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9 : 정교 분리와 세속정치의 시작

1851년 녜고쉬가 죽자, 그의 조카로 후계자로 지명된 스물다섯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 직을 수행할 차례가 됐다. 그런데 다닐로는 생각이 달랐다. 원로와 족장들에게 사제로 서품받는 것을 거부하고 왕자의 자리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개명천지에 신정합일은 너무했다는 생각이었던지 러시아가 그 생각을 지지해 줬다. 해서 그가 1852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짜르를 만날 때에는 그는 사제가 아니라 공Knez (Prince) 대접을 받았다.

몬테네그로 사람치고는 키가 작았고, 덕분에 현지인 사이에 별명이 토끼Zeko였다. 그러나 별명과 달리 성격이 강했다. 정교분리 이슈를 처음으로 끄집어내고 실행에 옮긴 것 만 봐도 그렇고 매사에 대응하는 거의 대부분이 이랬던 것 같다. 

이제 블라디카가 아니라 군주에 해당되니 장가를 가야할 때. 어디서 점지했는지 1855년 트리에스테 출신 세르비아계 사업가의 딸과  결혼했다. 기왕에 가는 장가, 왕녀에게 가는 것이 낮지 않겠냐는 측근들의 충언도 소용없었다.

세속군주로서 장가도 갔고 상비군 등 각종 구상도 실현해야 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당연히 조세징수가 강화됐다. 산중의 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다닐로는 무자비하고 신속하게 맞섰다. 반기를 든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구성원에 어린 아이까지 험하게 다뤘다고 한다.

몬테네그로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다링카Darinka. 초상화. 도도하고 씀씀이도 컸다고 한다. 그래도 문명의 세례를 받고 와서 그런지 체티녜 궁전 주변에 걸려있는 수급들을 다 치우게 한 것도 그녀 때문이라고 한다. 다닐로와의 사이에서는 공주를 하나 낳았다.

다 좋은데, 오토만의 심기가 편할리가 없다. 아직까지 몬테네그로라는 나라가 따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아직도 오토만 땅인데, 이런 데서 자기 마음대로 공이니 뭐니 따다 붙이는 셀프벼슬아치들이 영 거슬렸다.

1853년 오토만이 움직였다. 수장은 보스니아 총독인 오메라 파샤 라타스Omer Pasha Latas. 무능과 폭압을 일삼던 전임관료들과 달리 유능했다. 오토만의 군제 개혁 등에서도 공적을 남겼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소요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는, 다음 순서로 작정하고 몬테네그로로 들어왔다. 그것도 가장 아픈데를 골라서. 다닐로의 똥줄이 탔다. 당장 열강들에게 SOS를 타전.

강적 오메르 파샤 라타스.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계로 오스트리아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보스니아로 망명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찌 어찌 터키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한마디로 희한하고도 복잡한 이력의 사나이였다.  국제적인 외교력과 전술감각이 좋아서 망해가는 오토만의 생명줄을 연장시켰다.

오스트리아가 나섰다. 불편부당한 중재자로 스스로를 위치짓고 오토만과 몬테네그로 간의 평화협약을 성립시켰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왜? 몬테네그로가 이뻐서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나서서 몬테네그로를 도와주고, 그것을 기화로 발칸에 발을 뻗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열강들간의 힘겨루기가 발칸 정치의 아웃풋을 결정한 셈인데, 19세기에는 이게 하나의 고정된 패턴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몬테네그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러시아는 때마침 터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그래서 1853년 말에 터진 난리가 크리미아 전쟁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러시아가 바다까지 기어나오겠다고 싶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터키를 도와주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쟁 후 1856년 파리에서 전후 처리를 놓고 영국, 프랑스, 터키, 러시아 등 당사자들이 협약을 벌이는 이걸 받고 저걸 주는 복잡한 외교의 장이 마련됐다. 이런 복잡한 북새통 속에서도 몬테네그로와 오토만과의 접경에서는 사투가 지속됐는데, 그러다가 1858년 몬테네그로군이 두브로브닉에서 50km 가량 떨어진 그라호보Grahovo를 점령하는 전과를 거뒀다. 사태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열강들이 또 나섰다.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는 새로운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열강들의 관계에서 몬테네그로의 자기 주장이 또 한번 먹힌 것이다.

정작 내외로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다닐로를 가로 막은 것은 숙적 오토만 터키도 서구 열강들도 아니었다. 1860년 휴양차 나와있던 코토르Kotor에서 그는 같은 몬테네그로인에게 암살당한다. 암살자는 다닐로의 독주에 앙심과 불만을 품은 비옐로파블리치족의 일원으로 밝혀졌다. 폭압적인 전제군주는 아니었지만, 매사를 권위적으로 처리하던 카르마가 험하게 돌아온 셈이다. 이렇게 해서 몬테네그로 첫 세속군주는 삼십 중반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2013년 12월 29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8 : 산상의 르네상스맨

페타르1세는 몬테네그로에서 단순히 땅만 넓히는 역할 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구황 작물인 감자를 몬테네그로로 들여온 것도, 빈민 구제에 교회의 역할을 강화한 것도, 더 나아가서는 부족적인 틀을 벗어나 뭔가 뼈대가 있는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것도 다 그의 공적이다.

그러나 후계를 정하는 것 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후계자는 페트로비치 일족에다 성직자에다가 배운것도 많아야 한다. 후계자 1은 러시아에서 유학보냈으나 병에 걸려 죽었고, 후계자 2는 기껏 러시아로 보내놨더니 사제보다는 사관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어쩔수 없이 후계구도에서 떠나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1830년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페타르1세가 죽고 말았다.

권력의 공백기. 몬테네그로 산중 씨족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베네치아가 부여한 바, 지사guvernadur직을 세습하는 라도니치 일족이 들썩이자, 기왕에 잡은 권력을 놓칠 수없었던 페트로비치 문중이 나서서 가문의 17살짜리 청년 라데 토모브Rade Tomov를 서둘러 사제로 만들어 블라디카로 선출했다. 사제로 서품을 받으면서 아예 이름도 아저씨를 따라 페타르Petar로 바꿨다. 그러니 이 사람은 페타르 2세Petar II가 되는 것이다. 후세에는 녜고쉬Njegoš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왜 궂이 녜고쉬라는 부족명을 성처럼 썼을까? 그것은 러시아를 방문해서 황제를 알현하다가 붙인 습관이란다. 페타르 페트로비치. 러시아어를 배운 사람은 페트로비치 같은 남슬라브의 성씨가 러시아에서는 누구의 아들을 지칭하는 파트로님patronym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녜고쉬라는 부족이름을 붙임으로서 적어도 러시아인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녜고쉬의 초상. 2m가 넘는 거구에 영화배우 못지 않은 미남이다. 가히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이상형이라고 할 만도 하다. 이전까지의 블라디카가 주로 사제복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면, 녜고쉬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몬테네그로 전통의 속복을 즐겨입었다. 

19살 되던 해 1933년 녜고쉬는 러시아를 방문하고 메트로폴리탄으로서의 서품은 물론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약속 받았다. 1834년에는 죽은 아저씨 페타르1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물론 거국적 성원을 받는 조치였지만, 아직은 어리고 약한 자신을 다잡고, 더 나아가서는 페트로비치 일족의 권력 장악을 공고하는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몬테네그로 부족사회에 없던 '세금'을 도입했다. 도입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에 대한 부족들의 불만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안그래도 없어서 산아래 노략질까지 하는데 세금은 무슨 세금.... 반항하는 부족들에게는 가차없는 처벌이 내려졌다. 국가의 세금으로 펀딩한 경찰 및 경호병도 두고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수도원에서 벗어난 궁전도 만들었다.

녜고쉬가 건설한 블라디카의 궁전...이라기보다는 사저 빌랴르다Biljarda. 녜고쉬가 산길을 뚫고 당구대를 갖다놨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산중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고자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는 데, 19세기 당대의 궁전에 비교해서 매우 투박하다. 게다가 녜고쉬를 방문한 외국 손님들은 궁전 주변에 걸어놓은 무슬림들의 목때문에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집중된 권력으로 변사또 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몬테네그로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도입했다. 원로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도 만들었다. 경찰도 창설해서 몬테네그로인들 간의 사적인 복수를 제어코자 했다. 한마디로 그의 치세에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녜고쉬 당대에 땅을 늘리거나 뭐 이런 것을 한 것은 없지만, 적어도 다음 대가 공고해진 권력을 바탕으로 튀어나갈 기틀은 만들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녜고쉬가 이쪽 지역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인으로서의 업적이다. 녜고쉬가 1847년에 발표한 장편서사시 산중화환Gorski Vijenac(Mountain Wreath)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중심으로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안그래도 19세기 초반은 민족주의 바람으로 인해 유럽 군소민족의 가슴이 벌렁벌렁해질 때였다.

녜고쉬의 산중화환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정념을 표현한 걸작으로 숭앙받고 있다. 합스부르크 황태자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찝은 아예 이 시를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녜고쉬도 이 시를 세르비아의 국부(실제로 녜고쉬가 쓴 말이다) 카라조르제에게 헌정한다.

서사시이며 등장인물이 명확하기 때문에 산중화환은 연극이나 영화로도 만들 수 있는 구조다.  1997년 세르비아와의 갈등이 커진 몬테네그로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서 올렸다. 반오토만/범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표방한 이 작품의 초연에는 몬테네그로 그랜드 무프티가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산중의 부족들 간의 회의가 소집되는 날, 블라디카 다닐로는 어지러운 마음을 주체 못한다. 극심한 고독감(오토만 터키에 포위된 데 따른) 그리고 그 가운데 버릴 수 없는 사명감(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이에서 다닐로는 번뇌하고 있는 것이다. 당면의 이슈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몬테네그로 종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블라디카 다닐로는 이들에게 회심과 (역)개종을 권한다. 이들이 이를 거부했을 때, 다닐로가 취한 길은 절멸의 길이었다.
As wide and long that Cetinje Plain is, not one witness was able to escape to tell his tale about what happened there. 
20세기 후반 유고 내전에서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인종청소가 자행됐을 때, 사람들은 다시금 녜고쉬와 산중화환을 마치 예언처럼 떠올렸다. 내전도 끝난 지금 녜고쉬의 시를 어린 백성의 순진하지만 야만적인 자기표현이라고 봐야 할까? 굳이 변론을 하자면 누구도 역사를 넘어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해야겠다. 녜고쉬나 몬테네그로의 부족들이나 가파른 산중에서 오토만 터키와 사활을 건 쟁투 중이었다. 누구 하나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인정해주는 열강이 없었다. 고립무원 속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길은 결국 손에 와닿고 가슴에 절실한 말을 하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단일민족/국민국가로 나가는 길이 그것 밖에 없었냐는 물음은 우화를 실화로 착각한 후대에 할 질문이다.

