한 샤인, 결국 드라간과 같이 세르비아로 도망친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사회시설에 샤인을 의탁할 생각을 하던 드라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샤인은 참지못하고 몰래 고향집으로 간다.

다시금 샤인을 찾으러 집시마을을 방문한 드라간. 그런데 샤인의 태도가 영 삐딱하다. 알아보니, 아빠는 감옥에 갔고 어린 동생들만 집에 남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샤인의 분노는 왜 드라간이 엄마의 죽음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냐는 데서 비롯된다.  집안을 챙기기 위해서는 다시 이태리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샤인의 퉁명스런 대답이다.

샤인의 쌀쌀한 태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드라간의 '영업 방해' 사실을 알아챈 '조직'이 나선 것이다. 결국 드라간은 마을에서 '조직'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영화는 결국 '수호천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람객에게 던진다. 드라간의 선의는 무시할 수 없지만, 그가 샤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아원에 의탁하는 것 뿐이다. '조직'의 작태는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샤인의 동생들은 연명할 건덕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란 선의로 샤인을 구하려다 목숨까지 잃은 드라간인가? 아니면 인륜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집시들에게 살 구석을 마련해주는 '조직'인가? 물론 영화는 질문만 할 뿐. 대답은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가 나오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는 앞서 소개한 '깃털수집상'이 나온 60년대와는 상당히 판이한 상태에 있었다. 티토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민족주의가 사회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던 때다. 여느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서도 개방적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시들의 앵벌이가 고질화되던 시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성조지의 날'Đurđevdan 축제일에 집시들이 냇가에서 몸을 씻는다. 아무리 무법해 보여도 집시들 나름의 사회적 질서와 제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집어 넣은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샷에는 쓰레기 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드라간의 모습도 비춘다. 구유고 집시음악의 거두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이 영화에서 샤인의 아빠 역할을 맡고, 메인테마Sajbija까지 불렀다. 

이 같은 문제는 EU가 들어선 오늘날이라고 특별한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집시들이 많은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까지 EU로 가입한 만큼, 집시들의 휴먼 트래피킹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간 듯 하다. EU가 풀어야할 난제다.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구유고의 음악 6 :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Klapa

오늘날 크로아티아 해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달마시아에는 클라파Klapa라는 남성중창 전통이 발달해 있다. 한참 관광시즌 때 자다르, 쉬베닉, 트로기르, 스플릿, 두브로브닉 등의 해변도시를 걷다보면 이들 남성 중창단을 심심치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라파 합창단. 위 밴드가 클라파 캄비Klapa Cambi 아래쪽이 클라파 인트라데Klapa Intrade다.

처음 들어보면 '일 디보'Il Divo가 부르는 칸쪼네?같은 느낌이 문득 드는데, 이것이 사실은 크로아티아 고유의 음악이다. 칸쪼네 냄새가 강하게 베인 것은 아무래도 베니스가 달마시아를 상당히 오랫동안 지배한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개의 서양음악이 그렇듯 시작은 교회음악이다. 아무래도 해변마을 가난한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모인 미사에서 성대한 오케스트라를 초빙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대체적으로 암마추어들 중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모아서 성가를 부르면서 미사를 집전했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할 사람이 없다보니, 당연히 무반주 아카펠라다. 

클라파 중창단이 교회에서 아카펠라로 합창하는 모습. 

이 같은 교회음악의 전통은 슬라브족의 전통적인 민속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달마시아 산구석이나 인근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양가죽 백파이프, 지난 번에도 소개한 적인 구슬레 음악이 남아있다. 

카톨릭 교회, 예수회, 프란체스코회 등의 카톨릭 조직들은 이런 원시족 슬라브족에게 그레고리안식의 음계와 화성을 전했다. 그것이 민간에 스며들어 만들어진 것이 클라파인 것이다.  서양음계를 갖춘 다성합창이다 보니, 테너, 바리톤, 베이스 등의 성부가 다 있지만, 오페라나 성악의 발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중심의 음악이다.

서양음계를 받아들이고 다성으로 소화했다고 해서, 클라파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희한하게 단조 노래가 없다. 웅장함과 슬픔을 대변하는 조성이 없다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하지만\ 달마시아의 하늘과 바다를\ 보면 그럴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파란 하늘, 이 파란 바다, 이 아름다운 자연풍광에서 슬픔과 심각함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달마시아의 생활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달마시아를 오랜 기간 경영했던 베니스의 기본 방침은 '착취'에 가까웠다. 식민지 백성들이 '학자 보다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베니스는 의도적인 궁핍화 정책을 추구화했다. 그나마 달마시아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유고슬라비아 당시 해외여행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다음이니,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슬라브의 우수는 어디가고 어찌 찬가만 남은 셈인지 모르겠다.

달마시아 어느 해변 정경. 우리에게 떠오르는 노랫말은 '근심을 접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다.

가사는 주로 하늘, 바다, 태양, 포도주, 동네 일상사 등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소갯말에는 짝사랑, 슬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허나 조성이 영 딴판이니 믿기 어렵다.

유네스코는 나 같은 문외한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러 저러한 음악적 이유로 2012년 클라파 음악을 유네스코 무형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그 설명은 여기로) 보통 문화유산 쯤 되면 대다수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징표도 될 법한데, 클라파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아마추어 및 프로 클라파 중창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실력있는 밴드들은 어딜가나 매진이다. 달마시아의 오미쉬Omiš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클라파 페스티벌이 성대하게 개최되어, 실력있는 합창단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클라파 캄비의 '좋은날'Dan Ljubezni. 클라파 가사의 상당수는 달마시아 사투리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지금은 달마시아가 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이지만, 원래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 주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의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시아가 모여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가 된 것이다. 그만큼 달마시아와 자그레브 중심의 크로아티아 본토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가 크다.  


현재 크로아티아에서 클라파 음악은 전통적인 무반주에서 벗어나 전통악기 탐부리차, 기타, 베이스 등이 가미되어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 최근에는 남성 일색 클라파 합창에 여성중창단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단조 클라파 합창곡이 나오는게 다음 순서가 아닐까 한다. 

