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4 : Balkan Gypsy Brass Band

발칸반도에 집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4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는 서유럽이나 러시아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퍼져나갔지만, 다수는 아직도 발칸에서 살면서 사회생태계의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살을 맛대보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 집시 하면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이들의 음악은 찌고이네르바이젠, 헝가리 무곡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줬으며, 후대에는 장고 라인하르트를 비롯해 기라성 같은 집시 뮤지션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발칸지역 집시 음악 역시 같은 궤적에 있다고 봐야 겠지만, 가장 눈에 띠는 점은 집시 브라스 밴드의 존재다. 이들 음악은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의 '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이들 밴드는 중요한 축제 혹은 애도의 계기 때마다 등장해서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듣는 것이 축제 때가 많다보니 다수의 노래에 축제와 흥분의 톤이 내장되어 있다. 

구유고에서 활동 중인 집시 브라스 밴드 중에서 가장 많은 각광을 받는 보반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Markovic Orkestar의 모습. 리더 보반의 아들 마르코Marko도 14살때 학교를 때려치고 가세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브라스 밴드인가? 동유럽 집시하면 바이올린 아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오토만 터키는 서구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앞서 전문군악대Mehter를 운영했다. 14세기부터 오토만의 서진이 본격화되면서 이들의 악기(주로 나팔과 북)가 이런 저런 경로로 집시들 수중에 들어갔다. 19세기 세르비아가 독립하면서 이들의 악기는 서양식 나팔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적으로 조직된 세르비아 군대에서도 군악의 취주를 담당한 계층은 집시들이었다. 더 나아가 척박한 데서 거친 일을 하다보니, 손이 거칠어져서 현악기보다는 관악기 쪽이 이들에 맞았다는 설명도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브라스 밴드가 많다 보니, 세르비아에서는 오늘 날도 구챠Guča에서 매년 8월 마다 트럼펫 축제가 열리는데, 이게 왠만한 서유럽이나 미국 록 페스티발 저리 가랄 정도로 규모가 꽤 크다. 

이들 음악은 이것 저것을 섞은 잡탕처럼 보이지만, 족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19세기 발칸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첵Čoček 장르의 주요담지자들이다. 터키식 오리엔탈 멜로디, 강력한 비트(4/4, 7/8, 그리고 집시 9이라고 불리는 9/8박) 등이 주요 특징이다. 댄스비트의 경우 벨리댄스와도 결부되기도 한다.

구유고 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집시 브라스 밴드를 꼽으라면, 단연 세르비아의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Boban & Marko Marković Orkestar다. 다음 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10년 구챠 트럼펫 페스티발에서 이들의 라이브 장면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집시 브라스 음악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반 앤 마르코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 연주곡은 쿠스투리차 영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칼라시니코프Kalašnjikov다. 브라스 밴드 역시 여느 록밴드 못지 않게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이것이 집시 브라스 밴드의 전통적 기능이었을 것이다.


약간 발칸의 궤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최근에 뜨는 집시 밴드로는 팡파레 초카를리아Fanfare Ciocărlia를 빼 놓을 수가 없다. 루마니아 집시들인 이들은 독일 음반제작가들에게 최근에 '발견'되기 전까지 동네 섬유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루마니아 깡촌에서 조차도 지켜낸 이들 음악의 매우 높은 완성도다. 이들은 2011년 마르코비치 오케스트라와 공동음반 발칸 브라스 배틀Balkan Brass Battle(Asphalt Tango 발매)을 내놨다. 두 밴드의 경쟁심으로 시종 긴장감이 팽팽한 명반이다.  공산주의 시절 전혀 만날 수 없었던 두 밴드가 얼마나 동일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다.

2011년 부다페스트에서 이 두 밴드가 만나서 같이 공연했다. 영화 007 테마를 주제로 만든 곡인데, 대중에 어필하는 곡인데도 어쨌건 집시식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이게 꽤나 흥겹다. 청중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9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2 - 1차대전의 결과

동맹들과의 협력과 알력을 통해 일으킨 발칸전쟁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꿈에 그리던 고토 코소보를 회복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동포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차대전 직전 보스니아의 경우 인구의 43%가 세르비아인들이었으며, 크로아티아에서도  군사특별구Krajna Vojna를 중심으로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대세르비아의 꿈은 이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는 것이었다.

오스만 터키와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 형태로 보스니아를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를 공식적으로 병합annexation하여 지역의 긴장도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 때문에 1912-13년 발칸전쟁이 끝난 다음을 기점으로 세르비아의 민족적 원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오토만 터키에 비해 헛점이 없었다. 국력 면에서도 실력 차이가 너무 확실했다(인구 : 오-헝 5천만, 세르비아 발칸전쟁 이후 440만).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에서는 청년적 이상주의와 군부의 팽창주의가 만난다.

1911년 이상주의적 청년장교들이 '통일 아니면 죽음'Ujedinjenje ili Smrt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03년 오브레노비치 왕조 축출과 쿠데타 주동자들이 만든 단체다. 그것이 나중에는 훨씬 간지나는 '검은손회'Crna Ruka로 이름이 굳어버렸다. 시작은 단촐했지만, 군내유력인사가 시대정신을 담아 만든 것이다 보니 1914년 경에는 2,500명까지 회원이 늘어났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대세르비아의 실현. 이를 위해서 보스니아 등지에서 활동할 다양한 사보퇴르, 게릴라,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했다. 어느날 이들에게 보스니아 촌뜨기 청년들이 찾아와서 거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 중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cip이었다. 1914년 6월 . 이 보스니아 청년이 얼떨결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암살하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1차대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검은손회 주동자 중의 한사람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역사적으로는 아피스Apis라는 암호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당시 대령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온 햇병아리 암살자들에게 총과 폭탄을 건내주라고 한 사람이 바로 이 양반이다.  너무 나댄다 싶었던지 세르비아 정부에서 1차 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살로니카(오늘날 테살로니키)에서 반란혐의로 체포, 총살했다.  