어쨌거나 녜고쉬는 시를 발표한 지 3년 후 1851년 서른 여덟의 나이로 죽었다. 척박한 몬테네그로에 태어난 르네상스맨이었다. 민족주의자에 잘 맞는 낭만주의자로 그를 묘사할 수도 있지만, 그는 처한 현실은 낭만주의가 발붙일 역사적 배경이나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표방한 시적 지향은 결국 당대 낭만주의적 아이디얼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그만의 독특함이 있다. 그가 죽기 전에 오스트리아의 어느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지만 일단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게 되면 모든 인간의 빈곤상을 보게됩니다.... 시란 풍우의 연안에서 외치는 유한한 인간의 비명이요, 시인이란 황야의 외로운 고함일 뿐입니다.  - But once man rises above himself, then he sees the poverty of all things human... a poem is the cry of a mortal from this stormy strand of ours, the poet is 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

한 (유사)국가의 정치지도자가 하기에는 궁상스러운 언사다. 그의 시가 보편적 인간의 대의에 복무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의 고독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진정했던 것이다. 성직자도 문맹이 많은 몬테네그로 사회에서 나온 그의 시작들은 그야말로 작가적 저작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 큰 업적이었으니 가히 산골짝이 배출한 르네상스맨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죽을 때 로브첸 산 정상의 작은 교회당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는 그 자리에 묘당mausoleum을 만들어 그를 기렸다.

로브첸Lovćen산 정상에 마련된 녜고쉬 묘당. 몬테네그로인들에게는 백두산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묘당 아래까지 찻길이 마련되어 있지만, 상태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맑은 날에나 갈 수 있다. 올라가 본 사람 말에 따르면 경치가 끝내준다고 한다.







2013년 12월 22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7 : 몬테네그로의 부족들

20세기 초까지 몬테네그로 사회의 근간은 부족시스템이었다.

커다란 혈연적 범위 내에서 부족pleme(tribe)이 있고 그 아래 보다 응집력이 강한 소집단으로 씨족bratstvo(clan)이 있다. 예컨대는 이런 거다. 페타르 1세의 경우 녜구쉬족Njeguši의 페트로비치씨족Petrović clan에 속했다. 녜구쉬족은 몬테네그로에서 유서깊고 뼈다귀가 있는 부족이다. 그에 소속된 페트로비치씨족은 18세기부터 블라디카 직을 세습했고, 나중에는 국왕까지 배출했으니 그 중에서도 명망씨족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녜구쉬족이라고 페트로비치 씨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가 몬테네그로에 부러 선사한 지사guvernadur직은 녜고쉬족의 라도니치씨족Radonjići에 세습되면서, 양 씨족의 갈등은 몬테네그로의 지배구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올드 몬테네그로, 그러니까 페타르 1세 시절 제타강 넘어 브르다를 합병하기 이전의 부족 분포도. 1번지역이 체티녜Cetinje족, 2번이 명문 녜구쉬Njeguši족, 6번이 오즈리니치Ozrinići족의 영토


1796년을 기점으로 몬테네그로와 융합하게 된 브르다 지역의 일곱부족 중에서 숫적으로도 많고 가장 용맹스럽고 호전적이라는 평판을 받는 족속은 바소예비치족Vasojevići이다. 이 부족 출신으로 우리가 알만한 인물을 몇명 꼽아보자.

19세기 초 들어 형성된 부족 세력도. 올드 몬테네그로라고 지정한 부분이 바로 위의 지도에 해당하고 더 나아가서 브르다의 일곱 부족, 바소예비치, 피페리, 쿠치 등이 몬테네그로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

기억 나시는가? 이 블로그의 앞에서 언급한 세르비아의 창업자이자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비조 카라조르제다. 그 스스로는 세르비아에서 태어났지만, 그 조상은 몬테네그로 바소예비치족 출신이다.

카라조르제는 세르비아 1차봉기 당시부터도 그 격렬한 성격과 용맹+흉폭함으로 잘 알려져 있어 바소예비치 집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약간은 옆으로 새는 이야기지만, 카라조르제는 전형적인 세르비아 인간형의 한 축(하이랜더형)으로 곧잘 언급되고는 한다. 이에 반해 2차봉기를 주도했지만 타협과 정치를 통해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이끈 밀로쉬 오브레노비치는 그 반대적 형질(로우랜더형)을 대표한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90년대 유고내전의 제1원흉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결국 헤이그에서 전범재판 중에 죽었다.

이 사람은 몬테네그로에서 태어났고 그 중에서도 바소예비치족의 혈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용맹함이나 용감함보다는 교활한 정치공학으로 집권했다. 하지만, 이 양반이 1989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기댄 연설을 했을 때,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가 카라조르제에 못지 않은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인 투쟁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레지던트 이블 씨리즈의 히로인 밀라 요보비치도 바소예비치의 후예라고 한다. 아빠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엄마가 우크라이나인이다. 몬테네그로인들은 남녀모두 잘났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데, 그에 부끄럽지 않은 딸이 태어난 셈이다. 과거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를 러시아, 우크라이나, 몬테네그로인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


바소예비치족은 카라조르제 등이 자신의 혈족인 탓이었는지, 강한 세르비아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2006년 독립을 두고 몬테네그로에서 국민투표가 벌어졌을 때, 바소예비치족의 근거지에서는 압도적인 반대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혈통 그 자체가 민족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중에는 알바니아 혈통의 부족이  세월이 흐르면서 몬테네그로/세르비아계로 전환하는 일이 있었다. 예컨대 올드몬테네그로의 동북방 경계인 제타강 넘어 브르다 일곱 부족 중에 볠로파블리치Bjelopavlići족의 조상 비옐로 파블레Bijelo Pavle는 원래 알바니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웃 알바니아 산중 부족과의교류, 동맹과 적대의 역사가 복잡다기한 융합, 포섭, 분화의 과정을 거쳐서 몬테네그로의 부족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민족이라는 이미지만한 허상이 없다. 어떻게 보면 그런 허상을 기본으로 근대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6 : 산중의 법도

고대국가 이전의 부족 연합체. 제정합일의 신정정치. 이런 모습으로 인해 몬테네그로인들이 형편없는 원시종족 같이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토만의 내습으로 봉건제가 깨지면서 산중으로 흩어져 들어간 이들을 중심으로 부족사회 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해서 사가들은 몬테네그로의 부족생활이 15세기 쯤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세기 말엽의 블라디카의 모습. 정교의 체계 내에서는 보통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맡았다. 이 때 쯤 와서는 블라디카의 세속적 권력이 민간권력에게 이양된 상황이었지만, 동방정교는 몬테네그로의 살림살이에서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세르비아 정교냐 몬테네그로 정교냐는 것.

슬라브족이 발칸으로 들어와서 살기는 했지만, 지금도 산중에는 이미 알바니아계 하이랜더나 그 연원이 묘연한 블라흐Vlah족들이 부족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가 부족생활이 자리잡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특히 알바니아계나 블라흐계 부족들도 차차 세월이 지나면서 숫적으로 우세한 슬라브에 동화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딱히 경작할 땅이 없는 산 속에서 목축생활을 했지만, 이 역시 지속가능한 생활의 자량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산 아래 정착한 무슬림 마을을 터는 산적Hajduk 생활이 이들의 주요한 밥벌이였다. 따라서, 오토만과의 갈등이라는 것도 종교가 달라서 또는 가슴에 주체할 수 없는 민족정기 때문에 .. 등과 같은 상부구조적 요인보다는 결국은 이런 원초적 생활 패턴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랜 세월의 더케가 쌓이다 보니 밥벌이를 위한 원초적 다툼이 고아한 민족의식이 서로를 북돋으며 몬테네그로인들의 뇌리에 남은 듯 하다.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전사간의 싸움.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의 상당수는 오토만 편에서 싸웠다. 전사로서의 명예/투쟁의식은 몬테네그로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알바니아계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몬테네그로 대 오토만의 싸움이었지만, 19세기 언제부턴가 몬테네그로 대 알바니아 간의 쟁투로 점차 변질되어 갔다.

외부민족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부족간 또는 구성원 간의 반목도 심했다. 티핑 포인트였던가 블링크였던가. 말콤 맥도웰Malcolm McDowell은 스코트랜드 등 하이랜더들이 불같은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러가지 나열한 적이 있다. 몬테네그로(나 알바니아에서) 하이랜더들 사이에서도 대충 그 비슷한 원인으로 분규가 잦았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인들의 눈을 가장 많이 끄는 대목은 '피의 복수'Blood Feud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받은 만큼은 되돌려준다는 이 간단한 룰은 몬테네그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근 알바니아 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영화 '대부'의 본거지 시실리, 더 넓게는 파푸아 뉴기니 원시종족에도 널리 퍼져있는 관습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지위는 제한적이었지만, 가사부터 경작, 목축에 이르는 경제활동은 모두 여성의 일이었다. 남성들의 일이 싸움질이었다면 여성의 일은 그 나머지 다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이런 의식이 오랜세월을 거쳐 축적되고 체화된 탓인지, 몬테네그로 남성들에 대한 구유고국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게으르다'는 것이다.  

코토르Kotor 시장으로 물건 팔러 나가는 몬테네그로인들을 묘사한 그림. 여성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가고, 남자는 총만 달랑들고 가는 모습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병참은 여성의 일이었다.

19세기 알바니아 카톨릭 수도사가 알바니아 하이랜더들을 중심으로 통용되는 룰Kanuni i Lekë Dukagjinit을 문서로 정리한 적이 있다. 관혼상제 여러가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런거다: 원수는 피로 갚는다. 피로 갚을 때는 백주대낮에 다들 보이는 데서 한다.... 손님한테는 정성을 다해서 대접한다. 우리집 손님의 안전을 헤쳐서 집안의 명예를 실추한 놈은 집안의 원수다... 이런 놈에게는 피로 원수를 갚는다... 결국 피의 복수란 강력한 가부장제, 명예의식, 중앙사법권력의 부재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자고 만들어 놓은 생존전략 때문에 사람들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때문에 20세기 초가 되도록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사망원인은 '살인'이었다. 알바니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룰이 몬테네그로에서도 통용됐다고 보면 된다. 몬테네그로의 정치권력이 점차 중앙집중화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가장 큰 골치꺼리는 이것을 어떻게 근절하느냐 였다.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구유고의 음악 11 : 몬테네그로 전사의 노래

몬테네그로에는 지난 번에도 소개했던 구슬레 서사시를 부르는 악사Guslar가 유난히 많다. 소박한 악기 자체가 공교롭기 어려운 산악의 단순한 삶에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몬테네그로가 배출한 최고 시인 네고쉬도 '구슬레 소리가 나지 않는 집은 죽은 집'이라고 읊었을 정도였으니, 구슬레가 몬테네그로에서 가지는 의미가 알쪼다.