클라파 인트라데의 '크로아티아여, 맘으로부터 너를 사랑해'Croatio iz duše te ljubim. 달마시아가 아무리 크로아티아 본토와 문화적 차이가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분리주의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파 인트라데가 부른 이 애국적 크로아티아 찬가는 크로아티아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구유고의 집시 3 : 영화 속 집시 1 - Skupljači Perja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다수 집시영화들이 나와서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다. 1967년작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은 깐느 그랑쁘리 수상작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역시 집시들을 소재로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1989)으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것 말고도 Anđeo Čuvar(1987), Crna Mačka Beli Mačor(1998), Ciganska Magija(1998) 등 (구)유고산 집시 영화는 허다하고 반향도 크다.

평론가들은 이들 영화가 집시를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외부자의 시각으로 외부자를 위해 만들어진 집시 영화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영화들에 대해서는 서구 중심부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라는 비난도 있다.

어떻게 보면 주변부의 비애다. 우리나라도 해외에서 각광을 받으려면, '만다라', '서편제'처럼 서구의 이국취향을 살려주거나 아니면 '섬', '올드보이'처럼 폭력적으로 충격적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어찌 됐건 집시들을 서커스 곰처럼 부린 것도 아닌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랴.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유고슬라비아처럼 내부사회 문제를 까밝힌 나라도 많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줘야 한다. 집시에 의한 집시를 위한 집시의 영화는 집시들이 직접 만들면 된다.

유고슬라비아 영화를 세계무대에 제대로 선보인 첫번째 영화가 바로 '거위털 수집상'Skupljači perja(영어로 Feather Gatherers)이다. 영어 제목은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I Even Met Happy Gypsies)다. 왜 이런 차이가?  Feather Gatherers라는 직업 자체가 서구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네'는 집시들의 송가 젤렘 젤렘Djelem Djelem에 나오는 가사의 한 구절이다. (젤렘 젤렘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영화 포스터.

영화 내용은 이렇다. 물론 스포일러 주의다.

무대는 보이보디나Vojvodina. 예전에 헝가리 땅이었다가 1차대전으로 세르비아에 귀속된 지역이다. 세르비아 말고도 다양한 민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는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 세르비아어 말고도 헝가리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때문에 세르비아에서도 자막없이는 이 영화를 이해하기 힘들다..

주인공인 집시 보라Bora는 인근 농가로부터 거위 깃털을 수집해서 파는 장사꾼이다. 젊고 힘도 세다보니 술-도박-여색의 3박자에 거칠 것이 없다. 이미 자기보다 연상의 마누라가 있지만, 나쁜남자답게 대드는 마누라에게는 구타가 약이다.

보라. 짐승남이라고 이마에 쓰여있다. 

보라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시 처녀 티사Tisa를 좋아한다. 동업을 하는 미르타Mirta의 의붓딸이다.

보라가 좋아하는 티사. 실제 집시인 고르다나 요바노비치Gordana Jovanović가 맡았다. 영화를 찍을 때까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티사는 관습과 부모의 주선에 따라 동네 어린애에게 시집가지만, 신랑이 너무 어린 바람에 합방에 실패. 결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보라는 이 때다 싶어 미르타에게 티사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하지만 미르타는 이를 거절한다. 왜냐. 그 스스로가 티사한테 흑심이 있었거든.

딸을 다오. 싫다 새꺄.

아니나 다를까. 티사를 겁탈하려던 미르타, 마누라가 말린 덕에 미수에 그친다. 티사는 도망과 곡절 끝에 보라와 만나 교회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빡친 미르타, 보라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그 사이 티사는 보라의 마누라가 준 돈으로 베오그라드로 도망갔다가 이도 저도 못하고 거리에서 겁탈만 당한채 결국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온다.

티사를 찾아다니던 보라, 티사가 다시 미르타에게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복수에 나선다. 깃털 수북한 작업장에서 만난 두 사람. 격투 끝에 미르타는 죽고, 보라는 도망에 나선다. 마지막 장면은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이 집시 마을에서 보라를 탐문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집시들은 공권력의 사법정의 구현노력에 대해서는 시종 모르쇠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일곱살 쯤 되보이는 집시 뽀이가 담배를 피면서 탐문 중인 유고슬라비아 경찰들을 노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여기는 신경 끄는 게 좋아'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영화감독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Aleksandar Petrović는 당시 유고 영화계 블랙 웨이브의 기수였다. 티토 스스로가 영화광이다 보니 영화산업을 적극 후원했다. 덕분에, 유고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배달의 기수'류의 영화가 판을 쳤다. 페트로비치는 이 같은 조류에서 벗어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사람이다.

주연배우로 보라 역을 맡았던 사람이 유고산 국제스타 1호 베킴 페흐미유Bekim Fehmiu다.

추레한 모습을 벗어던진 베킴 페흐미유. 초기 헐리우드 진출작으로 캔디스 버겐Candice Bergen과 공연한 Adventurers(1970) 만 안 망했어도,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질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시가 아니라 코소보 알바니아계인 이 사람은 이 영화를 통해 국제적 스타덤에 올랐다.  그런데 이 양반, 잘 살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되자 베오그라드에서 사는 것이 불편해졌다. 1987년 결국 민족주의 정책에 대한 항의표시로 연극 공연 도중에 무대를 박차고 나간 뒤, 다시는 배우로 복귀하지 않았다. 2001년 잠깐 인터뷰에서 드러난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에 대한 지독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은둔생활을 지속하다가 2010년 76세의 나이에 베오그라드 자택에서 권총자살을 택한다. 아내에게 적어놓은 편지에서 그는 '암만 생각해도 인생이 의미가 없어서...'라고 적었다. 정치가 애꿎은 사람 하나 잡은 셈이다.

