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4 : 오토만 시스템의 정착

오토만은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에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바로 이 거침없는 확장의 시대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병합된 것이다.

1463년 여름 보스니아 왕국이 오토만 터키 세력에 망하고 난 뒤에도, 또다른 슬라브 영역인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가 어느 정도 이들을 버텨냈다. 헤르체고비나는 독일식 귀족 타이틀인 헤어쪼그Herzog에서 비롯됐다. 이 땅의 지도자가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헤어쪼그의 변형인 헤르체그Herceg로 지칭하면서 굳어진 이름이다. 이곳이 오토만에 완전히 접수된 것이 1481/1482년간의 일이다.

19세기 말에 오토만이 워낙 형편없이 무너지다 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터키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세력이라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유럽세력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토만의 서진이 막힌 것도 오스트리아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이스탄불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가는 병참선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술탄의 거병은 항상 봄철 이스탄불에서부터 시작됐고,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나야 했다. 비엔나 문앞에서 번번히 기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서구에서는 오토만이 보스니아를 오래 다스리다보니 보스니아의 진보가 늦어졌다고 하는 시각이 팽배했고, 아직도 이런 견해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15-16세기의 오토만 시스템은 어느모로나 동시대 유럽의 봉건제도에 비해서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중의 하나)라고 극찬했던 모스타르의 다리. 16세기 술레이만 대제 때 만들어졌고, 오토만 건축기술의 극치로 평가를 받는다. 오토만의 기술로 이런 다리를 만들었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19세기 서구인들은 이 다리가 로마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활발한 정복노선을 견지했던 오토만은 궁극적으로는 군사집단이었다. 더 많은 정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인력(=병력)과 물자(=세금) 만 별 문제없이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슬람으로의 강제개종 노력도 없었고 종교를 빌미로 싸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만, 군인들이 필요하니까 데비쉬르메deviširme라는 엽기적인 소년 공출제도(영어로 번역하면 collection이라는 뜻)가 있기는 있었다.

데비쉬르메로 인해서 공출된 소년들 역시 미국의 흑인노예들처럼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정예병 예니체리로 교육을 받아 정기적인 급여를 받았고, 그것이 다수에게는 출세의 길이 됐다. 오토만의 전성기인 술레이만 대제 당시 총리Grand Vizier는 모두 10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데비쉬르메를 거친 슬라브 계였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따로 세습귀족이 없는 터키가 제국으로 거듭난 데는 이 같은 능력위주의 인사도 한 몫을 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ša Sokolović(1506-1579)다. 오늘날 보스니아의 소콜라츠Sokolac에서 세르비아계 부모 슬하에 태어난 그는 데비쉬르메를 통해 출세한 대표적 인물이다. 술레이만부터 세명의 술탄 하에서 총 14년에 걸쳐서 총리Grand Vizier를 역임했으니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양반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역사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세르비아 정교교회를 다시 세운 것이다. 메흐메드 파샤는 페치Peć(오늘날 코소보에 있다)에 총대주교 관할구를 재건하고, 그 수장Patriarch으로 자신의 형제(친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인 마카리예Makarije를 앉혔다. 그 교회 시스템이 500년 동안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핵심 역할을 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경계선을 이루는 드리나강과 그 위에 세워진 180m 길이의 메흐메드 파샤 다리의 정경. 1577년 완공된 이 다리는 컨셉트의 과감성, 미학적 가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또다른 걸작이다. 보스니아의 소설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 다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Na Drini ćuprija를 집필하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오토만 터키의 가장 뚜렷한 유산은 뭐니뭐니 해도 사라예보Sarajevo다. 원래는 브르흐보스나Vrhbosna라는 이름의 한미한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토만 터키가 들어서면서 보스니아 행정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탈바꿈했다. (이름 자체가 궁정 또는 성을 뜻하는 Sarai에 슬라브어의 형용형 어미 jevo가 붙으면서 나왔다) 당초 무슬림들의 도시였지만, 이런 저런 경제적 이유로 세르비아 정교, 카톨릭, 유태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거점이 됐다.