몬테네그로인들이 구슬레를 연주하면서 읊었던 서사시 중에는 영웅을 찬탄하는 류의 서사가 많은데, 이번에 소개할 '밀로 요보비치 사제의 죽음'Pobigija (또는 Smrt) Popa Mila Jovovića가 가장 대표이라 할 수 있겠다.

원초적 단순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구슬레 연주 버전의 '죽음'. 여기 소개하는 것은 1부고 2부까지 합치면 장장 20분이 조금 모자라는 서사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르면서 끝까지 듣기가 어렵다. 

내용인 즉 이렇다.

"닉시치Niksić(오늘날 몬테네그로 도시들의 대다수는 19세기까지 오토만 터키 지배하에 있었다. 닉시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은 몬테네그로 대표브랜드 맥주를 만드는 동네다) 공략을 모의하던 몬테네그로 진영에서 누군가 밀로 요보비치 사제를 중상하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런 참언을 들었기 때문인가? 부족의 족장이 여러 전사들 앞에서 밀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대는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로다.' 요보비치 사제는 이 말을 듣고 분기탱천, 분노에 몸을 떤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홀연 총칼을 차고 닉시치로 향한다.

닉시치 성문 앞에 선 요보비치. 터키 경비병들에게 말한다. '무쇼비치 대장kapetan 나오라 그래'. 이 말을 듣고 나온 무쇼비치 수비대장. '웬 일이야? 항복하러 왔으면 환영이야'. 요보비치가 답한다. '쓸 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당장 나와. 나랑 결투다!' 하지만 요보비치의 명성을 알고 있는 대장은 부하들을 시켜 성문 앞 요보비치를 저격한다.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요보비치의 목을 따라 터키의 병사들이 몰려나오고, 그의 목은 닉시치 탑 위에 걸린다. 그 날 밤 병사들 사이에선 잔치가 벌어지고, 터키식 하렘의 여인들은 창문 넘어 유명했던 영웅의 머리를 호기심 어린 듯 바라본다. 요보비치가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이 땅을 치며 울음을 터뜨린다."

시가의 형태로 음미하지 않고 줄거리만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몇가지 몬테네그로의 단면을 포착할 수 있다. 성직자가 전사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성직자 중에는 일자무식꾼도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적 용맹과 명예는 몬테네그로 부족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이를 지키기 위한 분노의 표출은 남자라면 응당해야할 사회적 행동이었다. 남성중심적 문화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면 빙고! 군사적으로는 득도 있지만 실도 크다. 몬테네그로의 전사들은 산악 게릴라전에는 능했을지 몰라도 공성전과 같이 고도로 조직화된 군사적 행동에는 약했다.

이 오래된 노래는 80년대 등장한 몬테네그로 출신 랩퍼/로커 람보 아마데우스Rambo Amadeus가 모던한 랩으로 리바이벌한 적이 있다. 장장 20분 짜리 서사시가 5분 짜리 랩으로 축약되는 순간이다.

80년대 유고슬라비아 락씬에 데뷔한 람보 아마데우스는 B급 정서에 기반한 풍자적 노래도 곧잘하고 전통적 요소와 최신 유행을 결합시킨 곡을 다수 발표했다. 90년대 세르비아를 풍미한 '투르보 포크'turbo folk라는 말도 그가 만들어낸 말로, 짧은 말로 사회의 단면을 잡아낼 줄도 알았다. 지금도 활동 중이다. 2013년 몬테네그로를 대표해서 경제위기에 빠진 EU를 풍자하는 Euro Neuro로 유로비전 송 컨테스트에 나가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5 : 산중에 들기시작한 볕

1782년, 블라디카 사바가 죽었다. 40년이 넘도록 권력없는 권좌에 앉아있었던 그가 죽자, 새 세대가 들어설 자리가 생겼다. 약간의 뜸을 들인후 새로운 블라디카로 추대된 것은 역시 페트로비치 가문의 청년 사제 페타르Petar였다. 이전 블라디카 중에서 페타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페타르 1세Petar I가 됐다.

딱히 물려받았달 것도 없는 초라한 권력이었지만, 페타르에게는 선대 다닐로 못지 않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 하나가 있다면 그의 교육. 산중에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았던 선대 블라디카와 달리 페타르는 몬테네그로 산골에는 비할 수 없는 대처 러시아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사바와 공동으로 블라디카 직을 수행하다가 러시아에서 죽은 바실리예를 시봉하던 것도 바로 이 페타르였다.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수 있는 안목도 갖추고 있었다.

페타르 1세의 모습. 동시대의 사람이 직접 그린 초상화다. 엄숙 경건한 성직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앞의 블라디카들의 초상화와 좀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은가? 머리 부분의 후광을 주목한 사람이 있다면 눈썰미가 날카롭다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페타르 1세는 사후에 성자로 추존되었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성 페타르다. 

페타르1세의 핵심주적은 역시 오토만.... 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몬테네그로에 바로 접한 스쿠타리 파샬릭Pashalik of Scutari의 총독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Kara Mahmud Bushati였다. 이야기가 약간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앞에서 퉁쳐서 오토만이라고 총칭했지만, 오토만은 하나의 일괴암적인 성격의 집단이 아니었다. 워낙 구성민족들도 다양했던 것도 있고,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제도와 전통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들이 나중에는 지겹게 술탄의 말을 안들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원쑤 오토만이라고 여긴 족속에는 동일한 슬라브 혈통의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알바니아계였다. 카라 마흐무드 역시 알바니아계였던 것이다.

페타르 1세와 지역의 자웅을 다투던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 원초적으로 마초적인 모습이다. 카라라는 말은 터키어로 '검은색'을 의미한다. 거무튀튀한 얼굴색의 장사(속칭 소도둑 인상)들에게는 '카라'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 같다. 또다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르비아의 창업자 '카라' 조르제다. 

알바니아. 슬라브 족이 아니다. 언어 계통도 다르다. 슬라브족이 도래하기 전에 원래 발칸반도에 정주하고 있던 일리리아 원주민들이 바로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슬라브족에 이리 밀리고 저리 퉁겨 나가면서 디나릭 산중에 처박히게 됐다. 오토만이 발칸 반도로 들어오면서 다수의 카톨릭 또는 정교계통의 알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 결과 오늘날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이루는 나라가 됐다. 오토만 고유의 아동납치+영재교육 시스템Devşirme에 알바니아인 다수가 발탁된 결과, 오토만의 명재상이나 엘리트 중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나왔다.

알바니아는 발칸의 민족문제에 또다른 각도의 스핀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

카라 마흐무드는 오토만의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었다. 왜냐면 이 사람이 술탄의 말을 무던히 안들었거든. 빡친 술탄이 이 사람을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간단하게 격퇴당하고 만다. 이러니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가 오히려 마흐무드에게 반오토만 공동전선을 짜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오토만 내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페타르1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지배욕이 강한 마흐무드가 골목대장 노릇을 확실히 하려고 했거든. 즉위 초 한때는 체티녜가 이 양반에게 점령된 적도 있었다. 1796년 7월 이 마흐무드가 지역의 골치꺼리 산중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오토만군은 쨉도 안될 것 같은 페타르 휘하 몬테네그로 부족 연합군에게 일격을 당하고 만다. 마흐무드 본인은 부상까지 당하고....

몬테네그로인들의 전투모습. 이 동네의 쟁투에서는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양측 할 것 없이 목을 따는 것은 기본. 적의 목은 개인적 용맹과 전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도주나 퇴각시 머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상당한 전우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는 것이 예의였다고 한다. 

절치부심에 와신상담을 거듭한 한 마흐무드가 같은 해 9월 다시한번 군사를 일으킨다. 오늘날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차 근처인 크루시Krusi에서의 혈투. 오토만 3만 대 몬테네그로 7천. 그러나 얼마전 패배의 충격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것일까. 마치 뭐라도 씌인 것처럼 마흐무드는 또다시 지고 만다. 진것 뿐만 아니라 마흐무드 자신은 생포/참수당해서 그 목이 체티녜 거리에 걸리고 말았다.

몬테네그로로서는 강적을 만나, 이긴 것도 좋았지만, 가장 큰 소득은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 블라디카의 말빨이 안먹히던 브르다Brda의 일곱 부족을 영향권 안에 거두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제적으로는 용맹한 전사로서의 명망을 얻었다. 영국 등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몬테네그로를 주목하게 된 계기다.

1796년의 전투로 넓어진 땅. 올드 몬테네그로라고 표시한 영역이 페타르가 물려받은 영토(?)다.  크루시 전투를 계기로 브르다 지역이 새롭게 몬테네그로 수중에 들어왔다. 오늘날의 몬테네그로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좁은 땅이지만 이게 어딘가. 

더 나아가 페타르 1세는 중앙정부(?)의 사법적 기능을 강화하고 법을 도입했다. 물론 이 이후에도 부족장들을 다잡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꿈같은 일이었다. 로브첸 산중에 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4 : 사기꾼 황제

카리스마 만땅 다닐로가 1735년에 죽고 블라디카의 자리는 그 사촌인 사바Sava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사바는 사촌 답지 않게 내향적인 사람으로 뭘 장악하고자하는 권력욕이 없었다. 덕분에 모처럼 열린 시대의 몬테네그로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가 지속됐다. 오토만과의 갈등, 부족과 씨족간의 분규가 지속되면서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라고 해야겠지만, 원래 중앙정부랄 만한 것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바 페트로비치. 종교인 답게 생겼다. 페트로비치 씨족의 첫번째  블라디카 후계자. 영적인 문제는 몰라도 세속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후세인들은 성격이 강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다닐로가 어떻게 사바 같은 이를 후계로 지목했는지에 의문을 품고 있다.

다닐로의 조카로  보다 젊고 에너지가 있는 바실리예Vasilije가 1750년 어찌어찌 당시 세르비아 정교수장으로부터 서품을 받음으로써 사바와 블라디카 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형국이 됐지만, 대외적인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가난하고 못살았으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라였다. 바실리예는 베니스, 러시아 등으로 동분서주 하다가 1766년에 죽었다. 다시 블라디카 자리는 오롯이 리더십 결핍증에 시달리는 사바에게 넘어갔다.