1951년생의 또다른 주연 고르다나 요바노비치는 그 이후 딱히 출연작이 많지 않다. IMDB에서는 '수호천사'에서도 출연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1967년 그러니까 이팔청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만 보여주고 주섬주섬 사라졌다. 1999년에 죽었으니 오십이 채 안된 나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에는 가정폭력, 구타, 도벽, 주벽, 제도에 대한 거부 등 집시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가운데 영화제목을 '행복한 집시들 만났네'라고 붙였으니, 참 역설적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60년대는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전성기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미국-소련한테도 꿀리지 않는 정치적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 거칠 것 없는 유고슬라비아에 어떤 장애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집시들의 앤썸, 젤렘 젤렘은 환청과도 같이 지속된다.

영화 속의 젤렘 젤렘 노래부르는 장면. 집시 여가수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르는 올리베라 카타리나Olivera Katarina는 당시 유고 최고의 (섹시) 스타였다.  베킴 페흐미유의 자기파괴적 야성미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구유고의 집시 2 : 어떻게 살 것인가

2차대전을 맞아 집시들은 유태인들과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발칸지역 역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독일 나찌 점령군은 집시와 세르비아인들을 개잡듯 잡았다. 2차 대전 중 유태인들은 6백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집시들에게는 그 수를 헤아려 줄 사람도 없다.

이 같은 참상은 결국 스스로가 정치세력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집시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을까.

세르비아의 집시 쟈르코 요바노비치Žarko Jovanović는 2차대전을 맞아 일족의 대부분을 수용소에 잃었다. 티토의 빨치산에 합류하여 목숨을 보전한 쟈르코는 1964년 파리로 이주한다. 그는 1971년 세계최초로 런던에서 전세계집시회의Romani Congress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78년 2차 제네바 회의 당시에는 '문화부 장관'에 추대됐다. 스스로는 일국의 장관이 아니라 전세계 (집시들의) 장관이니 훨씬 격이 높다고 주장했다.

1971년 회의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집시깃발이 공인되고, 더 나아가 쟈르코 요바노비치가 만든 집시들의 앤썸, 젤렘 젤렘Đelem Đelem(이것도 지역마다 고유한 표기 방식에 따라 Djelem Djelem, Gelem Gelem, Jelem Jelem, Dzelem Dzelem 등 허다한 방식으로 표기)이 채택됐다는 것이다. 이제 국기國旗에 국가國歌가 생겼으니, 모든 게 거의 이뤄졌다. 국가國家만 만들면 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집시들의 깃발. 깃발 정중앙에 인도에서 모티브를 따 온 바퀴문양이 그려져 있다.  원래 만들어진 것은 2차 대전 전의 일인데, 1971년에서야 전세계 집시들에게 공인됐다고 한다. 

젤렘 젤렘. '간다 간다' 또는 '유랑한다'라는 뜻의 로마니어 단어라고 한다. 원래 있던 멜로디에 요바노비치가 가사를 붙였다. 집시 가수 또는 밴드들 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민족가, 국가 또는 앤썸이라고 한다면 집단의 뜻을 담은 힘찬 노래여야겠지만, 이 노래에는 오히려 슬픔과 우수가 서려 있다. 국가로써는 부적격이다.

쟈르코 요바노비치가 직접 부른 젤렘 젤렘. 요바노비치는 파리에서 발랄라이카(러시아 3현악기) 연주자로 활약했다. 원래는 '일어서라 집시여'Opre Roma라는 보다 선동적인 제목을 붙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나온 가사를 소개하자면 대충 이런 뜻이라고 한다.

"먼 길을 가다 행복한 집시들을 만났네. 어디서 오는가 집시여. 텐트를 짊어지고 행복하게 길을 가네.... 내 원래 가족이 있었으나, 검은 군단이 잡아 죽였다네. 가자, 전세계 집시들이여. 집시들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네. 일어나라 집시여. 지금 행동한다면 더 높게 일어서리.."

검은 군단Black Legion이 가족을 죽였다는 내용은 요바노비치의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나온 것이다. 나찌 친위대,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모두 검은 색 옷을 유니폼으로 입었거든. 2차대전 당시를 생각하면 집시들에게는 상당히 보편적 호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집시들이 반드시 이 가사에 천착하고 있지는 않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젤렘 젤렘 만큼은 집시들의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세르비아의 집시뮤직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쏘울풀하게 부른 젤렘 젤렘. 가사는 첫소절을 제외하고는 요바노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목소리에 곁들여 나오는 화면은 1987년 유고 영화 '수호천사'Anđeo Čuvar의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동유럽 집시의 본산 루마니아에서 집시들이 정당도 결성하고 케이블 채널도 보유하고 있다고들 한다. 합목적적 정치 활동을 집시들이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 붕괴 이후 최근의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와는 달라지지 않겠는가를 조심스럽게 점쳐보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큰것도 사실이다.

세르비아나 마케도니아에서 집시 뮤지션들이 크게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나머지 나라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기 앞가림이 급하다 보니, 집시들에게까지 돌아갈 에너지와 신경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서구 선진국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거의 도찐개찐 아닐까 추론해본다.

보스니아 투즐라에서 본 노래하는 집시. 어린나이지만 보스니아의 오랜 장르음악인 세브다흐를 곧잘 소화했다. 집시들에게 동냥과 거리공연 사이의 경계는 상당히 불투명하다. 무반주인데다 자세로 보아 아무래도 동냥이라고 봐야할 듯....

집시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또는 집시들을 어떻게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편입시킬 것인가. 구유고 연방 출신 나라들에서는 쉽지 않은 문제인듯 하다.




2013년 6월 20일 목요일

구유고의 집시 1 : 어떻게 사나

발칸이 순수한 민족공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남슬라브계가 주류를 이루는 구유고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도 블라흐Vlach, 몰락Morlach 등의 연원을 알기 어려운 종족들이 기록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소수민족이 있다면 집시들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집시를 '낭만적으로' 그린 서구의 문학, 음악, 미술 작품들이 많이 소개됐고, '집시여인' 등과 같은 노래가 히트를 하기도 해서 집시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실제로 이들을 맞부닥치고 보면 '꾀죄죄'라는 단어가 머리속 단어창에 뜬다. 신호 대기중인 자동차 앞에서 구걸하거나,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앞유리창을 닦는 집시들을 보면 남루 그자체다.