2013년 7월 14일 일요일

구유고의 음악 7 : 오토만의 유산 세브다흐Sevdah

구유고 지역의 대부분이 거의 500년 동안 오토만의 지배를 받다보니, 그 문화적 유산도 만만치 않게 남아있다. 음악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세브다흐Sevdah라는 장르다. 세브다흐. 무슨 뜻인가. 위키를 찾아봤더니, 그 어원은 아랍어로 뜻이 '검은 담즙'black bile(또는 흑담즙)이란다. 검은 담즙이 음악과 무슨 상관? 

'검은 담즙'은 원래 의학용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등이 '4대 성정性情론'Four Temperaments을 주창한 바 있다. 중세 아랍의 학자들이 이 고대 그리스 의학 파라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고, 그것이 서양까지 전해져서 18세기까지 의학적 사고의 근간이 됐다.

'4대성정론'이 이야기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의 4대 성정, 즉 냉정(또는 침착), 분노, 낙천, 우울은 4대 체액의 분비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 바 '검은 담즙'은 우울(멜랑콜리)을 유발하는 체액이다. 

4대 성정 : 이 파라다임을 표현한 설명 중에서 위의 이모티콘보다 더 잘된 예를 본 적이 없다. 왼쪽부터, 분노, 우울, 냉정, 낙천을 뜻한다.

4대성정론이 서구문화에 영향은 예상외로 넓고도 깊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멜랑콜리 과다증후군을 앓은 대표적인 인사다. 생전에 되는 일이 별로 없었던 보들레르는 '빠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영국의 르네상스 작곡가 존 다울랜드John Dowland는 당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멜랑콜리 열풍에 충실히 부응하여 변진섭, 신승훈 못지 않게 슬픈 노래를 많이 남겼다. 

이름이 암시하듯, 세브다흐(더 친근하게는 세브달링카Sevdalinka)는 원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슬픈 보스니아 민속노래들이다. 사람이 왜 슬픈가? 가장 큰 이유는 실연이다. 때문에 세브다흐는 보스니아의 사랑 노래Bosnian Love Song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꼭 이런 연애 이야기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일단 기조는 슬픔이지만, 그 가사에는 해학, 익살, 로맨스, 음란, 외설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노래들은 원래 마을 잔치, 회합이 주무대였다. 누군가 카수가 나서면 너도 나도 같이 따라부르는 방식이다. 가사가 너무 슬프다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울었다고 한다.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주된 기능이었던 셈이다.

싸즈Saz라는 보스니아 전통악기를 반주로 부르는 세브다흐.  이웃들과 옹기종기 모인 사랑방이 주된 연주 장소였다. 

아무래도 오토만 터키에서 유입된 장르다 보니, 음계나 분위기가 오리엔탈하다. 이 같은 문화적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변화와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구 유고지역의 음악 중에서 세브다흐 만큼 커다란 변화와 트랜스포메이션을 거친 장르가 없다. 지금도 거침없이 변화 중이다.

세브다흐 장르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아무래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다. 오스트리아인들이 가지고 온 아코디온, 바이올린, 베이스 등이 보스니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세브다흐 장인들이 음량 등 여러가지 면에서 한계가 많았던 싸즈를 버리고 근대식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주 장소도 대가집 사랑방, 마을회관이 아니라 카페로 바뀌었다. 합창보다는 공연 중심으로 음악적 소비의 성격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1945년 종전 이후 , 보스니아에서는 힘조 폴로비나Himzo Polovina, 자임 이마모비치Zaim Imamović 등의 가수들이 나와서 여러 앨범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우리나라의 김정구, 배호 등과 같은 전설적 위치를 누리는 가수들이다. 오케스트라, 아코디온 반주를 극대화한 이들에게는 서양의 크루너crooner적인 면모가 보인다.

힘조 폴로비나가 부른 에미나Emina. 대체적으로 세브다흐/세브달링카는 녹음시간이 4분을 넘지 않았는데, 폴로비나는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이 곡을 7분이 넘는 대곡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탄조의 탄식이 가득한 이곡은 같은 동네 이맘댁 처녀 에미나에게 연심을 품은 젊은 화자의 심정을 절절히 담고 있다. 너무 절절하다 보니 꼭 신파조로 느껴지는 폐단이 있다. 그래도 이 노래는 아마 세브다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곡이다.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보스니아 유사 3 : 보스니아와 이슬람

