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 : 옛 로마의 도클레아

몬테네그로Montenegro.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현지어로된 정식명칭은 검은 산의 직역인 츠르나 고라Crna Gora. 라틴어를 애호했던 옛 식자들 덕분에 외지인들에게는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대한민국이 코리아가 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할까나.

발칸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슬라브족이 살았던 땅이 아니었다. 로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그리스 혹은 로마 시민들이 바닷가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내륙 일리리아의 부족들과 교류했다. 그 때 이 땅 이름이 도클레아Doclea(또는 디오클레아Dioclea, 원래 이땅에 살고 있던 일리리아 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였다. 나름대로 번성했던지 서력 3세기 경에는 이 땅에서 로마 황제를 배출했는데, 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릿Split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발칸이 배출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비대해진 로마를 다스리는 방책으로 4두정치체제를 구상한 사람이다. 이 궁전은 황제직에서 은퇴한 뒤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 만든 사저다. 

도클레아라는 이름은 슬라브족이 도래한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슬라브족은 이 땅을 두클랴Duklja라고 불렀다. 어쨌건 기존 토착민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한 슬라브족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패자가 명멸하는 봉건제가 지속됐다. 그 때를 기해 이 지역은 제타Ze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9세기 경의 지역 세력관계도. 도클레아가 바로 오늘날 몬테네그로와 대충 맞아떨어진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이 강했고, 그 덕에 이 곳 슬라브들도 동방정교를 신봉하게 됐지만 해안가는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도 강하다.  

14세기 경에 이 지역을 다스린 유력가문으로 츠르노예비치Crnojević가가 융성했는데, 레베카 웨스트는 이 때 당주 츠르노예 때문에, 이 지역 이름이 츠르나 고라 즉 블랙 마운틴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살던 지역의 산색이 거뭇해서 생긴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 가문이 15세기 오토만(또는 베니스 공화국)에 의해 궁벽한 산속으로 쫓겨나면서 수도로 삼은 것이 오늘 날의 체티녜Cetinje다.

몬테네그로 체티녜에 설치된 최후의 슬라브 봉건영주 이반 츠르노예비치의 동상. 황량한 산속에 들어선 체티녜는 왕궁이 있기에는 부적합한 궁벽한 도시지만, 바다는 베니스 평지는 오토만이 장악하면서 이곳 몬테네그로 슬라브들의 정신적 본거지가 됐다.

여느 슬라브 영주와 마찬가지로 오토만의 서진은 몬테네그로에도 두고두고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웃민족인 알바니아계가 전반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민족 간의 분쟁은 종교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오토만 조정이나 이곳에 파견된 행정관의 입장에서는 산속의 슬라브족들 언제든지 쓸어버릴수도 있었지만, 황량한 산속의 슬라브족을 굳이 치고들어갈 전략적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몬테네그로의 산지를 두고서 '두개의 군대가 싸우면, 작은 군대는 맞아죽고, 큰 군대는 굶어죽는 곳'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그만큼 척박한 땅이다. 몬테네그로의 산악지역에는 오토만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15세기 이후 몬테네그로를 독립국으로 볼 수 있을까? 몬테네그로 산지의 물질적 여건이 중앙집권형 왕국이 나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 슬라브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강력한 왕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족 더 나아가 소속 부족 밖에 없었다.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실질적으로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유사한 부족사회 체제가 유지됐다. 우리나라와 빗대어 보자면 3국시대 이전 시기와도 비슷한 경우? 지금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외지인이 아니라면 자기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3 : 히틀러의 작난

근세사에서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불안이 가장 크게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2차대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독, 이, 일의 3국동맹에 참여했던 유고슬라비아 섭정  파블레공이 쿠데타로 쫓겨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반응을 기다려주질 않았다. 1차대전 후 각 참전국의 명운을 결정한 베르사이유 조약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작했던 히틀러로서는 그 산물인 유고슬라비아 자체도 존중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유고슬라비아군 수뇌부로서는 한 20일은 버티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지만, 왕정 유고슬라비아군이 백기투항한 데 든 시간은 열흘 남짓. 가볍게 유고슬라비아를 접수한 독일(과 이태리 등)은 유고의 국경을 다시 그렸다. 이렇게 해서 과거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은 독립 크로아티아, 동쪽에는 괴뢰 세르비아를 앉혀 놓고,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독일과 이태리가 반분하는 형태였다. 보스니아는 하루 아침에 독립 크로아티아의 영역이 된다. 

2차대전의 시작과 더불어 만들어진 독립크로아티아NDH, 보스니아를 꼴랑 다 먹어 버렸다. 보라색으로 처리된 해변지역은 NDH가 이태리에게 넘겨준 지역이다.  