발칸에서 집시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터키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롬Rom, 로마Roma로 부른다. 집시 말로는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구유고 지역에서는 이들을 찌가니Cigani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독일의 찌고이네르Zigeuner와도 어원이 똑같다. 불가촉Untouchable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1906년 경 세르비아의 집시 가족. Augustus Sherman이 찍은 사진이다. 

현재 서유럽에 비해서는 동유럽이 집시인구 비중이 높고, 동유럽에서 집시들이 가장 많은 나라는 루마니아다. 그럼 구유고 지역은? 센서스 상으로 합쳐놓으면 30만 정도 사는 것 같은데, 이들이 워낙 제도를 등지고 살고 있다보니, 실제 인구는 이것보다 몇배는 크지 않을까 생각들 하고 있다. 구유고 연방 중에서는 세르비아가 가장 많은 집시인구(센서스 인구로 10만 이상)를 보유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Romani people by country 참조]

구유고를 포함해서 발칸에서 집시들이 많다는 사실은 발칸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있다. 그 만큼 사회가 빈틈이 많다는 것, 집시를 포함한 사회생태계가 있다는 것, 비록 천대는 하지만 나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 집시 종족은 주로 오토만 터키 지배 하에서 가장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맡아주는 해결사로 살아왔다. 특히 우리에게도 알려진 바, 끝이 뾰족한 장대를 인간의 항문에 집어 넣어 척추나 내장을 흟고 들어가는 이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주로 집시들의 몫이었다.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는 이 장면이 소상히 소개된다.

이 외에도 대장장이, 신발장이 등 소소한 공예 등을 생업의 기반으로 삼았고, 말 사육, 거위 치기 등이 주요한 수입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런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선 지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쓰레기 처리 등이 주요 직종으로 변한 듯 하다. 자그레브에서는 집집 마다 폐가구 등 크고 무거운 고형폐기물을 한꺼번에 집밖에 내 놓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어김 없이 집시들이 나타나서 어디론가 물건들을 실어간다. 아예 쓰레기 하치장이 주거지역으로 변한 경우도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집시들이 인근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집시 브라스 밴드인 팡파레 쵸카를리야Fanfare Ciocarlia의 경우, 독일 음반 제작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인근 섬유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실제로 세르비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따르면, 집시들이 사회적인 고정관념(도둑질, 나태 등)과 달리 일을 곧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도시에서 구걸에 나선 집시들도 많다. 아동들을 이용한 앵벌이가 거의 (수출)산업수준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한 인신매매 등이 집시들이 많은 나라의 사회 문제로 떠오른 바 있다. 집시들을 어떻게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할 것인가는 구유고 및 발칸 지역의 주요한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집시하면 음악이다. 집시가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직종이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음악계에는 재즈 전설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t를 비롯해서 집시출신 기라성들이 배출됐고, 이들 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덕션 하우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길거리 밴드로 특화한다.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지에서는 집시들을 천대하면서도 집시의 음악에 대해서는 이를 자신의 음악적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오늘 날 구유고 지역에서 집시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세르비아의 사진기자 Ivan Aleksic  참조.]

1940년대 찍은 발칸 집시 밴드의 모습. 관악기가 오토만 군악대가 쓰다버린 쓰던 터키식 나팔 Zurna이다. 이게 나중에는  서양 목.금관악기로 바뀐다. 

어쨌거나 신기한 것은 이리 깨지고 저리 쫓겨다녀도, 집시들은 아직도 자기 언어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풀들이 이 바람에 휩쓸리고 저 물에 쓸려나가면서도 지천에 깔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만약 어느 민족이든 생존이 지상과제라고 한다면, 이 특이한 민족 역시 역사의 승자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기 나라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그들 스스로는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없고, 뭘 빼았겼다는 억하심정으로 다른 민족을 곤란케하는 법도 없다. 기록하는 버릇이 없는 이들 입장에서는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낭만화하기 딱 좋지만, 이 역시 이들의 비참함을 생각하면 속없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직도 집시들이 스스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모른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3 : 2차대전과 체트닉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짓쳐온 것은 독일 뿐이 아니었다. 헝가리는 1차 대전 때 빼앗긴 보이보디나Vojvodina를 되찾고자 했고, 불가리아는 발칸전쟁 때 빼앗긴 마케도니아Macedonija를 탐했으며, 아드리아 건너편의 이태리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코소보를 노렸다. 독일군이 진주한 베오그라드에는 초록동색의 파시스트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크로아티아는 말 잘듣는 우스타샤가 점거한 것은 지난 번에도 말했고.

2차대전 당시 쪼그라든 세르비아 지도. 1912년 발칸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마디로 암울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스타샤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는 독립크로아티아에 세르비아를 조직적으로 절멸하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지만, 힘없는 세르비아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틀러가 세르비아 전체를 물샐틈 없는 통제하에 둔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만 주둔해 있었고,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부가 집안 구석구석을 다스릴 힘이 없었다. 한마디로 대충 틀은 잡았지만, 내정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었다. 이런 공백 속에서 자급자족적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무장 자위조직이 생겨났다. 체트닉Četnik 반군들이다. 

체트닉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더 깊다. 체타Četa라는 이름은 터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은 소규모 부대를 의미한다. 오토만 터키가 물러나자, 발칸에서의 군소민족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마을과 지역 별로 때로는 알바니아계 게릴라, 때로는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의 테러, 1차대전 때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적들에 맞서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근대화된 심리와 조직체계를 갖추지 못한 무장조직이 할 수 있는 것은 게릴라전 + 보복테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어딘가. 누군가 쓰러진 왕국을 위해 싸워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 때 나타난 사람이 드라쟈 미하일로비치Draža Mihajlović다.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에 항복할 당시 대령이었던 이 사람,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작정, 1941년 세르비아의 중부 라브나 고라Ravna Gora로 숨어들어, 체트닉 운동을 주도했다. 


