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5일 금요일

구유고 음악 2 : Prljavo Kazalište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이 같은 유연한 자세로 인해 그 치세 하인 60년대부터 많은 록 밴드들이 연방내 각 공화국에서 나타났다. Time, Parni Valjak, Azra(크로아티아), Korni Grupa, Idoli, Riblja Corba (세르비아), Indexi, Bijelo Dugme(보스니아), Buldožer (슬로베니아), Leb i Sol (마케도니아) 등의 음악적 성취는 영미권에 비해, 영향은 받았을지는 몰라도 질적으로 꿀릴 것도 없었다는 것이 평이다. 실제로 70년대 활약한 Time, Korni Grupa 등은 유럽풍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상당히 음악적으로도  진취적이다.

곁가지지만 90년대를 풍미한 Nirvana의 베이스 주자 Chris Novoselic(대충 한국사람 사이에서는 노보셀릭이라고 불렸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노보셀리치가 맞다)도 재미 크로아티아인에게서 태어난 크로아티아인이다. (이 양반, 90년대 중 이름도 Chris에서 Krist로 크로아티아식으로 바꿨다. 크로아티아말도 잘 한다고 한다.) 80년대 10대 당시 크로아티아 자다르Zadar 친척집에서 머물면서 Azra에 심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를랴보 카잘리슈테Prljavo Kazalište(더러운 극장이라는 뜻, 이하 PK)는 1977년 자그레브에서 결성된 록밴드다. 롤링 스톤스 음악의 영향을 받은 PK는 당시에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뉴웨이브 등을 수용, 유고슬라비아 뉴웨이브 씬을 이끌었다. 초기 출세작 Crno Bijeli Svijet(흑백 세상)는 완연한 스카 펑크록이다.

PK의 대표곡인 흑백 세상. 초기 프론트맨 다보린 보고비치Davorin Bogović는 밴드 결성 당시 롤링스톤즈 풍의 노래를 빠르게 불렀더니 그걸 세상사람들이 '펑크'라고 부르더라라고 술회했다.

이 밴드는 크로아티아 독립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1988년 발표한 Mojoj Majci : Ruža Hrvatska (어머니에게 : 크로아티아의 루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크로아티아 청년층의 열기를 결집하는 역할을 했다. 루쟈는 밴드의 리더 야센코 호우라Jasenko Houra의 엄마 이름인데, 이것을 크로아티아와 빗대어 노래함으로써 중의적이지만 결코 모호하지 않은 음악적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가사는 대충 이렇다.

<밤늦게 그녀의 방에 소리죽여 들어가네,....문 닫는 소리 크게 날까 두려워하면서, 방에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Ruža가 잠들어 있고...... 만약 그녀가 없다면 누가 아침에 나를 깨울까. 만약 그대가 없다면 나는 잘 알지. 그대는 마지막 크로아티아의 장미.......장미여 나의 장미여. 나는 그대 때문에 밤새워 우네..... (중략)>

건전가요도 아니고 반항의 대명사 록음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약간은 아이러니 한데, 당시는 그게 또 먹힐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특수성이다. 1989년 10월 자그레브 옐라치치 광장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에는 30만명이 모였다. 자그레브의 인구가 80만 남짓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크로아티아 문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족적이다. U2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연상시키는 이 공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아레나록이 아니라 체제전환 광장록이라고 불릴 만도 하다.

당시 기록영상은 크로아티아가 얼마나 새시대를 열망했는지, 또 미지의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크로아티아 젊은이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시대는 더 없이 추악한 전쟁으로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곳의 젊은이들은 그걸 아직 몰랐다.

1989년 공연에서 부른 Ruža Hrvatska : 광장의 열기를 확인하려면 이 비디오

이건 앵콜로 다시 부른 Ruža Hrvatska : 크로아티아 청년들의 표정을 보려면 이 비디오

어쨌거나, 결성 30년을 넘어선 이 밴드의 음악적 경향은 초기에 비해 팝스러운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 2000년대 나온 노래 중에서  초기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Smeđi Šečeru(흑설탕)는 듣기에 흥겹고 즐겁다.


