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7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8 : 사라진 민족의 노래

옛날의 유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무슬림, 집시들 뿐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유태인들도 수백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발칸반도에 유태인들이 흘러 들어온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다. 일찍부터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유태인 본거지가 만들어지고, 보스니아나 세르비아를 남슬라브족보다 먼저 왔던 침입자들 중에서도 유태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태인 집단이 발칸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의 일이다.

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력에 축출되면서, 도매급으로 유태인들도 같이 쫓겨났다. 당시 관용이라고는 전혀없었던 기독교인들에게 몰려난 유태인들을 받아준 것은 오토만 터키였고 그들 중의 일부가 보스니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몰려온 유태인들은 세파르딤Sephardim 계열로 스페인어 버캐뷸러리의 영향을 받은 라디노Ladino를 썼다.

1918년 경, 보스니아에 살던 세파르딤 계열의 유태인 여성 (출처 : Journey East)

17세기에는 세파르딤과 양대계열을 이루던 아쉬케나짐Ashkenazim 유태인들이 보스니아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를 잃어버린던 때이다. 아쉬케나짐들의 언어는 라디노와는 전혀 딴판인 이디쉬Yeedish다. 언어 탓이었는지 양대 세력이 같은 신을 같은 방식으로 믿었지만, 정작 보스니아에서의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보스니아에서의 유태인들의 숫자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영향력은 단순한 숫자를 능가했다. 무엇보다 상업민족으로서 항상 부를 축적해왔다는 것도 있지만, 유럽 각지에 퍼진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로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의약, 외교 분야의 지식으로 보스니아의 총독이나 토호들의 자문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근동식 전제군주 체제 하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항상 자의적이기 쉬운 행정관이나 총독의 불알을 잡아놓지 않을 경우 뒷탈이 있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초 한때 변학도 같은 오토만 총독이 트라브닉에서 유태인 부자들을 붙잡아서 평양감사식으로 털어먹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무슬림들이 집단봉기를 일으켜서 즉각 석방을 요구하자, 총독이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슬림들이 굳이 유태인들을 선호해서라기 보다는, 이에는 외지인 총독과 보스니아 토종 무슬림들 간의 권력갈등이 중첩되어 있었지만, 어쨌던 다민족 사회로 살아가던 보스니아의 내부사정이 이런 식으로도 풀릴 수 있었다.

난리가 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유태인들은 언제나 이웃민족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차 대전을 맞아 히틀러가 폭주하면서 발칸에서 이런 감초같은 매개자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부터 보스니아 3대 마초 민족 간의 관계도 팍팍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이런 보스니아에서 얼마전부터 Arkul이라는 2인조 밴드가 결성되어 오래된 세파르딤 유태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오늘날 보스니아에서 쓰는 사람이 500명 남짓하다는 라디노어로... 뭔가 스페인스러운 어투로 부르는 노래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노랫말에 나오는 Te kero는 스페인어로 Te Quiero와 발음도 비슷하고 뜻도 같은 것을 알겠다.  라이너 노트에 나온 가사를 보면 이런 저런 일상적인 차제에 부른 노래인듯 싶다. 세브다흐와 같은 절절한 내러티브는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내가 이쪽 방면으로 과문한 탓에 뭐라고 말하긴 어렵다. 곡조는 중근동 색채가 스레인의 플라멩코 만큼은 완연하다. 세브다흐와의 상호영향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듣자니 세브다흐 대표곡 중의 하나인 '내가 벰바슈를 지날 때'Kad ja pođoh na Bebmašu가 세파르딤 민요곡조에 남슬라브어 가사를 붙인 것이라고 하니 이들의 조우를 허투로 볼 것은 아닌 듯 하다.

2집 타이틀곡, Il bastidor. 비디오 트레일러에 나오는 아트워크는 보컬 블라디미르와 그 동생 요십이 같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라이너 노트에도 삽입되어 있다. 가사의 뜻은 금요일날은 뭐하고, 안식일(토요일) 날에는 뭐하고 일요일 날은 뭐하고... 식이다. 주부가 부르는 노동요라고 봐야할 듯 하다.

그 멤버, 블라디미르 미츠코비치Vladimir Mićković(보컬)와 아틸라 악소이Atilla Aksoj(어쿠스틱 기타)는 모두 모스타르 출신이다. 그 덕이었는지 Mostar Sevdah Reunion 등 현지 뮤지션들과 가깝고, 최근에는 그들의 앨범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보컬의 목소리가 여리고 톤이 높은데, 라틴계열의 부드러운 언어에 워낙에 유태인들이 겪었던 간난과 신고가 겹친 탓인지, 노래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위태하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진다. 내가 듣기에 그냥 안쓰러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청승맞게 불러야 제맛인 노래들인가.