바실리예 페트로비치. 얌전한 사바보다는 활동력이 있었다. 베니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열강을 순회하면서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위해 힘썼지만, 시운 탓인지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권력의 공백기에 몬테네그로에는 사기꾼이 하나 흘러들어왔다. 몬테네그로 산속의 무지렁이들에게 자기가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의 남편으로 궁중 권모로 암살당한 (암살당하려다가 도망나온) 표트르 3세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나중에 "작은 스체판"Sćepan Mali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름으로 미루어 체구가 작았을 것으로 는 추정되는 이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정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달마시아 산간과 해변지역에서 약초를 캐던 약장수가 몬테네그로까지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로 추정되는 데, 이 역시 확실한 근거가 없다. 적어도 떠돌이 약장수를 하면서 익힌 언변으로 바깥 사정에 어두운 몬테네그로 산사람들을 홀린게 아닌가라는 것 까지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을 홀리고 다니더니 그 수가 제법 불어났다. 블라디카 사바가 나서서 족장들에게 표트르 3세는 실제로 죽었음을 알리려 했으나 오히려 (잠시나마) 구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오토만, 러시아가 아연해서 서로를 의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화 속의 삽화처럼 그려진 작은 스체판.  왜소한 체격으로 전통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마초를 선호했던 몬테네그로 산악부족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6년 동안 이들을 쥐락펴락했다. 

오토만이 우선 1768년 거병해서 산중 부족들의 세가 결집되는 것을 막고자 나섰다. 그러나 산중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아니면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쟁이 나는 등등의 이유로 여의치 않았다. 러시아가 나섰다. 에카테리나 여제의 특사가 몬테네그로까지 와서 부족들에게 스체판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운 족장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특사는 결국 두 손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설에는 아예 스체판에게 러시아 장교복까지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변의 강국들이 자기 앞가림하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스체판을 실질적으로 몬테네그로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초적이기는 하지만 사법시스템을 도입하고 인구조사를 하는 한편 시장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진보에도 불구, 1773년에 스체판은 오토만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나는 왕이로소이다'The man who would be King(1976)라는 영화가 있다. 션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 주연으로 영국의 사기꾼 두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땅에 들어가서 알렉산더 대왕을 참칭, 현지 부족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비슷한 일이 18세기 중엽 몬테네그로에서 일어난 것이다. 영화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체판의 참칭은 비극으로 끝났다.

사기꾼의 왕노릇이었지만,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를 통해 몬테네그로의 대 오토만 항쟁과 호전성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대군과 맞서는 산중의 부족들. 게다가 낭만주의 시대 아닌가. 뭐하나 대승을 거둔 적은 없어도 압도적 무력 앞에서 근근히 버티는 몬테네그로 산중부족들은 자유를 그리는 서유럽 낭만가들의 몽상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스체판이 죽고 난 뒤에도 블라디카는 여전히 사바였다. 이 무기력한 장수왕의 시대에 스체판은 산중 사람들의 단순 무식에 힘입어 강렬하게 매운 조미료 역할은 한 듯 하다.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3 : 리더의 탄생과 시대의 개막

산속에 처박힌 몬테네그로인들. 코토르를 비롯한 바닷가는 베네치아인가 평야 지역은 오토만의 지배체제가 들어앉았다. 몬테네그로는 이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사실은 그 두세력이 산으로 까지 굳이 쫓아들어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16세기 베네치아와 오토만 터키는 과거 츠르노예비치 가문의 땅이 온전히 오토만의 것임을 합의했지만, 츠르노예비치의 마지막 농성장소인 체티녜를 중심으로 다단한 부족과 씨족들이 살았다. 삶은 단순했다. 국가도 없고 세금도 없다. 귀족도 없고 농노도 없다. 이것이 바로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 부족pleme(tribe), 씨족bratsvo(clan) 등의 단어가 근세까지 살아서 남아있게 된 연유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가 없는 사회라는 것은 지극히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오토만과 같은 강대한 적이 있을 때는. 그래서 산중의 부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뽑았다. 누구에게도 불편부당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가 블라디카Vladika라는 직함을 가지게 됐다. 정치적 스킬도 있어야 하지만, 군사적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도 잘생기고 키고 큰 사람이면 더욱 좋다.

블라디카 다닐로의 모습. 당연히 직접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후세에 보다 로만틱하게 각색한 그림이다. 정교 승려라기 보다는 댄디한 군인처럼 보인다. 군사지도자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도 틀린 것 만은 아닐 것이다. 

블라디카를 중심으로 몬테네그로는 초록동색 베네치아와의 연합을 통한 오토만 군과의 대항전선을 만들었고 베네치아와 오토만 사이에서 일어난 다단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항상 믿을 만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만과 항상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시세와 풍향에 따르는 잡초와도 같은 삶이다.

그러나 17세기를 기점으로 오토만이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던 베니스 포위(1683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산속의 바람도 슬슬 동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녜구시Njeguši족 페트로비치Petrović 집안의 25살짜리 승려 다닐로Danilo가 블라디카에 선출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1697). 오토만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과 야망이 있었다. '체티녜 주석 블라디카 겸 세르비아의 령(!)도자' Vladika of Cetinje and Vojvodić of Serbian Land. 그의 (자칭) 공식 직함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바탕으로 한 다닐로는 몬테네그로사에서는 지금까지 없던 두가지 유산을 남겼다.

그 하나가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

때마침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함대 구축, 부동항 건설을 국가적 목표로 내놓고 뛰어다닐 때다. 항해술 습득을 위해 청년 장교들을 서방으로 보낼 때, 베네치아가 관리하던 코토르Kotor에도 몇사람 보냈다. 이곳에서 이들은 산중에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호전적인 부족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몬테네그로와 러시아 간의 관계가 시작된다. 동일한 정교를 신봉하는 데다 오토만과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신흥강대국 러시아에 몬테네그로가 홀딱 빠졌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일까 몬테네그로의 러시아 숭배는 거의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관계를 처음으로 열어나간 것이 다닐로였다. 블라디카 다닐로는 러시아로부터의 원조를 바탕으로 몬테네그로 전사들의 화력과 더불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몬테네그로 부족들의 유일한 생명줄 노릇을 해왔던 베네치아가 가만히 만은 있을 수 없었다. 원래 인연이 있던 족장들을 초치하고 그 중 대장급에게 지사guvernadur의 명함을 달아줬다. 이간책이었다. 다닐로는 정치적 수완으로 이같은 외세의 개입을 교묘하게 무력화한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뜨는 해라면 베네치아는 지는 해였다. 표트르 대제를 중심으로 오토만 못지 않은 국토확장을 추진하는 러시아, 그리고 지중해 무역의 위상이 옛날같지 않은데다 곧 있으면 나폴레옹에게 망할 베네치아.

또 블라디카직의 세습...

다닐로 때부터 블라디카 직이 다닐로가 속해있던 페트로비치 씨족에만 전승되는 전통이 생겼다. 다닐로의 카리스마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사는 정교 승려의 신분에 후사가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조카가 이어받는 것으로 결정됐다. 세습군주는 아니지만, 어느 집안을 구심점으로 중요한 정치적 권력이 전승된다는 것은 이제까지 민주적 부족사회의 전통과는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집중되고 집약되기를 바라는 권력의 구심력이 어디선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블라디카에게 없던 권력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었다. 산중의 부족장들은 여전히 말을 안들었고 이들에게 다닐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문'이라는 위협과 협박 뿐이었다.

17세기 벽두에 다닐로가 건립한 체티녜 수도원Cetinjski manastir. 옛날 츠르노예비치 왕가가 만들었다는 수도원 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오토만이 대군을 끌고 체티녜를 들이닥치는 바람에 여러번 불탔지만, 그 때마다 다시 세웠다.  페트로비치 가문의 또다른 성자 페타르의 유골이 봉헌된 곳이기도 한 만큼, 몬테네그로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만 하다. 

오토만과의 다단한 전투를 통해 명성을 구축한 블라디카 다닐로가 워낙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지 몬테네그로의 후세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학살'Christmas Eve Masacre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702년에 일어났다는 이 사건은 다닐로의 명하에 마르티노비치Martinović 가문의 다섯 형제(와 그 권속)들이 무슬림 (배교자) 마을을 찾아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사건의 역사적 진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후세 몬테네그로인들은 이를 통해 다닐로를 더욱 살갑게 기억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서사시도 여러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중에도 나오지만 몬테네그로 국민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중화환Mountain Wreath이다.

어쨌거나 다닐로를 기점으로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몬테네그로의 새 시대가 열렸다. 물론 다닐로는 이 역사적 길목에서 스스로를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포지셔닝했다. 이 같은 정체성이 어떻게 몬테네그로라는 별도의 지향점으로 빠져들었는가가 역사의 미묘한 점이다.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2 : 산 속의 생활

15-6세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오토만의 물결을 피해서 산으로 달아난 몬테네그로인들. 산으로 들어가고 보니 사방이 막막했다. 디나릭 알프스 자락의 산악 지형은 카르스트 암반 위주의 지형이다. 몬테네그로에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남은 돌덩어리들을 이쪽지역에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당연히 거칠고 황폐하다.

코토르 만을 둘러친 몬테네그로의 산들. 물가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산위는 보기는 좋지만 살기는 영 아니다. 몬테네그로인들이 19세기말까지 산에서 내려오질 못했고 이들 해변 도시를 제대로 접수한 것 역시 20세기 전후의 일이다.

이런 산속에서 최후까지 반 오토만 전선의 선봉이었던 이반 츠르노예비치도 몇 년 살아보다가, 15세기 말 베니스로 투항했다. 츠르노예비치의 후예로 이반의 세째 아들 스타니샤Staniša는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오토만 술탄의 대리자로서 지역을 군림했다. 그러나, 지역에 뿌리박은 호족으로서가 아니라  행정관료로서였다.

산속에서 지배계급이 없어진 만큼 몬테네그로 인들의 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왔다. 억센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도 그만큼 억세어지지 않으면 안됐다. 그렇다고 개개인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던 만큼 대가족을 중심으로 한 부족들이 나타났다.

목축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지만, 이것 역시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산아래로 내려와서 약탈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주된 약탈의 대상은 주로 어느정도 윤택했던 무슬림 대갓댁이었지만, 부족들 끼리도 목축지를 둘러싸고 험한 싸움이 지속됐다.

위의 그림은 산 아래를 내다보는 몬테네그로 전사의 모습. 마초들이 다스리는 남성우위사회다.  고산지대를 배경으로 강팍한 스파르타 생활을 영위했으니까 가히 하이랜더라 할만 하다.

누군가 나의 원한과 원망을 풀어주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줄 중앙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는 부족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됐다.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룰이 금과옥조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룰은 부족간의 쟁패를 불식하기는 커녕 더 확산시킬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산 아래는 오토만이라는 강적이 있지 않은가?

