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0일 화요일

보스니아 유사 6 : 오토만의 쇠퇴와 보스니아 17-18세기

보통 오토만 제국의 정점이라고 하면 술레이만 대제 때를 이야기한다. 1520년부터 1566년까지 40년을 집권했는데, 어느 술탄보다도 긴 재위기간이다. 이 때 헝가리까지 싹 정리하고 비엔나 코앞까지 밀어닥쳐 어느 때보다 서구 문명권의 위기의식이 높았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오토만 터키 제국의 내정이 여기 저기서 파열음을 낸다.

터키에서 만든 대하 TV 드라마, 술레이만 대제. 터키도 어느 정도 경제가 좀 돌아가니, 과거의 영화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는 발칸을 비롯한 남동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본적으로 정복을 통해 경제권을 확대해 나갔던 오토만의 경우,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영역을 넓혔으나, 그 이후로는 기술(병참선), 자연조건(사막) 등의 이유로 더 이상의 확장이 어려웠다. 17세기 말 오토만의 총리가 만용을 부려서 다시 한번 비엔나를 포위하긴 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그 이후 오토만은 유럽세력에 야금야금 땅을 잃기 시작한다.

더 이상 확장하기 어려운 국토, 여기에 유럽, 중동에서의 전란이 지속되면서 전에는 없던 전쟁세가 만들어졌다. 한 때는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었지만, 17세기부터는 거의 상시세금처럼 고착됐다. 기층 민중들의 세금부담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보스니아 같은 경우는 특히 오토만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게다가 행정관료들에게서 과거와 같은 기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술탄으로부터 위임받아 보스니아를 다스리던 행정관Governer으로는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등 외지인이 임명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선정을 베풀거나 문화적 유산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개인적 축재를 위한 변학도 노릇에 골몰했다.

복잡한 행정제도를 악용한 여러가지 꼼수와 트릭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교 시설을 위한 비영리재단vakuf 제도를 악용하면서 각종 세수누출이 심해지고, 더불어 오토만 재정에 부담을 줬다.

티마르 제도와 같은 왕토제도도 쇠퇴하고, 술탄의 말빨이 먹히지 않는 개인 사유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인 사유지가 넓어지면서, 직접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지위가 전에 비해 크게 약화됐다. 100%는 아니지만, 소작농의 대부분은 기독교인. 당초 보스니아에서 사회 갈등은 종교보다는 경제 갈등의 색채가 강했다. 

지주들의 등쌀에 못이긴 소작농들의 상당수는 땅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활빈당, 양산박과 같은 채를 꾸리고 산적이 됐다. 크로아티아-보스니아-세르비아에서는 이런 산적들을 하이둑hajduk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영웅담을 칭송하는 민요가 많다. 우리나라 조선조에 임꺽정, 장길산 등 산적들이 많아진 것과 비슷한 이치다. 특히 산지가 많은 보스니아는 이들이 활동하기에 더없이 안성마춤이었다.

보스니아 어느 마을에서 17세기 하이둑을 재현한 모습. 하이둑이란 말은 오늘날에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로빈훗과 비슷한 어감으로 기억된다. 오토만에 대한 민중적 저항을 상징하는 낭만적 기억이다. 크로아티아의 스플릿의 프로 축구팀 이름도 하이둑이다. 

이 같은 내정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가 후대까지 이슬람적 색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 행정제도의 특수성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보스니아가 오토만의 변경에 있다보니, 군사조직의 중요성이 컸다. 보스니아에는 총독 등 술탄이 직접 임명하는 관료 이외에 지역 보안과 군사력의 유지를 책임지는 카페탄kapetan(그렇다. Captain과 동일 어원이다)을 뒀다. 17-18세기에는 이들 카페탄들이 다스리는 카페탄구kapetanije가 39개나 있었는데, 오늘날의 보스니아를 대부분 커버한다. 이들은 당초에 군사 업무에서 나중에는 세금 징수 등 행정 전반에 걸쳐 업무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나중에는 거의 세습직화하면서 일종의 봉건영주와도 같은 권력을 지니게 된다. 이 같은 카페탄 제도가 유럽의 보스니아 침입을 막아내는 데 어느정도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오늘 날의 해석이다.

'보스니아의 용'이라고 칭송되는 후세인 그라다쉬체비치Husein Gradaščević. 이 양반 역시 카페탄이었다. 19세기 들어 오토만 조정에 대항해서 보스니아의 자치를 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보스니아 만의 정체성을 원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영웅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보스니아 유사 5 : 오토만 점령후 15-16세기