어쨌거나 민족밴드?국민밴드로 거듭난 PK가 2012년 들어서는 26년만에 처음으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도 Ruža Hrvatska를 불러, 크로아티아-세르비아간의 대결의식이 무뎌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줬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뉴스가 됐으니, 또 그 세월이 얼마나 더디게 흐르는지도 보여줬다.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3 : 엔터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위기에 위기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크로아티아에서는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으니, 우스타샤Ustaša(봉기라는 뜻이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계 출신으로 세르비아가 헤게모니를 쥔 유고슬라비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골수민족주의자였다. 이들의 대외적 표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작 크로아티아에서 정치적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이태리에서 무쏠리니의 비호를 받는 과격테러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1934년 알렉산다르 1세 암살 사건 이후에는 이들의 관여가 문제가 되면서 비호라기 보다는 감금 상태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쥐구멍 같은 이들의 처지에도 쨍하고 해뜰날이 있었으니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히틀러가 194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생긴 공백에 크로아티아에 이들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권을 앉혔다. 개선장군 처럼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부정하고 독립크로아티아Nezavisna Dražava Hrvatska, NDH 를 세웠다.

무쏠리니와 사열 중인 NDH 수령Poglavnik 안테 파벨리치 : 나찌 코스프레가 완연하다. 히틀러의 외부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그대로 계승했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로버트 카플란 등 일부 논자들은 나찌즘의 연원을 발칸에서 찾을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청출어람?

졸지에 생각도 않던 독립을 했으니, 1941년 초기만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괴뢰정권이 독립국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었다. 결국 나라를 둘로 나눠서 독일과 이태리의 영향권을 인정했으니, 우스타샤는 독일과 이태리의 군사력이 아니고서는 유지가될 수 없는 정권이었다.

NDH의 판도 : 세르비아는 독일이, 몬테네그로는 이태리가 점령하고 남는 땅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합쳐서 NDH가 성립했다. 나라를 둘로 가르는 회색선 위쪽은 독일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 아래쪽은 이태리의 영향권이 됐으니, 독립국이라는 명칭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해변가는 이태리에게 양도했으니 달마시아를 둘러싼 이태리의 야심은 그야말로 유구하다.

우스타샤는 독일의 열등민족 박살정책을 계승하여, 영내 유태인과 집시들을 박멸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구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형성된 발칸의 유태계 사회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다. 여기까지 나찌가 정해놓은 표준화된 이민족 혐오에 더해 우스타샤는 자기만의 색채를 더했는데, 그것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박해였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 성호를 그려보라고 해서 카톨릭 성호가 아니면 즉결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톨릭으로 강제개종을 시키거나 혹은 개종을 시켜준다고 해놓고는  한자리에 모인 세르비아계 마을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잔학상은 학살의 원조인 나찌 독일군조차 아연해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우슈비츠 등을 본딴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를 세워놓고 공장형 학살을 자행했다. 이 악명높은 수용소에서는 많게는 70만, 적게는 2만 정도의 인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은 쪽으로 갈수록 세르비아, 낮은 쪽으로 갈수록 크로아티아 쪽의 주장이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은 약 3년 반 가량의 운영기간 중 야세노바츠에서는 약 77,000-90,000명 가량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는 곡물다발을 자르는 농기구였던 이 도구를 우스타샤들은 세르비안 커터srbosjek라고 명명하고, 사람잡는 도구로 썼다. 다소 작은 외양과는 달리 치명적 도살 도구였는데, 사람의 멱따는데 경동맥을 끊는데 효율적으로 만들어졌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에서는 이것으로 사람잡는 경진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때때로 인간의 잔인함은 그 많은 고어 무비나 잔혹극에서도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자료원 : Wikipedia, srbosjeck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숫자를 두고 로버트 카플란은 유고슬라비아 만큼 2차대전 역사가 청산이 안된 나라가 없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던 NDH는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더이상 추락하기 어려운 밑바닥인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나온 이야기로는 우스타샤은 영내 세르비아계의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내고, 1/3은 절멸시킨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을 깊은 의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생적 기반이 없던 우스타샤의 운명은 2차대전의 성패와 직결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의 전선이 크게 위축되면서, 우스타샤 역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이 임박하자, 파벨리치는 로마, 나폴리 등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암살자를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다가 1957년 스페인에서 병으로 죽었다. NDH군은 같은 달 오스트리아쪽으로 도주, 유고슬라비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영국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기차에 태워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되돌려 보냈고, 빨치산은 이들을  현장에서 즉결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3만 명 정도가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Bleiburg 학살)