해서 부족간의 분규 해결이나 쟁송 협의를 위해서 부족회의Opšti Crnogorski zbor가 구성됐다. 오늘 날 의회와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되려나? 또 누군가 불편부당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블라디카Vladika, 부족간 회의를 통해서 선출된 지역 정교교회의 수장이다. 영어로는 Prince-Bishop으로 번역되는 데, 만약 번역 그대로라면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제정일치 또는 신정합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금 제도가 없다 보니 중앙집권적 정부가 나올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오토만에 먹히던 내분으로 망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방책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이런 권력을 몰아주기는 어려우니 어느정도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종교인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카가 받은 권력이라는 것 역시 실제적 물리력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블라디카의 궁극적 역할은 군사지도자이자 중재자였다. 군사지도자라 함은 오토만에 대한 군사지도자, 중재자라 함은 부족간의 알력을 막는 타협의 매개체 역할인데, 말 안듣는 족장에게는 '파문' 으름짱을 놓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었다.

몬테네그로 산중의 생활. 터키식 칼 야타간과 총을 찬 남자들의 무대였다. 이들에게 '무장해제'란 '거세'와 비슷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19세기까지 몬테네그로의 정치체제는 정교일치였다고 하지만, 오늘 날의 이란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의 블라디카의 권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봉건 영주가 없는 무계급 사회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산에서 사는 만큼 삶은 강팍해졌지만, 개인을 찍어누르는 계급은 없어진 셈이다. 무정부적 자유주의자들의 연합. 이것이 몬테네그로 산중생활의 실체였다. 이 같은 생활양식이 18-19세기 서유럽의 낭만주의적 영감을 자극했다.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구유고 음악 10 : 록에서 집시 뮤직까지 Goran Bregović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ć는 보스니아 출신의 락/에트노 뮤지션이다.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2차대전 후 사회적 긴장이 완화된 틈을 타서 민족 간의 혼인이 성했다. 고란 브레고비치도 이런 예로, 아빠는 세르비아, 엄마는 크로아티아계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근 모습. 90년대 유고 내전이후 고향이 보스니아를 떠나 세르비아에 눌러 앉기는 했지만 이기 팝Iggy Pop 등 서구 락스타에게 곡을 주고 크로아티아의 팝스타 세베리나Severina 등과 교류하는 등 국제적 지명도도 높다.  

20대 초반이던 70년대 말, 고란은 보스니아에서 친구들과 이런 저런 모색끝에 비옐로 두그메Bijelo Dugme(하얀 단추라는 뜻)라는 락 밴드를 결성했다. 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 뿐만 아니라 유고 락 음악 역사에서 다수의 기념비적 명반을 배출한 대표 밴드다. 초기작들은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은 정통 하드락 계열이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류에 편승해서 뉴웨이브로 전환했다. 고란의 변신의 싹수는 여기서 부터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옐로 두그메 전성기 때의 모습.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만나다 보니 경제적으로 피지는 못해도 유고슬라비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비옐로 두그메 역시 가장 시골스런 곳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을 추구한 밴드 되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보스니아에서 더 이상 밴드음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고란 브레고비치는 결국 세르비아에 정착하고 본령인 락음악에서 집시음악을 중심으로 한 에트노/월드 뮤직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하필이면 집시음악인가? 모를 일이지만, 비옐로 두그메 후기 앨범에서는 집시노래 번안곡이 들어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음악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형성된 듯 하다.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와의 공동작업(집시의 시간dom za vešanje,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등 에밀 쿠스트리차 대표작의 음악은 모두 고란의 작품)을 통해 집시 뮤직에 기반을 둔 영화음악을 발표해서 그 성가는 일국을 넘어서 범유럽으로 퍼져 나간 바 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만가다. 헤쳤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남슬라브족의 처지가 정처없이 유랑하는 집시들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유고 내전이 한창 진행되던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혼혈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가 부질없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적어도 90년대에 들어 사방에서 고립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고란표 집시음악이 상당히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왔던 것 같다. 고란은 음악적 방향을 바꾼 90년대 이후 다른 나라 민족음악인(속칭 월드뮤직)들과의 교류를 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혔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집시 음악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

고란 브레고비치작 집시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완급 조절이다. 하드 드라이브 일색의 집시음악에 고란은 긴장과 이완을 불어 넣었다. 여기에 주류적 대중감성, 모던 프로덕션 기술로 사운드를 윤색하니까 정말로 성속聖俗, 귀천貴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잘된 음악이 나왔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섹스Sex. 원래 음반에서는 집시 음악의 왕 샤반 바이라모비치의 음성이 수록됐다. 샤반의 다른 음반과 비교해 보면 프로듀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 한데, 은밀하게 밀고 당기는 듯한 섹스의 정조가 잘 표현된 것 같다.

그러나 허다한 작품 가운데에서 고란 브레고비치의 최대 히트곡은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1989)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에데를레지'Ederlezi다. 90년대 세르비아에서는 시대의 송가처럼 불리워 졌다. 

전통적 집시 브라스밴드의 반주를 바탕으로 한 에데를레지. 2005년 이태리 아시시Asisi 성프란시스코 바실리카에서 개최된 크리스마스 라이브 현장이다.  

에데를레지는 발칸의 종교축일 '聖조지의 날'Đurđevdan(Saint George's Day)를 기리는 집시들의 노래다. 이 날을 전후로 사람들은 강가에서 몸을 씻고 새끼양 통구이를 먹는다. 종교축일의 틀을 빌렸지만, 실제 주민들에게는 다가오는 봄을 기리는 축제날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지 발칸의 주민들은 카톨릭, 정교, 무슬림 할 것 없이 이 날을 기념했다. 때문에 학자들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이교도의 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보 안드리치와 더불어 보스니아 대표문호 메샤 셀리모비치Meša Selimović의 대표작 더비쉬와 죽음Derviš i smrt은 바로 이 성조지의 날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슬람 성직자Derviš인 주인공이 밤중에 길을 걸어가면서 성조지의 날을 맞는 주민들을 보면서 제도화된 종교적 순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결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남과 여의 원초적 마그네티즘으로 형성되는 생명이란 순수와 고결을 숭배하는 화석화된 기성종교로는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에데를레지는 종잡을 수 없는 봄 또는 생명의 시작을 찬미하는 찬송이지만 그 가사는 애잔하기 그지없다.
Ederlezi 
All my friends are dancing the oro Dancing the oro, celebrating the day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But me, poor, I am sitting apart
A Romany day, our day
Our day, Ederlezi
They give, Dad, a lamb for us
All the Roma, dad, slaughter lambs
All the Roma, dad, dad
All the Roma, oh mommy
All the Roma, dad, dad
Ederlezi, Ederlezi
All the Roma, mommy





2013년 10월 11일 금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 : 옛 로마의 도클레아

몬테네그로Montenegro.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현지어로된 정식명칭은 검은 산의 직역인 츠르나 고라Crna Gora. 라틴어를 애호했던 옛 식자들 덕분에 외지인들에게는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대한민국이 코리아가 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할까나.

발칸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슬라브족이 살았던 땅이 아니었다. 로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그리스 혹은 로마 시민들이 바닷가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내륙 일리리아의 부족들과 교류했다. 그 때 이 땅 이름이 도클레아Doclea(또는 디오클레아Dioclea, 원래 이땅에 살고 있던 일리리아 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였다. 나름대로 번성했던지 서력 3세기 경에는 이 땅에서 로마 황제를 배출했는데, 그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릿Split에 세워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발칸이 배출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비대해진 로마를 다스리는 방책으로 4두정치체제를 구상한 사람이다. 이 궁전은 황제직에서 은퇴한 뒤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 만든 사저다. 

도클레아라는 이름은 슬라브족이 도래한 이후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슬라브족은 이 땅을 두클랴Duklja라고 불렀다. 어쨌건 기존 토착민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한 슬라브족이 들어서면서 지역의 패자가 명멸하는 봉건제가 지속됐다. 그 때를 기해 이 지역은 제타Zet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9세기 경의 지역 세력관계도. 도클레아가 바로 오늘날 몬테네그로와 대충 맞아떨어진다. 문화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이 강했고, 그 덕에 이 곳 슬라브들도 동방정교를 신봉하게 됐지만 해안가는 오랫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도 강하다.  

14세기 경에 이 지역을 다스린 유력가문으로 츠르노예비치Crnojević가가 융성했는데, 레베카 웨스트는 이 때 당주 츠르노예 때문에, 이 지역 이름이 츠르나 고라 즉 블랙 마운틴이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살던 지역의 산색이 거뭇해서 생긴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이 가문이 15세기 오토만(또는 베니스 공화국)에 의해 궁벽한 산속으로 쫓겨나면서 수도로 삼은 것이 오늘 날의 체티녜Cetinje다.

몬테네그로 체티녜에 설치된 최후의 슬라브 봉건영주 이반 츠르노예비치의 동상. 황량한 산속에 들어선 체티녜는 왕궁이 있기에는 부적합한 궁벽한 도시지만, 바다는 베니스 평지는 오토만이 장악하면서 이곳 몬테네그로 슬라브들의 정신적 본거지가 됐다.

여느 슬라브 영주와 마찬가지로 오토만의 서진은 몬테네그로에도 두고두고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웃민족인 알바니아계가 전반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 민족 간의 분쟁은 종교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오토만 조정이나 이곳에 파견된 행정관의 입장에서는 산속의 슬라브족들 언제든지 쓸어버릴수도 있었지만, 황량한 산속의 슬라브족을 굳이 치고들어갈 전략적 이유가 없었다. 오랫동안 몬테네그로의 산지를 두고서 '두개의 군대가 싸우면, 작은 군대는 맞아죽고, 큰 군대는 굶어죽는 곳'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그만큼 척박한 땅이다. 몬테네그로의 산악지역에는 오토만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15세기 이후 몬테네그로를 독립국으로 볼 수 있을까? 몬테네그로 산지의 물질적 여건이 중앙집권형 왕국이 나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곳 슬라브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강력한 왕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족 더 나아가 소속 부족 밖에 없었다.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실질적으로는 아메리칸 인디언과 유사한 부족사회 체제가 유지됐다. 우리나라와 빗대어 보자면 3국시대 이전 시기와도 비슷한 경우? 지금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외지인이 아니라면 자기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3 : 히틀러의 작난

근세사에서 보스니아가 가지고 있는 내재적 불안이 가장 크게 확대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2차대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독, 이, 일의 3국동맹에 참여했던 유고슬라비아 섭정  파블레공이 쿠데타로 쫓겨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반응을 기다려주질 않았다. 1차대전 후 각 참전국의 명운을 결정한 베르사이유 조약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작했던 히틀러로서는 그 산물인 유고슬라비아 자체도 존중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유고슬라비아군 수뇌부로서는 한 20일은 버티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지만, 왕정 유고슬라비아군이 백기투항한 데 든 시간은 열흘 남짓. 가볍게 유고슬라비아를 접수한 독일(과 이태리 등)은 유고의 국경을 다시 그렸다. 이렇게 해서 과거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은 독립 크로아티아, 동쪽에는 괴뢰 세르비아를 앉혀 놓고,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독일과 이태리가 반분하는 형태였다. 보스니아는 하루 아침에 독립 크로아티아의 영역이 된다. 