1차대전을 만나 자기보다 훨씬 강한 적을 만나게 세르비아는 전쟁 초기 예상외로 잘 싸웠다. 이미 발칸 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병사들의 훈련상태나 전투준비도가 훨씬 높았던 것도 있었고,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다민족군을 이끌다 보니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가 많았다. 1차대전 협상강대국Entente Powers 측의 최초 승리 역시 세르비아군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해를 넘긴 1915년부터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동맹국Central Powers이 불가리아를 꼬드겼다. 발칸전쟁으로 피해의식이 컸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잃은 땅을 되찾아주겠다는 말에 홀딱 넘어갔다. 오스트리아-불가리아의 양면협공이 시작되자, 세르비아도 바로 만세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포위를 피해 선택한 퇴로는 알바니아 해변.

알바니아 해안까지 후퇴하는 길은 너무나도 고단했다. 험악한 지형, 악천후, 추위, 전염병, 패잔병을 노린 알바니아 산악부족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민간인과 군인 약 20만명이 이 퇴각로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1916년 3월 동사, 아사, 피로사 등에서 살아남은 병력 12만명이 아드리아해에 있던 연합국 해군군의 도움으로 그리스의 코르푸Corfu로 이동했다. 왕과 수상을 비롯한 중요 정부요인들만 이곳에 남고, 병사들은 다시 그리스-마케도니아 쪽의 살로니카전선으로 투입됐다.

알바니아로의 후퇴 장면. 한겨울에 산길이다. 당시는 죽을 맛이었겠지만, 1차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때, 세르비아 민족에게는 유구한 국난극복의 역사에서 또 다른 기념비적 순간이 됐다. 

이 같은 고난을 버틴 세르비아는 편을 잘 선택한 탓에 결국 1차대전 승전국이 됐다. 대세르비아를 노려왔던 세르비아에게는 민족적 열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전의 결과 세르비아 왕가에게는 정작 기대하던 대세르비아보다 커다란 선물이 배달됐다. 유고슬라비아였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사들이 세르비아와의 병합을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에 요청해 온 것이다.

1918년 왕가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왕국Kraljevina Srba, Hrvata i Slovenaca(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 통칭 SHS라고도 부른다. 보스니아라는 이름이 빠져있는 게 눈에 띈다)의 결성을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세르비아는 이 참에 기존 왕가를 내치고 몬테네그로까지 합병했다.

1918년 새왕국의 지도. 얼추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과 비슷한 모습이다. 1차대전 승리로 세르비아는 원래 영토(옅은 황색)에 헝가리의 보이보디나Vojvodina(연홍색),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를 추가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 땅인 이스트리아반도는 이태리가 가져갔다. 제국의 한축을 담당했던 헝가리는 루마니아한테도 땅을 빼았기고 1차대전 이후 크게 위축됐다.  헝가리가 2차대전 당시 독일 편에 붙은 이유는 히틀러가 무서운 것도 있지만, 고토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어쨌거나 봉기 이후 100년이 지나고, 독립을 인정받은지 40년 만에 세르비아는 이루고 싶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이뤘다. '싸우면 이긴다'는 세르비아의 호전적 상승의식은 1차대전을 기점으로 더 강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영광에 또다른 그늘이 있었다. 무엇보다 1차대전의 피해가 막심했다. 인구 1/4, 15-55세 남성인구의 2/3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1차대전 참전국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특히 대학 졸업자들이 대거 전사하면서 넓어진 왕국을 다스릴 엘리트층이 괴멸됐다. 나라는 몇 배 커졌지만, 왕가와 세르비아에게는 좀 벅찬 짐이 됐다.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8 : 大세르비아를 향하여 1 - 1912-13 발칸전쟁

19-20세기 격동기에서 세르비아를 규정하는 중심적 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은 세르비아 이데올로기Greater Serbia Ideology다. 민족으로서 이런 꿈을 가지지 않은 족속이 없었지만, 발칸에서 Greater라는 말은 유독 세르비아와 결부되어 사용되는 감이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을 제치고, 이를 정말로 실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탓이 크다.

세르비아어 개혁자인 북 카라지치Vuk Karadžic(1787-1864)는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 슈토Što를 쓰는 민족은 모두 세르비아인이라고 봤다. 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의 상당부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는 물론 몬테네그로에 사는 남슬라브계는 모두 세르비아 민족이 된다. 다만 일부는 카톨릭을 믿고, 일부는 이슬람을 믿는 차이 뿐이다. 언어공동체를 중심으로 민족을 규정하는 초기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류데빗 가이가 주창한 일리리아 운동Ilyrian Movement가 비슷한 궤를 그리고 있었다. 다만, 남슬라브족을 세르비아로 통칭하는 데 대해서는 분명 이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서 이 원초적 아이디어를 보다 고도화되고 구체적인 국가비전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일리야 가라샤닌Ilija Garašanin (1812-74)이다.