2차대전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이렇게 처참하고 험악하게 끝났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는 이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회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억압은 됐을지언정,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우스타샤의 일부는 해외로 도망을 나가 미국, 캐나다, 남미 등지에서 웅크리고 살았다. 이 사람들의 후손들이 나중에 크로아티아로 돌아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크로아티아의 역사 12 : 세르비아와의 동침

1차 대전이 끝난 후 이러저러한 요행수와 우여곡절로 발칸의 맹주로 성장한 세르비아. 19세기에 갓 독립한 나라로서는 눈부신 팽창이 아닐 수 없었다.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을 대내외에 선포는 했지만, 세르비아의 통치 및 국가관리 능력은 여러가지 면에서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토만 터키에게 500년 지배를 받으면서 정교한 사회제도가 없이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가부장적 대가족Zadruga 중심으로 살았다. 문맹률은 높고 그나마 교육시켜놨던 대학생들은 몇번의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근대적으로 훈련된 관료들은 적었으며, 민주주의의 전통은 물론 귀족들간의 대의의 관습도 없었다.

언어가 동일했지만,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기질과 역사. 레베카 웨스트의 Black Lamb and Grey Falon을 보면, '크로아티아는 변호사를 길러냈지만, 세르비아는 군인을 키웠다'는 취지의 말이 나온다. Pacta Conventa부터 시작해서 크로아티아는 주로 외부 민족들과의 '계약' 또는 '협정'을 통해서 국체를 지켜왔다. 면면한 Sabor의 전통도 있어왔고... 그러나 세르비아는 오토만에 폭력으로 망했고, 폭력으로 오토만을 도왔으며, 폭력(1804년과 1817년 봉기)으로 나라를 일으켰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같은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동방정교와 카톨릭간의 관계는 기독교/무슬림의 관계 못지 않게 나빴다. 역사적으로도 차라리 무슬림들보다 서로 비슷한 이 두 종교간의 증오가 더욱 뿌리깊었다는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이렇게 안맞아도 한참 안맞는 나라에 크로아티아가 편입됐다. 크로아티아인들이 느끼게 될 이질감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합병이 처음부터 마땅치 않았던 라디치는 공화정과 독립을 요구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왕정이 이런 주장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1921년 수립한 왕국의 헌법에는 크로아티아가 그 오랜 세월을 지켜왔던 Ban과 Sabor 제도가 폐지됐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라디치는 결국 왕국의 의회에 참여하기로 한다. 역량이 모자란 세르비아 통치체제를 배경으로 최대야당으로 올라서게 되고, 세르비아 민주당과 연합하면서 세르비아 골수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긁어놓는다. 그런데 옐라치치 이래 거의 처음으로 크로아티아 민족의 총의를 대변한 이사람이 1928년 회기 도중 몬테네그로 출신의 동료 의원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의회 암살 :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스톄판 라디치 말고도 두명이 더 죽었다. 라디치의 장례식은 크로아티아에서 '국장'인 것 마냥 진행됐다. 이 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라디치를 '우리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으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불신과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의회정치로는 답이 안보인다고 생각한 알렉산다르 1세Aleksandar I은 결국 1929년 1월 헌법을 정지, 의회를 해산시키고, 왕정독재를 선포한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라 이름도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바꿨다 (유고슬라비아는 남(Jug) 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라디치를 각별히 아끼고, 총격사건 이후 그 병실까지 지켰다는 이 왕으로서는 바닥에서 돌아가는 일에 솔직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왕마저 몇 년 후인 1934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다....

알렉산다르1세 암살사건 : 불가리아계가 많은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들이 일으켰지만, 이에는 후에 등장할 크로아티아 골수민족주의자들 우스타샤Ustaša가 관여되어 있었다. 곁가지로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는 이 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를 보고 유고슬라비아를 찾았고, 20세기 기행문학의 걸작 Black Lamb & Grey Falcon을 남겼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지속적인 소요와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짧은 왕국의 역사에서 천수를 누린 왕 자체는 두 사람 밖에 없고, 쿠데타로 쫓겨나던가, 암살 당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겪었으니 권력기반 자체가 심히 불안불안했다.

안그래도 내정도 불안한데, 외정 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파시즘이 급속도로 퍼졌고, 신생 독립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앞에는 먹구름 뿐이었다.