2차대전의 시작과 더불어 만들어진 독립크로아티아NDH, 보스니아를 꼴랑 다 먹어 버렸다. 보라색으로 처리된 해변지역은 NDH가 이태리에게 넘겨준 지역이다.  

크로아티아로 들어선 우스타샤 정권은 독일과 이태리의 '순수성'을 벤치마크해서 유태인은 물론 영내의 세르비아계를 잡도리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본토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 같은 난리가 극대화하되는 곳은 역시 세 민족이 모여사는 보스니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립크로아티아NDH 정부는 보스니아에서도 일단 사라예보를 거점으로, 체계적으로 유태인들하고 세르비아계들을 잡도리질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 정권은 희한하게 무슬림들에게는 관대했다. 아무래도 보스니아에서 겪는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무슬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여기에 무슬림들의 일부가 호응을 했다. 

무슬림들의 상징인 페즈를 착용한 NDH의 수령 안테 파벨리치. 그 스스로가 보스니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르체고비나) 출신이다. 석회암으로 팍팍한 헤르체고비나 땅을 두고 세르비아인들은 '돌과 뱀 그리고 우스타샤 만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우스타샤 정권이 유화의 손길을 준다고 해서 무슬림들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다종교 사회를 살아온 대다수 무슬림들에게는 우스타샤가 벌이는 학살극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때는 사라예보 무슬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우스타샤와 일부 무슬림 '쓰레기'들의 살륙극을 중단하라는 청원이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도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무슬림들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비전과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스타샤의 장단에 얼결에 선무당 칼춤을 췄던 무슬림들이 NDH가 자신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시작하면서 NDH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 무리의 무슬림들이 히틀러에게 독일의 보호하에 자치와 별도의 무장조직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선심쓰는 척하면서 보스니아 무슬림들로 이뤄진 친위돌격대 SS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원성을 듣는 단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계 역시 팔짱끼고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세르비아계는 어디까지나 1940년대에서 보스니아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민족이다. 게다가 보스니아의 꼬불탕 산악지역이 NDH 나 독일군이 생각하듯이 쉽게 접수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Četnik 조직이 들고 일어났다. '눈에는 눈' 여기저기서 당한 학살에 대한 앙갚음으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였다. 

보스니아의 산악지형은 게릴라 전을 벌이기 딱 좋은 지형이다.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여기를 주무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싸움을 두고 독일과 이태리 등 파시스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의 기치가 걸렸지만, 내용은 결국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 세르비아계 체트닉,  공산주의 빨치산의 3파전의 양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작난질은 보스니아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파생시켰다. 




2013년 10월 5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12 : 얼떨결에 유고슬라비아

정작 사라예보에서 1차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기는 하지만, 대전 내내 보스니아는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의 전세가 기울어 가는 데에도 보스니아는 전반적으로는 커다란 소요가 없었다. 다만 전시경제 하에서의 곤궁함은 지속됐다.

1차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에 점점 불리하게 흐르면서 남슬라브 제민족을 하나로 묶는 유고슬라비아 운동이 정치적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패전 무드가 무르익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국민회의'National Council가 형성됐고, 허망하게 도시를 떠난 제국의 관료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세르비아군이 진주했고, 일부 유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 간의 갈등으로까지 격화됐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세르비아계들은 환희용약했다. 드디어 대세르비아가 실현되는 때였으니까. 세르비아 본토에서 건너온 군인들 입장에서는 오토만 터키의 잔재인 무슬림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었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때 세르비아 인사 중에는 무슬림들의 강제개종을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12년 발칸전쟁 때 잔학한 인종청소로 인해서 '야만인'으로 악명을 떨친 세르비아로서는 애먼 무슬림들을 쫓아낼 도덕적 명분도 없었거니와 국력도 고갈된 마당이었다.

어쨌거나 보스니아도 역시 얼떨결에 남슬라브의 일원으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에 편입됐다. 보스니아가 원래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무슬림들로 이뤄진 곳이다 보니, 대충은 맞는 국호이긴 하다 하지만, 무슬림들로서는 꺼림직했다. 난 도대체 누구야?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스스로가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민족 둘 중의 하나일꺼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를 기해 무슬림들 간의 독자적 정치조직화가 이뤄졌다. 1919년 2월에는 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브 무슬림 기구'Yugoslav Muslim Organization이 만들어져 유고슬라비아 왕정시대 무슬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거의 독점적으로 대표했다. 초반에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하나의 목소리로 통합해 낸 사람이 바로 메흐메드 스파호Mehmed Spaho다. 이 사람의 주장인 즉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정치체제 하에서 독자적 정체성과 자치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모습. 비엔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엘리트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두 동생 중에 하나는 세르비아계로 다른 하나는 크로아티아계로 천명했다. 한마디로 민족문제와 관련해서는 무슬림들의 입장은 애매하고 모호했다.

메흐메드 스파호의 정치적 입장은 민족이건 아니건 그 이후로도 무슬림들의 전통적 자기주장이 됐다. 하지만 보스니아로서의 통합성은 여전히 난제였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언제든 기댈 언덕이 있었지만, 무슬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중간자적 입장, 국외자적 정치적 토대는 새로 형성된 왕국에서 희한하게 먹혀들어갔다. 일종의 캐스팅 보트 권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1, 2민족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에서의 알력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세르비아 왕가에서 크로아티아 쪽의 손을 들어줘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간의 대협약Sporazum이 형성됐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난제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에 반분되는 결과가 나온다. 유력 무슬림 정치인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되돌릴 힘이 없었다. 메흐메드 스파호도 1939년 대협약이 막바지 협상단계에 들어섰을 때  죽었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내일이 어떻게 됐건, 시간은 급박하게 흘렀다. 대충 뭔가 정리될 시간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구유고 음악 9: 세브다흐의 젊은 얼굴

젊은 층들이 보기에는 더 없이 '구릴 수 있는' 장르인 세브다흐가 환골탈퇴하는 데는 1990년대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구유고 내전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때를 기점으로 젊은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세브다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주방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모험적인 길을 택한 신진 세브다흐 장인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Amira Medunjanin이 가장 대표적이다.

아미라 메두냐닌. 보스니아의 빌리 홀리데이 또는 보스니아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라고도 칭송된다. 두 가수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정조를 극대화하는 노래실력 때문이다. 

아미라 메두냐닌은 사라예보 출신 여성 세브다흐 가수다. 90년대 유고 내전에 사라예보가 근대사상 최장기간 포위를 당하면서 바로 그곳에서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생존이 급한 시대에 음악 교육을 따로 받을 여유가 없었지만, 그 어려운 때에도 지하에서 열리는 게릴라성 콘서트는 꾸준히 찾아갔다고 한다. 가수가 된 것은 좀 뜬금없는데, 전시 사라예보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조직하던 오늘날 남편을 만나서, 우연찮게 노래를 따라부르던 것이 가수가 되는 길이 됐다. 그녀의 테이프를 들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MSR)이 객원 가수로 초빙해서, 2003년 Secret Gate 제작에 참여한 것이 직업가수로서의 첫걸음이다. 

아미라가 부르는 세브다흐는 슬픔의 정조에 더욱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하여 카라 세브다흐Kara Sevdah (Black Sevdah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콘서트에서는 항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온다. 극도의 슬픔을 다한 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 그것이 그녀 음악의 지향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세브다흐가 전달되는 방식이다. 어쩔 때는 서양재즈에 어쩔 때는 바로크 류트와 같은 고악기를 반주로 나오는 그녀의 세브다흐는 기존의 음악을 상당부분 해체/재구성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이것이 모던 세브다흐인가? 아티스틱한 면모가 더 분명해 지는 것은 분명하고, 또 이 같은 시도로 인해서 그 지평이 넓어지는 것 역시 분명한 듯 하다. 더 나아가 아미라의 시도를 두고 세브다흐의 본질을 훼손했느니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가까운 역사에서 쓴 맛을 봐서 그런지 그녀가 우울한 노래들에 대한 이 지역 대중들의 반응도 좋다.

류트 연주자 에딘 카라마조프Edin Karamazov와 같이 한 2010년 이스탄불 공연모습. 서구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오리엔트의 노래가 예상외로 잘 맞는다. 부르는 노래는 '아 사랑을 숨겨야 하다니'Ah što ćemo ljubav kriti. 에딘 카라마조프는 스팅과 더불어 존 다울랜드의 노래를 앨범으로 낸 사람이다. 아미라 메두냐닌과 마찬가지로 보스니아 출신. 

지금까지 네장의 독집 앨범을 냈는데, 앨범 마다 새로운 컨셉트를 채용했다. 세브다흐 장르의 혁신자로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항상 대담한 실험을 동반하면서 MSR 등과 같은 선배 뮤지션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됐다. MSR의 최근 앨범, Tales From A Forgotten City는 전례없는 실험을 하다가 망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미라 메두냐닌 따라하다 망한게 아닌가 싶다.

아미라가 내놓은 앨범 모두 하나 같이 들을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2009년 앨범 Zumra에 수록된 '엄마가 메흐메드를 깨웠다'Mehmeda Majka Budila다. 단순한 노래인데, 가사가 심상치 않다.

내용인 즉 엄마가 아들 메흐메드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메흐메드가 이야기한다. 여동생이 자기의 팔을 묶고, 아버지가 눈을 가리고, 엄마가 심장을 도려내는 꿈을 꿨다고. 노래는 잠을 깨우는 노래라고 하지만, 곡조는 어째 자장가인가? 평안한 집안에 왜 메흐메드는 이런 악몽을 꿨는가? 한두가지가 수상치 않은 이 곡을 아미라가 메리마 클류초의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에 맞춰 부르는데, 듣는 사람 기분이 서늘해 진다. 노약자와 임산부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앨범에 수록된 Mehmeda Majka Budila. 자장가풍의 단순한 노래에 섬뜩한 불협화음 아코디온 반주를 태워서 가사가 가지고 있는 기묘한 전복적 성격을 극대화했다. 