결국  15세기에는 오토만 터키가 이래저래 외우와 내환이 겹친 보스니아를 접수하게 됐다. 그런데 보스니아가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오토만이 접수한 여타 유럽지역과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이슬람 유산이 상당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과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학설들이 많지만, 틀린 견해도 많다.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보스니아 무슬림. 1906년.  Rudolf Bruner-Dvořák이라는 양반이 보스니아와 관련해서 다수의 사진을 남겼다. 관련 링크 참조 요망

가장 많이 유통된 속설은, 한손에는 칼, 다른 한손에 코란을 든 이슬람 세력이 유럽에 들어오면서 강제개종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서구가 만들어낸 썰이다. 식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런 허구는 오늘날에도 상당히 일반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뿌리박았다.

오토만 터키는 당대의 서구국가들에 비해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훨씬 관용적이었다. 서구에서는 17세기 후반까지 종교전쟁이 있었지만, 오토만 하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동방정교, 카톨릭 기왕의 신앙에 대해서는 기본적 자유를 인정했다. 세금만 잘 회수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말을 타서는 안되네, 칼을 차서는 안되네, 교회를 신증축해서는 안되네 등의 간섭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로비를 하면 교회신축, 증축과 관련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오토만에서도 기독교 양대 교파에 대한 태도상의 온도차는 있었다. 십자군하고 징하게 대적했던 오토만은 바티칸의 영향을 받는 카톨릭에 비해서는 동방정교 쪽에 좀 더 관대했다고 한다.

유럽땅에서 심심하면 털리고 축출당하기 일쑤이던 유태인들을 받아준 것도 오토만이다. 보스니아에서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과 같이 쫓겨난 세파르딤Sephardim 유태인들이 군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여기에 동유럽에 살던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태인들이 들어온 것은 근세의 일이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커다란 유태인 집결지가 된 곳은 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다. 이들 반도의 유태인들을 다시금 작살낸 것이 2차 대전 나찌 독일이었고....

사라예보의 모습. 모스크, 정교교회, 카톨릭성당, 유태교 회당이 다 들어있다. 런던, 파리 같은 거대도시에는 모스크가 들어섰지만, 이렇게 다양한 종교시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광경은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찾기 어렵다. 종교적 관용은 오랜 기간 보스니아의 자랑이었다. 

두번째 속설은 보스니아에 결집된 보고밀Bogomil 이단이 집단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설이다. 같은 기독교계의 이지메에 학을 띤 이단들이 한꺼번에 이슬람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나이쓰한 스토리 라인이기는 하지만, 개연성은 떨어진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보스니아가 그렇게 이단의 온상이었는지도 의심을 받는 상황이다.

세째 속설은 기존의 귀족들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단체로 개종을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아니면 군인이나, 정치인, 행정가로의 출세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 발칸 진출 초기에는 기독교 무사들도 오토만 군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활약에 따라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술탄으로부터 식읍을 하사 받았다. 후세의 실증연구에 따르면 일부 귀족가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가 있지만, 그 같은 연결선은 뚜렷하지가 않다. 오히려 다수의 귀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네째,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경제적이었다는 속설이다.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정 세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조상대대의 믿음까지 저버릴 정도로 큰 것이었나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무슬림들의 경우 종교적 의무에 따라 별도의 자선세alms tax를 내야했다. 또한 병역 역시 법적으로 무슬림들에게만 부과된 의무사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말 이외를 제하고는 설득력이 크지는 않다. 만약 사정이 이러했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보스니아에서 더 많은 개종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요즘 학자들은 보스니아에서의 이슬람은 상당히 점진적으로 퍼졌으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착근됐다고 본다.

다만 보스니아의 경우 이런 것은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는 기성 교단의 조직력도 약하고, 유자격 성직자들이 부족했다. 이런 것이 이슬람 전파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기는 했을 것이다.

사라예보의 중앙광장 바쉬차르시야Baščaršija의 옛모습. 바쉬차르시야 또는 차르시야는 미디어가 없던 시기에 정보가 모이고 확산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물론 근거없는 소문, 험담, 뒷다마까지 포함해서..