드라쟈 미하일로비치. 별명 드라쟈 아저씨. 말끔하게 면도를 하거나, 정돈된 수염을 갖춘 근대 서양인들과 달리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세르비아 농촌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 가부장의 모습이다. 미하일로비치의 심리적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당연히 왕국의 망명정부는 쌍수들어 환영했다. 당장 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히틀러를 물리칠 수 있다면 누구와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던 처칠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리고 용맹무쌍 세르비아군의 수령 미하일로비치가 내놓은 필승의 전략은 '대기전술'이었다. 

대기전술? 연합군이 승기를 잡을 때까지 힘을 비축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최선? 체트닉 조직의 성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독일군은 1941년 독일군 1명 부상에 50명, 독일군 1명 사망에 100명에 해당하는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다. 그 해 세르비아 중부 크라구예바츠Kragujevac에서 독일군이 공격을 당해서 다수가 죽었다. 빡친 독일군이 예의 원칙에 의거, 양민을 거의 3,000명 가깝게 학살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밤에는 퇴근해야 하는(!) 체트닉 입장에서는 이 같은 복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기전술은 세르비아의 인명피해를 줄이자는 생각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전쟁 전반에 걸쳐 체트닉의 주적은 독일이나 이태리 같은 점령군이 아니라 세르비아 민족의 박해자 우스타샤 혹은 민족해방의 경쟁자인 빨치산들이 된다. 2차 대전으로 외부세력에 점령을 당한 유고슬라비아는 업친데 덥친 격으로 내전까지 일어났다. 무의미한 살륙과 복수가 연이어 일어났다. 미하일로비치 입장에서는 말리고 싶은 부분도 있었겠지만, 체트닉 조직은 내부통제도 제대로 안됐다.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카톨릭 또는 무슬림 마을에서 수두룩하게 일어났던 양민학살은 분에 못이긴 즉흥 복수극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체트닉 운동의 근본목표 자체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왕국의 원상복구보다는 대세르비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던 크로아티아인들과는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체트닉 조직의 가장 큰 경쟁자는 뭐니뭐니 해도 티토Tito가 이끄는 빨치산이었다.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체트닉 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이도 컸지만, 해방전선에서 빨치산과 체트닉 간의 실질적인 차이점은 바로 조직이었다. 티토는 마을 또는 지역 단위 투쟁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기동군을 조직해서 독일, 이태리, 우스타샤 등에 대항했다. 체트닉이 결국 방어에 중심을 둔 조직이라면 빨치산 기동군은 공격과 타격에 촛점이 맞춰졌다. 설사 독일 점령군이 가혹한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데미지는 체트닉에 비해 작았다. 더구나 학살당한 가족 친지들의 복수를 원하는 자들의 선택도 체트닉보다는 빨치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때문에 티토의 인민해방전선은 나중으로 갈 수록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처칠이 필요한 것은 이런 싸움꾼이었다. 양 측을 저울질을 하던 처칠은 1943년, '때'를 기다리는 체트닉이 아니라 언제든 싸울 의지가 넘쳤던 빨치산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빨치산과의 경쟁에 몰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과 연합하는 실수까지 범했다. 

복벽을 원하던 미하일로비치는 결국 2차대전 말로 들어서면서 빨치산에 밀리게 되고, 2차대전 후 공산당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것으로 체트닉 조직이 역사에 이별을 고하게 됐을까? 당연히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형성된 체트닉의 전통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이후에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첨병으로서의 과거를 세르비아인들이 기억해 낸 것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얼마전에 미하일로비치를 복권까지 시켰다.

체트닉 깃발과 모자를 둘러쓴 세르비아인들. 당연히 최근 사진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체트닉 깃발에는 '신에 대한 믿음'S VEROM U BOGA '자유가 아니면 죽음'SLOBODA ILI SMRT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중앙의 해골 문양이 이색적이면서도 섹시하다.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 역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의 시기가 됐다. 티토가 나타나서 대충 상황을 갈무리했지만,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는 못했다. 어느 식자는 세르비아인들의 전형적 심리상태를 '피해망상'으로 묘사했다. 코소보에서부터 시작된 피억압의 역사, 근세를 거쳐, 더구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참혹한 피해를 입은데다, 유태인들과 같이 조직적 살륙까지 당했다. 이러니 자라보고 놀란 마음, 솟뚜껑만 봐도 돌아버리지 않겠냐고. 이런 내상은 사회주의 시절 내내 잠복상태에 있다가 1980년대 말 크로아티아인들이 전통의 홍백 체크무늬 깃발Šahovnica을 들고 나왔을 때 다시 터졌다.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2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붕괴

1928년 크로아티아의 거물정치인 라디치의 암살로 인해 촉발된 위기에서 알렉산다르 왕은 결국 6개월의 장고 끝에 1929년 1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왕정 쿠데타를 일으킨다.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대세르비아를 추구할까라는 개인적 망설임을 묻어버리고 왕국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왕정 독재자로서 알렉산다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행정구역 개편이다. 왕국내 기존까지 통용됐던 역사적 경계를 다 지워버리고 주요 강이름을 기반으로 바노비나Banovina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요 구성민족 명칭을 썼던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Kraljevina Jugoslavije으로 바꿨다. 왕국의 애칭 또는 별칭 정도로 쓰이던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어가 공식적인 국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 주도하는 국민통합의 첫걸음이었다.

1929년 새로 개편된 행정구역체제. 슬로베니아가 이름을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의 전통적 경계가 없어졌다. 크로아티아의 반Ban 제도에서 비롯된 바노비나Banovina라는 없던 단어를 만들어서 광역지방의 단위로 썼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민통합 드라이브가 걸린 것 까지는 좋았으나, 참외에 줄을 그어넣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 세르비아 민주당과 같은 주요 야당 정당지도자들은 투옥 또는 가택연금되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결국 이같은 통합 조치는 오히려 왕국내 세르비아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 왕국내 다른 민족들의 반발도  심해졌지만, 왕의 전횡이 강해지면서 세르비아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반발과 원망이 누적된 끝에, 1934년 알렉산다르 왕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되고 만다. 암살을 직접 시행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무장테러단체인 IMRO. 그 배후에는 무솔리니 치하 이태리에 결집한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우스탸샤Ustaša가 있었다.