2013년 3월 11일 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1 : 1차대전과 남슬라브족의 나라

제국의 교묘하고도 노회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이웃의 발칸 민족들과 더불어 점점 더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 되어 갔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터키의 청년터키혁명Young Turk Revolution에 자극을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탄하자, 그 동안 헝가리 측의 통치에 적극 협력해왔던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대거 반정부로 돌아서는 효과가 났다. 정치재판, 회유 어떤 수를 써도 크로아티아 의회에서는 헝가리가 나오는 대로의 선거결과가 나오질 않았고, 결국 1912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라디치 등의 요인들을 잡아들였다.

거기에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등이 1차 발칸전쟁Balkan War을 일으키고, 또다시 오토만 터키군을 패퇴시키자 발칸의 전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1913년 전후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2차 발칸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패하자 세르비아는 영토를 거의 두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발칸을 노리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복장터질 일이었다. 어떻게든 세르비아를 손을 봐줘야 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는 가운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1914년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 대공Arch Duke Ferdinand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Gavrilo Pricip에게 암살을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주권국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후의 통첩을 때리고 전쟁에 돌입했고, 복잡하게 맞물린 국제정세에서 이는 연쇄반응을 거쳐 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장면 복원도 : 비스마르크의 예언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발칸에서 난리가 날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 난리가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물론 황태자의 암살이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사건은 우연에 우연, 오판에 오판, 실수에 실수, 주로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결과는 대비극.
자료원: http://www.znanje.org/i/i23/03iv05/03iv0502/html/sarajevski_atentat.htm

이런 국제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의 처지는 장기판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191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앙땅뜨 국가Entente Powers들은 런던에서 모여,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북달마시아 양도를 조건으로 이태리를 꼬드겼다. 이태리는 이 미끼를 물고 곧바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혼란기에 제국에 염증을 느낀데다, 앙땅뜨 국가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염려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지사들이 1915년 파리에서 유고슬라브위원회Yugoslav Committee를 결성, 앙땅뜨 국가들에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로비하기 시작한다. 

유고슬라브위원회는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도 이들의 노선을 두고 크로아티아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과연 민의를 대표하지 않는 일개 사설조직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 크로아티아로서는 선택지 자체가 많지 않았다. 중립을 지키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편을 선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어차피 견마의 노력은 1848년에 이미 했고, 그 결과 돌아온 것은 배신 밖에 없었다. 

1918년 1차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센트럴 국가들이 패전하면서 결국 제국은 붕괴됐다. 100년묵은 여우보다 더 오래 유럽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합스부르크 황가도 망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1918년 10월 800년을 이끌어온 헝가리와의 관계를 종식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을 선언한들 나라를 지킬 힘은 없었다. 1818년 11월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왕가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를 도합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를 선포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지도 : 1차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로 인해 가장 커다란 이득을 얻은 것도 세르비아였다. 불가리아, 헝가리가 당초 센트럴 국가들과 붙어먹는 바람에 이들로부터도 국토를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세르비아의 땅이 엄청 넓어졌다. 사회주의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지도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으니,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와 해변의 몇몇 도시가 1차대전의 또다른 승전국 이태리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생긴 차이다.
* http://news.bbc.co.uk/2/hi/europe/7251376.stm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반응은 하나의 방향으로 갈피를 잡기 어렵다.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독립을 원했으나, 속아서 왕국에 편입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서 독립을 추진할 수단과 토대가 전혀 없었다. 유고슬라브위원회처럼 남슬라브족의 연합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일부 오스트리아 충성파 장교들 처럼 제국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희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주어진 왕국에서 크로아티아의 자치권을 최대한 얻어내려는 세력이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정치거물이자 민족지도자 격인 라디치는 바로 이 세번째 세력이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줄다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2013년 3월 10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10 : 세기말의 발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1848년은 정치적으로 크로아티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을 표출하는 계기가 됐지만, 그 결과는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헝가리의 입김과 압력은 더 세졌다.