이러던 것이 오토만 세력이 17세기부터 오스트리아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헝가리, 크로아티아 일부지역까지 진출했던 무슬림들이 보스니아로 다시 쫓겨나면서, 인구의 밸런스에 영향을 줬다. 더 나아가 보스니아는 인근 세르비아나 불가리아에 비해 토착 무슬림들이 조금은 더 잘 조직화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보스니아는 1878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면서, 당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에서 일어났던 인종청소가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발칸 지역 국가들의 독립하면서 엄청난 무슬림 인구 이동이 있었다. 남은 무슬림들은 강제개종을 당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세기 중후반의 정치적 소란으로 발생한 무슬림 난민이 약 100만 정도. 20세기초 발칸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무슬림 난민이 약 50만.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당연히 이스탄불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뇌리에 남아있어서인지, 90년대 유고내전 당시에도 보이슬라브 셰셀Vojslav Šešelj 같은 극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아나톨리아로 다 쫓아낼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하지만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아나 불가리아보다는 그나마 문명화된(?) 오스트리아가 장악하면서 이런 난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긴, 무슬림들을 다 쫓아내면, 최대다수 세르비아계를 맞닥뜨려야 하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서도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2013년 7월 7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2 : 그래도 역사는 있었다.

보스니아의 과거가 묘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찬란한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간 먼저 왕권국가가 성립된 크로아티아가 11세기 들어 헝가리에 복속되던 때, 보스니아를 명목상으로 지배한다고 했던 것은 비잔틴 제국이었으나, 실질적인 지배는 못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를 정복한 헝가리가 보스니아도 자기 땅이라고 우겼지만, 이것도 거의 뻥카에 가까웠다. 이 때 보스니아에는 누가 있었는가?

반 쿨린Ban Kulin(1180-1204, 그렇다. 정치지도자, 지배자를 의미하는 Ban은 크로아티아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됐다.)이 태평성대를 열었다고 한다. 전설의 주인공이지만 단순한 신화적 존재는 아니었다. 오늘날 두브로브닉인 라구사 공화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통치술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있는 동안 전란이 없었다. 그 뒤에 나타난 코트로마니치Kotromanić 집안는 지역의 반Ban으로서 이태리, 라구사, 베니스, 헝가리 등과의 외교를 통해 존재를 알렸다.

하도 교회문제로 바깥에서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으니까, 이 집안의 스톄판 2세Stjepan Kotromanić II(1322-1353 재위)는 공개적으로 카톨릭임을 선포하고 프란시스코회 수도사들을 받아들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는 14세기부터 프란시스코회의 유구한 전통이 이 때부터 만들어졌다.

그 다음  된 트브르트코Tvrtko(1353-1391재위)는 보스니아의 황금기를 만든 사람이다. 이름에서부터 슬라브어에 전형적인 모음결핍증후군(?)을 몸소 보여준 이 왕은 영토를 달마시아까지 확대하고 교역과 외교를 통해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

비슷한 시기에 세르비아의 네마냐Nemanja 왕조가 인근 라슈카 지역에서 일어나서 경쟁을 할 법도 했지만, 당시 세르비아 왕조의 주된 관심은 비잔틴 방향이었기 때문에 양대 세력이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다. 1389년 세르비아 호족의 대표격인 라자르가 코소보 들판에서 오토만과의 회전을 준비하던 당시, 세르비아에 원군을 보낸 것도 이 트브르트코다. 이 트브르트코가 1377년부터 왕국을 선포하고 왕Kralj의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14세기 중세 보스니아 왕국의 확장세를 보여주는 지도. 서로는 헝가리 동으로는 오토만이 양강 구도로 압박해 오는 가운데도,  지역 내에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산촌의 궁벽한 땅이긴 하지만, 이 때 당시 보스니아 왕조는 탄탄한 수입원이 있었다. 바로 광산업이었다. 독일의 광산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영토 내에서 납, 구리, 금, 은 등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20세기 말엽의 인종학살로 유명한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는 은광산(Srebre는 '은'이라는 뜻)으로 유명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잘 발달된 카톨릭 클러스터가 있었다.

문제는 트브르트코가 죽고 난 1390년대 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부 권력다툼에 베니스, 헝가리, 오토만 등의 외세가 개입하면서 정세가 급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헝가리에 붙었다가, 오토만과 협력하는 등 왕가 혹은 호족들이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464년 보스니아 왕가는 오토만에 군사적으로 완전히 항복한다.

