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8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3 : 오토만 지배 500년

1389년의 코소보가 세르비아 민족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것으로 믿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그 때부터 오토만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귀족들이 오토만에 충성을 서약하면서, 15세기 유럽-오토만 간의 전선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다시 그려졌다.

또 유럽으로 들어오는 오토만 역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커다란 위기가 15세기 초에 티무르 칸과의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나타났다. 술탄 바예지트가 티무르에게 생포되고 그 아들들이 후계 다툼을 벌여서 내분이 정리되는 데만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때를 기해서 세르비아의 대표호족, 즉 라자르의 후계자 스테판Stefan은 헝가리와 연합한다. 때마침 헝가리는 국력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야노쉬 훈냐디Janos Hunyadi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었다. 스테판이 죽자 그 사촌 주라지 브랑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그 뒤를 이었다. 주라지는 변방국가 만이 할 수 있는 줄타기 외교의 달인이었다. 두명의 딸 중 한 명 마라Mara는 오토만 술탄에게, 또다른 한 명은 헝가리 왕의 사촌동생에게 출가시키면서 중간역할을 했다. 오토만-헝가리 평화조약인 세게드 평화조약Peace of Szeged(1444)를 중재하면서 세르비아의 국권을 일으키는 희귀한 일도 바로 이 사람의 치세 때 일이다.

세르비아의 거의 마지막 왕Despot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1430년에 거처 스메데레보Smederevo(베오그라드 남동쪽 다뉴브강변)에 지은 성이다. 오토만 쓰나미는 이 성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구-이슬람 문명의 평화체계가 지속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카톨릭 교회가 '이교도와의 약속은 안지켜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헝가리가 중심이 된 십자군이 오늘날 불가리아 지방으로 침입하면서 모처럼의 평화조약이 깨져버렸고, 주라지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 게다가 주라지는 평화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야노쉬 훈냐디에게 뇌물까지 주지 않았나. 십자군과 오토만 간의 대결은 1444년 바르나 전투로 연결됐다. 결과는 십자군 패배.

헝가리의 야노쉬 훈냐디가 1448년 다시금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코소보 들판에서는 두번째 서구와 오토만 간의 전투가 있었다. 또다시 헝가리의 패배. 이 전투에서 주라지는 중립을 지켰지만, 헝가리 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낱낱이 오토만 쪽에 알리고 전략적 자문을 제공했다고 한다. 세게드 평화조약을 망친 것은 훈냐디 때문이라는 개인적 악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와 오토만간의 일진일퇴 공방이 지속되고 이 자리에서 불안하게 나마 세르비아는 정치적인 권력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는 1456년말 주라지 브랑코비치가 79세의 나이로 타계하면서 또다시 지긋지긋한 후계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를 틈타 오토만은 조용하게 세르비아를 병탄했다. 브랑코비치 왕가가 망하면서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정치체제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다뉴브강 북쪽으로 도망친 세르비아인들과 일부 귀족들이 잠깐 잠깐 왕국을 만들기는 했지만, 오래 끌지 못했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 하에서, 모하치 전투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하에서 오토만 항전의 최전선을 맡았다. 나라가 없어진 세르비아인들의 일부는 다뉴브를 넘어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슬라보니아 평야를 거쳐, 아니면 보스니아를 거쳐 달마시아에 이르기까지 또다시 이동을 했다. Tim Judah가 말한 바 이 같은 세르비아의 이주 패턴은 결국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종청소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체제를 피한 정처없는 방랑 아니면 기존의 이주민들을 뿌리부터 드러내는 모습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됐다.

국가적 혹은 정치적 체제로서의 세르비아가 사라지게 된 때는 오토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정복왕 메흐메드Mehmed II the Conqueror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술레이만 대제의 치세였으니까, 오토만으로서는 최대 전성기를 찍고 있을 때다.

2012년 터키에서 개봉된 영화 Fetih 1453은 주라지의 세르비아를 비롯해서 서방세계를 괴롭히던 메흐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비잔틴제국) 정복을 다루고 있다. 최근 경제사정이 나아지니까, 터키에서는 과거의 영화를 영화로 재현하려는 움직임들이 커지는 듯 하다.