아미라 메두냐닌의 가수로서의 활동은 앨범보다는 콘서트에 방점이 더 맞춰져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에딘 카라마조프 등과의 협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유럽의 주요도시가 그녀의 콘서트 무대다. 기본적으로 깔고들어가는 기조 때문인지 무대의상은 유난히 검다. 노래는 주로 슬프지만, 공연 중간에 실없는 웃긴 소리도 많이 한다. 2013년 최근에는 같은 보스니아 출신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 보쉬코 요비치Boško Jović와 같이 순회하고 있다. 이 역시 앨범으로 발매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콘서트를 참여할 수 있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콘서트를 참여할 수 만 있다면...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11 : 1914년 운명의 날

1878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보스니아 통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가운데, 둘 사이에 놓인 무슬림들. 무슬림들도 스스로를 누구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사뭇 팽팽하게 돌아가던 팽이에 다른 각도에서 스핀이 들어왔다. 1908년 터키 본토에서 '청년 터키' Young Turk 쿠데타가 일어났다. 젊은 군인들이 술탄을 압박해서 근대적 의회주의에 근거한 입헌군주국을 도모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난제였다. 입헌군주, 의회, 다 좋은 데, 오토만 터키 정부가 법적 주권을 지닌 보스니아에서도 지역대표를 소집한다 치면 어쩔건가? 오스트리아 통치 지역의 대표들이 터키의 국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지금까지 맘속으로만 간직하던 '합병'을 선포한다. 보스니아는 실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땅이 된 것이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발표는 지역에서 일련의 정치적 소요와 위기를 야기했다. 흔히들 말하는 합병 위기annexation crisis가 바로 이것이다. 가장 흥분한 것은 세르비아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들이었다. 흉중의 대세르비아로 가는 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이다.

각종 비밀결사와 혁명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스니아에서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 라는 이름의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배경의 학생운동 흐름이 형성됐다. 이들 학생들 중 일부가 세르비아 본토의 민족주의 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사보타지, 폭탄제조 및 무기 사용법 등을 배웠다. 그 중의 하나가 가브릴로 프린찝이었다.

민족주의 청년의 초상. 가브릴로 프린찝Gavrilo Princip. 1912-13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 군에 자원했으나 '너무 병약하고 왜소해서' 복무를 거부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큰 사고를 치는 데는 큰 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암살 당시 미성년(20세 이하)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징역 도중 병몰.

이렇게 벌집 쑤셔놓은 듯한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뜬금없이 방문한다. 당연히 열혈청년들이 암살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날짜는 1914년 6월 28일, 성 비투스의 날Vidovdan.

암살범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너무 명확했다. 황태자를 기다리던 암살자들은 모두 여섯명. 밀랴츠카 강변에 새로 조성된 길을 따라 시청으로 향하던 황태자 부부. 환영인파들에 대한 황실 서비스의 일환으로 무개차를 탔다. 기다리던 암살자1. 너무 떨려서 차를 그냥 보낸다. 조금 뒤의 암살자2는 좀더 대범했다. 수류탄을 던졌는데, 황태자는 무사하고 그 뒤를 따라오던 수행차량으로 떨어져 사상자가 나왔다. 암살자는 망명도생코자 그 자리에서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내리다가 발목이 접질렸다.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족사진. 황태자는 나름 로맨티스트였던지 황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비깜이 아니었던 색씨과 결혼했다. 총을 맞고 부인을 부르면서, '애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사는 것은 황가라고 다르지 않았던 듯.

소란 속에 얼마 안떨어진 시청까지는 도착했으나 황태자는 환영사고 축사고 공식일정을 소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수행원이 다쳤다니 문병이나 갈까? 그 자리에 있던 보스니아 총독이 말린다. 일단 숙소에 짱박히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최종 행선지가 1호차 운전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다시 밀랴츠카 강변길을 내려가다 운전사는 황태자를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우회전을 튼다. 뒤에서 호통이 터졌다. '이봐 어디가. 거기가 아니지!' '어렵쇼. 여기가 아녀?' 차를 멈췄다. 바로 그 자리에 프린찝이 있었다. 무개차, 코 앞에 황태자 부부, 내 손에 총. 나머지는 역사가 됐다.

암살 직후 혼란통에 포착된 체포 장면. 쥐어터지는 프린찝. 시아나이드 독약을 깨물었으나, 불량품이었는지 그대로 토하고 잡혔다. '황태자 부부가 죽었다는 것' 빼 놓고는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암살 기도였다. 

황태자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나섰다. 그 책임을 놓고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전될 줄 몰랐던 세르비아로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최근 몇 년간 발칸 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넓혀가면서 한참 기세를 올렸지만, 국력으로나 어느 면으로나 자신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 손들어 말리고 싶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민족의 화약고, 발칸이라는 악명은 이 사건으로 더 공고해졌다. 하지만 이들을 멸시하던 고아한 서유럽은 더 큰 야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보스니아 유사 10 : 합스부르크의 하늘 아래 1878 이후

1878년 베를린 협약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경영하기로 한 결정은 보스니아의 기득권 무슬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당장에 반항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사라예보 등 주요 거점 마다 무슬림(+일부 세르비아계)들의 봉기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이들 주요 도시를 접수하는 데는 이틀 이상이 걸리지 않았다.

1878년 이후 한창 때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판도. 2중 제국의 예법에 따라, 헝가리와 제국의 영역을 반으로 나눴다. 수도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보스니아와 달마시아가 오스트리아의 땅으로 지명되고 헝가리가 오늘날 슬라보니아와 크로아티아 본토를 관리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기는 했지만, 보스니아를 통치하기로 결정한 것도 오스트리아로서도 숙고를 거듭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역사를 통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욕은 다양한 경로로 노출된 바는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의 장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말은 '살로니카로..'Nach Salonika였다고 한다. 오늘 날의 그리스 영토인 테살로니키까지 쭈욱 밀고 나가자는 말이다.

말은 호기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쪽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제국영토 안에 슬라브 민족이 더 많아진다는 것. 인구 비중의 균형추가 슬라브 쪽으로 더 기울어졌을 때 늘어나는 부담과 리스크가 분명했다. 헝가리가 관리하는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미 민족주의가 들썩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그랬는지 보스니아는 헝가리 쪽에 넘기지 않고 황유지Crown Land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관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손을 대기로 한 이상, 어중간한 스탠스는 있을 수 없었다. 오토만 터키의 국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이 땅을 제대로 경영해서 다시 오토만에게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독일, 러시아 등과는 적당한 때 '합병'한다는 합의가 이뤄진 마당이다.

이러한 오스트리아를 환영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보스니아의 카톨릭 크로아티아계였다. 이제 카톨릭이 어깨좀 펴고 살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을 법도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점진주의를 표방했다. 특별하게 문제가 있지 않는한 오토만의 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사라예보를 비롯한 근대화의 물결을 끌고 들어왔다. 사라예보가 허다한 모스크와 바자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근대도시로 본격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 무슬림 도시 사라예보에 맥주집도 생겼다. 사진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맥주홀인 Pivnica HS의 모습이다. 바쉬차르쉬야에서 봤을 때 밀랴츠카Miljačka 강 건너편에 있다. 물이 있다보니 90년대 사라예보 포위 당시에 중요한 식수공급원이었다고 한다.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철도와 도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광산이 개발되는 한편 방직 등 공장들이 들어오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진 보스니아의 면모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역시 뭔가 좀 보여주려 했던지 보스니아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 물결과 더불어 근대 민족주의의 바람도 더 거세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것 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맘 대로 되나. 민족 별로 단체가 생기고 회합과 결사가 일어났다.

19세기 말, 사라예보에 들어선 근대식 숙박업소 에우로파 호텔 Hotel Europa 앞의 정경. 페즈를 눌러쓴 이슬람 신사와 더불어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농민들이 주거니 받거니 거래 중이다. 보스니아는 민족갈등으로 유명해 졌지만, 실질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때는 많지 않다.  다수의 방문자들이 이들 민족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을 목도했다.

어떻게 하나 뻘쭘한 것은 무슬림들이었다. 같은 남슬라브 민족인 것은 맞지만, 자신을 과연 크로아티아계로 봐야할지 아니면 세르비아계로 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지사들은 무슬림들이 실제로는 크로아티아 민족이라고 말하고, 세르비아 계는 기실 세르비아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거기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너나 없는 남슬라브 민족주의까지 가세하니, 무슬림들은 더 헷갈리게 됐다.





2013년 9월 8일 일요일

보스니아 유사 9 : 19세기 중후반 요람을 흔드는 손

오토만의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에는 보스니아로서도 외부의 입김이 강해져 갔다. 현저하게 도드라진 새로운 현상은 역시 세르비아 자치령의 탄생이다. 400년 동안의 질곡에서 해방된 어린 민족의 자기주장이 보스니아에서도 투영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정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기독교인'hrišćani이 아니라 '세르비아인'srbi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새롭게 서구열강의 인정을 획득해나가던 몬테네그로 역시 헤르체고비나를 끊임없이 도모하기 시작했다. 대세르비아의 주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쪽의 크로아티아에서도 마찬가지 민족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슬라브주의와 평행선을 이루면서 순혈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이 1860년대 보스니아 내에서 혁명조직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들의 움직임을 발각하고 탄압한 것은 오토만과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주의를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19세기 중반은 오토만 터키에서 종교/민족 간의 차별을 철폐하는 술탄의 칙령이 발표되는 등 탄지마트Tanzimat 개혁운동이 일어났던 때이다. 이 같은 소식은 보스니아에서는 아직 딴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 여러가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가 향상되기 시작하는 등 개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트라브닉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카톨릭과 정교 교회당 신축이 허가되는 한편 초중등학교들이 건설됐다.

하지만 취약한 행정체계나 문화가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도입된 징세 시스템은 기존에 크게 악화된 지주/소작농 간의 관계와 더불어 보스니아의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저해했다. 여기에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가 겹쳐지면서 19세기 보스니아는 지속적으로 흔들거렸다. 거기에 더해서 무슬림들의 기독교 세력에 대한 경계, 이를 넘어선 혐오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에 새롭게 건립되는 교회당 종탑의 높이 등은 안그래도 위협감을 느끼는 무슬림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사라예보 중심부의 세르비아 정교 교회Саборна Црква Рођења Пресвете Богородице. 성모에게 봉헌된 이 교회는 1863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데, 완공 즈음해서 기득권 무슬림들이 종탑의 높이를 두고 딴지를 거는 바람에 하나의 정치적 이슈로까지 비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건곤을 일척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Herzegovina Uprising다. 1874년 대흉년으로 헤르체고비나의 작황이 엉망이었지만, 징세관들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이에 소작농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보스니아 총독과 지주들이 가혹하게 대처했다. 서구 국제사회에서 야만적 오토만에 대한 지탄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산속에 매복한 헤르체고비나 반군. 디나릭 알프스 산악지대가 이들의 앞마당이다. 어려운 지형, 어려운 생활환경 등이 이들을 터프한 전사들로 만들었고, 이 같은 문화는 후대에까지 전승된다. 