이때 크로아티아를 이끌었던 민족지도자가 바로 스톄판 라디치Stjepan Radić. 민족운동의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농민당Hrvatska Pučka Seljačka Stranka을 결성했다. 농민당... 제대로된 산업화의 과정도 없었고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던 크로아티아의 처지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레베카 웨스트는 라디치의 비전과 정책이 크로아티아의 미래를 대변하기에는 불완전하고 부정합적이라고 봤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처럼 문명의 변방에서 허덕이던 사회에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라디치. 크로아티아 쿠나화에도 올라온 위인이다. 200쿠나는 우리 돈으로 약 40,000원 정도

라디치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각축이 가열차게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세계 다수의 민족들이 기왕의 독립조차 빼앗기던 시기에 라디치의 외로운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될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대로 발동걸린 제국주의가 발칸반도 소수민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주기도 했다. 가장 커다란 계기는 오토만 터키의 패퇴였다. 19세기 초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이 러시아 제국 등의 암암리의 지원을 받아 봉기, 오토만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한다.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데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슬라브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유럽의 열강들이 모여서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특히 러시아가 몬테네그로 등을 통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들에게는 악몽같은 일이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는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나온 해결 방안이란 발칸의 소수민족들을 독립시키는 것. 이 참에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정식 독립을 쟁취하고, 불가리아가 오토만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토만 터키의 주권을 인정한 가운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경영하게 되니, 정치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

1900년의 유럽: 군웅할거의 독일이 통일되면서, 지도가 지극 간단해졌다. 하지만 발칸에서는 없던 나라들이 생겨났다

19세기말 20세기 초 발칸이 민족분쟁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였다. 제국과 제국들의 욕심과 지배욕이 중첩되고, 거기에 신생국들의 민족적 열망이  겹치면서 휘발성이 높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878년 비엔나회의를 주도했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만약 유럽에서 또다른 전쟁이 있을 것이라면, 발칸의 그 어느 빌어먹을 바보짓에서 비롯될 것'If there is ever another war in Europe, it will come out of some damned silly thing in the Balkans.(자료원 : wikiQuote) 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 예지력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 스스로가 이런 구도를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2013년 3월 8일 금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9 : 민족? 어느 민족?

18세기부터 징조가 보이더니 유럽에서는 19세기 들어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지난 회차에서 다뤘던 옐라치치, 코슈트, 서로 다투기는 했지만 모두 거대 제국 하에 눌려있던 변방 민족들의 바램을 담아낸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같은 민족주의라고 하더라도 크로아티아에서의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언어와 혈통의 고립점으로 남아있던 헝가리와는 자못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19세기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직접적 타겟은 헝가리였다. 이같은 경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이 있고 난 다음에 더 심해졌다. 그렇다면 헝가리와 맞서는 우리 민족은 무엇인가? 즉, 누구를 아(我)로 놓고 누구를 비아(非我)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크로아티아의 경우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와 비아를 가르는 투쟁이 계속됐고,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됐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오스트리아, 터키, 헝가리 등으로부터의 차이점에 주목한 19세기 초 일리리안 운동Illyrian Movement이 일어났다. 크로아티아 족이 당초 원주민인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정착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아이러니 한 이름이지만, 이 운동의 창시자(류데빗 가이Ljudevit Gaj)는 운동을 통해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의 단합을 생각했다. 언어공동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남슬라브족은 동일민족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19세기초 오토만 터키에 대한 봉기를 통해 자치(또는 실질적 독립)를 획득했다.

이러한 방향의 움직임은 당시 고개를 들던 범슬라브주의 유행과도 궤를 같이 했지만, 운동 추진체의 실행력이나 현장의 사정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분한 민족주의 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황가에 대항적인 면모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이 운동의 특이한 단면이다. 한마디로 농촌이나 현장과는 격리된 인텔리들의 공상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오토만이 퇴조하자 슬슬 불손해지기 시작한 헝가리를 견제하는 차원에서라도 변방의 슬라브 민족주의를 용인하지 않았을까. 서로 의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제국이든 이이제이는 살아있는 준칙이었다. 실제로 제국에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민족주의를 억누르는 데 앞잡이 역할을 했다. 헝가리가 패퇴하자 그 용도도 없어지고, 슬라브 민족주의 운동도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금지는 됐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크로아티아 더 넓게 남슬라브족의 역사에 커다란 저류이자 영향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심의 움직임에 대한 구심의 반작용도 있었다. 주변 남슬라브족과는 별개인 크로아티아 민족의 정체성을 주창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조를 이끌었던 인물(안테 스타르체비치 Ante Starčević)들은 세르비아와의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 역시 또다른 저류로 크로아티아 역사에 도저히 흐르게 된다.