과연 오토만 터키가 과연 압제와 폭압 만을 앞세운 야만민족이었을까? 세르비아 사람들은 코소보 전투 이후부터 세르비아 민족의 암흑기로 들어서면서 내내 오토만의 압제가 지속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미지는 대부분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상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압제 만으로는 500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토만 제국은 세르비아를 병합하면서 무슬림 엘리트들과 샤리아 율법 체제를 발칸으로 도입했지만, 현지의 실정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아서 세르비아에서 통용되던 세속법quanuns을 대폭적으로 수용했다. 전제주의 오토만의 군사적 파상공세로 발칸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는데, 15, 16세기 오토만의 사회 시스템과 체제는 서구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앞서있었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란 말로 대표되듯 무자비하고 강제적인 개종작업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것도 다 서구가 만든 편견이다. 물론 일부는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강제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오늘 날의 기준에서 보면 에누리가 있지만 오히려 오토만 치세는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하는 관용Tolerance의 시대였다. 동방정교던 카톨릭이던 기독교를 믿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과거 서구 문명권이 틈만 나면 박해하고 쫓아낸 유태인들을 받아 준 것도 오토만이었다.

사회 및 정치 체제가 이슬람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세르비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준 것은 세르비아 정교 교회였다. 정교 교회가 코소보에서 오토만과 싸우다가 전사한 라자르 Lazar를 비롯한 주요 민족의 영웅들을 성인으로 추존하고 숭앙하면서, 다시금 부활하게될 세르비아 민족의 신화를 전승해왔지만, 이 역시 건드리지 않았다.

오토만 제국은 정교, 카톨릭, 이슬람, 유대교 종교 신봉자들이 별도의 구역에서 살도록 하는 구획 시스템Mahala을 유지해왔다. 귀족들이 사라지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주로 농촌 대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결속한다. 하나의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세금을 제 때 내는 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토만의 원칙이었으므로 이들 대가족 커뮤니티Zadruga는 세르비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 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어떻게 보면 우리 기준에서 보면 전혀 다른 민족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이들이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된데는 이 같은 시스템을 통해서 형성된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민족을 언어공동체 중심으로 규정하던 서구 사람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근원이었다.

문제는 지배세력의 타자성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관용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서구사회가 표방하는 것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토만이 유럽의 병자로 이 강대국 저 강대국에게 돌아가면서 따귀를 맞게 되면서, 애꿎은 화풀이를 지역내 기독교인들에게 했던 것이 두고두고 오토만의 압제로 기억되게 된다. 18-19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맞아 세르비아의 자기 주장은 결국 어떻게 하면 오토만 유산을 극복하고 몰아낼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었다.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2 : 코소보 1389

어느 민족이나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결정적 전기가 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그것이 1389년 코소보라고 생각한다.

* 코소보의 소녀, 우로쉬 프레디치Uroš Predić가 1919년에 완성한 그림으로 아직도 가장 인기 있다. 전투 다음 날 부상당한 병사를 부축하는 코소보 소녀의 모습에서 세르비아의 자기투사가 보여진다. 

1389년이면 네마냐 왕조의 두샨이 제국의 위업을 세운지도 얼마 안되는 때다. 하지만 아들이자 후계자 스테판 우로쉬Stefan Uroš도 왕업을 이을 실력이 없었다. 친족과 호족들이 너도 나도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얼마 안가 우로쉬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어 네마냐 왕조도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때문에 14세기 세르비아는 호족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했고, 이렇게 지역사정이 어지러운 가운데 1389년 오토만의 술탄 무라드Murad I가 대군을 이끌고 유럽원정길에 나섰다. 결국 라자르 흐레블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호족 연합군이 이들을 검은새벌, 코소보 들판Kosovo Polje에서 맞선다.

세르비아에서 민족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보는 이 전투의 구체적인 모습과 결과에 대해서는 예상 외로 자료가 많지 않다. 이 전투의 결과를 놓고 세르비아는 장렬한 패배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후세에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것이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동의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투 직후, 상황에 대한 평가는 서구에서 떠돈 서신과 편지들을 보면 오히려 세르비아 측의 승리라고 표현한 경우가 종종 나왔다.