가라샤닌(1812-74)의 초상. 근대적 관료제 도입 등 세르비아의 국체를 세우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역사상 세르비아 및 발칸 정치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는 1844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나체르타니예Načertanije (Outline 또는 Draft라는 뜻)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대세르비아Greater Serbia의 목표, 전략 및 방법을 기술한 이 문건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현 국경선 바깥에 있는 세르비아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어우를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비전대로라면 결국 오늘날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에 이르는 상당한 영토를 세르비아가 흡수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1850년 경 유럽의 지도. 가라샤닌이 문건을 작성할 때 만 해도 세르비아의 처지는 오토만내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는 자기를 둘러싼 제국들에 대한 대항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물론, 14세기 두샨의 제국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당시 세르비아는 오토만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둘러쌓여 있었고 제대로 독립을 인정받은 나라도 아니고 오토만 터키의 자치령에 지나지 않았다. (세르비아에는 아직도 오토만 터키 군대가 주둔) Načertanije는 결국 이들 강대국을 주적으로 간주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작성하고 나서도 상당기간 대외적으로 공개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문건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비밀주의, 음모론의 냄새가 강하게 베어들게 된다. 하지만 정책입안가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으로 회람됐고, 그 내용은 왕정하 세르비아 정부에 지속적인 방향성을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19세기 세르비아 역사는 이 비전을 실현시키는 과정이 됐다.

물론 만만치는 않았다. 1876년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후원을 업고 오토만을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마 사정이 뜻대로 흐르지 않아서,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1877년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도와 오토만과의 전쟁에 뛰어들고 오토만이 여지없이 밀리면서 발칸의 세력균형이 크게 바뀌게 될 처지에 이르렀다.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서구 열강들이 1878년 베를린 회의(Congress of Vienna)를 소집한다.

이 회의를 통해서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또 영토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자력으로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가 경영하기로 하고, 불가리아가 자치를 획득하면서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입장이 됐다. 강대한 오스트리아, 형님형제격 러시아보다는 만만한 오토만을 상대하길 원했던 세르비아로서는 동서 방향 팽창의 길이 막힌 셈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에는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던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885년에는 갓독립한 불가리아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어이없는 완패. 때문에 세르비아의 국왕 밀란 오브레노비치는 국민의 멸시를 받게 된다.

1878년의 유럽지도. 독립을 인정받은 세르비아 색깔이 드러난다. 베를린 회의를 통해 독립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르비아의 남부인 니쉬Niš까지 영토를 넓혔다. 자력은 아니지만 세르비아가 더 커진 것Greater은 사실이다.

답답한 가운데 새로운 계기는 1903년 왕조가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으로 교체되면서 나타났다. 1910년 대는 발칸에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과거 오토만 지배하의 독립국들이 자리를 잡은 때다. 러시아가 살살 슬라브 형제국들을 부추키고, 그리스가 이에 합세하면서 이들 간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형성된다. 이들 간의 군사력을 모아놨더니 대충 70만, 지역내 터키 군사력을 두배나 상회했다. 1912년 발칸 전쟁은 이런 구도 하에 일어났다. 결과는 터키가 참패. 오토만 터키가 유럽에서 발을 떼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그러나 이들 신흥국가들의 야망은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1912년 런던조약(Treaty of London)에서 서구 열강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가 지중해에 발을 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덕분에 알바니아가 얼떨결에 독립을 당하게 됐다(?). 코소보를 넘어 알바니아를 집어먹을 생각을 하던 세르비아의 기도가 틀어지면서, 발칸 동맹국 간의 마찰이 일어났다.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공모해서 마케도니아의 상당부분을 발라먹은데 대한 앙심으로 1913년 불가리아가 전쟁을 선포, 2차 발칸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불가리아의 패배. 덕분에 세르비아는 원하던 바다를 얻지는 못했지만, 코소보를 넘어, 마케도니아 쪽 영토를 공고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1914년의 유럽지도. 세르비아가 올챙이 자라듯 커졌다. 이번에는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일부까지 먹고 들어간 모습이다. 특히 코소보는 고토회복의 의미가 크지만, 이 때 쯤 이미 알바니아계가 인구의 과반을 넘고 있었다.  

세르비아가 대세르비아의 꿈을 실현해 나가면서 국운이 뻗어가는 듯 보이지만, 이 같은 팽창은 지역 내에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 냈다.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신흥민족의 팽창과 더불어 대대적 인종청소가 일어났다. 누구나 지역내 정착한 무슬림들을 축출했다. 터키에는 19세기 말부터 발칸지역의 정정불안을 피해서 거의 100만 명의 인구가 터키로 이주했다. 발칸전쟁 덕으로는 거의 20만 가량의 무슬림등이 다시 터키로 도망갔다. 남아있는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혹한 동화정책을 폈다. 언어 상으로 불가리아 쪽에 가까웠던 마케도니아에서 이런 정책이 제대로 펴질 리가 없었다. 마케도니아 분리주의자의 활동이 더욱 거세졌고, 그 결과는 1934년 알렉산다르의 암살로 연결됐다.

이는 20세기 초 발칸이 왜 화약고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밖으로는 한치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국간의 긴장, 안으로는 갓태어난 신생민족들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대세르비아 이데올로기의 그늘이었다. 발칸전쟁을 통해 코소보를 복수한다는 꿈은 실현됐지만, 세르비아는 여전히 불안했다.