슬라브(세르비아) 동포들의 고난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명목으로 187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똑같이 오토만 터키에 전쟁을 선포했다. 두 신생국가 사이에는 보스니아 본토는 세르비아가, 헤르체고비나는 몬테네그로가 접수하기로 밀약이 있었다고 한다. 국지적 봉기가 국제적 분쟁으로 흘러가는 순간이다.

몬테네그로는 잘 싸웠지만, 세르비아는 덤벙대다 오히려 곤경에 빠졌다. 좀 진전이 더디다 싶자, 1877년 큰 형님 러시아가 불가리아 문제까지 패키지로 들고나와, 곧장 이스탄불 코앞까지 군대를 끌고 들어갔다. 숙적 러시아까지 발칸의 올망졸망한 민족과 더불어 떼로 덤비자, 오토만 터키가 결국 백기를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래서 맺어진 것이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San Stefano Treaty. 이 때 그려진 지도는 러시아의 요구가 대폭 반영된 것이다. 가만 나뒀다간 러시아가 지중해로 삐져 나오겠다 싶었던 오스트리아와 서구열강들이 협상 테이블을 다시 꾸몄다. 이래서 나온 것이 1878년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좌)과 베를린 조약(우)에 의해 달라진 유럽 지도.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대불가리아가 만들어졌다가,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등 서구열강의 요구로 인해 국경이 다시 조정됐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 참에 땅도 넓히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 왜 보스니아가? 발칸에서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앞세워 세력을 넓혔으니, 오스트리아도 여기에 균형을 맞추자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와 오토만 터키의 콘도미니엄Condominium의 형태다. 내용인 즉 보스니아의 국권은 오토만이 지속 보유하되, 경영만 오스트리아가 하자는 소리다. 그러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진 상황에서 보스니아의 실소유주는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지방의 봉기가 지정학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희한한 결말을 만들어 냈다. 봉기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이나, 이를 탄압하던 보스니아 정부군 누구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순간에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세르비아계들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는 더 멀어지게 됐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보스니아 유사 8 : 급박해진 19세기 전반

비엔나나 이스탄불의 입장에서는 어디서나 궁벽한 촌동네일 수 밖에 없었던 보스니아에도 변화의 바람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다. 서구세계와 오토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다양한 물결을 일으키며 보스니아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서구세계를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오토만 조정에서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의 개혁이었다. 구식군제가 아닌 서구 근대적 군제의 도입이 그 핵심이었다. 그러나 구식 군제를 대표하던 예니체리가 문제였다.

예니체리 혁파를 통해 오토만 터키를 개혁코자 했던 마흐무드 2세. 18세기 이후 술탄들은 서구의 영향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여러가지로 여의치 않았다. 근대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국가가 속출하는 시기에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으로 이뤄진 제국을 꾸려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수도....

한 때는 오토만 터키의 정예병 예니체리는 역사를 거치면서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 18세기 오토만 술탄의 개혁노력을 번번히 좌절시켰다. 1826년 술탄이 새로운 군제에 의한 근대군 창설을 지시하자, 예니체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러나 이 때의 술탄 마흐무드 2세Mahmud II는 전대의 술탄과 달리, 나름의 준비가 있었다. 이스탄불에 모인 예니 체리들을 기다린 것은 프랑스 포병교육을 받은 근대식 포병대. 이들을 쥐구멍에 몰아넣고 포도탄grape shot으로 전멸시켜 버렸다. 술탄은 이 참에 눈엣 가시 같던 예니체리도 해체한다.

예니체리 복장을 한 근대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Kemal Paša. 터키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기도 하는 예니체리는 18-19세기초 기간 중 번번히 오토만 개혁을 방해한 수구정치집단이었다. 이들 때문에 술탄도 여럿 쫓겨났다. 능력주의에 입각했던 초기와 달리, 세습화된 것이 예니체리가 변질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들 지적한다. 

술탄은 보스니아에도 징집에 근거한 근대식 군제 개편안을 추진할 새 총독을 선임해 보냈다. 하지만,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다.그러자 오토만 군대가 나섰다. 1827년 술탄의 군대가 사라예보에 입성, 로컬 예니체리 리더들을 처형하는 등 초강수를 써서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지방 곳곳에서 소요가 지속됐다.

1831년에는 보스니아 북부 그라다차츠Gradačac의 카페탄 후세인Husejn이 봉기를 일으켜, 총독이 주재하는 트라브닉까지 짓쳐와서 총독을 생포했다. 앞 편에서 간단히 그림으로 소개한 바, '보스니아의 용'zmaj od bosne으로 칭송되는 사람이다. 같은 시기 알바니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나자, 후세인은 오토만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2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코소보까지 내려간다. 도와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이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다름 아닌 보스니아 자치였다. 일단 발등의 불이 급했던 오토만 조정은 이들의 요구를 승낙(하는 척) 한다.

카페탄 후세인. 수염때문에 나이가 들어보이지만, 이 사람이 죽은 때가 30대 초반이다. 카페탄으로 있으면서 카톨릭, 세르비아 정교인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다. 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도 보스니아에서는 한동안 그 이름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시절 내내 묻혀있다가, 유고 내전 이후 보스니아의 영웅으로 '재발굴'됐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도 다른 보스니아 만의 정체성의 상징으로..

그러나, 오토만 조정은 실제로 이들의 요구를 들어 줄 의도가 없었다. 기만 및 내부분열 전술로, 반란군을 반으로 쪼갠 오토만 터키는 1832년 잔당 세력을 사라예보 근처에서 격퇴한다. 후세인 카페탄은 일차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가, 술탄의 용서를 받아 트레비존드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33년에 죽었다. 반란세력의 기가 꺾이면서, 보스니아에서도 다양한 개혁조치가 진행됐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누구도 만족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무슬림들은 무슬림대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대로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러던 상황에서 드디어 보스니아에서도 또 다른 용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용이었다.





2013년 9월 5일 목요일

구유고의 음악 8 : 모스타르에서의 재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한 세브다흐처럼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장르가 없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신파조의 멜랑콜리 추구'라는 세브다흐의 기본적인 덕목이 1990년대 유고 내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으면서 새로운 음악적 변화를 거듭해 가고 있다.

당금 보스니아에서 세브다흐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음악인(집단)은 모스타르 세브다흐 레우니온Mostar Sevdah Reunion(이하 MSR). 프로듀서 드라기 셰스티치Dragi Šestić가 고향 모스타르Mostar 출신 음악인들과 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 밴드다.

2002년 경의 MSR. 앞에서 담배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밴드의 보컬 일리야 델리치Ilija Delić옹. 약간의 주책기가 있지만, 담배에 찌든 텁텁한 목소리가 매력포인트다.

모스타르는 보스니아 남부 헤르체고비나의 중심도시다. 이 동네가 재미있는 것은 시내 중심을 흐르는 네레트바 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주로 무슬림들이 서쪽에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살면서 다문화 다종교 사회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500년 넘게 형성된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1990년대 유고내전으로 산산히 박살나면서, 모스타르는 졸지에 비극의 도시가 된다.

레베카 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찬탄해 마지 않던 오래된 다리가 1993년 내전 한가운데 무너지는 영상이다. 술레이만대제 때 만들어진 이 다리는 모스타르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이 다리 폭파 지시를 내렸던 사람들은 2013년 현재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고 있고, 그 폭파 사실이 공소이유의 하나가 됐다.

MSR은 이러한 비극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셰스티치가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 모스타르 어느 골방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작은 콘서트를 열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전쟁이 끝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브다흐를 알게 될꺼야'. 밴드 멤버 중의 누군가가 그 와중에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은 실현됐다.

1999년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당신에게 숨어든다'Kradem ti se. 사랑하는 연인의 집에 월장해 들어간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들어있다. 세브다흐의 본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한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델리치 옹의 목소리다. 이 때 벌써 60대 중반의 노장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옛날 친구들을 찾아서 무슬림계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멤버들의 재회Reunion를 이뤄낸 리더 셰스티치는 1999년 들어 첫앨범을 내고 세브다흐 장르의 대표주자로 우뚝 선다. 이들 음악의 특징은 세브다흐 고유의 본래적 전통에 서구음악의 영향을 결합시켜 구유고지역 젊은 세대는 물론 세계인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멤버들이 모두 고향을 등지거나 뿔뿔이 헤어지는 비극을 거쳤지만, 이들의 음악에는 세브다흐 고유의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의외로 흥겹게 즐길 수 있는 노래들이 많다. 마치 흥을 통해서 슬픔을 극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2003년 Secret Gate에 수록된 '모스타르의 희한한 슬픔'Čudna jada od Mostara grada. 연인이 마음이 변할까 안절부절하는 여성의 심정을 희극적으로 풀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이 MSR 최대명곡이 아닌가 싶다. MSR은 이 노래를 보다 '훵키'하게 풀어내기 위해 비트를 2/4에서 4/4박자로 바꿨다고 한다.  이 노래를 듣는 모스타르 청중들의 반응이 물만난 고기같다. 

그러나 2013년 현재 MSR은 Reunion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갈라선 상태이다. 보컬인 델리치 옹과 더불어 코바체비치(바이올린), 샨티치(아코디온, 클라리넷) 등이 2007년 경 밴드에서 탈퇴해서 자신들만의 MSR을 결성했다. 때문에 2013년 현재는 원 멤버들도 서로 서먹해지고 연락도 안하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MSR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밴드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그 소상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드라기 셰스티치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멤버들의 반란이 아닌가 싶다. 셰스티치는 MSR를 통해 세브다흐 뿐만 아니라 묻혀있던 왕년의 (집시)씽어 샤반 바이라모비치, 릴랴나 버틀러Ljiljana Buttler 등을 재발굴했다. 이들이 다시 부른 노래는 하나같이 왕년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재해석이 됐다. 허나, 이들 스타에 가려진 보컬 델리치 옹이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똑같은 이름의 두 밴드는 각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다만 델리치 옹의 노쇠현상이 심해지고, 드라기 셰스티치의 프로듀싱이 과도하게 실험적으로 흐르는 듯하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초 당시의 밴드가 최전성기였다고 본다. 헤어진 것은 안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민족감정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셰스티치 솔하의 MSR은 2013년 신작 앨범 'Tales from the Forgotten City'를 냈다. 밴드는 더 젊어지고 노래는 더 모던해졌다. 이 최신작에 수록된 '왜 당신은 여기 없는가'Što Te Nema는 그리운 이의 부재를 그리는 걸작이다.

모스타르에서 촬영된 Što Te Nema 뮤직 비디오. 모스타르 출신 세르비아계 민족시인 알렉사 샨티치Aleksa Šantić의 시에 노래를 붙인 장르 최대인기곡이다. 조국, 연인 또는 한용운식 님의 부재와 결핍을 노래한 이 노래는 크게는 오늘날의 보스니아, 작게는 MSR을 너무 절실하게 그려내는 듯 하다.