적어도 거의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점은 전투자체는 매우 격렬했을 것이라는 점, 그 결과로 양측의 총수 즉 라자르와 무라드가 모두 전사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래서 후세 사가들은 세르비아의 일방적 패배보다는 무승부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투의 직접적 결과가 어찌 되었건, 오토만은 다시 끌고올 군사력과 재정이 충분했지만, 세르비아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Stefan은 터키에 충성을 서약하고 오토만의 봉신Vassal이 됐다.  특히 스테판은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 주도 십자군을 1396년 니코폴리스Nicopolis (오늘날 불가리아의 Nikopol)에서 격퇴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코소보는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민족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자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신화로 격상된다.

라자르가 코소보에서 결전을 벌이기 전 날, 그는 선지자 엘리야Elias의 계시를 받는다. 엘리야는 라자르에게 묻는다.  천상의 왕국 Heavenly Kingdom을 원하는지 아니면 땅위의 왕국 Earthly Kingdom을 원하는지. 땅위의 왕국을 원한다면, 내일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지만, 언젠가는 망할 것이고, 천상의 왕국을 원한다면 내일 전투에서 지고 전사하더라도, 천국에서 하늘의 왕국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에 라자르는 천상의 왕국을 선택하고 나아가 장렬히 전사를 했다는 이야기. 이 찬란한 정신승리의 전설로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천상의 민족 heavenly people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최근에도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민족에게 백두산을 통째로 외국에 넘기라는 것과 비슷한 감정적 무게라고나 할까.

후세 학자들은 이 신화의 구조가 금도끼 은도끼 예수의 고난과도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만큼 드라마틱하다.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세르비아 민족의 부활이다. 19세기 민족주의 시대를 맞아 이 신화는 더욱 확대재생산되면서 대大대세르비아의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 베오그라드 연고 축구팀 츠르베나 즈베즈다Crvena Zvezda 축구경기에 등장한 1389 코소보 머플러

전투가 있었던 6월 28일은 세르비아 정교 축일인 Vidovdan(Saint Vitus Day)이다. 이 날에는 이 극적인 민족에게 유난히도 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1389년 코소보 전투를 필두로, 1914년 1차대전의 발화점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저격사건도 이날 일어 났다. 뿐인가 티토 치하의 유고슬라비아는 1948년 6월 28일 스탈린 주도 코민포름에서 축출됐다. 가장 최근 1989년 이 날에는 밀로세비치가 코소보 들판에서 전투 600주년 기념연설을 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촉발했다.


2013년 4월 20일 토요일

발칸은 도대체 어디인가?

발칸반도Balkan peninsula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정확한 지리적 경계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드리아해, 에게해 등을 포함한 지중해, 흑해를 3면으로 해서  소챠Soča, Vipava비파바, 크르카Krka, 사바Sava, 다뉴브Danube 강을 경계로한 광대한 지역을 발칸이라고 칭하거나 사바, 다뉴브를 제외한 다른 강들이 들어서서 발칸을 구획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더불어 발칸국가Balkans라는 말도 있다. 발칸반도에 들어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또 다시 위키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불가리아, 그리스를 기본으로 해서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를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한다.

자료원 : http://exetertraveljournal.blogspot.com/2009/01/historic-fortresses-of-balkans.html

발칸이라는 명칭 자체가 터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9세기 근대 유럽에 있어서 발칸은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도 문명권 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영원한 '타자'를 의미했다. 19세기 유럽의 문명(!)국들은 발칸을 쇠락하는 터키 제국의 무능, 부패와 결부시키면서 그 인식 자체를 유럽 문명의 안티테제로 부각시켰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속에서도 보스니아로 발령난 오스트리아 영사의 부인이 왜 자신이 '아시아'로 가야하냐면서 속상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디트 더햄Edith Durham이라고 20세기 초 발칸반도를 여행한 작가는 유럽인들의 인식을 이렇게 정리했다. 발칸에서 무슬림이 무슬림을 죽이면 잘된 일이고,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죽이면 폭정이자 탄압이고,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죽이면 숭고한 독립투쟁이었다고... 이 같은 편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같은 인식이 팽배하다보니,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발칸국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이다. 이 두 나라는 스스로의 소속처를 숭고한 중앙유럽Central Europe(!)으로 본다. 중앙유럽이 어디인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다. 세르비아는 스스로를 발칸반도 국가로 인정을 하지만, 자신은 이슬람을 극복하고 이겨낸 기독교 문명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인기있는 철학자(?)인 슬라보이 지젝은 이런 현상을 '모든 나라가 발칸을 필요로 한다Every Country Needs Balkans'고 정리한다. 이태리나 오스트리아 같은 서구 선진국들 눈에는 발칸은 슬로베니아부터 시작해서 터키까지 이르는 부분이고, 슬로베니아는 크로아티아에서부터 발칸이 시작한다고 본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같은 무슬림들이 문제라고 본다는 것. (이슬람 = 테러리즘)