보스니아 역사에서는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중심세력으로서의 토착 귀족세력이 없었다. 이것은 봉건제를 유지해 오면서 뼈대있는 집안들을 만들어낸 유럽의 전통과도 다른 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오토만 시스템이 세습귀족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소아시아 지역에 흘러들어온 근본없는 유목 부족이던 오토만이 귀족이고 뭐고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귀족제도가 없다보니 좋은 점이 있었다. 바로 능력주의 인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잘한 놈한테 떡을 더 주니, 잘한 놈은 더 잘하려고 하고, 아직 잘하지 않은 놈도 앞으로 잘하려고 애썼다. 데비쉬르메와 같은 공출제도를 통해서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붙잡혀간 슬라브(와 알바니아, 그리스)의 소년들이 성장해 가면서 오토만 조정에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에서 걸리적 거리는 기득권 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세한 이들이 술탄에게 하사받은 토지를 대대손손 유지해 가면서 지역에 기반한 귀족으로 자라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만의 최전성기를 전후로 해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상비군단이던 정예보병이자 군사 엘리트 층이던 예니체리는 술탄으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기마 무사인 스파히Spahi는 술탄으로부터 봉토Timar를 하사받았는데, 이 땅 역시 군역이 끝나면 다시 술탄에게 회수됐다. 전제군주의 왕토사상이 그대로 적용됐던 것이다.

오토만 기마무사Spahi. 서양의 기사들과 커다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서로 싸우면서 배운 것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총기가 개인 화기로 널리 쓰이면서, 이 기마무사의 쓰임새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스파히로 구성된 기마병단은 오토만에서 예니체리와 더불어 최고의 군사엘리트집단이었다. 

이 같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효과적인 관료제도가 필요하다. 술탄에게 충성하는 관료들이 없이는, 어디에 놀고 있는 땅이 있는지, 누가 제대로 세금을 바치고 있는지, 농땡이치는 자는 없는지를 파악할 길이 없지 않겠는가? 오토만 전성기 터키가 점령한 유럽 지역에는 이 같은 메카니즘이 작동했다. 이 당시 터키를 방문했던 당대의 유럽인들도 안정적 관료제에 기반한 술탄의 강력한 중앙집권 때문에, 오토만이 유럽을 한참 앞설 수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티마르가 됐건 봉토가 됐건 적어도 상위계급을 위해서 누군가는 땅을 경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서양의 농노에 비견될 만한 경작자들이 있었으며, 오토만 지배층들은 이들을 라야raja(영어로는 rayah)라고 불렀다. 라야, 원래는 가축/짐승 무리herd/flock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주에게 소작을 내거나 나라에 세금을 내는 오토만 경제의 중추였지만, 신분상으로는 하위계층이다. 라야라는 말은 이후 보스니아에서 의미전환을 거쳐 '오손도손한 친한 사람들끼리의 인적 써클'을 뜻하는 말이 된다. 세르비아에서는 오토만에서 순응하고 살았던 다수의 기층민중의 의식상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됐다. 세르비아에서 '라야 멘탈리티'라 하면 '저항을 못하는 피지배자의 순응의식'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오토만 정복 초기에 보스니아에서 라야의 역할은 기층 기독교인들이 전담했다. 그러나 한동안 전란에 귀족들이 지역을 뜨면서 남은 사람들이다. 프란시스코파 수도사들이 들어와서 일궈놓은 카톨릭계 주민들의 상당수는 이웃 크로아티아 등으로 이주했다. 보스니아 교회 조직이나 체계가 그리 탄탄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일부는 이때를 계기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구공백을 계기로 세르비아 등에서 정교계 인구가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보스니아 토착교회는 정교라기도 하고 어렵고, 카톨릭이라도 하기 어려운 묘한 상황이었다. 카톨릭이 이 지역에서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하자 봉건영주나 왕들조차도 긴가민가하는 상황에서 카톨릭을 받아들였지만, 보스니아 카톨릭의 뎁쓰는 그리 깊지 못했다. 이 같은 공백을 배경으로 헤르체고비나 등을 중심으로 있던 정교계 주민들이 보스니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부 세르비아계 정교신자들은 아예 무슬림들의 지배를 벗어나 크로아티아, 달마시아, 헝가리 등에 정착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황제가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놓은 군사특별구Vojna Krajna에 집중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못 간 사람들이 무슬림들 지배 하의 보스니아에 주저 앉았다. 이러한 경계선 상의 군사적 충돌의 상당수는 결국은 양대 세력을 등에 업은 세르비아인 간의 다툼에 지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지배세력으로 보스니아를 들어온 만큼, 일단 도시를 중심으로 생활했다. 사라예보를 보스니아 중심도시로 만든 것도 이들이다, 이들의 주요 생업이 정치, 행정, 그리고 상업에 있었던 만큼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건 이들은 이차저차한 경로를 통해 점차적으로 농촌지역에까지 퍼지게 된다.

오토만 터키가 보스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또 한번 인구지도가 바뀌었다. 끊임없는 이동, 이것이 슬라브의 전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당시 인구이동과 교류의 다이나믹스는 복잡다단했다. 슬라브 틈새에 끼여사는 각종 소수민족들(블라흐, 알바니아, 집시 등)까지 합치면, 경우의 수는 훨씬 많아진다.

1991년 현재 보스니아의 민족 지도. 그러니까 유고 내전이 일어나기 전의 인구지도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무슬림계가 서로 이리저리 얽힌 모습이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인구구성의 변화가 만들어 놓은 맨얼굴이라고나 할까. 민족별 구획이 나이스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쭉 이러고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