크로아티아로 들어선 우스타샤 정권은 독일과 이태리의 '순수성'을 벤치마크해서 유태인은 물론 영내의 세르비아계를 잡도리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본토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같은 난리가 극대화하되는 곳은 역시 세 민족이 모여사는 보스니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립크로아티아NDH 정부는 보스니아에서도 일단 사라예보를 거점으로, 체계적으로 유태인들하고 세르비아계들을 잡도리질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 정권은 희한하게 무슬림들에게는 관대했다. 아무래도 보스니아에서 겪는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슬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여기에 무슬림들의 일부가 호응을 했다. 

무슬림들의 상징인 페즈를 착용한 NDH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 그 스스로가 보스니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르체고비나) 출신이다. 석회암으로 팍팍한 헤르체고비나 땅을 두고 세르비아인들은 '돌과 뱀 그리고 우스타샤 만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우스타샤 정권이 유화의 손길을 준다고 해서 무슬림들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다종교 사회를 살아온 대다수 무슬림들에게는 우스타샤가 벌이는 학살극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때는 사라예보 무슬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우스타샤와 일부 무슬림 '쓰레기'들의 살륙극을 중단하라는 청원이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도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슬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비전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스타샤의 장단에 얼결에 선무당 칼춤을 췄던 무슬림들이 NDH가 자신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시작하면서 NDH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 무리의 무슬림들이 히틀러에게 독일의 보호하에 자치와 별도의 무장조직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선심쓰는 척하면서 보스니아 무슬림들로 이뤄진 친위돌격대 SS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원성을 듣는 단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계 역시 팔짱끼고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세르비아계는 어디까지나 1940년대에서 보스니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민족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의 꼬불탕 산악지역이 NDH 나 독일군이 생각하듯이 쉽게 접수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Četnik 조직이 들고 일어났다. '눈에는 눈' 여기저기서 당한 학살에 대한 앙갚음으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였다. 

보스니아의 산악지형은 게릴라 전을 벌이기 딱 좋은 지형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여기를 주무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을 두고 독일과 이태리 등 파시스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의 기치가 걸렸지만, 내용은 결국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 세르비아계 체트닉,  공산주의 빨치산의 3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작난질은 보스니아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파생시켰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12 : 얼떨결에 유고슬라비아

정작 사라예보에서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는 하지만, 대전 내내 보스니아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의 전세가 기울어 가는 데에도 보스니아는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소요가 없었다. 다만 전시경제 하에서의 곤궁함은 지속됐다.

1차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에 점점 불리하게 흐르면서 남슬라브 제민족을 하나로 묶는 유고슬라비아 운동이 정치적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패전 무드가 무르익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형성됐고, 허망하게 도시를 떠난 제국의 관료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세르비아군이 진주했고, 일부 유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 간의 갈등으로까지 격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세르비아계들은 환희용약했다. 드디어 대세르비아가 실현되는 때였으니까. 세르비아 본토에서 건너온 군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 터키의 잔재인 무슬림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세르비아 인사 중에는 무슬림들의 강제개종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12년 발칸전쟁 때 잔학한 인종청소로 인해서 '야만인'으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로서는 애먼 무슬림들을 쫓아낼 도덕적 명분도 없었거니와 국력도 고갈된 마당이었다.

어쨌거나 보스니아도 역시 얼떨결에 남슬라브의 일원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에 편입됐다. 보스니아가 원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무슬림들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대충은 맞는 국호이긴 하다 하지만, 무슬림들로서는 꺼림직했다. 난 도대체 누구야?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스스로가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 둘 중의 하나일꺼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기해 무슬림들 간의 독자적 정치조직화가 이뤄졌다. 1919년 2월에는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브 무슬림 기구'Yugoslav Muslim Organization이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왕정시대 무슬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했다. 초반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해 낸 사람이 바로 메흐메드 스파호Mehmed Spaho다. 이 사람의 주장인 즉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정치체제 하에서 독자적 정체성과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모습. 비엔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두 동생 중에 하나는 세르비아계로 다른 하나는 크로아티아계로 천명했다. 한마디로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은 애매하고 모호했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정치적 입장은 민족이건 아니건 그 이후로도 무슬림들의 전통적 자기주장이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로서의 통합성은 여전히 난제였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언제든 기댈 언덕이 있었지만, 무슬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중간자적 입장, 국외자적 정치적 토대는 새로 형성된 왕국에서 희한하게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캐스팅 보트 권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1, 2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서의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세르비아 왕가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손을 들어줘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대협약Sporazum이 형성됐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제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에 반분되는 결과가 나온다. 유력 무슬림 정치인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메흐메드 스파호도 1939년 대협약이 막바지 협상단계에 들어섰을 때  죽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내일이 어떻게 됐건, 시간은 급박하게 흘렀다. 대충 뭔가 정리될 시간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