결국 발칸이란 말은 되고 싶지 않은 타자, 박멸해야할 외적, 반문명, 비문명과 결부되어 사용되는 예가 많았고, 그 탓에 유럽에서는 공식적 외교문서에서 발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이보다 훨씬 가치 중립적인 남동유럽 Southeastern Europe이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그런지 구유고 국가들 저마다 동쪽의 이웃 나라를 '발칸'으로 얕잡아 보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알게된 크로아티아에 시집온지 10년이 되가는 마케도니아 색씨는 완벽한 크로아티아어를 구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엘리트지만, 크로아티아 정부나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마케도니아인은 그럴 자격이 부족하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슬로베니아 최대 유통체인인 메르카토르Mercator가 도산지경에 이르렀던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 최대기업으로 유통체인이자 식품가공업체인 아그로콜Agrokor가 인수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번번히 최종단계에서 무산됐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토종 국내최대기업이 크로아티아 기업에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2012년 만난 슬로베니아 유통업체 인사에게 이와 관련해서 의견을 물어봤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고 했지만, 태도나 언사로 봤을 때 딱 받은 인상은 '머슴이 어디 안방을 들어와?'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사실 발칸에서만 일어나고 있나? 사람사는 데가 어딘들 다르겠나. 어쩌다 알게된 세계은행 컨트리 매니저와 부부동반 식사(부부가 한국인)를 하는데, 아프리카 출신 월드뱅크 직원들이 한국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월드뱅크 명함달고 다녀도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 1997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인도 출신 IMF 직원과 같이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인도 사람이 제나라나 잘 건사할 것이지 뭣하러 한국에 왔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란다. 그 뿐인가 안산 같은 데서 사는 외국인근로자들에게는 온갖 멸시가 쏟아지고, 웹에서는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데마고그도 한참이다. 최근에는 한동안 호남사람들에 대한 멸시 버릇이 점차 다른 나라나 조선족으로 비화하는 느낌이다.

비단 우리 뿐이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수태 죽어나간 이야기도 결국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근거없는 소문 때문이었고, 기독교 문명권이 유태인을 대대로 이지메하고 핍박했던 것도 유태인들이 애를 잡아먹는다는 둥,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둥의 편집증 때문 아니었던가?

'발칸'은 결코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나라 이야기도 아닌듯 하다.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1 : 민족, 왕국, 그리고 제국

유고슬라비아라는 한지붕에서 살았던 다른 민족으로는 크로아티아 말고 세르비아 인들이 있다. 사실 어쩌다 크로아티아 옆에 붙어사는 민족처럼 들리지만, 사실 구유고에서 인구수로 따지면 세르비아 인들이 제일 많다. (2011년 현재 크로아티아 약 5백만, 세르비아 천만 가량?)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발칸의 호랑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는 등 지역내 맹주의식이 강하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차이가 거의 없는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사실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봐야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민족의 자각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18세기 말 19세기 초 크로아티아(류데비트 가이Ljudevit Gaj)나 세르비아(북 카라지치 Vuk Karadžić)의 민족 선각자들은 양측에서 모두 언어로 민족을 정리해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서로를 다른 민족N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양 측이 서로 다른 버전의 기독교를 믿었다는 점. 하나는 카톨릭, 다른 하나는 동방정교. 그런데 그것이 서로의 선을 가르고 니편 내편 따질 이유가 되나?