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7 : 왕조의 드라마

세르비아에 왕조 또는 왕조라 할만한 가문이 다시 들어선 것은 400년만의 일이다. 세르비아 민족의 정치적 구심점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인데, 문제는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는 점이었으니, 오브레노비치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가 그것이다. 터키와의 외교를 통해 독립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국내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함으로써,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했지만, 가문 마저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밀로쉬는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카라조르제 미망인과 자녀들을 세르비아로 불러들이고 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 왕조가 만들어졌던, 지역을 둘러싼 열강들의 견제와 줄다리기, 거기에 별다른 통치술을 익히지 못한 신생왕국의 내부적 불균형. 이 두가지가 모여서 웬간한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왕조의 역사가 만들어 졌다.

세르비아 1차 봉기를 이끌었던 카라조르제는 반란지도자들에 의해 수령Vožd으로 추대됐다. 2차봉기 지도자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오토만과의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는 수준에서 출발해서 차근 차근 제도를 유럽식으로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초기만 해도 오토만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공Knez(Prince)로 세르비아에 군림했다. 오토만의 속령이었지만, 지위는 전제군주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 스스로가 오토만 전제군주의 틀을 크게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 밑에서 다단한 봉기가 일어났고, 1939년 결국 장남 밀란Milan에게 양위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역사를 시시콜콜하게 기록하는 것은 필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같은 이름이 계속 재활용되는 바람에 엄청 헷갈리기도 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839 : 밀로쉬의 장남 밀란 즉위. 병약해서 몇주 안에 병사하고, 16살 미성년자인 동생 미하일로Mihailo가 승계했다. 그러나 경험 미숙으로 3년만에 오스트리아로 망명, 아버지인 밀로쉬와 합류한다.

1842 : 반란세력이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장손 알렉산다르Aleksandar를 군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양반, 아버지 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 1858년 결국 의회가 퇴위를 요구했고, 이를 군말없이 수락했다.

1858 : 창업자인 밀로쉬가 78의 나이로 군주로 복귀했다. 망명 당시 '나는 세르비아의 왕으로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데 정말 그 말대로 됐다. 20개월 만에 병사한다.

1860 : 창업자의 아들 미하일로가 다시 군주의 자리를 계승했는데, 이번에는 좀 잘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무엇보다 세르비아에 주둔해있던 오토만군을 조용한 외교술로 철수시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또다른 초석을 다졌다. 나름대로 비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1868년 묘연한 이유로 암살 당했다. 지금도 범인과 배후가 누군지 모른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본정통에 서 있는 군주 미하일로Knez Mihailo의 동상.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골목이자 만남의 장소다.

1868 : 미하일로가 후사가 없었던 탓에 5촌조카 격인 밀란Milan이 군주 자리를 계승했다.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는 이 양반을 재난 급으로 묘사한다. 전쟁에서 약했고, 외교에서 밀렸으며, 가정사가 어지러웠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멸시당한 군주라고나 할까. 이 양반의 치세에 세르비아가 독립을 인정받고, 또 나라의 격을 공국에서 왕국으로 높였지만, 민심이 이반했다. 결국 1889년 미성년자인 왕자를 놔두고 자진 퇴위했다.

1893 : 그 아들 알렉산다르Aleksandar가 16살 성년이라고 우기면서, 왕으로 등극했다.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성격적으로 불안했다. 자진퇴위한 아버지 밀란을 다시 불러와서 총사령관에 앉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모습도 연출했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서 자라난 철모른 아들들이 다 그렇듯, 순정이 충만해서, 모후의 시녀이자 이미 한번 결혼경험이 있는 드라가 마신Draga Mašin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부모는 물론 전 세르비아가 패닉 상태로 돌입. 더 나아가 외척인 두 오빠들이 나설 기세를 보이자 세르비아 군이 나서서, 1903년 왕과 왕비를 왕궁에서 잔인하게 살해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세르비아군은 후계자를 오브레노비치 왕가에서 찾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또다른 가문인 카라조르제비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퇴진한 알렉산다르의 아들, 스위스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페타르Petar를 찾아내서 왕좌에 앉혔다. 그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다.

1903 : 페타르는 프랑스에서 사관학교와 외인부대 장교를 거치고, 보스니아 봉기에 참여하는 등 군인으로써 자질을 보여준 바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하는 등 계몽군주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다. 두차례에 걸친 발칸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의회를 활성화하는 등 민주주의도 확장해서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914년 건강 상의 문제로 왕태자에게 실권을 넘겼지만 곧이어 터진 1차대전을 맞아 노구를 이끌고 군과 함께 했다. 1차대전의 승리를 맞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왕이 되어, 봉기 이후 세르비아의 황금기를 열고 1921년 죽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시대를 본격 개장한 페타르 1세. 낭인 청년기를 보내고, 1차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쟁 등으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왕조 중에서 가장 행복한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1921 : 그 다음 왕이 된 알렉산다르는 부왕 페타르 1세의 차남이다. 장남 조르제Đorđe가 있었지만, 증조 할아버지를 닮아서였는지 성격이 너무 과격했다. 1909년 하인을  발로 차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세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알렉산다르는 일찍 권력을 이양받아 섭정왕자로서 1차대전 내내 군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테살로니키 전선을 돌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자질이나 행동거지 면에서 왕으로서의 자질은 분명했지만, 문제는 세르비아가 너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내외의 정치적 위기에 휩쓸렸다는 것. 지금까지 역사를 같이 해본 적이 없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같이 다스린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29년 크로아티아의 정치인 라디치가 세르비아 국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는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헌법을 정지시키고 독재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1934년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마케도니아와 크로아티아 테러조직에 암살당했다.