'보스니아는 속삭임 속에 쓰러졌다'라는 말이 있듯이, 왕가의 멸망 전후사정, 구체적인 전투, 각 호족의 세력관계 등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크로아티아는 일찌감치 헝가리 왕을 받아들였고, 세르비아가 그 얼마 전인1459년  완전히 망했으니까, 남슬라브족 누구 치고 본격적으로 왕국을 받들은 족속이 없게 되는 셈이다.

2012년 투즐라 중앙공원에 세워진 트브르트코왕 기념동상.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투즐라에 세워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트브르트코는 독립 보스니아의 상징이다. 때문에 기독교를 믿은 지배자이지만, 독립 보스니아를 지지하는 무슬림들의 이 양반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듯 하다.  90년대 유고내전에서도 무슬림들이 초승달 문양이 아니라 백합 문양(fleur de lis)을 엠블럼으로 활용한 것도 그것이 바로 트브르트코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보스니아 유사 1 : 묘연한 과거

보통 줄여서 보스니아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정식 국명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a i Hercegovina(Bosnia and Herzegovina)다. 이름에서 유추가능하 듯, 두개의 지역, 즉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다. 하지만 이하부터는 그냥 보스니아라고만 지칭코자 한다.

지도상으로 보는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에서는 나라 이름을 그냥 보스니아라고 칭했다가, 상대가 정색을 하고 말미에 '헤르체고비나'를 붙여주는 바람에 매우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보스니아 남부에서는 특히 모스타르 근처에서는 귀찮아도 예의상 나라이름을 정식명칭대로 끝까지 불러주는 것이 좋다.  

스위스 알프스는 아니지만, 거기에서 흘러나온 디나릭 알프스 산맥이 이 땅의 대부분을 메우고 있다. 높지는 않아도 석회질, 화강암 산들이 많고 그 사이 사이 협곡으로 진한 녹색의 강들이 짓쳐흐른다. 인간들이 도달하기 쉬운 땅이 아니다.

보스니아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지금 건설 중이지만, 지형이 쉽지 않다보니 공사비가 만만치 않다. 지형은 어렵지만,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 서구 선진국들의 '합리적' 인간들에 비하면 훨씬 인간미가 있다. 여유와 더불어 헛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길이 어려워서 그랬나. 고대, 중세는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알려지지 않았다기 보다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세기말 전쟁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알려줬다.

보스니아에는 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적이 남아 있지만, 기록된 역사는 많지 않다. 슬라브족이 들어오고 기독교가 전파됐지만, 동서 양대교회의 중간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보스니아 교회는 카톨릭에 분류하기도 아니면 동방정교에 귀속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됐다.

그런 까닭에 중세 내내 보스니아 교회는 바티칸으로부터 항상 이단의 의심을 받았다. 일부 사학자들은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보고밀Bogomil 이단이 중세 보스니아에 전파되어 꽤나 활성화됐다고 본다. 특히 오토만 터키의 침략 당시, 이들 보고밀 이단이 동서교회의 박해에 견디다 못해 터키에 투항하고 이슬람으로 대규모 개종을 했다는 것이 한 때 정설처럼 퍼진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세시대 보스니아 비석stećak. 서구 전통에서 찾기 어려운 신기한 문양의 비석들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보스니아 교회가 보고밀 이단이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결격사유는 정작 보고밀의 발상지 불가리아에는 이런 묘지석이 없다는 거...

요새 나오는 학설은 기독교의 동서분열Schism이 진행되는 가운데, 보스니아가 워낙 접근이 어렵다보니 교회분열 이전에 형성된 의식과 교리가 계속 전승됐으며, 이것이 14-15세기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단으로 비쳐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지대가 어렵다보니 외부의 (권위있는) 성직자들이 왕래하기도 어려워 원시적 형태의 교회가 온존되고, 성직자들의 다수가 라틴어를 못하거나 아예 일자무식인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무자격 성직자들이 나오거나 의식과 교리의 왜곡이 나오기 딱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보스니아 이단설을 퍼뜨린 자들은 실제로 보스니아는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더 나아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서구 중세시대에는 이단을 제압하는 것 만한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보스니아는 옛날부터 미스터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은 언제나 주변에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