알렉산다르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페타르는 11살의 미성년자였다. 정부는 부랴부랴 영국에서 사촌 파블레Pavle 왕자를 섭정Regent으로 불러와서 왕세자가 성인이 될때까지 임시적으로 왕권을 맡겼다. 생각지도 않은 왕권을 물려받은 파블레공은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항구적인 솔루션을 원했다. 왜?

무엇보다 국제정세가 불안했다. 1차대전 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신생 세르비아의 앞을 막아선 거대제국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더 크고 험악한 독일 제3제국이 나타났다. 1939년에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이어 오스트리아까지 합병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괴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까지 다가오자 왕국으로서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거기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도 달마시아 지역을 노렸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에 접근해서 왕국의 균열을 도모했다. 파블레공으로서는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크로아티아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938년에는 이 같은 섭정의 뜻에 따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첵Vladko Maček과 왕국의 내무부장관(후에 수상)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Dragiša Cvetković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이 지속됐다. 그 결과 나온 것이 1939년 8월의 '대타협'Sporazum이다. 핵심 골자는 크로아티아에 자치권autonomy을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외부와의 협상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던 크로아티아와 폭력으로 나라를 만들어왔던 세르비아 간의 타협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39년 대타협으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크로아티아, 즉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e의 지도. 크로아티아는 연청색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오늘날 보스니아(날줄로 표시)를 먹고들어 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나? 아쉽게도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사단은 1941년 파블레가 히틀러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이의 추축국 동맹Tripartite Pact에 가입하면서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독일을 싫어한데다, 타협주의적인 섭정을 싫어했던 군부 민족주의자들이 (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노발대발, 41년 3월 곧바로 유고슬라비아로 짓쳐들어갔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왕국의 군대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왕국을 점령한 독일은 곧바로 왕국의 해체에 돌입한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우스타샤에게 넘겨 독립크로아티아NDH를 만들고, 세르비아에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대타협을 성사시킨 크로아티아 농민당 마첵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소년왕 페타르 2세가 이끄는 왕가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민족간의 '대타협'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1941년 히틀러를 만난 파블레공. 영국에서 교육을 받아 친영 성향이 강했지만,  영국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왔다. 

이 '대타협'이 몇년 만 더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그 이전에 알렉산다르 왕이 크로아티아와 분리했었더라면, 아니면 더 이전에 왕국이 만들어질 때부터 중앙집권이 아닌 연방제를 염두에 뒀더라면....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후세 사가들 조차도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만큼 유고슬라비아에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대타협' 자체는 민족간 화합의 단초이자 재난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가장 극명한 단초로 '대타협'에는 보스니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당시의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인들은 무슬림들이 별도의 민족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했다. 무슬림은 종교 범주고 민족 범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시의 생각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귀의한 크로아티아인 아니면 무슬림이 된 세르비아인'이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결국 무슬림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며, 따라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하나의 나라로서 역사적 뿌리가 부족하다는  인식으로 연계된다.

나중에 이런 인식은 1990년대 유고 내전의 발발과 확산에 직간접적 원인이 됐다. 후일 1990년 크로아티아의 투지만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는 어떻게 두 민족 간에 유고슬라비아를 갈라먹을 것인가를 논의했다고 한다. 워낙 동상이몽이었지만 이 두 정치지도자들의 머리 속에는 39년 '대타협'이 들어있었던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보스니아가 90년대 유고 내전의 중심전장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당시에 대타협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이런 것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지도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내파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레퍼런스 포인트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1유고슬라비아의 해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5 : King of Gypsy Music

먼저 음악부터..

샤반 바이라모비치가 부른 '풍뎅이'Bubamara. 화면은 이 노래가 OST로 활용된 에밀 쿠스투리차의 1998년작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Crna Mačka Beli Mačor의 장면을 모아서 만든 동영상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한다.

또 집시 음악이다. 발칸 집시 음악은 브라스 밴드로 유명하지만, 실력있는 보컬 들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가수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에스마 레제포바Esma Redzepova와 세르비아의 샤반 바이라모비치Šaban Bajramović를 들 수 있다. 오늘은 샤반 바이라모비치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단발머리 청년 당시, 그러니까 젊었을 때 모습이다. 찰슨 브론슨의 향취가 느껴진다. 

샤반 바이라모비치. 1936년 세르비아 남부 니쉬Niš에서 태어나서 2008년 죽었다. 대부분의 집시들이 그렇지만, 학교 공부는 설렁설렁 초등학교 중퇴, 길거리에서 음악을 배웠다. 19살 되던 해 군대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연애에 빠져 병역을 회피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탈영'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 앞에서 어설픈 소리하다가 3년이면 끝날 형량이 5년반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끌려간 곳이 '벗은섬'Goli Otok(영어로 옮기면 Naked Island. 정치범/흉악범 수용소로 유명)이다.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굴러먹던 집시생활, 수용소에서도 잘 버텼다. 재소자 축구시합에서는 '흑표범'으로 이름을 날리고, 밴드에도 들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쓰고 읽는 법도 익혔다고 하니, 교도소가 그에게는 학교가 됐다. 출소 이후 여기 저기 카페에서 노래를 하다가 1964년 첫 음반을 내고, 그 길로 엉겁결에 스타가 됐고, 그렇게 50여년 가수 인생에서 20여장의 앨범과 50장의 싱글을 발매했고, 집시음악의 왕kralj romske muzike라는 칭호를 얻었다. 곁가지로 수호천사Anđeo Čuvar(1988), Ciganska Magija(1998) 등의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했다.

과거 유랑악단이나 다름없는 생활이다. 음반, 공연도 있지만, 결혼식, 피로연 등이 집시밴드의 주수입원이다. 로컬 카페가 우리나라와 같은 '업소' 역할을 했다.