왜 이런 흐름이 생겼던 것인가? 가장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19세기 초 세르비아가 오토만 제국에 대한 두차례의 거국적인 봉기를 통해서 실질적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이다. 남 슬라브 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세르비아의 궐기는 앞으로 크로아티아에게 새로운 경계의식을 일으키게 된다.

이 두가지 흐름, 전혀 반대방향의 사조는 크로아티아 역사(더 나아가 이웃의 남슬라브 국가들의 역사)에서 음과 양 같은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사족같은 말이지만 일리리아 운동을 주창했던 류데빗 가이는 부계는 슬로바키아, 모계는 독일계이고, 순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대표주자 스타르체비치는 아빠가 크로아티아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세르비아 사람이다. 결국 혈통과 삶보다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 셈이니, 이것도 결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이 내포한 미망의 시작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2013년 3월 6일 수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8 : 빛나는 예외, 두브로브닉

초기에 잠시 반짝하던 때를 제외하고 적어도 19세기까지 크로아티아의 역사에서 해뜰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한 민족의 쟁투를 놓고 봤을 때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생존자로서 역사의 투쟁에서 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모든 구석이 고투 속에서 역사를 보낸 것은 아니었으니, 그 예가 바로 라구사Ragusa 공화국이다. 오늘날 두브로브닉Dubrovnik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도시 국가는 크로아티아가 악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베니스, 제노아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 

두브로브닉 올드타운의 전경, 우리나라에서 고현정씨가 커피믹스 광고를 찍어면서 유명해졌다.

이태리 쪽에 비해서 훨씬 더 투명하고 맑은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변에 위치한 이 중세도시는 오토만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에도 지중해 무역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베니스, 헝가리, 오토만 등 주변 열강들의 움직임에 따라 속국을 자처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 어떠한 경우에도 외세의 실질적 지배를 허용했던 적이 없었다. 몽매한 군주가 나오면 한큐에 역사에서 사라지기 십상이던 문명의 경계선에서, 라구사 공화국이  14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독자적인 공화정 정치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사실 자체는 경이롭다할 수 있을 것이다.(사가들은 도시 자체는 한 7세기 정도부터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외교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외적들의 위협을 돈으로 무마할 수 있을 만큼 재력도 튼튼한데다 사진에서 보듯이 성곽도 튼튼해서 쉽게 공략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베니스가 오토만과의 쟁패로 점점 내리막을 걷고 있을 때도, 이들은 오토만, 헝가리, 베니스 등과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이 잘 나가던 공화국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으니, 17세기 중엽 지진으로 인해 통령관저 등 대다수의 주요건물들이 무너지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오늘 날 올드 타운의 모습은 그 이후 복구된 모습인데, 안타깝게도 왕년의 영화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둘째, 주요 교역대상인 중국, 오토만 문명이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신대륙, 신항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 상황에서 지중해 무역은 과거 프레스티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근대적인 무기체계의 발명으로 인해 높은 성곽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점도 중요하다. 남은 건 외교술인데 주둥이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면, 세상에 망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 

두브로브닉 성당이다. 카톨릭 역시 라구사와 크로아티아를 엮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에 성문을 열면서 라구사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그 다음부터 달마시아의 일부로서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다면 이들 라구사 사람들은 스스로를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구는 슬라브 계통이 다수였지만, 지배계급은 라틴어나 라틴계 지역방언을 사용했으며, 원로원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배계층의 이런 생각에도 불구, 라구사 공화국 전성기인 16세기, 지배층의 일원인 이반 군둘리치Ivan Gundulić가 크로아티아어로 장편서사시를 만들었으니, 크로아티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1990년대 유고가 붕괴되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몬테네그로 출신의 민병대가 두브로브닉에 포격을 가하면서 국제사회가 공분한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유적에 대포를 쏜다는 것이 너무 야만적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폭격으로 갈아업다시피한 크로아티아의 또다른 도시 부코바르Vukovar와 달리, 두브로브닉에 대한 공격은 조기에 중단되고 말았다. 역시 사람이건 도시건 이쁘고 봐야할 일이다. 

2013년 3월 5일 화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7 : 귀신들린 해 1848년

18-19세기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는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유럽 구석구석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자각, 산업국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계급적 자각 등이 버무려진 혼돈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유럽지도는 점점 간단해졌지만, 속사정은 더욱 복잡해져 갔다.