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유고 삼국지 11 : 갈려지는 승패

연합국이 체트닉에서 빨치산으로 파트너를 바꾸기로 하면서, 덩그라니 홀로 남겨진 미하일로비치와 체트닉. 뭐라도 해야했다. 1944년 1월 세르비아 바Ba에서 나름 전국적 규모의 회의를 개최했다. 왕조를 존속하되 '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가미한 선언문이 나왔다. 하지만 반향도 작았고, AVNOJ 2차 회의의 짝퉁처럼 보이고 말았다. 무엇보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다민족적 절실함이 없었다.

전쟁 초기부터 미하일로비치에게 파견된 영국의 군사사절단은 1944년 체트닉의 부역혐의를 들어 철수했다. 이들이 철수하면서 지금까지 체트닉들에게만 제공됐던 보급도 끊겼다. 하필이면 전황이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시점이다. 이 때 만을 기다려왔던 미하일로비치로서는 뭔가 아다리가 안맞아도 한참 안맞았다. 대기전술의 한계인가, 기회주의의 응보인가 아니면 연합국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 것인가. 8월에는 왕까지 그를 최고사령관 지위를 박탈했다.

연합국의 공식 파트너가 된 티토는 영국 등으로부터 6만톤에 달하는 보급품을 공수받았다. 안면을 바꾼 처칠, 이제는 카라조르제 왕가를 대하는 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20대 젊은 왕을압박해서 티토를 내각에 임명할 것을 압박한다. 물론 영국이 무작정 왕가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조리돌림한 것은 아니다. 왕가가 어떻게든 빨치산과 정치적 접합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티토는 아쉬울 게 없었다.

1944년 10월 빨치산이 드디어 베오그라드를 입성했다. 아무리 사회주의 조국에서 왔다고 하지만 인근에 도착한 소련의 붉은 군대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었다. 탱크나 야포. 기계화된 근대전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수준이었지만,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 다음 달인 11월에는 영국에 거처한 임시정부가 그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페타르 왕은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라는 내용의 방송까지 내보냈다. 하지만, 티토는 왕가에 대해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44년 10월에 해방된 베오그라드. 퍼레이드 중인 빨치산. 소련군이 중화기를 지원해줬지만, 빨치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어떠랴 개선군의 입장이다.

전황이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그레브에 거처한 우스타샤 수뇌부들의 계산 속도 바빠졌다. 44년 7월, 파벨리치는 연합국과의 공모를 통한 쿠데타 혐의를 들어 몇몇 동지들을 처단했다. 이 때 쯤 들어 NDH 대열 안에 있는 누구에게나 상황은 분명해 졌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 당연히 우스타샤 대열에 속해있던 상당수가 빨치산으로 편을 바꿨다.

1945년 봄이 되자,  빨치산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평원을 강하게 압박했다. 산악지대에서 펄펄 날던 빨치산들도 평지에 내려오자 이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빨치산도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한번 맛이 간 전황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5월 들어 독일군은 크로아티아내 모든 추축국 군 작전권을 파벨리치에게 양도했다. 파벨리치로서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빨치산이 이미 자그레브에서 50km 떨어진 카를로바츠까지 진격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틀 뒤인 5월 8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슬로베니아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 그리고는 다시 이태리로 운신했다가 아르헨티나로 망명한다. 남미에서 몇번의 암살위기를 모면하고 1938년 스페인에서 병사했다.  2차대전 전범으로, 병상에서 죽은 얼마안되는 사람이다. 크로아티아를 탈출하는 데는 교황청이 도와줬다는 말도 있고 아직도 미스테리다.


크로아티아 모처에서는 요새도 해마다 안테 파벨리치를 위한 미사가 열린다. 유태인 단체가 반대성명을 내지만, 크로아티아 신부님들은 묵묵하다. 이 죄많은 사람을 용서해달라는 뜻일까? 물론 반대시위도 열린다. '야세노바츠에서 2만명의 아동이 죽었고,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죽은 인물들만 20만명. 모두 파벨리치가 명령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2013년 일이다. 이런 걸 보면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도자가 이렇게 가족 만을 챙겨서 도망간 사이에 남아있는 우스타샤 잔당을 비롯해서 NDH 추종자들 역시 도주길에 올랐다. 빨치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그래도 빨치산보다는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로의 월경을 시도하다, 여단 급의 영국군을 만났다. 협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국경 바깥에 수용된다'는 조건으로 영국군에 항복하고 고스란히 무장해제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을 태운 기차는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다시금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갔다. 속은 것이다. 빨치산의 손에 다수가 죽고 상하고 그 결과는 '블라이부르크 학살극'Bleiburg Massacre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2차대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났던 다수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시종과 희생자수는 제대로 밝혀진게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으로 20만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까지는 아니고 한 3만명 정도가 희생되지 않았겠나들 보고 있다. 영국군의 행동 자체는 어차피 국제법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 빨치산도 총격을 가했지만, 항복과정에서 발생한 오해가 있었다는 등 아직도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빨치산들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세력이 해외로 나가서 임시 또는 망명정부가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우스타샤와 빨치산 사이에서는 제네바 협정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