1934 : 왕위는 알렉산다르의 아들 페타르Petar II에게 넘어가야 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알렉산다르의 사촌인 파블레Pavle가 섭정이 되어 페타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를 다스리게 된다. 이 때는 유럽이 파시즘 등으로 흉흉해지던 때. 옥스포드 출신의 파블레는 심정적으로는 영국에 가까웠지만, 영국과의 인연을 계속하기에는 히틀러 독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리 빼고 저리 빼다가 1941년 독-이-일 간의 3국 군사동맹에 유고슬라비아가 조인했던게 화근이 됐다. 독일을 전통적인 원수로 간주하던 세르비아 군부가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키고 파블레를 축출하고 17살의 페타르를 왕에 앉혔다.

1941 : 페타르가 왕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독일이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 베오그라드 공습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돌입했다. 1차대전 때는 어떻게 든 알바니아 산길을 타고 그리스까지 후퇴할 여유도 있었지만, 전격전을 내세운 독일한테는 이런 전술도 쓸 틈이 없었다. 결국 군은 백기투항하고, 페타르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다. 빨치산이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면서 이들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카라조르제, 오브레노비치 두 왕가는 밀로쉬 1명, 미하일로 1명, 밀란 2명, 알렉산다르 3명, 페타르 2명의 왕(또는 공)을 배출했다. 자꾸 썼던 이름을 재활용하다보니, 표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은 가계도라고 하겠다.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면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는 왕위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건재하다. 페타르 2세가 1970년에 죽고, 그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세자로 아직도 남아있다. 왕가는 주로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밀로셰비치 정권이 무너진 2000년에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왕가의 목표는 입헌군주제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1/3가량은 입헌군주제 찬성, 1/3 가량은 아직도 반대다. 왕세자 알렉산다르가 세르비아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세르비아 국민을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오늘날 모습. 왼쪽부터 후계자 피터, 왕세자 알렉산더 2세, 왕세자비 캐서린, 차남 쌍동이 필립과 알렉산더 3세다. 로얄 패밀리 홈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다보니, 이름들이 다 영어식이다. 

어쨌거나 세르비아의 왕조는 대하드라마로 전혀 손색이 없는 부침을 겪었다. 누군가 실력있는 제작자가 만든다면, 과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뿌리Roots나 다이나스티Dynasty 못지 않은 재밌는 대하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3 : 구슬레와 구전서사시

오토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정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커다란 자랑이지만, 정작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문건은 그리 많지 않다. 19세기 봉기 지도자들 조차도 문맹들이었으니, 역사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 내고,  그것을 정체성의 일부로 체화해 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 해답은 동방정교 교회와 세르비아의 구전서사시가epske pesme다. 교회가 고답적인 문어체 기도문으로 역사를 기록했다면, 구전서사시들은 바로 민간에 즉각적으로 유통됐다는 점에서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래적으로 시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낭송하기 위해 있는 것. 세르비아의 음유시인들은 여기에 반주 격으로 구슬레gusle라는 악기를 연주한다.

구슬레.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악기로 봐야할지 아니면 연장으로 봐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단 한가닥의 현, 제한된 음계, 딱히 정해진 음정이나 피치도 없다. 낼 수 있는 피치는 전통적인 방식을 취할 경우 많아야 다섯개. 연주하는 사람의 목소리 높낮이에 따라 튜닝도 바뀌는 인간친화적인(?) 악기다. 세르비아에서만 쓰는게 아니라 크로아티아를 포함한 발칸 전체에 연주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악기의 종주는 세르비아 민족이 많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다.

구슬레, 이렇게 생겼다. 양다리 사이에 끼우고 활을 써서 연주하는 찰현악기다. 우리나라 해금과도 비슷한 구조이지만, 손아귀가 아니라 손가락 만으로 음정을 만들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음계가 그리 많지 않다. 더욱 이해가 안되는 건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서는 이 한줄짜리 악기를 복수plural 취급한다는 것.......

음유시인의 낭송을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음악 이전의 그 무엇인가? 정작 들어보면 형언할 수 없는 원초성이 마음을 파고들어 온다. 청중에게는 악기의 단순성이 오히려 메시지의 명징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주로 세르비아의 역사와 신화, 영웅담들이다. 당연히 가장 인기있는 곡들도 1389년의 코소보 전투 전후의 사정들을 기록한 시가들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던 코소보 신화 역시 음유시인들의 낭송을 통해 전해졌다. (특히 코소보 서사시들은 유고 내전 등의 계기를 통해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영어번역으로 보려면 링크1 혹은 링크2 참조)


그렇다면 박제된 과거의 일만 전해지는가? 구슬레 서사시가들은 세르비아인들에 영향을 끼친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을 노래하는 창구가 된다. 19세기 초 사라예보 암살사건, 티토의 빨치산 활동, 가장 최근에는 유고 내전에 이르기까지, 구슬레 음유시인들이 아니 다루는 주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오늘날 세르비아 구슬레 씬의 주된 에토스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유고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 혐의로 전범으로 지목된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등을 칭송하는 구슬레 서사시도 심심치 않게 곧 잘 들을 수 있다.

구슬레 음유시인 Guslar 사샤 라케티치Saša Laketić. 세르비아에서 활동 중인 많은 구슬레 가수들이 있지만, 무대 장악력이 좋아서, 그런지 박수도 잘 이끌어 내고, 청중과의 교감이 좋다. 아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 음유시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14년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암살사건sarajevski atentat을 노래하고 있다. 