드디어 1800년대 유럽지도 : 이전에 나온 지도들에 비해 (통일되지 않은 독일만 빼놓고) 엄청 간단해졌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드리아해를 주름잡던 베니스까지 잡아 먹은 모습이다.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오토만 터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이 철저한 반동정치로 회귀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압박과 압력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열망이 응축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산주의의 귀신이 유럽을 활보하고 있다고 전했지만, 분명 유럽을 괴롭힌 귀신은 공산주의 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구석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각종 사상과 주의 주장들이 나타나면서 1848년은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든 것 처럼 전 유럽이 무병을 알았다. 

반동정치에 앞장섰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집약됐는데, 보헤미아, 헝가리, 이태리 등 각 속령에서 반란이 속출하는 가운데 비엔나에서 마저 봉기가 일어나,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합스부르크 황가 역시 또다른 위기를 맞았다. 가장 커다란 도전은 제국에서 최대다수의 피지배민족인 헝가리의 봉기였다. 러요쉬 코슈트Lajos Kosuth를 위시한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이 황가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포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 입장에서도 민족주의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거셌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자신의 민족적 입장을 대변할 만한 인물로 오토만 터키 국경에서 오스트리아 장교로 활약하던 요십 옐라치치 Josip Jelačić(1801-1859) 대령을 반Ban으로 선출한다.

요십 옐라치치 :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사특별구를 주활동 무대로 했던 이 사람은 부하들의 절대적 신망을 받았다. 반이 될 때까지만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입장은 헝가리에 비해 훨씬 요구사항이 온건했는데, 요체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동등하게 3중왕국Triune Kingdom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합스부르크가 약해질대로 약해졌을 때 헝가리와의 연합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헝가리는 아예 크로아티아를 자신의 속령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헝가리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과거의 전례로 보아, 크로아티아를 자신과 동등한 민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알량한 자존심이 헝가리 사람들에게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십 옐라치치가 한 일은 합스부르크의 편을 들어 코슈트의 난을 진입하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독립....은 아니라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것... 황제의 명을 받지도 않고 덜컥 헝가리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았다. 헝가리에 들어가서 견마의 수고를 했어도,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장기판의 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가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대접을 받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약탈과 강간 등 오토만 터키와의 오랜 마찰을 통해 체득한 여러 못된 습관으로 인해 크로아티아군의 내부군기까지도 말썽이어서 오히려 헝가리 국민의 결속을 굳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황가의 문제를 풀어준 것은 혁명의 열기가 자국에 까지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러시아 황제. 1849년 러시아 군이 개입하면서 헝가리 독립군이 지리멸렬, 러요쉬 코슈트가 터키로 망명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게 1848년의 혁명은 지금도 항복날에는 아예 맥주를 마시지 않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가 됐다. 개와 말의 노고를 다했던 크로아티아는? 역시 개뿔 얻은게 없었다. 혁명의 열기를 타고 모처럼 제목소리를 냈던 의회Sabor는 다시금 권위와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기기 시작했다. 옐라치치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뇌와 고민을 거듭하다 조로의 길을 걷고, 혁명이 진압된 10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헝가리 문제는 당분간 잠잠해졌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1867년 들어 다시금 입장이 궁해진 합스부르크 황가가 결국 헝가리와의 대타협Ausgleich을 통해, 제국을 비엔나를 수도로 한 오스트리아와 부다페스트를 수도로한 헝가리 2개로 분할한다. 황제만 합스부르크가에서 맞되 두개의 분국은 각자의 의회와 각자의 수도를 가진 2중 제국이 된 것이다. 또 이 때를 기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크로아티아는? 당연히 과거의 관례에 따라 헝가리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니, 한마디로 크로아티아가 쏟아부은 견마의 노고는 없었던 일이 됐다. 헝가리가 벌로 받은 것을 크로아티아는 상으로 받았다는 말도 나왔다. 이 이후부터 크로아티아는 교육 등 여러 면에서 강력한 마자르화Magyarization의 압력을 받게 된다.