예술가 답게 생활도 방탕했다. 노름.술.담배.여색 등. 성격도 괴퍅해서 정해진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아무때나 마음대로 훌쩍 사라졌다. 공연을 펑크내서 수소문해서 찾아보면 누구집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노래를 하지 않는 동안은 내내 불평불만이었다. '같이 작업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위키에 따르면 그는 700여곡을 작곡했다(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 자기 노래라고 주장한 노래가 원래부터 집시들 사이에서 불리워졌던 것도 있고, 같은 노래에 제목이 달리 달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축재의 방도를 딱히 아는 것도 아니고, 유고슬라비아 시절 내내 저작권이 잘 보호되지 않아서 말년에는 지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가 죽은 다음에 후배 뮤지션들이 위로 삼아 '고인은 저작권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라고 세속에 초연한 영웅인 듯 그를 기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 같은 동료음악인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같은 영화인을, 특정 음반제작업자를 틈만 나면 욕했다. 허락 또는 보상 없이 자기 노래를 쓴다는 이유로. 하지만 정작 그는 쟁송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을까. 집시가 남에게 소송을 건다는 게 허망하게 느껴졌을지, 아니면 남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경험이 많아 변호사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또 다른 노래 '깡총깡총'Opa Cupa. 헤르체고비나의 세브다흐 장르 밴드인 '모스타르 세브다흐 리유니언'Mostar Sevdah Reunion과의 공연 장면이다. 샤반은 이들과 2002년과 2006년 콜라보 앨범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냥 뭉뚱그려서 '집시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와 같이 토만 터키의 영향 때문인지 오리엔탈 풍은 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 그의 노래는 발칸 세브다흐Sevdah 장르에서부터 재즈, 삼바, 탱고 등으로의 다양한 확장성을 가진다. 90년대 까지 그의 음반은 난삽해 보이는 아코디온 반주에 싸구려 씬서사이저까지 곁들어져 음악적 이디엄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들린다. 게다가 프로덕션 밸류도 낮아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뽕짝 메들리 판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낮은 질의 레코드를 커버하고 있는 '쏘울'이 있었다. 창법으로나 태도에 있어서나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는 '봄비'를 히트시킨 박인수씨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세르비아어보다 집시들의 언어인 로마니어로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그 스스로가 언어상의 장벽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노래는 '쏘울'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가사를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한번은 티토 앞에서도 노래를 불렀는데, 티토가 집시의 언어를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 음반 Romano Raj에 수록된 '백장미'Bele Ruže. 프로모션 화면이지만 집시의 음악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음반에서는 이 오랜 히트곡을 장고라인하르트 풍의 집시 재즈로 풀어냈다.

그에게 다행한 점이 있다면 성격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콜라보하고 싶어하는 실력있는 후배 뮤지션들이 따라 붙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2000년대 이후 나온 음반들은 음악적 전성기를 지난 상황에서 발매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수작들이다. 특히 2006년 세르비아 재즈 밴드 '자발적대장간협회'Dobrovoljno Kovačko Društvo와 공동으로 만든 마지막 앨범 '집시의 천국'Romano Raj(PGP RTS 발매)에서는 재즈, 삼바, 레게, 탱고 등의 주법에 맞춰 자신의 히트작들을 다시 불렀는데, 장르가 바뀌었음에도 마치 자기옷 입은 마냥 편안하게 느껴진다. 죽음을 2년 앞둔 70세 고령에 녹음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확장성, 놀라운 적응력, 놀라운 유연성이다. 가히 '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백조의 노래. '집시의 천국'Romano Raj. 재즈, 삼바, 레게 등으로 풀어낸 자신의 히트곡 모음집이다.  이 음반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세계 구석구석에서 비루하게 시작된 음악들이다. 원래 예술을 비루한 현실을 더욱 숭고한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인간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샤반 바이라모비치는 천상 예술가다.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1 : 유고슬라비아라는 몸

1918년 12월 합병을 통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탄생은 세르비아 카라조르제 왕가의 입장에서는 과거 두샨의 제국에 버금가는 역사적 영광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창업과 경영은 상당히 다른 종류의 기법을 요구하는 별도의 과정이다. 이제 스스로 나라로 자립한지 얼마 안되는 민족이 다른 민족까지 포함한 연합왕국을 다스리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차대전 이후 확대된 왕국에는 국명에 거명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이외에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 왕국의 인구는 1,200만을 헤아리게 됐는데, (몬테네그로까지 포함한) 세르비아 민족은 39%를 차지, 최대다수였지만 과반수까지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보스니아 무슬림들이라는 별개의 정치세력까지 생각하면, 카라조르제 왕가의 밥상에 놓인 밥은 크게 차고 넘치는 양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지향하지만 민주적 훈련이 전혀 안되어 있던 세르비아 정부로서는 이들 민족의 요구가 보통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고, 주로 강압적 수단으로 대응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저항에는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고, 마케도니아에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썼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고 규정한 몬테네그로에서도 합병 반대세력에 호된 철퇴를 내렸다.

왕국령 마케도니아에서 조직된 내부마케도니아혁명기구(Internal Macedonian Revolutionary Organization, IMRO) 게릴라의 모습. 20세기 초 결성된 IMRO는 오토만 터키에 대항하는 불가리아계 민족 독립무장단체였지만, 발칸전쟁, 1차대전을 거치면서 반세르비아 무장봉기조직으로 변했다. 프랑스에서 암살당하는 알렉산다르왕을 죽였던 것도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결탁한 이들이다.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를 중심으로 1918년부터 반세르비아 무장저항운동인 카착Kacak운동이 일어났다. 사진속의 인물은 운동의 지도자 아젬 갈리차Azem Galica와 그의 부인이자 여걸 쇼타Šota.