세르비아가 2012년 EU 후보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회원국이 되는 절차를 밟아가는 오늘 날 구슬레 서사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 나갈까? 이 원초적 목소리가 EU 문명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궁금해 지는 지점이다.

2012년 I Got Talent 몬테네그로 프랜차이즈에서는 14살짜리 소녀 Bojana Peković가 출연해서, 능숙한 구슬레 연주와 노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로 남성일색의 구슬레 씬에 나타난 귀여운 소녀의 고고성은 세르비아 민족 서사시에 새로운 방향과 기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려서 그런지 다른 악기와 합주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음역을 내보는 등 신선한 실험도 하고 있다.

2013년 2월 보야나와 니콜라 페코비치 남매의 구슬레-아코디언 협연 장면. 희귀한 일이다. 구슬레는 다른 악기 사이에서는 거의 음향효과 정도를 낸 적은 있지만, 제한된 음역으로 인해 협연을 불가능했다. 보야나가 과거에는 거의 고정적이었던 손 포지션을 바꿔가면서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구슬레의 미래?

그러나 이 같은 실험이 구슬레의 미래를 담보할 것인가? 모르는 일이다. 보야나가 알아서 잘 하겠지.

개인적으로는 베오그라드에서 구슬레를 구입하기 위해 물어 물어 장인匠人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담배가 쩐 아파트 응접실에서 몬테네그로 출신의 장인은 구슬레의 요모조모를 가르쳐 주더니 날보고 이제 여기에 맞춰서 노래를 하라고 권했다. 세르비아말을 못해서 안된다고 하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한국말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살아있는 역사로서의 구슬레의 미래에 대해서 그는 전혀 걱정이 없었다. 나한테는 구슬레 시가의 본질에 대한 작은 깨달음의 계기도 됐다. 구슬레가 없어진다면 세르비아의 매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듯 하다.





2013년 5월 6일 월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6 : 독립 아니면 부활

오토만 터키가 서구문명권에 이리 저리 밀리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에도 독립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나폴레옹에게 조리돌림 고전하는 사이에 오토만 터키의 술탄 셀림Selim III세가 어떻게든 살아볼 요령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변방에는 상당한 자유를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몸은 김정구 마음은 김완선이랬던가, 내부적 부패가 극에 달한 오토만 체제 자체가 통제가 안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 세력. 오토만 확장의 일등공신 예니체리들이 공고한 기득권을 형성하면서 술탄에게 반기를 들어 1802년에는 술탄의 총독을 살해하고 세르비아를 점거하고, 폭압을 일삼았다. 1804년 이들은 세르비아 내부적으로 싹트는 반란의 조짐을 선제적으로 제압할 요량으로 세르비아계 주요 지도자들 150명을 한곳에서 살해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곳곳에서 반란의 물길을 트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세르비아 1차 봉기다.

이 때 세르비아인들이 봉기의 지도자로 지명한 사람이 조르제 페트로비치Đorđe Petrović, a.k.a 카라조르제Karađorđe, 영어로 표현하면 Black George다. 일자무식에 양돈업자였던 이 사람이 어떻게 민족의 지도자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가. 세르비아는 이미 귀족들이 사라져버린 평등사회였다.  전국민이 거의 무학인 상황에서, 무식은 지도자로서의 결격사유가 아니었다. 카라조르제는 이미 터키와 맞서 싸우다 대가족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고, 오스트리아 군 통제하에서 군인생활 경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잔인, 과단, 용맹한 행동은 세르비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키가 큰 세르비아인들 중에서도 카라조르제는 더 컸다고 한다.

카라조르제는 자신을 찾아온 세르비아 가부장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는 너무 잔인하다. 당신들이 아마 못견딜 껄?'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그는 못이기는 척 수락하고, 이처럼 비싸게 군 덕에 3만 세르비아 반란군의 총수로서 절대적인 리더쉽을 확립할 수 있었다. 오토만 내부에서도 손발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일련의 전투를 거쳐 반란 예니체리들을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해방시켰다.



성사바 교회 앞의 카라조르제 동상. 사뭇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설을 통해서 전해지는 카라조르제의 아우라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양반, 자기가 했던 말 처럼 정말로 사나왔다. 청년시절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거부하는 양아버지를 직접 죽이고, 동생이 양가집 규수를 강간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처형, 시체를 며칠 동안 그 자리에 걸어놨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는 민족해방의 첫 물꼬를 튼 지도자로서 추앙받는다. 야만인으로서의 야성과 지도자로서의 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던 듯.....


세르비아는 이렇게 하나의 해방구가 되면서 독립의 발길을 디디기 시작한다. 귀족-농노 구분이 없는 세르비아와 같은 상황에서 카라조르제는 처음으로 대의체제를 만들었다. 그 스스로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지만, 학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세르비아인들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었다. 이런 체제가 1813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카라조르제의 해방구도 위기를 맞았다. 1812년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처들어간 해이다. 러시아가 궁해진 입장에서 오토만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오토만이 군사력을 돌려막기가 훨씬 수월해 졌다. 처음에는 카라조르제가 골치거리 예니체리 잔당들을 처리해줘서 고마왔지만, 자신의 권위에 복속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된 오토만이 1813년 대군을 이끌고 발칸으로 들어섰다. 까마득한 대군을 맞아 카라조르제를 비롯한 반란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로 망명도생의 길로 들어서고, 1차 봉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1차 봉기는 결국 실패했지만, 세르비아의 궐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차봉기가 진압된지 2년 후인 1815년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이번에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Miloš Obrenović. 출생과정이나 사회적 배경이 카라조르제와는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양반의 봉기는 카라조르제 때와 달리 궁극적으로 성공했는데, 그 실마리는 아이러니스럽게도 다시 한번 나폴레옹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지면서 오토만 터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향배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브레노비치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오토만과의 협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오토만이 세르비아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되,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확보하는 구도가 만들어 졌다. 그 상황에서 그는 세르비아 대공Prince가 됐다.