기질 상의 차이도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90년대말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이 살짝 언급한 바, '발칸의 격정 Passion'의 진앙지였다.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의 영화 Underground를 본 사람들이라면 느낄 수 있듯이, 놀기 좋아하고 정열적이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도회의 영향을 받아 차분한 서울 다마네기라면 세르비아 사람들은 훨씬 격정적이다. 즉흥성도 강하고 변덕도 있지만, 친해지면 더 없이 괜찮은 사람들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를 쓰릅Srb이라고 부른다. 모음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민족의 명칭은 나라에 적용되면서 쓰르비야Srbija가 됐다. 그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세르비아Serbia가 된 것이다. 간혹가다 스페인의 세빌랴Sevilla 와 헷갈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세르비아에서는 이발사를 찾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크로아티아인들과 얼추 비슷한 시기에 발칸지역으로 찾아든 이들은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 형식으로 살다가 11세기 경부터, 라슈카Raška 지역(오늘날 세르비아내 산작지역)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1160년대 스테판 네마냐Stefan Nemanja가 왕조를 형성하고 발칸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네마냐 왕조는 그저 오고 가는 왕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세르비아 역사에서 굵은 획을 그었다.

가장 뚜렷한 획은 세르비아라는 국체를 역사에 각인했다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들의 영속적인 영향은 정치적인 부분보다는 문화적인 데 있었다.

가장 획기적인 점은 스테판 네마냐의 세째 아들이 정교의 사제로서 그리스 아토스산에서 오랜 수행 끝에 획득한 법력(!)을 바탕으로 비잔틴 교회로부터 세르비아 정교 독립권Autocephaly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사바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최초의 총대주교patriarch가 되면서 세르비아 교회의 전통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성 사바Saint Sava다.

아버지 스테판도 이 아들의 감화를 받아 출가하고, 남은 두형제 간 후계싸움도 이 사람이 말렸다고 하니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형제 간의 싸움을 말리고 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는 것은 세르비아 역사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오직 단결만이 세르비아인을 구한다'Samo Sloga Srbina Spašava라는 구호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정교가 만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세르비아 정교는 오토만의 500년 지배 기간 중 거의 유일하게 남은 사회제도Institution로 세르비아의 정체성을 지키는 구심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 십자가의 모습이다. 십자를 중심으로 한 네개의 분면에 총 네개의 키릴 문자 C(음가는 'S') 도안이 배치되어 있다. 바로 Samo Sloga Srbina Spašava (Само Слога Србина Спашава) 구호의 첫음절들이다.

잘 되는 집안은 무엇을 해도 잘된다고 네마냐 왕조는 그 이후로도 번창을 거듭했는데, 특히 독일에서 광산기사들을 영입해서 금, 은, 납, 구리 등을 채굴하면서 상당한 재력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지배영역을 넓혀 갔다. 특히 이들은 거점인 코소보 지역에 데차니, 그라차니차 등 국력을 총화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를 민족의 발상지처럼 여기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다.

그러다 14세기 들어서 두샨Dušan이 스스로 황제(짜르, Car)라고 칭할정도 세력이 커졌는데, 다뉴브 강에서부터 에게해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을 세르비아의 통솔하에 편입시켰다.

<네마냐 왕조의 최전성기 1350년 경의 발칸 지도 : 북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 보스니아가 위치하고, 동쪽으로 불가리아, 비잔틴제국, 남쪽으로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생긴 카톨릭 아테네공국, 아체아 공국 등이 보인다>
자료원 : http://imgur.com/r/MapPorn/WJcYFgR

그러나 두샨에게는 아버지 스테판 데찬스키Stefan Dečanski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2달 만에 목 졸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도덕적 흠결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다수의 성자를 배출한 네마냐 왕조에서 두샨이 성인으로 추존되는 데 결정적 결격사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결격사유와는 별도로 이 오래전 두샨의 궐기는 세르비아 민족의 지향과 비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줬다. 이러한 화려한 과거는 구 유고 국가들 중에서 세르비아 만이 지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왕년에 말이지~하는 자존심? 야성, 야심, 야만. 좋던 나쁘던 세르비아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