때문에 옐라치치에 대해서는 후세 사회주의 정권 등으로부터 '나이브하다'느니, '정치적 둔재'라느니 가혹한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모처럼 민족의 총의를 한몸에 모아낸 이 사나이에 대한 크로아티아인들의 애정은 매우 깊다. 특히 그 이후 계속된 마자르화의 압력 속에서 헝가리와 맞서 싸운 이 사람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던 탓도 있을 것이다. 유고에서 독립하고 난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의 중심광장을 이 영웅에게 헌정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 동상도 역시 반 옐라치치. 원래 칼을 뻗은 방향이 헝가리 쪽(북쪽)이었는데,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헝가리 정부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남쪽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옐라치치와 동일하게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는 러요쉬는 나중에 가서 헝가리내 소수 민족을  달래지 못한 것을 가장 커다란 실패로 꼽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아집이 결국은 사단을 만들었지만, 오스트리아 내의 어느 소수 민족도 전략적 사고를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봉헌된 러요쉬 코슈트. 웃긴 이야기지만 부계조상은 슬로바키아계, 모계 조상은 독일계다. 자신은 스스로를 100% 헝가리인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 3월 3일 일요일

크로아티아의 역사 6 : 합스부르크의 팽창

17허망하게 토종 귀족들을 잃어버리게 된 크로아티아의 주변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나타났다. 크로아티아 두가문의 난이 진압된지 10여년이 지난 1683년 오토만의 Grand Vizier인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가 뜬금없이 비엔나를 처들어간 것이다. 20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서 비엔나를 겁박하니 합스부르크의 Leopold 황제도 일단 도망가기 바빴다.

1683년 비엔나 포위전 : 이 때보다는 훨씬 뒷 시대에 태어났지만, 모짜르트의 초시대적 히트곡 중에 터키 행진곡이 있다. 모짜르트 시대 오스트리아는 오토만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군악대를 조직해서 전쟁터로 끌고 다녔던 것은 오토만 터키가 처음이라고 한다.
* 자료원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Vienna_Battle_1683.jpg

하지만 거기까지. 

1만명 남짓으로 지키는 비엔나에서 발이 묶이고, 여기에 폴란드, 바바리아 등 독일의 각 왕국에서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역전됐다. 오토만군의 일방적인 패주가 시작되고, 평지에 풍파를 일으켰던 카라 무스타파는 결국 베오그라드에서 참수당했다. 이 때의 패전을 계기로 오토만군 뿐만 아니라 오토만 제국 자체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았고, 이 이후로 유럽의 병신 병자Sick Man of Europe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이후 30년 간에 걸쳐 헝가리를 비롯하여 크로아티아 땅 대부분이 회복되고, 1697년에는 사보이의 오이겐공 Prince of Savoy Eugen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의 젠타Zenta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이제는 오토만이 평화를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1699년 체결된 스렘스키 칼로브치Sremski Karlovci 협정을 통해 오토만 제국은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영토를 포기하게 되는 바, 오이겐 공은 부다페스트 부다왕궁에 동상을 모실 정도로 초국적 영웅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오이겐공의 초상, 원래는 프랑스 왕궁에서 총신의 자제로 자라났으니 프랑스 사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형제 중에 가장 병약했지만 군문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 자기를 받아준 오스트리아 황제를 위해 진력했다. 비엔나에는 이 사람의 여름별장이던 Belvedere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활약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국토의 상당부분이 오스트리아 황제의 직할지로 남게된데다가, 크로아티아인들을 이끌만한 대표적 가문도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을 내세울 만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중앙집권적 행태는 더욱 강해졌고, 거기에 더해서 과거 크로아티아를 지배했던 헝가리 귀족들까지 나서서 크로아티아를 헝가리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중 왕국 체제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의 자치를 인정하던 과거 헝가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18세기초 유럽의 세력판도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전세기에 비해 부쩍 커졌다.

베니스의 직할로 다스려진 해변지역 역시 역시 상황은 안좋았는데, 베니스 공화국은 광대한 해상 영토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내재적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 보다는 공산품(베니스)-원자재(식민지) 분업구조를 유지하면서 지역경기를 빈곤으로 내몰았다. 베니스는 정책적으로 식민지에서 학자보다는 군인을 원했고, 군인을 만들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가난의 대중화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크로아티아에서 생산한 소금에 중과세를 부과하면서, 생선의 보관을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던 달마시아 어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과거에는 숲이 울창했던 크로아티아 해안지방이 지금은 팍팍한 돌산 밖에 남지 않은 것이 베니스가 배를 만들 나무를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조달하면서 남벌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뭐 하나 시원한 소식이 없는 가운데도 크로아티아인들의 가슴이 끌어오르는 분위기는 자꾸 조성됐는데, 유럽에서도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