2차봉기를 주도하는 오브레노비치. 터키식 복색이 눈에 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금 한다하는 집안들은 다들 이러고 살았다. 카라조르제가 비타협적인 군인의 이미지라면 오브레노비치는 외교가 또는 비즈니스맨의 면모가 강하다. 터키와의 타협을 추구하는 동시에 열강들과도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점진적으로 완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욱일승천하는 오브레노비치에 가장 강력한 정적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로 망명가 있던 카라조르제였다. 결국 오브레노비치는 1817년 뜬금없이 세르비아로 돌아온 카라조르제를 암살하고, 그 수급을 터키로 보냈다.

오브레노비치가 그 이후 터키로부터 종주권suzerainty을 획득하고, 헌법을 제정한 데 이어, 터키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독립을 쟁취해 나갔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약삭빠른 밀로쉬보다 단심의 카라조르제 쪽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어쨌거나 카라조르제는 불운한 암살을 당했지만, 후손들은 카라조르제비치Karađorđević 가문이 되어 세르비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언제든 오브레노비치 가문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세력으로서 자리잡았다.

카라조르제가 시작해서 오브레노비치가 완성한 세르비아의 독립은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 회의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가 너무 막나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모인 열강들의 짜고치는 고스톱 도박장이다. 이를 통해 세르비아는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가 끼어들어 보스니아를 가져간 데 대해서만큼은 적대적이었다. 보스니아에 사는 세르비아 동포들 때문이었다. '단결 만이 세르비아를 구한다'는 구호가 머리 속에 선명해 졌다.



2013년 5월 5일 일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5 : 반란과 봉기

세르비아인들의 자랑 중의 하나는 불굴의 민족혼, 외세 오토만에 대해 허다한 봉기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집단이주는 이와 같은 봉기 시기에 맞춰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봉기는 어디에나 일어나기 마련. 과연 세르비아인들의 봉기라고 할 만한 것을 찾는 데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봐야 한다.

역사에 기록된 봉기 중에서 가장 최초이자 그 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봉기가 1596년 오늘날 보이보디나 지방인 바나트Banat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 반란에는 약간은 종교전쟁의 성격도 채색되어 있었는데, 정교 주교가 주동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반란군은 성 사바의 모습을 그린 깃발을 들고 다녔다. 이 때 오토만군을 이끌던 시난 파샤Sinan Pasha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정교가 배출한 최고의 성인 성 사바Saint Sava의 유해를 베오그라드에서 화형? 소각? 화장해 버렸다. 물론 한참 오토만의 세력이 전성기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은 얼마 안가 진압됐다.

<베오그라드에 있는 성사바교회는 발칸 최대, 세계에서 두번째(또는 세번째?)로 큰 정교교회라고 한다. 터 자체는 바로 시난 파샤가 성사바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이 아름답고 야심찬 교회를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사바에게 봉헌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일이다. 1935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교회는 2차대전, 사회주의, 유고 내전 등 다사다난한 세르비아 역사 탓에 아직도 완성이 안됐다. 공사진도가 민족주의의 발흥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

세르비아 민족이 오토만에 대한 반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결국 17세기 오토만 세력의 쇠퇴와 일치한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연합군의 도움으로 1683년 오토만의 비엔나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기 시작하면서 오토만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1683년부터 1699년까지는 서양사에서는 신성동맹Holy League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니스)과 오토만 간의 대전쟁Great War에 돌입하면서 오토만 지배 하의 기독교를 신봉하는 민족들의 봉기를 부추키고 다녔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정교의 수장인 아르세니예 3세 Arsenije III Čarnojević와 접촉, 거국적 봉기를 요청했으며, 아르세니예 3세가 이에 협조한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을 간다고 아직 오토만의 힘이 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발칸으로 들어서면서 보급선도 아슬아슬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을 빼기 시작한다. 덕분에 입장이 난처해진 아르세니예 3세는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과 더불어 다뉴브강을 건너 슬라보니아 평야로 다수 세르비아인들을 이끌고 이주했다. 이때 이주민들이 오스트리아가 만들어 놓은 군사특별구의 새로운 인력공급원이 됐다. 누구든 와서 군사특별구에 인구를 채워주길 기다렸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들을 대환영하고 각종 특권을 베풀었다.