1920년 제헌의회에서는 전체 419석에서 세르비아계 2개 주요정당 183석, 공산당이 58석,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50석을 차지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속에 만들어진 새 헌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불법이었으니 퉁치고, 여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발세력은 라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결국 이들이 의회를 보이콧한 상황에서 헌법은 의회를 통과, 6월 28일 聖비드의 날(Vidovdan, Saint Vitus Day)에 선포됐다(!).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가 몸을 가진 현실 정치체로 전환된 순간이기도 했다.

헌법이 효력을 발휘한 다음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왕국에서 두번째로 큰 비중(24%)을 차지하는 '크로아티아 문제'Croatian Question였다. 국가연맹 하에서 공화국 체제를 지향하던 크로아티아 농민당수 라디치가 완고하게 협력을 거부했다. 왕가는 라디치를 투옥하고 이리 겁박 저리 회유를 반복했다.

왕국의 정부에 몽니 옹고집을 거듭하던 라디치가 생각을 바꾼 것은 1925년. 헌법을 받아들이고 정부참여를 선언했다. 정부가 이것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 회심한 라디치에게는 교육부 장관 감투까지도 씌워줬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정치상황이 이 때를 기점으로 미묘하게 변화한다.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 중심으로 구성된 세르비아 민주당이 이전까지의 기조를 180도 전환, 중앙집권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의회에 입성한 라디치의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연합을 통해 왕국 제1야당 연합이 됐다. 뭔가 좀 될 수 있으려나 싶던 바로 1928년 6월,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동료의원이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의회에서 라디치와 그 일행에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디치는 즉사는 면했지만, 결국 두달 후 병상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정국이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28년 자그레브에서 라디치의 장례운구 행렬. 라디치는 20세기 초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정치인으로써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국장에 가까운 장례행사가 치뤄졌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대변했지만, 후에 등장하는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의 우스타샤 운동과는 구별되는 온건노선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28년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국왕 알렉산다르는 '아예 이참에 크로아티아와 갈라서고, 자기네는 그냥 하던 대로 大세르비아나 계속 추구할까'라는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실행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국왕이 나서서 헌법을 위배(반역)할 수는 없다는 것, 둘째, 그리고 갈라서면 어디를 경계로 갈라서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아이디어는 너무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 세르비아인들로만 구성된 단일 국가.... 이 아이디어는 2차대전을 거쳐 199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가 된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0 : 유고슬라비아라는 아이디어

유고슬라비아. 유고는 남쪽을, 슬라비아는 슬라브를 뜻한다. 합치면 결국 남슬라브인들의 단결 또는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유고슬라비아는 국가체제 이전에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비록 종교도 다르고 역사적 경험도 다르지만, 하나로 단결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등의 강대국으로부터 민족의 자존과 자립을 지키자는 아이디어. 때문에 그 자체는 정복적 전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EU에 비견할 만한 야심찬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린 사람들은 19세기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류데빗 가이Ljudevit Gaj(1809 – 1872)가 일리리안 운동으로 남슬라브 족의 연합가능성을 가장 먼저 제기했고, 요십 스트로마이에르Josip Strossmayer 주교(1815 – 1905)가 이 아이디어를 이어 받아 정치세력화했다. 문제는 고장난명. 세르비아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세르비아의 기본적인 관심은 순수 세르비아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의 형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세르비아인 지사들 상당수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카톨릭을 믿는 세르비아인이라고 보고 있었다.

요십 스트로스마이에르 : 교황무오류설에 반기를 드는 등 카톨릭 주교로서는 매우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해서 남슬라브족의 정치적 단결을 촉구했고 이를 위해 동방정교의 화해를 모색했다. 또 크로아티아인이 어디 가서도 꿀리지 말라고 자그레브 대학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해박한 지식과 식견으로 당대의 교양인이자 지금도 크로아티아의 사표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이디어로만 머무르던 유고슬라비아 개념은 1차대전 때를 들어 실현가능성이 급속하게 높아진 정치적 화두로 부각된다. 강고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게 된 탓이다.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영토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모여서 유고슬라비아 실현을 위한 활동에 돌입한다.

일단 합스부르크 영토내 3개 민족 명망가들이 1915년 영국 런던에서 유고슬라브 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합스부르크내 남슬라브 땅을 세르비아와 합병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이 굳이 세르비아와의 합병을 주창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연합국이 달마시아 등 크로아티아 땅을 미끼로 이태리의 참전을 부채질했던 탓이 크다. 이대로라면 합스부르크 영토내 남슬라브족의 영토가 또 강대국들에게 전리품으로 배분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연합국 편인 세르비아와의 합종을 내세워, 자신도 연합국의 편임을 증명하고, 영토의 통합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이 같은 시도는 해외에서 활동중인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 만은 아니었다. 슬로베니아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영토 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들의 연합을 지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슬로베니아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일부 카톨릭 주교들이 이런 운동을 주도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 사는 민족이 남슬라브 족에 해당된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일부 이 같은 움직임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이 있었던가 하면,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안테 스타르체비치Ante Starčević((1823 – 1896)와 그 정치적 후계자들은 세르비아인들과의 합종을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의 목소리는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묻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망하면서 1918년 10월 자그레브에서는 남슬라브 3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권력을 인수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국'Država Slovenaca, Hrvata i Srba (DSHS, State of Slovenes, Croats and Serbs, '왕국'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을 선포한 일이다. 그러나 시대는 DSHS 편이 아니었다. 이태리는 원래 정해진 선을 넘어서 리예카까지 쳐들어왔다. 국민회의 안에서도 어서 세르비아와 합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약간 난삽해 보이지만, DSHS 지도.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일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포괄하는 땅이 바로 DSHS의 영토이다. 이 영토를 어떻게든 건사해야겠는데, 아쉽게도 DSHS 국민회의는 그럴 수 있는 실행력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인 농민당(당수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이 반대했다.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에 합병된다는 것, 연방제가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로 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스스로가 이런 방향으로 활동을 한 탓도 있지만, 그의 말은 후에 대부분 들어맞았다.

결국 국민회의는 농민당을 빼고 베오그라드로 가서 페타르 왕을 접견하고,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을 대내외에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로 가는 지난한 길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