1690년 아르세니예 3세가 주도하는 세르비아 민족의 대이동을 재현한 역사화. 파야 요바노비치Paja Jovanović가 1896년에 완성한 그림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이를 민족의 대이동The Great Migration이라고 부른다. 아르세니예 3세가 주석하던 곳은 다름 아닌 오늘날 코소보의 역사도시 페치Peć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때 세르비아인들의 대이주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인구가 줄어들게 된 결정적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그 공백을 알바니아계가 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동의 규모와 영향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많다.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의 존재가 이전에는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들의 코소보에 대한 집착은 이 같은 역사적 경향을 수정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코소보 패전, 그리고 오토만 지배 하에서 강요된 대이동 등이 결국 세르비아계에 대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꼭 이 같은 이동이 세르비아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150년 가량 살던 무슬림들이 개종을 하거나 다시금 발칸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땅을 잃고 쫓겨난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리가 없다. 이 때를 맞춰 오토만의 영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보복의 잔인성과 강도도 더욱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 같은 지역의 불안은 문명권의 조류와 더불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오스트리아, 베니스, 러시아 등 서구열강들의 오토만 터키에 대한 견제, 더 나아가 범 게르만, 범 슬라브 등의 민족주의의 발흥은 세르비아 인들의 맘을 설레게 한다. 특히 세르비아인들을 흥분시킨 것은 정교 형제국 러시아의 굴기였다.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꼬드겨서 그 장단에 춤을 몇번 추기는 했지만, 문제는 카톨릭 교회와의 긴장. 카톨릭 교회가 세르비아 이주민들에게 자꾸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정교 사제들의 맘에 상처를 줬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흑해를 주변으로 오토만과 쟁패를 벌이면서, 세르비아인들의 마음에도 '우리도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2013년 5월 2일 목요일

세르비아 이야기 4 : 끝나지 않은 이주의 역사

15세기 오토만의 접수로 독자 정치체제 없어지자 세르비아인들은 여러나라에 드넓게 퍼져 나가게 된다. 16세기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가 오토만에 크게 발리면서, 오스트리아가 구원투수로 긴급투입된 상황. 크로아티아 역사를 이야기할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오토만이 촉발한 인구 공백을 채우기 위해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지역에 군사특별구 Vojna Krajna(Military Frontier, 또는 Military District로 표현)를 세운다. 이 군사특별구를 채워준 인구의 상당수가 주로 세르비아계였다.

17-18세기 군사특별구의 모습이다. 군사특별구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는 헝가리도 포함)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가 세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Republika Srpska Krajina의 판도와 어느 정도 겹친다. 아울러 왜 나라 이름에 '크라이나'라는 말이 들어갔는가도 여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을 대표할 만한 정치체제가 없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군사특별구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곳의 정주민들은 기존 귀족에 복속된 농노가 아니라 자유민이었다. 그만큼 세금에서도 자유로왔다. 오스트리아가 특별구민들에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특별구민들은 황제가 원할 때 언제든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르비아 귀족들이 오토만과의 동맹을 통해서 서구 기독교 세력과의 대결에 참여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스스로 오토만의 서진을 막았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때 오스트리아가 동원한 군사력의 상당부분이 세르비아계였기 때문이다.

18세기 군사특별구 지역민의 모습. 군인의 모습이다. 특별구 안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대충 이러고 살았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부류들을 국경사람Graničar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오토만 치하에 있는 세르비아계는? 일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토만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주민들에게 무기소지, 승마 등을 금지했다.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면 칼을 들어야 하는 시기에 상당수의 세르비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군문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세르비아 사람이 아니라 터키인Turci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오토만은 너무 광활한 지역에 팽창하다 보니 한 때는 인구의 80%가 기독교계였다. 문제는 군사력. 기독교인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이 미심쩍었던 오토만은 항상 밀리터리 엘리트가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토만은 한동안 데브쉬르메Devşirme 시스템이라는 엽기적 인력공급 방식을 유지했다. 공출과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독교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을 징발한다.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어려서부터 군사교육을 시킨다. 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술탄의 충성스런 정예 직할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예니체리Yeni Çeri (영어로는 Janissary로 표기)다. 예니체리의 주요공급처는 당연히 발칸의 피지배민족들,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인들이었다.

이태리의 벨리니가 그렸다는 예니체리. 신분상으로는 노예였다. 하지만, 고정적 급여를 받았다. 잘 하면 행정관으로 나가는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한 터키 전사 중에서 많은 수가 세르비아인이었을 것이다. 

술탄이 원정 때마다 대동하고 다녔던 이들 정예병들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 또는 백척간두의 타이밍에 투입되어 전투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 쏟아지는 화살과 투석 속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깨뜨린 사람들도 이들이었다. 오토만이 한참 잘 나가던 시기에는 능력위주의 인사가 이뤄지다보니, 여기에서 전공을 세운 자들은 황제의 대리인 Grand6 Vizier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하기도 했다. 이 부류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Mehmed Pasha Sokolovic다. 나중에 이보 안드리치의 노벨상 수상작 '드리나강의 다리'가 바로 이 사람이 만든 다리의 이야기다.

곁가지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출세길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일부 마을에서는 아예 데비쉬르메로 뽑혀갈 아이들을 미리 뽑아놓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조금 잘나간다 싶을 때가 항상 문제, 예니체리 시스템은 나중에 세습으로 변질됐다. 아이들을 강제로 납치해갈 필요는 없어졌지만, 능력위주의 인사시스템이 기득권 체제로 변질되면서 오토만은 부패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오토만 제국의 생성부터 절정기까지의 모습을 한꺼번에 표시한 지도. 한참 때는 유럽에서는 비엔나가 코 앞이다. 

어쨌거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오토만을 피해 정처없이 방랑과 이주를 반복했던 세르비아 남자들은 성직자가 아니면 군인의 길을 걸었다. (아예 성직자 겸 군인도 상당수 존재.) 오토만 시대는 세르비아에 상무 문화를 착근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